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글이다. 인터넷 상에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 대해서 정리해둔 글은 많이 있고, 필자 역시도 수차례에 걸친 이 전쟁에 대해서 정리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글에서는 두 나라의 전쟁에 대해서 전체적인 흐름이 끊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 참에 내가 탈고중인 작품 <양규전>을 위해서라도 간단하게 흐름을 정리해보려한다.
전쟁은 매우 정치적인 일이다. 한 나라가 시행할 수 있는 정책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많은 힘이 들어가는 정책이다. 다들 삼국지와 같은 영웅물의 영향을 받은 덕택인지 화려하게 싸우는 장군의 모습과 영웅적인 싸움을 벌이고 세상을 떠난 전사에 대해서는 알지만 그 뒤에서 전장과 전쟁을 위해 벌어지는 행정을 총괄했던 사령부의 노력은 생각하지 않는다. 사령부의 노력이란 단순히 적절한 타이밍에 전략에 알맞는 병종을 적절히 전장으로 투입하는 식의 노력만이 아니다. 후방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토목공사부터 어마어마한 규모의 보급, 그리고 주변의 지리를 면밀히 검토하고 그 주변의 민가와 곡물의 상태 파악 등등 사실 전투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바로 이 후방의 '진짜 전쟁' 이다. (과장하자면) 전장의 최전선에서 10명이 죽는 동안 후방에서는 100명의 행정관들이 과로로 사망한다. 그게 전쟁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그런 후방의 전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전쟁의 본질이 정치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삼국 통일 전쟁을 진행하면서 생겨난 수많은 분란거리를 해결해야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여진과의 관계, 발해와의 관계, 지방 군벌들에 대한 통제 등등 산더미처럼 쌓인 문제들과 직면해야 했기에 더더욱 후방의 전쟁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극단적이었다. 그는 많아봐야 2만, 보통 5천~1만 사이의 병력만을 이끌고 대부분의 전쟁을 치뤘다. 먼저 '후방의 전쟁' 을 최대한 줄여서 나라가 지게되는 부담을 덜기 위해서 그랬고 섣불리 지방 군벌의 군대를 차출했다가 해당 군벌의 세력을 키우게되는 치명타를 입지 않으려고 그랬다. 그런 그가 거란과 철저하게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많은 혼인을 한 것은 단순히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혼인은 호족들을 규합하기는 커녕 분열시켜 고려라는 나라가 만들어지자마자 망하게 만들 뻔 했으니까. 너무 많은 혼인은 '정략혼' 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잡한 것이었다. 그가 정치적인 사람이었던 이유는 바로 발해에 대한 입장 정리 때문이다. 고려 초기 고려 황실은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 했었다. 고려 황실 자체의 힘과 그 지지 군벌의 힘을 합쳐봐야 난립해있던 각기 지방 군벌들에 비한다면 보잘 것 없었다. 그저 수많은 군벌들 가운데 왕건의 군벌이 가장 강력했기에 왕건이 임금으로 올랐을 뿐이었다.
그런 왕씨 군벌에 강력한 힘이 된 것이 바로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었다. 발해의 황족을 비롯한 귀족들과 백성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그대로 왕씨 군벌에 편입되었고, 왕씨 군벌은 엄청난 백성과 군사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도 막대한 재물을 지녔을 귀족들이 포함되었으므로 왕건에게 그들은 그야말로 복덩이였다. 그 때 거란이 고려와의 통교를 요청해왔다. 바로 그 타이밍에.
왕건이 신흥 군사제국 거란의 힘에 대해서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것도 아닌 모양이다. 무엇보다 왕건에게는 자신의 힘이 되어주고 있는 발해 유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발해 유민들은 거란을 증오했다. 모든 걸 잃게 했으니까. 왕건은 그 순간에 확실한 입장정리를 해야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당연하게도 발해 유민이었다.
만약 왕건이 거란과의 친교를 수락하여 고려와 거란이 정상적 통교를 할 경우 발해 유민의 마음은 왕건을 떠날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반란 세력이 될 수도 있고 고려 밖으로 벗어나 여진과 협력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왕건에게 반기를 들 경우 미약하기 짝이 없던 왕건의 세력은 와르르 무너질 거라는 계산도 가능하다. 이미 궁예를 몰아냈을 때 당했던 반란이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서 일어난다면 지방의 강력한 군벌들은 왕건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임금의 자리를 찬탈하려 굴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 반면 거란과의 관계는 당장 개선할 필요가 없었다. 거란과 고려의 국경에는 발해 유민과 여진족들이 산발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거란이 고려를 향해서 대규모 원정을 하려면 그들을 모조리 정리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자칫 여진에 의해서 보급선이 끊기면 끝장이다. 군대는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결국 고려는 거란과의 통교 요청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거절했다. 그 결과 거란은 고려를 확실하게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려에게 엄청난 불행이다. 본래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동방 원정이 대체적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본래 요하 유역에서부터 시작되는 유목 제국이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동쪽을 먼저 안정시키기 마련이다. 고구려때 연나라가 그러했듯 요하 유역의 세력은 반드시 동쪽을 먼저 공격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필수 조건이다. 만약 동쪽을 공략하지 못 한다면 적어도 친교라도 맺어두어야 한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아직 미약한 세력이었던 거란으로서는 강대한 동쪽의 발해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아직 정상적인 힘을 갖추지 못 했던 고려는 화친을 해두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했던 것인데, 왕건은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것을 거절한 것이다. 이로서 거란은 발해뿐 아니라 주변 여진과 고려까지 모두 정리해야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위에 정리해둔 것들은 고려와 거란이 왜 전쟁이 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정리해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두 나라는 반드시 전쟁을 치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게 누군가의 정치적 실수든 우연의 일치든 필연적 운명이든간에 두 나라는 빠르던 늦건 꼭 승부를 봐야만 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왜' 일어났느냐에 대해 가끔 다른 견해를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필자 개인은 그저 반드시 승부를 봐야만했다고 여긴다. 필자의 의견은 거란이 고려에게 패배한 이후 더 이상 뻗어가지 못 했던 것으로 증명된다. 동쪽에 고려라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는 한 거란은 그 어디로도 뻗어나갈 수 없었다.
종종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에 대해서 대비가 게을렀다는 주장을 보곤 하는데, 필자는 약간 생각이 다르다. 고려는 적어도 거란이 얼마나 큰 위협인 지 눈치는 채고 있었다. 다만 왕건이 죽은 뒤 고려는 엄청난 홍역을 앓아야했다. 첫번째 글에서 말했듯 왕건의 혼인은 정략혼이 아니라 그저 색을 밝히는 남자의 혼례일 뿐이었다. 정략혼이란 '희소성' 에서 비롯된다. A세력이 B세력과 정략혼으로 동맹을 맺었다면 그것은 정략혼이다. 하지만 A세력이 B,C,D,E,F... 이렇게 많은 세력과 혼인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그것은 정략혼이 될 수 없다. 가진 것을 나눠야하니까. 그래서 정략혼은 '희소성' 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왕건의 정략혼은 '희소성' 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고 심지어 미천한 여자까지 침대로 끌어들여 관계를 가졌다. 이건 절대 정략혼일 수 없다.
왕건의 그 황당무계한 혼인 관계는 고려 사회를 패닉으로 몰고 들어갔다. 서긍의 말에 의하면 '고려는 나라는 작아도 사람이 많다' 라고 한다. 그 사람많은 고려 땅에는 수천명의 병력까지도 동원 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군벌들이 수없이 있었다. 정종대에 귀족의 사병들을 바탕으로 30만 광군을 조직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왕건이 개척한 서경(평양)과 그 이북의 청천강 유역 역시도 토착화되고 군벌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를 완벽하게 분열시켰다. 수많은 반란과 독살. 궁궐은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황을 막아낸 것이 바로 광종이다.
광종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말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광종은 정상적인 군주는 아니었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비정상이 고려의 분열을 막는데 성공했다. 광종 사후 약간의 혼란이 빚어졌지만 성종대에 들어서서 고려는 간신히 지방행정을 갖추는 등 정상적인 나라가 되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성종대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다. 성종은 워낙 엉망진창이 되어있던 고려를 재구축하느라 바로 북방에 거란이라는 강대국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정종이 30만이나 되는 병력을 군벌들에게서 '구걸' 해가며 만들었던 이유가 바로 거란이라는 국가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한 거란과의 관계를 성종은 망각해버렸다. 심지어 성종은 지방 사병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동원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지방 귀족들의 불만을 불러왔을 것이다.
성종이 압록강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 압록강에 성을 쌓기도 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성종 역시 대비를 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만, 개인적으로 이 기록 자체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정말 압록강에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다면 상당한 병력을 동원해 여러개의 성을 쌓아야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이 보낸 병력은 전혀 대군이 아니었다. 얼마나 처참한 수준의 병력이었냐면 아직 제대로 세력끼리 규합되지도 않아서 기껏해봐야 수백,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해봐야 1,2천에 불과했을 여진의 병력에게 처참하게 패배해서 성을 쌓지도 못 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그 이후 압록강 진출은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하자면 성종에겐 압록강에 진출하려거나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하려던 의도가 전혀 없었다. 어쩌면 그저 거란의 여진 공략에 위협을 느낀 고려의 장수들이 성종에게 간언했고, 성종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 적당히 병력을 보내서 적당히 성을 쌓는 척 하다가 되돌아오도록 지시했을 수도 있다.
고려가 이렇게 내부를 단속하느라 정신없을 때 거란은 중국 공략을 잠시 일시정지하고 동쪽 공략을 시작했다. 거란은 수차례에 걸쳐서 여진을 정벌했고, 그 결과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압록강 남쪽 하구쪽에 만들어진 보주의 경우 고려에게 결정타를 먹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군사가 이동할 때 가장 위험한 순간이 바로 도하 순간이다. 강과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강을 바탕으로 적을 방어했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모든 강이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방어선이 될 수 있는 강은 요하, 압록강, 한강 이 셋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고려는 압록강을 잃어버렸다. 거란의 보주 건설은 고려에게 있어서 수십만 대군의 침략을 받은 것과 동급의 충격이다.
성종은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된 모양이다. 부랴부랴 최종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는 청천강 일대에 성들을 보강하고 서경에 행차하는 등 민심을 진정시켰다. 아무리 거란에 대비를 하지 않은 성종이라고 하지만 군사를 전혀 키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동안 엉성하게 유지되던 중앙군을 6위라는 이름으로 편성하며 공고히했다. 이 6위는 이후 현종대에 2군이 추가되어 2군 6위라는 이름으로 윤관의 여진정벌로 인해 군제가 바뀌기 전까지 고려의 중앙군으로 역할을 했다. 이 중앙군이 성종이 믿는 마지막 보루였다. 광군은 소용이 없다. 일단 광군에 소집령을 내리긴 하지만 제대로 모일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실제 제대로 모인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성종이 이미 광군의 바탕이 되는 사병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실제 사병을 줄여버린 귀족들도 있을테고 사병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더라도 조정에 협조하지 않은 귀족들도 있을 것이다. 결국 성종은 자신이 최승로와 함께 만든 6위의 중앙군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거란이 쳐들어왔다.
993년, 8월. 소손녕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왔다. 하지만 그 군사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본디 고려를 침략하려고 구성한 군대였다기 보다는 여진 정벌을 하는 와중에 고려까지 침략해온 것이라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소손녕의 거란군은 거란에서 출발하고나서 한참을 지나서야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이 이유는 역시 여진 정벌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여러차례 계속된 여진 정벌에도 불구하고 여진은 이곳저곳에 산발적으로 세력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란군이 마음껏 진군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진은 고려에게 '거란이 침략하려 한다' 라고 통보하기까지 한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고려도 소손녕이 압록강에 이르르자 간신히 사태를 파악하고 군사를 움직였다.
고려가 행한 군사 동원령이란 당연히 30만 광군을 모집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편에서 말했 듯 이 군대가 정상적으로 움직였을 리 없다. 아니, 거의 동원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근거로 서전에서 패배하자 성종이 서경 이북을 떼어준다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쉽게 말해서 고려는 대군을 동원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일단 성종은 중앙군 위주로 3군을 구성해서 박양유, 서희, 최량에게 군사를 맡겨 북진시켰다. 고려군은 청천강 방어선을 기점으로 조금씩 북진해갔고, 거란군 역시 조금씩 조금씩 남하했다. 그리고 양측이 처음으로 만나서 전투를 벌인 곳은 바로 봉산군이라는 지역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거란이 3~6만 사이의 병력만을 이끌고 왔는데, 80만 대군이라고 거짓을 외쳤고 성종은 바보같이 그것을 믿는 바람에 서경 이북을 떼어준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아무리 고려가 막장이어도 그 정도로 정보력이 없지는 않다. 80만이라는 군대가 움직이려면 그 정도의 댓가가 필요하다. 엄청난 길이의 보급선부터 엄청난 길이의 이동 경로. 출전하는데에만 무지막지한 시간이 걸리는데다 그들이 먹고 싸는 양은 그 자체로 지나간 흔적을 만든다. 80만 대군이 지나가면 그 지역 전체가 요동하면서 여기 엄청난 대군이 있다고 외친다. 게다가 고려의 정보력이 상대의 병력조차 제대로 파악을 못 할 만큼 모자랐다곤 생각하기 힘들다. 그 뿐이 아니라 고려에겐 여진이라는 정보 제공 세력까지 있었다. 이쯤이면 고려가 거란의 병력 규모를 파악 못 했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충분하다.
더 중요한 것은 성종이 직접 최전선으로 왔다는 것이다. 성종이 왕건처럼 군사를 부리면서 성장한 타입도 아니고 전쟁을 경험해보지도 못 했다. 유학 군주로서 사병을 약화시키는 정책까지 썼었던 그가 전략에 능통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를 것 같다. 설사 전쟁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더라도 성종이 최전방이라 볼 수 있는 안북부까지 오는 것은 지나치게 자신감 넘치는 행동이다.
사실 이 1차 여요전쟁은 지나치게 영웅 서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많은 기록이 생략되어있는 게 느껴진다. 서희가 훌륭한 인물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서희의 훌륭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전투 경과나 서희를 제외한 고려인들의 행동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부분은 최대한 사실에 근거한 추정으로 채워넣을 수 밖에 없다.
먼저 왜 성종이 안북부까지 올라왔느냐. 그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 제대로 대군을 동원하지도 못 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자신감이 있었느냐. 당연하게도 여진에게 제공받은 정보와 첩보 활동을 통해서 얻은 정보 모두가 거란군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란군의 숫자가 우리가 예상하는 것 보다도 훨씬 적었고, 반면 고려군은 의외로 많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 뿐이 아니라 성종은 자신이 만든 6위라고 하는 중앙군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었을 것이다. 6위는 충분히 훈련받은 정예군이었을테고 그들의 위용은 성종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봉산군 전투로 이어졌다.
우리는 왜 봉산군이냐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봉산군은 딱히 방어를 하기 좋은 곳이 아니다. 이렇다할 요새도 없고 지리적 이점을 취할 공간조차 없다. 오히려 바로 근처에 있는 귀주는 충분한 요새이고 주변의 산지 등에서 매복이라도 가능하며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고려에게 잇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첫번째 전투는 봉산군에서 벌어졌다. 왜?
몇몇 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고려군의 본대가 나약했기 때문에 고려가 지나치게 서둘러서 움직이다보니 귀주에 도착하기 직전 봉산군에서 거란군과 조우하게 되었다라고 추정하고는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말이 아닐까 싶다. 고려군이 나약했던 것은 맞지만 고려 스스로 자신들이 약하다고 생각했을 리 없다. 즉, 나약했기 때문에 서둘러서 움직였다는 말은 틀렸다고 본다. 그랬다면 성종이 안북부를 방문한다는 무모한 계획을 실천하려 했을 리 없으니까. 오히려 윤서안이 이끌고 출전한 고려의 선봉군은 고려군 가운데에서 엄선하고 엄선한 최정예 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던 윤서안 역시 자신이 이끄는 부대가 거란군보다 뛰어나고 강력한 부대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봉산군이라는 지리적 이익을 볼 수 없는 평원지대에서 회전을 벌였다고 보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안타깝게도 성종과 윤서안의 생각은 틀렸다.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 고려의 최정예 부대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성종은 그 소식에 깜짝 놀라서 안북부 방문을 취소하고 서경으로 되돌아간다. 성종의 이 태도를 봐도 성종과 고려인들은 고려군의 실력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란군은 적었고 고려군은 많았으며 고려군 내에는 중앙군이 포함되어 최정예 부대도 존재했다. 자신감을 가질만 했다. 하지만 한차원 더 높은 거란군의 실력에 고려의 최정예부대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성종은 그제서야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경악하며 서경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성종은 극단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심해진다.
봉산군 전투에서 고려가 처참하게 패배하자 중군사 서희는 북진하여 봉산군 일대에 진영을 꾸리고 거란의 남하를 막는 장기전 책략으로 나섰다. 그 와중에 서경에서는 대신들과 성종의 회의가 이어졌고, 곧이어 거란군의 주장이 당도했다. 그 내용은 기가 막힐 정도로 황당한 내용. 고구려의 땅은 전부 거란의 땅이어야하고 우리 거란은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라는 내용이었다.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한 말이다. 고구려 땅 운운은 이미 고구려가 수백년전 멸망한 마당에 별 의미가 없는 명분이었고, 80만 대군이라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거짓말이었다. 그저 거란은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서 고려를 협박했을 뿐이었다. 기껏 몇만 되지도 않는 병력으로 고려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은 소손녕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마 거란군은 식량도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 식량이 충분히 비축되어있을 시기에 출정했지만 소손녕이 머무는 지역은 고려의 행정력이 완벽하게 미치지 않는 곳이었고, 그로 인해 예상치 못 한 굶주림이 다가오고 있었을 지 모른다. 누차 말하지만 군대는 먹지 않으면 개차반이 된다.
그런데 우습지도 않게, 거란군의 조짐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고려측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고려 대신들의 의견은 서경 이북을 떼어주는 것이 옳다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종의 결단일텐데, 성종 역시도 할지론을 지지한 것 같다. 여기서 서희는 일단 싸워보자고 말한다. 적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 알려진 마당에 꽤 모여있는 고려군으로 싸워보지도 않고 땅을 포기하는 것은 미친짓이다. 서희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희 역시 이때까지는 거란의 조짐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고려 내부에서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거란이 결국 움직이고 만다. 아마 내원성쪽에 비축해둔 식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여진의 세력 때문에 보급선이 위태로워졌을 수도 있다. 결국 거란은 안융진쪽으로 갑작스럽게 군대를 출전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안융진이 어떤 곳이었냐인데, 딱히 산세에 의지해 만들어진 요새도 아니었고 성의 둘레가 1km도 되지 않는 것을 보아 대군이 머물렀을 수도 없다. 봉산군 전투에서는 고려군이 촌극을 벌였다면 안융진에서는 거란이 촌극을 벌인다. 거란은 이 조그마한 요새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 하고 오히려 대도수가 이끄는 소규모 부대에게 격퇴당하는 황당한 전쟁 기록을 남긴다. 발해의 태자 대광현의 아들인 대도수가 발해 유민 출신 군대를 이끌고 주둔했었기 때문에 거란에 대한 항전 의지가 강렬했고, 그 결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거란군 자체도 아주 코믹한 전투를 벌였다.
1차 협박 이후에 2차 협박을 하려면 '담보' 가 필요하다. 적어도 성 하나 정도는 차지해놓고 협박을 해야지 먹힌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란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청천강 방어선을 뚫어보려고 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봉산군 전투를 제외하면 거란이 얻은 것이 전혀 없는 상황. 그런데 거란은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고 고려에게 협박만 계속하는 코미디를 벌인다. 그런데 더 코미디는 고려인 중에 거란군이 정말 너무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한 사람이 서희 한 사람 뿐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종은 할지론을 확정하고 서경의 식량을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령까지 내리는데, 서희의 반대로 무산되고 서희의 강력한 주장 하에 다시 거란측에 사신을 보내는 쪽으로 책략이 변경된다. 하지만 소손녕은 사신의 지위가 너무 낮다는 이유로 무시했고, 그러자 서희가 직접 나서게 된다. 그리고 나오는 게 바로 서희의 담판인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서희의 담판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서희의 담판을 고구려 땅이 누구 것이냐에 촛점을 맞춘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수백년전 고구려 땅이 누구의 것이냐를 두고 서희와 소손녕이 논쟁을 벌였을 리 없다. 게다가 고려는 고구려의 국가명인 고려를 그대로 계승한 나라였고, 그 유민들이 세운 나라라는 명분이 확실했기 때문에 소손녕의 고구려땅 운운은 그저 협박성 멘트였을 뿐이다. 서희는 그것을 파악했고, 거란이 사실 여진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으며 고려와의 통교 역시도 여진 때문에 손쉽지 않다는 것까지도 파악했다. 여기서 서희의 놀라운 외교술이 발휘된다. 상대의 의도를 먼저 읽었으면 그것을 역이용하기도 쉬운 법이다.
외교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 이상으로 얻는데 성공해야만 훌륭한 외교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희는 훌륭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거란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곤란으로 되돌려버리는 놀라운 외교술를 발휘한다.
"본래 압록강 내외는 우리 경내인데, 여진이 그 사이를 훔쳐 도로를 막고 있어 거란과 통교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 힘을 합쳐 도로를 내고 통교한다면 어찌 서로 친교하지 않겠는가."
그는 순식간에 왕건이 만들었던 거란과의 적대적 관계를 중립적 관계까지 끌어올렸다. 친교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식으로. 그리고 동시에 함께 여진을 정벌함으로서 도로를 내고 성을 쌓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 결과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주었지만 동시에 고려가 원하는 것 또한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이 회담의 결과물은 이것만이 아니다. 기록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그 이후 기록을 보면, 거란은 서여진을 지배하고 고려는 동여진을 지배한다는 협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뿐이 아니라 성종이 거란과 통교를 하기 시작하려고하자 서희는 이를 반대한다. 서희가 거란과의 통교를 반대하는 이유는 하나. 거란에게 "고구려 땅을 회복한 후에 통교하겠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아직 그렇게 하지 못 했다." 라는 이유였다. 쉽게 말해서 서희는 회담을 통해 동여진에 대한 지배권과 고구려 땅에 대한 회복 권리까지 가져왔던 것이다. 이토록 놀라운 사람이 또 있을까?
이 회담이 끝난 뒤 서희는 그대로 군대를 이끌고 북진해 압록강 일대에 머물러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곳에 강동 6주를 만들었다. 이 일대에 만들어진 요새들은 바로 2차 여요전쟁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고구려가 요동에 만들어뒀던 방어선이 서희를 통해 압록강에 그대로 재현되었던 셈이다. 1차 여요전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격퇴했고, 오히려 여진을 정벌하면서 강동6주를 만들어냈다. 동시에 동여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게 된다. 첫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했는데도 이런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은 역시 서희의 외교술 덕택이라 볼 수 있겠다. 이래서 세상사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게지. 봉산군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했을 때 과연 어느 고려인이 이런 결과를 예측했을까.
1차 전쟁은 고려에겐 큰 충격을 줬지만 거란에겐 딱히 큰 충격이랄 게 없었다. 외교상의 이득은 고려와 거란 양측이 모두 취했지만 국가적 굴욕은 고려가 당했으니 거란에게는 자부심마저 생겼다. 변변치 못 한 병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킨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이 자부심은 거란의 송나라 정벌에 적극 활용된다. 당시 거란은 성종이 즉위하였지만 태후였던 소씨가 사실상 정권을 틀어쥐고 있었고, 소태후는 매우 강력한 정치적 행동과 전쟁 활동으로 거란을 성장시켰다.
'전연의 맹' 일종의 국가간 약속일텐데, 통일된 중국이 당했던 굴욕 가운데서 손꼽히는 굴욕이다. 심지어 한나라 유방이 흉노에게 죽을뻔한 경험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는데, 이 전연의 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거란은 고려가 굴복하자 즉시 군사력 증강을 다시 시작했다. 이 낌새를 눈치챈 송나라는 거란에게 화친을 요청했지만 거란은 단호히 거절한 후 5년 동안 군사력 증강에 힘쓴다. 그리고 시작된 원정에서 송나라를 처참하게 박살내버렸다. 그 다음해 또 다시 송나라 정벌에 나선 거란, 하지만 이번에는 딱히 큰 성과를 거두지 못 한다. 그러나 이게 거란에겐 짜증나는 일이어도 송나라에겐 아니다. 당시 거란의 송나라 정벌이 어중간하게 끝난 것은 자연이 송나라의 손을 들어준 덕이었다. 다음 정벌에도 자연이 그런 은혜를 배푸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송나라는 어설픈 대책으로 일관한다.
그 와중에 소태후는 다시 한 번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획한다. 1004년, 소태후는 아예 고려에 송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통보까지하고 송나라를 친다. 이 전쟁에서 거란은 국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남하했으나 의외의 사건이 벌어진다. 송나라 진종이 직접 이끌고 올라온 송나라의 주력군이 거란군을 패퇴시킨 것. 생각외로 송나라가 강경하게 나오자 소태후는 전쟁이 길어질 것을 고려하여 화친을 제의하는데, 바로 이것이 '전연의 맹' 되시겠다. 그 내용은 첫째, 송을 형으로 하고 요를 동생으로하는 대등조약을 맺고 둘째, 송나라에서 해마다 은 10만 냥, 명주 20만 필을 세폐(歲幣)로서 요에 보내고 셋째, 양국간의 국경은 현상을 유지한다는 내용.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송나라는 평화를 돈으로 사버렸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채.
이 맹약이 중요한 것은 송나라가 굴욕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맹약이 곧 거란의 전성기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란의 가장 큰 적이었던 송나라가 거란과 화친을 맺었다. 두 나라간에는 적어도 몇년간은 전쟁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거란은 고려를 본격적으로 침공할 힘을 갖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소태후는 압록강 남쪽에 만들어진 보주를 강화하고 전쟁 준비를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 이렇게 빠르게 변해가는 국제 관계 속에서 고려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었을까?
우연히도 이 당시 고려 역시 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태후는 적어도 성종과는 확실하게 다른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태후로 올라서자 자신의 아들인 목종에게서 '응천태후' 라는 칭호를 받는다. 하늘에 응하다. 이미 목종이 임금이 되었는데도 응천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즉, 사실상 정권이 태후에게 있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다. 아마 성종이 죽기 전부터 쭈욱 천추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준비해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바로 이 인물이 '천추태후' 다.
국제 정세가 격동하는 만큼이나 천추태후대의 고려는 격동의 시기였다. 먼저 천추태후는 외교쪽에 눈을 돌렸다. 고려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기록이 거란과 일본의 기록에 등장하는데, 먼저 1차 여요전쟁 이후 성종이 맞이한 거란인 부인을 따져봐야한다. 이 거란인 부인은 고려의 기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쉽게 얘기하자면 거란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았던 것이다. 굴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를 받아들인 세력은 천추태후의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천추태후는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다. 하루아침에 천추태후의 세상이 열릴 리 없으니. 그리고 이 혼인은 매우 효과적인 혼인이었다. 이 거란인 부인이 있는 상황에서 거란은 고려를 침공할 명분이 없다. 최소한 거란과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시간 벌이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봐야하는 것이 고려의 일본 침공이다. 이 기록 역시 고려측 기록엔 등장하지 않고 일본 기록에만 등장하는데 고려군 500척이 일본을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이 침공이 성공했을 리 없다. 성공했다면 우리 기록에 남지 않을 리 없고, 무엇보다도 이 전쟁 이후에도 일본과 고려의 관계에 발전이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천추태후가 제일 먼저 하려고 했던 일은 바로 국제 정세에서 고려만의 위치를 구축하려는 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무리가 없는 정보들이다.
천추태후는 외교에만 신경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평양을 서경에서 호경으로 고쳤는데, 이는 단순히 이름만 바뀌었다고 볼 게 아니다. 호경이란 칭호는 주나라에서 비롯된 칭호로 천추태후가 평양을 굉장히 중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몇몇 학자들은 천추태후가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이런 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천추태후가 단순히 그런 선전용 정책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강동 6주가 설치된 이후 서경은 북계 군사력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천추태후가 했던 정책은 서경을 강화하고 서경의 백성들의 정신력을 강화시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게 하려는 정책이었다고 봐야한다.
천추태후대의 기록은 굉장히 요상하다. 중요한 기록, 예를 들자면 군사력 강화에 대한 기록이나 2차 여요전쟁의 영웅, 양규에 대한 기록 등이 전무하다. 천추태후가 고려의 군사력을 강화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1차 여요전쟁때 제대로 동원되지도 못 했던 광군이 2차 여요전쟁에서는 완벽히 동원되어 30만 병력이 거란군과 맞섰다. 또한 양규는 2차 여요전쟁때 아주 중요한 서북면을 담당하는 '서북면도순검사' 의 직책에 있었고, 엄청난 활약을 펼치지만 이 중요한 인물의 과거가 전혀 나오질 않는다. 양규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고려는 처절하게 패배했을텐데 현종대 문신들이 그것을 모를 리 없고, 아마 거란에 의해서 기록이 소실된 후 남은 극소수의 기록과 관청의 기록들을 동원한 후 '기억' 에 의존해 7대 실록을 복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천추태후대의 기록을 적은 이들은 바로 천추태후를 끌어내린 반정 세력이라는 얘기. 왜곡이 없을 수 없다.
어쨌든 고려와 거란은 걸출한 태후를 만나 군사력을 강화하고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소태후가 죽자마자 천추태후가 정변을 겪어 실각했고, 두 태후가 사라지자 전쟁이 발생했다. 이걸 두고 운명이라고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