지는 꽃에 대하여
모든 삶에는 꽃이 있다.
흔히 꽃이 없다고
' 무화과' 라고 부르는
나무도 알고 보면 열매 속으로 꽃이 핀다.
사람도 꽃다운 나이가 있고,
지구도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 [화양연화]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한 때,
혹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이란
주석을 붙여두었는데,
아마 젊은 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말하는 듯싶었다.
특히 남자 배우인 양조위가
연인을 그리워하다가 차마 잊지 못하고
앙코르와트의 오래된 사원 기둥의
돌구멍에 대고 고백을 한 후 흙으로
막아버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저려왔다.
그때 흘러나오던 첼로 선율------
그렇게 멋진 영혼을 울리는
음악과 장면들에 반해 몇 번을 보고 또 봤는지----
사람들은
누구나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피는 꽃들만 있는 게 아니다.
지는 꽃도 있다.
화려했던 순간들과
뭇 시선들을 뒤로한 채 쓸쓸히 지는 꽃.
목련처럼 가장 화려하게 피었다가
철저히 비참하게 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동백이나 석류, 능소화처럼 가장 아름답고
화려할 때 마치 자기를 꽃피우게 해준 대지에
공양이라도 올리듯이 ,
온몸을 내던지며 장렬하게 떨어지는 꽃도 있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 시구처럼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떨어지는 ,
마치 선승이 열반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훌쩍 몸을 바꿔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오래 전 가수 송창식 씨가 부른 노랫말이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선운사
선운사 동백꽃에 관한 시가 또 있다.
내가 좋아하는 멋진 시인의 시인데
아마 선운사에 갔다가
처절하게 지는 동백꽃을 보고 시상이 떠올랐나 보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최영미 [선운사에서]
선운사 동백림이 여기 백련사처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까지 했으니 유명하긴 한가 보다.
나는
이런 류의 꽃들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능소화를 아낀다.
능소화는 한여름에 커다란
나팔꽃을 연상시키듯 주황색으로 아주 화려하게 핀다.
통도사 보광선원 마당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데 이 감나무를
적당히 의지해서 타고 올라가
아침 하늘에 찬란하게 피어난 능소화는
아마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철에는
선방에 정진하면 그 꽃이 너무 아름다워
대중들의 눈치를 무릅쓰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곤 했었다.
그리고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보길도 어느 민박집 담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환하게 웃던 능소화도 잊을 수 없다.
그땐 도반과 함께 만행 중이었는데
맑은 영혼 간직한 그 모습이 마치 능소화를 닮은 듯했다.
지는 꽃이 서럽지 않은 게 어디 있으랴만
내게 가슴 아픈 추억의 꽃이 하나 있다.
바로 석류꽃이다
십 년 전이던가,
그러니까 1992년 송광사 율원에 살 때다
그때 내 방 앞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해 여름, 결혼하며 떠나버렸던 내 첫사랑이
마치 이별의 낙관이라도 찍으려는 듯 내게 찾아왔었다.
이박 삼일 머무르면서
도반 현진 스님과 함께
차도 마시고 변산반도에
구경 가서 낙조를 보고 돌아오기도 했다.
서울로 떠나는 날,
내 방으로 올라온
그녀 앞에서 왜 그리도 서럽게 눈물이 나던지-----
광주역에서 그녀를 보내고 돌아온 날 저녁,
석류나무 아래 무참하게 떨어져 내렸던
피눈물 같은 주황색 꽃들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리고 우연히
석류나무 가지를 보게 되었는데 가지 사이 움푹 팬 곳에
누군가 떨어진 석류꽃을 주워 일곱 송이나 올려놓고 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방 앞에서 서성이던 그녀가 한 것이었다.
좀체 내 앞에서 눈물을 안 보이던
그녀도 차마 가슴이 아파 석류꽃을 주워 나무에 올려놓고
이별의 눈물로 대신했나 보다는 생각이 들자 더 가슴이 아려왔다.
그 석류꽃을 책상 위에 고이 올려놓고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바라보며 또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석류꽃 하니까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석류꽃은 다른 꽃과 달리 유난히 많이 떨어진다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잘 살펴보면
석류나무는 피어나는 꽃들을
다 감당할 만큼 가지가 튼튼하질 못하다
그래서 더 크고 실한
열매를 얻기 위해 자신들을 내던지는 것이다
고귀한 자비심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져 내리는 석류꽃이 있기에
주먹만 한 석류가 몇 개씩 달려도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다.
모든 열매는 지는 꽃이 있기에 존재한다
우리가 즐겨 먹는 과일이나 열매도 그것을 위해
아름답게 몸을 내던진 꽃송이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다
마치 지는 꽃이 있어야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실패하고 좌절할 줄도 알아야
멋진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마당 한편에서 쓸쓸히
그러나 간절하게 지고 있는 들꽃을 보며
긴 망상 한번 피워봤다.
7.26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