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작
붉은 도넛 외 3편 / 고은유 시인
너무 큰 구멍은 그릴 수 없다
도화지를 목탄으로 까맣게 다 칠해도 어림없다
다시 도화지를 편다
가운데부터 동그랗게 그려나간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린다
명치가 아프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물체들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빛, 천문학자들이 마지막 비명인 파장들을 한 점 한 점 모아서 찍었다 붉고 둥근 것이 떠올랐다
안간힘이 남긴 것 침 같은 것 소리치다 맺히는 눈가의 눈물자국 돌이킬 수 없는 발자국 탁자에 엎드린 사람의 비명 차가운 손 거품 같은 것 흩어지는 숨결 드라이아이스 당신을 그릴 수 없다 다리를 휘감는 어둠 빠질 것 같다 손을 내저으며 한 발짝 뒤로, 뒤돌아 뛴다
아무리 뛰어도 도화지는 너무 넓어 그 끝에 다다를 수 없다 커다란 구멍이 나를 삼킨다
나를 따라오는 것 당신이 남긴 것들이 발아래를 받친다 베개 위의 머리카락 만들어지지 못하고 입안에 남아 있는 말 크고 단단한 손바닥 접혀있는 시집의 갈피 반작이는 금반지가 큰 원을 만들며 나를 밖으로 밀어낸다 발바닥 아래 바삭하고 따스한 것 붉은 도넛
검고 커다란 구멍이 한가운데 있다
잔혹한 식탁
고등어는 만만하다
“만원에 세 마리에요”
사지 않을 수 없다
일주일 마다 열리는 아파트 장터
막 물들기 시작한 감나무 잎이
떨어진다 침이 고인다
“또 고등어야?”
두부를 사며 무시한다
만만하긴 두부도 마찬가지다
냉장고에 등 푸른 고등어가 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줄무늬가 희미해진다
물렁해지면서 비린내도 강해진다
“물렁한 것들”
당신이 내게 말했다
땅 속으로 자라는 무
땅 위로 솟은 무의 밑둥이 푸른 것은
날이 따뜻했다는 것
당신이 결재를 하는 동안
나는 빨래를 널고 와이셔츠를 다리고
무를 넣고 고등어를 졸인다
발톱이 양말을 뚫고 나온다
등에 푸른 줄무늬가 선명해진다
당신은 나의 등뼈를 드러내고
하얀 살만 발라먹는다
바다로 간 앨리스
나는 달린다 수많은 너를 지나치고 너를 찾아서 달린다 하얀 토끼를 따라 굴에 뛰어든다
3월의 토끼네 집에서 “큰까마귀는 왜 책상하고 닮았지?”라고 묻는 미친 모자 장수와 차를 마시고 하얀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주문했다
기차를 타고 바다에 갔다
기차 창밖에서
6월의 풀은 예초기 아래 쓰러진다
개망초꽃 무더기로 흔들린다
물이 가득한 논으로 아카시아꽃이 떨어진다
바다에는 미친 모자 장수는 없고
레이스 달린 모자만 여자 아이의 머리 위에 얹혀있다
아이는 모래 장난을 하며 까르르 웃는다
흐린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곳으로
배 한 척이 간다
집으로 돌아 올 때
앨리스가 손 흔들어 배웅해 주었다
산야초 차는 쌉싸래한 풀맛
향기를 남기며 뜨거운 물속에서 풀어진다
커졌다 작아졌다 그 모든 앨리스는 바로 나예요 미소만 남은 체셔 고양이, 여기 있지만 여기 없다 너는, 미소처럼 입가에 남는다
두근두근 토마토
직장을 그만 두었다
나는 욕조에 담긴 물처럼
오래도록 가만히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직장에서 오년 동안 키운 선인장이 죽었다
겉은 멀쩡한데 갑자기 푹 주저앉았다
생각해보니 물을 너무 많이 줬다
이제 나는 가시가 필요없다
별 감정 없이 선인장 화분을 버렸다
쪼글거리는 발가락에 힘을 주고
물 밖으로 나왔다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고
화원에 가서 모종을 샀다
방울같은 녹색 열매를 매달고 있다
붉어질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