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영적 교훈
사도행전 15:36~41
찬송가 379(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483장(구름 같은 이 세상)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기 전에 세 번에 걸친 이방 지역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것은 그의 2차 전도 여행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을 잠시 살펴봄으로써 영적 교훈을 얻고자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성화의 부족함과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위하여 전진하였습니다.
이차 선교 여행은 처음부터 삐그덕거렸습니다. 1차 선교 여행의 드림 팀이었던 바나바와 바울의 환상적인 조합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를 이차 전도 여행에 동행하느냐 여부를 가지고 바바나와 바울이 의견을 달리하면서 크게 다투고 헤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오랜 우정과 사랑으로 연합된 바나바와 바울은 이차 전도 여행을 함께 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성령께서 처음 전도여행을 시작하도록 명하실 때에 “내가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는데, 이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가지고 함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나바와 사울의 인간적인 실패요 성화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집니다. 크게 다툴 일도 아니고 서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 못할 정도의 큰 문제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인 두 사람이 이렇게 헤어지고 말았으니, 선교 여행 자체가 큰 걸림돌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바나바와 바울은 인간적인 실패, 인간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각자 선교 여행을 계획하고 떠났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났고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로 택하고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명 수행의 과업은 인간적인 성화의 부족과 인간적인 실책 혹은 범죄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섬기다가 인간적인 연약함을 발견하고 성화의 부족함 때문에 죄의 걸림돌에 비틀거릴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엄중한 사명, 예배, 섬김, 봉사, 전도 사역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은 숭고하고 허물과 죄를 발견한다고 해서 도중에 포기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기도하며 주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터어키의 갈라디아 지방을 다녀가면서 터어키의 서쪽 지역인 소아시아 지방을 전도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여행하는데,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반대쪽인 터어키 북동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어서 여행을 계획했는데 또 다시 길이 막혔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르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예수의 영 성령께서 환경과 여건을 통하여 표징을 보여주셨는지, 아니면 기도하는 중에 분명히 말씀으로 가르쳐주셨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전혀 모르는 중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분명치 아니한 중에 기도해도 아무 지시도 없는 기간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사명을 받들어 순종하여 행하는 길에도 때로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며 잠잠히 내버려두시는 것과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그러한 혼돈의 상황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원망 불평하지 않고 또 인간적인 고집을 피우면서 성령을 거슬러 행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여 드로아 항구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사도 바울에게 환상이 하나 보여졌습니다.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환상을 보고 몹시 기뻐하였으니, 이것이 분명한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사명에 순종하며 살아간다 해도 때로 선택해야 할 기로에 있는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어떤 징표도 나타나지 않는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섣불리 내 고집을 피워 강행하려 하기보다는 잠잠히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이나 인간적인 지혜나 사람의 뜻을 따라 행하였다가 낭패를 만나거나 후회를 겪을 수 있기에 그 때 은인자중하면서 함부로 서둘러 결정하여 행하지 말고 잠잠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기다리는 자가 됩시다.
세 번째, 대적하는 상황을 만날 때 다투거나 맞서지 말고 순리를 따라 행하였습니다.
사도 일행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의 첫 지역인 그리스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으나 쉽게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도 일행은 차분히 기도하는 중에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한 여자 성도를 얻었으니 곧 옷감 장사 루디아였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에 비단 옷을 팔러 다니는 여인들이 있었는데, 루디아는 그런 옷 장사를 제법 크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이 사도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모시고 선교 일을 도와서 사도는 빌립보에서 전도의 문이 열린 줄 알고 최선을 다했는데, 점치는 귀신 들린 여인을 고쳐준 일로 예기치 않게 큰 박해를 만나 심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는 중에 옥문이 열리고 간수장이 회개하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간수장이 회개함으로 빌립보의 교회는 믿음 좋은 일꾼 하나를 얻었지만 그곳의 관리들이 사도 바울 일행으로 하여금 그 지역을 떠나달라고 부탁하자 사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데살로니가에 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 다시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를 맞았습니다. 사도는 또 다시 박해에 맞서지 않고 그곳을 떠나 베뢰아로 가서 전도하여 성도들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거기까지 사람을 보내어 사도를 해하려 하니, 사도는 또 다시 보따리를 챙겨서 그곳을 떠나 아테네까지 멀리 피신하여 거기서 전도하여 또 다시 몇 명 사람을 얻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고린도까지 흘러들어와 전도하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평신도 동역자를 얻어 그곳에서 큰 교회를 이룹니다. 일년 육 개월 동안이나 아무런 박해가 없는 중에 고린도 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었으나 그곳에 유대인들이 또 다시 사도 바울을 고소 고발함으로 사도는 또 다시 그곳을 떠나 이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파송하였던 안디옥 교회로 되돌아오려고 수습 정리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보면 주의 사명을 감당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련이 있지만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면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전도의 다른 문을 두드리곤 했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고 더 많은 교회를 세우는 계기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만 복음을 전하는 데 그쳤다면 그리스 남부에까지 이르는 수많은 지역 복음화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렇게 환난과 시련까지 사용하여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 삶에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역경을 허락하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사람이나 상황에 맞서서 에너지를 다 소모하지 말고 하나님께 그런 어려움을 고하면서 여전히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자 집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려움과 시련조차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고난 중에 문제 해결에 다 쓰지 말고 그 일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여전히 충성스럽게 감당하고자 사용하면, 주님께서 나머지 모든 일을 다 해결해주실 줄 믿습니다.
네 번째, 자기의 장래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행하였습니다.
사도 일행이 파송한 모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오는 중에 소아시아의 큰 항구 도시 에베소에 들렀을 때에 그곳 회당에 들러 복음을 전하는데 그곳에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더 오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허락하지 않고 작별하면서 이르기를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하고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말한 바,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이라는 고백은 사도가 자기의 미래 일정을 언급할 때 자주하는 말입니다. 그는 자기의 미래가 언제나 하나님의 장중에 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좌우됨을 늘 느끼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움직여집니다. 그러므로 너무 미리 미래를 염려하지 말고,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지도 말고 우리 앞날을 하나님께서 다 미리 계획하시고 다 책임져주심을 믿고서 평안히 오늘을 누리십시다. 내일 일은 내일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십시오. 염려한다고 해서 절대로 바꾸어질 것도 없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는데, 장래 일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고 계획하고 계시니, 바울처럼 하나님의 뜻일진대 우리의 발걸음도 인도해주실 것이요 만남과 계획과 우리의 모든 일들과 우리의 수명도 다 주님께서 작정하신 것이 있음을 믿고 평안하게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신 사명 잘 감당하다가 주님 앞에 설 소망 가지고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됩시다.
우리들도 사도의 삶을 본받아, 성화의 부족함과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위하여 전진합시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성급하게 이리 저리 행하지 말고 잠잠하게 기도하며 주의 뜻을 기다립시다. 우리를 대적하는 상황을 만날 때에 사람들과 다투거나 맞서지 말고 순리를 따라 행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장래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사명을 꾸준히 행하며 하루 하루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 여정을 통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맺는 천국의 순례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