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계류와 짙은 숲이 그리운 계절. 녹음 드리워진 원시의 숲을 거닐면서 들꽃과 눈 맞추다가 맑은 계류를 만나면 두 발 담그고 가만히 파란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이렇게 자연에 온몸을 맡기면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 아닌가.
유토피아는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강원도 인제의 방태산 둘레로는 ‘삼둔 사가리’라 불리는 한국적인 이상향이 있었다. 살둔돚달둔돚월둔의 삼둔과 아침가리돚명지가리돚적가리돚연가리 이렇게 사가리(곁가리를 합쳐서 오가리라고도 한다)는 오래 전부터 흉년과 전쟁 등을 피할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한여름에도 무더위 걱정 없는 적가리골
방태산에서 흘러내리는 적가리골은 한여름에 하루 이틀쯤 보내기에 좋은 환상의 휴양지. 1997년 계곡 깊숙한 곳에 자연휴양림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인근 주민들이나 여행 마니아들만 알음알음 찾아들던 곳이다. 한여름에 휴양림에서 묵으면서 적가리골 숲속을 산책하거나 방태산 산행을 곁들인다면 더없이 행복하다.
지세가 마치 넓적한 그릇을 닮은 적가리골은 아주 오랜 옛날 운석이 떨어져 생긴 운석분지라고 한다. 원시의 짙은 숲이 품고 있는 계곡은 폭포와 바위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계류는 그냥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그곳엔 1급수의 차가운 물에서만 살아가는 열목어도 노닐고 있다.
산림휴양관 앞의 널따란 마당바위 주위에는 널찍한 바위가 펼쳐져 있어 더위를 식히기에 아주 좋다. 적가리골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산림휴양관 위쪽의 계단폭포. 주민들은 ‘이폭포 저폭포’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부른다. 위쪽에 있는 높이 15m쯤의 ‘이폭포’는 아래에 널찍한 소(沼)를 이루었다가 다시 ‘저폭포’라는 이름의 짤막한 폭포로 떨어진다.
휴양림에서 조성해놓은 산림체험코스를 따라 약 1시간 정도 산책 삼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가래나무, 거제수나무, 다릅나무, 당단풍나무, 물박달나무, 산벚나무, 야광나무, 피나무 등 활엽수가 숲을 이루고 있어 녹음이 아주 짙다. 특히 이른 아침의 산책은 녹색의 향연이 펼쳐진 싱그러움 그 자체다. 산책로는 노약자도 충분히 안전하게 걸을 수 있게끔 휴양림에서 잘 가꿔놓았다.
하지만 이 정도 산책만으로 성이 차지 않는다면 방태산 산행에 나서보자. 방태산은 주봉이라 할 수 있는 주억봉(1,444m)을 중심으로 동쪽의 구룡덕봉(1,388m), 서쪽의 깃대봉(1,436m)으로 이루어진 산역 전체를 말한다.
산행은 휴양림∼구룡덕봉∼주억봉∼휴양림 원점회귀 코스가 일반적이다. 총 10.2km 거리로 6시간 내외가 소요된다. 산길은 제법 가파른 편이다. 그러나 추락 위험성이 있는 것은 아니고, 걷기 좋아하는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면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너무 오래 걷는 게 부담스러우면 휴양림에서 주억봉까지만 올랐다가 내려올 수도 있다. 이 경우도 4시간은 잡아야 한다.
정상 가는 길에 은방울꽃 등 들꽃 황홀
예전엔 방태산 산길은 나물꾼이나 약초꾼이 다니던 길을 중심으로 뚫린 좁은 오솔길 정도가 전부라 길을 잃는 등산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휴양림이 생기면서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어 길 잃고 헤맬 염려도 거의 없다.
방태산 산행은 휴양림 시설 도로 가장 위쪽의 널찍한 공터에서 시작한다. 그냥 떠먹어도 좋을 듯한 옥빛 계류를 왼쪽에 끼고 이어지는 산길은 처음엔 완만하다. 이렇게 평탄한 산길을 10분쯤 걸으면 갈림길. 왼쪽은 구룡덕봉으로 돌아 주억봉으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쪽은 곧장 주억봉으로 이어진다. 원점 회귀산행을 하려면 여기서 왼쪽 길을 선택해야 한다.
산행을 시작한 지 30∼40분 만에 수량 넉넉한 계곡을 만난다. 식수를 담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이니 여기서 수통에 물을 채워야 한다. 다시 15분 만에 심마니와 약초꾼들의 임시 숙소인 모둠터를 지나면서 산길은 갑자기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가팔라진다.
이렇게 가파른 산길은 방태산 주릉의 안부까지 40여 분 내내 계속된다. 이어 다시 경사가 완만해지면 주변의 들꽃이 눈에 들어온다. 매발톱, 벌깨덩굴, 풀솜대, 붉은 병꽃나무, 은방울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앙증맞은 금강애기나리도 있고, 함박꽃도 화사하다. 정향나무 꽃향기도 황홀하다. 방태산은 초여름이면 이런 온갖 들꽃들이 피어나 천상의 화원을 이룬다.
이렇게 30분쯤 오르면 임도를 만나고, 임도를 따라 10분쯤 더 오르면 구룡덕봉 정상. 여기서 조망하는 방태산 일대의 산세는 경이롭다. 북으로는 방태산~구룡덕봉~1249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큰 호를 그리고, 그 안쪽에 푹 안긴 적가리골이 오묘하다. 또 남으로는 개인산으로 이어진 듬직한 산줄기 오른쪽으로 비경의 개인동계곡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남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 너머 멀리로는 오대산~구룡령~갈전곡봉~점봉산~설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장쾌한 능선이 황홀하다.
구룡덕봉 정상 조망을 즐긴 뒤 방태산 정상 역할을 하는 주억봉으로 향하는 길에도 역시 들꽃이 지천이다. 이들과 눈 맞추며 30분 정도 걸으면 주억봉 직전의 갈림길.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방태산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지당골이고, 왼쪽으로 가면 주억봉 정상이다. 주억봉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0여 분. 역시 구룡덕봉의 전망과 맞먹는 조망을 자랑한다.
주억봉 정상에서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지당골로 방향을 잡으면 산길은 휴양림까지 이어진다. 경사는 매우 급하고, 산길도 조금 거친 편이다. 숲엔 어여쁜 큰앵초가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주억봉 갈림길을 출발한 지 50여 분 만에 계곡을 만나고 나면 산길은 평지에 가까워진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휘파람 불며 걷다 보면 휴양림의 적가리골. 이제 옥빛 계류에 발 담그고 쉬는 일만 남았다.
한편, 방태산자연휴양림 입구엔 산삼 캔 자리에서 솟는다는 방동약수가 있으니 휴양림 오가는 길에 한번쯤 들러보자. 300살쯤 된 엄나무 아래의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방동약수는 탄산·철·불소·망간 등이 주성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톡 쏘는 맛이 좋다.
여행정보
◆ 숙박
방태산자연휴양림(www.huyang.go.kr 033-463-8590)은 전국에 산재한 휴양림 가운데 여름을 보내기 가장 좋은 조건을 지닌 휴양림이다. 따라서 여름 성수기엔 산림휴양관을 예약하기 어렵다. 이때는 숲속에 있는 가족야영장이나 오토캠핑장을 이용해보자. 오히려 자연의 숨소리를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어 좋다. 이용요금 휴양관 5인실(29㎡) 비수기돚주중/주말돚성수기 4만원/7만원. 6인실(39㎡) 5만원/8만5000원. 야영데크 4000원, 야영장 2000원. 입장료 성인 10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 중소형 3000원, 대형 5000원.
◆ 별미
방태산자연휴양림 입구인 방동에서 지방도를 따라 진동리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갈터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의 진동산채가(033-463-8484)는 산채 요리 전문점이다. 참나물돚곰취돚산고사리 등등 방태산 주변에서 뜯어온 산채로 차리는 식탁이 아주 싱그럽다. 산채비빔밥 1인분 6000원, 산골정식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