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면, 난 마치, 어제의 일은 잊고 사는, 과거의 기억들을 잊고 사는 초라한 썩은 나뭇가지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벌써 스물 한 살이었다. 무엇하나 한 것 없이, 바란 적도 받은 적도 없이 그네들이 그려주는 얇은 평로만 따라 걸어왔다.
그렇기에, 그 누군가에게 한번도 무시당한 적이 없고, 무시한 적도 없는 난, 당근 부족한 것이 없기에 당당히 내 자신에게 늘 '넌 착하고 순진한 요조숙녀야.' 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난 다른 누구보다 빠질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었다.
만약, 그 누군가가 나와 미모에 대해 승부를 하자고 한다면, 난 도도하게 목을 곧추세우고, 우아한 손짓을 하며, 단번에 거절할 것이다. 그런 부류들은 나와 상대도 되지 않는 호박들일 것이 분명했다.
몸매에 대해 나와 승부를 하자고 한다면, 음악이 있지 않아도 난 그 자리에서 춤을 출 것이다. 주위 모든 사람들이 내 미모와 몸매에 반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뿐, 난 그들에게 관심 가져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승부 따위를 걸 여자도 없었다. 보나마나 뻔한 승부를 하자고 하는 여자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나에게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걸 어쩌지?
난 학교에서 잘 나가는 연예인이었다. 걸어가는 길마다 내 향취에 숨이 막힌 남정네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내 이 뛰어난 미모를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기 위해 온 정력을 쏟아 부었다. 하루에도 프로포즈를 네댓 번 받는 것은 이제 일상화가 되었다.
'후…….'
정말로 이런 일은 골치가 아팠다. 얼굴 믿고 내게 꽃을 내미는 놈, 돈 믿고 내게 달려드는 놈, 권력 조금 있다고 당당하게 내 시선과 높이를 같이 하는 놈, 마음 같아선 그런 놈들 모두! 이 발로 사타구니를 뻥 차주고 싶었다.
"유나야, 내 마음을 받아 줘∼"
"내게 오면 뭐든지 해줄 수 있다니까, 정유나."
"정유나, 너를 황후를 만들어줄 수 있다, 나는."
이런 것도 없는 놈들은 그저 내 얼굴을 훔쳐볼 뿐이었다. 지금 내 앞을 가로막는 이 세 놈이 바로 우리 문과 대학 최고의 킹카들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거의 매일, 아니, 매일매일 나를 귀찮게 만드는 기생충들이었다. 얘네 말고도 나를 괴롭히는 남정네들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말로 듣자하면 정유나 수호대라는 비공식 서클이 생겼다는데, 난 별로 관심이 없었다.
꽃을 내게 치켜들며, 한쪽 무릎 꿇고 앉아있는 얼굴 짱 안준영. 내 앞을 척 막고 껌을 짝짝 씹어대는, 얼굴은 보통 수준이지만 돈을 휴지처럼 마구 써대는 재벌 3세 염성진, 벽에 등을 기대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할아버지가 잘 나가는 국회의원이라는, 그래도 이 중에서는 제일 난 국기호. 정말 짜증나는 놈들이었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이 놈들이 정유나 수호대를 이끌어 가는 수뇌부라고 했다. 난 다 필요 없단 말이다!
난 어제처럼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귀찮아……. 가자, 현주야."
여러모로 숙녀는 남자들 앞에서 당당해야했다. 그렇기에 난 평소 그 걸음을 유지하며, 턱을 꼿꼿이 세우고, 도도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옆에 얼굴이 무르익은 현주는 뒤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그들을 바라보며 넋이 나가 있었다. 내 눈에 그들 얼굴이 별로 라는 것이지, 다른 여자 애들에겐, 그들은 거의 수호신처럼 떠받들려 지고 있었다. 웃겨, 정말!
"빨리 와, 지지배야!"
"어? 어……. 조금만 기다려봐. 악, 안 돼∼, 준영 오빠!"
강의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면서, 그들의 모습이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자, 현주는 금세 풀이 죽어버렸다.
왜 저런 애들을 좋아해서 그런지, 현주 얼굴도 여자 중에서는 그래도 예쁜 편이었다. 나보다는 한참 아래지만 말이다. 아기를 닮은 순수한 두 눈동자에 갈대처럼 긴 속눈썹은 모든 남자들의 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한가지 단점이 있다면 현주 얼굴엔 주근깨가 깨알 같이 많다는 것이다. 그게 흠이라면 흠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 한가지 더 있다면 남자 같이 머리카락이 짧았다.
그러고 보니 얘가 완전 여자이기를 포기한 것 같네. 뭐, 그래도 자신은 언제나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계단을 올라 3층에 다다르니, 벌써부터 내 미모에 반한 늑대들이 길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침 좀 닦아라. 코웃음을 치며 당당히 그들을 넘어 강의실로 들어갔다. 내 보디가드는 늘 옆에 붙어 다니는 현주였다.
아직 교수님이 오지 않았는지 강의실 안은 시끌벅적했다. 내 얼굴을 향한 많은 시선을 옆으로 쳐내며, 그 사이로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 눈알을 굴렸다.
'저기 있다!'
중간쯤, 내 눈에 익숙한 몸뚱이 하나가 보였다.
난, 현주를 먼저 자리에 앉히고는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 목표는 청색 빵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 목이 부러질 듯 위태위태했다. 고개를 아래위로 왔다갔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 이 놈의 청색 빵 모자만 보면 열이 솟구쳤다. 그냥 청색 빵 모자여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바로 저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놈이기 때문이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놈이 고개를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돌렸다.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결국, 붙잡고 있었던 한쪽 손이 내 의지에서 벗어나 놈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진짜 더러워서 같이 앉을 수가 있어야지. 이게 사람이야, 짐승이야?
코가 막히는지 그냥 그 상태에서 코를 흥 풀어버렸다. 초록 건더기와 같이 딸려 나온 콧물이 옆으로 흐르다가 놈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그걸 또 껌을 씹듯 쩝쩝거리는 놈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손바닥에 번쩍 눈을 뜨는 놈. 잠시 눈을 깜박 깜박거리더니 고개를 들어올려 옷소매로 코를 쓱 닦았다. 그리고 좋다고 씩 웃는 꼴이, 정말 주위에 사람만 없었다면, 난 일찌감치 이 자식의 코를 도려내 버렸을 것이다.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잘 자고 있는 사람 왜 때리냐. 아, 졸려 뒤지겠네. 치와와(교수별명) 왔냐?"
"오빠, 너 진짜 그렇게 살고 싶어?"
내 말을 끝으로 교수님이 들어왔다. 다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수많은 입들이 동시에 멈췄다. 녀석도 다시 엎어지려고 하다가 교수님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수업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마음에도 없는 강의를 들어야만 하는지……. 조금 심하다 싶을지 모르겠지만, 진짜 마음 같아선 오빠라는 녀석을 때려 죽여버리고 싶었다. 또, 또, 판다! 코딱지를 아무 데나 튕기는 행동까지……. 저 인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진짜 더러워서 같이 못 앉아있겠네. 저 인간은 더러운 오물로 목욕을 하나 진짜 왜 이렇게 더러운 짓만 골라하는 거야!
그래도 한가지 마음에 드는 건 머리카락은 하루에 꼬박꼬박 감는다는 것이다. 놈의 머리카락에선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아련한 꿈속의 틀에 박혀 헤어져 나올 수 없는 기분에, 한층 더 높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놈이 저렇게 더러운 짓을 일상으로 삼고는 있지만, 뜻밖에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생겼다. 장미처럼 붉은 입술은 바깥 모든 여자들의 마음을 한 번에 뒤흔들어 놓고, 저 오뚝한 콧날은 바깥 모든 여자들의 심장을 내려 앉힐 정도의 매력을 갖고 있었다. 또, 두 눈은 날카로운 면서도 순진했다. 항상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여자인 나보다 긴 속눈썹은 부럽기까지 했다. 거기다 쌍꺼풀까지…….
예전에 이 놈이 여장을 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했었다. 그리고, 작년 축제 때 그 궁금증이 풀렸다. 난 놈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말 놈은 감쪽같이 여자로 둔갑하여, 눈썰미 좋은 이 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놈의 얼굴은 바깥에서만 통했다. 학교에선 절대 통하지 않았다. 저 칠칠맞은 웃음과 밑으로 질질 흐르는 침.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열이 받는 이유의 근원은 바로! 바로 저 기다란 새끼손톱이었다. 못해도 1cm는 될 것이다. 손이라도 예쁘면 뭐라고 안 하지. 저 손톱이 어디에 사용되는지 누군가 알게 된다면 아마도 뒤로 나자빠질 것이다. 놈이 저 손톱으로 하는 짓은 딱 세 가지였다. 그 첫째가 귓구멍 파기. 여기까지는 그래도 봐 줄만 했다. 나도 가끔 귀가 간지러우면 그렇게 하니 말이다. 그런데 두 번째부터가 나를 매우 열 받게 했다. 새끼손톱으로 코딱지 파다가 코피 나는 놈은 세상천지 여기 장정현 한 명뿐일 것이다. 또,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저 콧구멍 판 손톱을 이쑤시개 대용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꼭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저 손톱을 잘라내 버리고 말 것이다. 그걸 위해 난 매일 손톱깎이를 핸드백에 갖고 다녔다.
내가 왜 이렇게 열 받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침을 튀겨가며 말해줄 것이다.
'난, 이, 짓, 을, 매, 일, 보, 고, 산, 다!'
손등은 온통 피딱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날씬하기는 하지만, 만지면 마치 악어가죽 같이 꺼칠꺼칠했다. 그렇다고 놈이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저렇게 매일 손등에 피가 나는 이유는 놈이 바로 바보이기 때문, 그 이상의 까닭은 없었다.
누군가 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쪽 벽만 하루에 200번씩 100일 동안 때리면 벽이 뚫릴 것이라고 말이다. 놈은 정말 그걸 믿고 매일 그 짓을 해댔다. 강의실을 나가 2층으로 내려가면 화장실이 나오는데, 남자화장실에 들어가는 입구 왼편에 놈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어떤 놈이 그런 말을 지껄였는지 내 손에 잡히기만 하면 아주 박살을 내버릴 것이다.
"내가 진짜 오빠 때문에 내 수명에 못 살 것 같다."
'진짜 너처럼 더러운 놈은 처음 봤다.'
그래도 놈은 좋다고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실 웃었다. 이 놈은 바보인 것이 아니라 정말 바보였다.
놈의 이름은 장정현. 나보다 두 살 많은 스물 세 살, 군대를 갔다와서 그런지 지금 놈은 나와 같은 2학년이었다.
"제수명이 누구냐?"
한가지 기가 막힌 게 있다면 이 자식이 바로 세상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 나, 정유나의 남자친구라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길을 홀로 외로운 발걸음으로 달려왔었던 어제가 지금의 유나에겐 긴 아픔에서 추억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 그녀에게 있어서 집이란 감옥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구속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한국 3대 기업 교성 그룹 회장이었던 그녀의 할아버지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아직은 젊기만 한 아버지가 그 뒤를 이은 날부터.
그 전에도, 그 뒤로도 그녀는 부모님의 품에서 행복하게 자랐다. 아니, 그녀는 억지로 그렇다고 고집했다.
유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을 하게 되면 뭔가 바뀔 줄 알았던 것이 하나 변함이 없었다. 그녀를 압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그녀 혼자만이 그 무언가에 힘들어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게 깊은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란 걸 알지 못했다. 바로 1년까지만 해도 말이다.
하늘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벌써 몇 시간 째 밤하늘을 가느다란 빗줄기들이 수놓고 있다. 하늘은, 이 눈물을 맞는 모든 이들에게 웃기를 바라고 있었다.
검은 도로에 빗방울 한 가닥이 탁, 땅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줄기로 퍼져 나가 긴 물줄기를 형성했다. 그 자리를 채우고, 또 채우고, 그렇게 연속적인 반복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긴 침묵은 깨지고 말았다. 커다란 검은 색 신발이 그 자리를 꿰차면서 더 이상 빗줄기는 땅바닥에 부딪쳐 여러 개로 퍼지는 번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한자리에만 떨어지던 빗줄기는 갑자기 나타난 검은 색 신발 발등에 맞고 움푹 패인 곳으로 흘러 들어가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넘치더니 신발 주름을 타고 땅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벌써 다 왔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갈까?"
"어여 들어가 봐라. 나 추워 죽겠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입고 다니래! 내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했잖아. 왜 이 추운 겨울날 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거야!"
"남자가 멋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추위쯤이야 별 것도 아니지. 움하하핫! 내일 일찍부터 우리 집 오지 말아라. 제발 부탁이다. 나 잠 좀 자자. 알았지? 그럼 그만 들어가 봐. 잘 자고 내 꿈꾸던지 말던지!"
한 가운데 곰돌이가 그려져 있는 노란 우산 속에서 정현은 뛰쳐나왔다. 군데군데 찢어진 청바지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왔다. 삐쭉 솟은 정현의 머리카락이 빗물에 한 가닥 한 가닥 눕혀졌다. 두 손을 머리에 짚고 검은 늪으로 사라져 가는 정현을 보며 유나는 오늘도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야이, 바보야! 우산 가져가야지!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친다, 미쳐. 이렇게 비가 오는데……. 우리 집 다 왔는데 우산 놓고 가는 놈이 어디에 있어."
유나는 정현이 사라진, 가로등 하나만이 빛을 비추고 있는 방향을 한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산을 꼭 붙들고 있는 게, 유나는 조금이라도 정현의 온기를 더 느끼고 싶었다.
어깨까지 닿는 긴 머리카락으로 조금씩 빗물이 떨어졌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추위에 꽁꽁 얼어 붙어있었지만, 그래도 피부는 뽀얗게 살아있었다.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붉은 도톰한 입술은 아무나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영역이었다.
커다란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유나는 머리 속에 한참동안 정현의 모습을 그렸다. 그와 사귀기 시작한지 오늘로 452일째였다. 1년을 넘게 의지해온 연인이었다.
유나는 정말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처럼 정현은 돈이 많은 것도, 권력을 갖고 있는 집안에 사는 것도 아니었다. 얼굴은 다른 남자들에 비해 뛰어나게 멋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었다. 정말로 괴상한 일이었다.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세계 7대 미스터리보다 더 궁금한 블랙홀 안의 보물상자였다. 하지만, 유나는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를 보면 심장이 뛰는 것, 가슴이 따스한 온기로 채워지는 것, 그건 분명 그녀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추적추적 빗물을 밟아가며 유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대학교와 근접해 있어서 그런지, 이곳은 다른 곳보다 원룸 단지 건물이 많이 들어차 있었다. 짙은 어둠 사이로 비가 와서 그런지, 유나의 두 눈엔 바로 코앞 친구 현주와 함께 사는 원룸 건물이 있음에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얼굴에 흐릿한 안개를 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나는 우산을 어깨에 대고 손가락을 짚어 키를 재보았다. 그녀는 여자들 중에서 보면 꽤 큰 키에 속했으나 옆에 늘 붙어 다니는 정현에 비하면 조그마한 난쟁이에 불과했다. 정현의 턱이 늘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게, 유나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아직도 멀었어……. 이제 성장이 멈춘 건가?"
유나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유나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제야 가슴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걱정 하나가 깨끗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현이 사는 곳은 여기서 못해도 뛰어 15분은 가야만 했다. 그가 비에 홀딱 젖어버렸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오빠는 바보라서…… 감기 같은 거에 절대 안 걸… 리겠지?"
그녀 앞에선 언제나 강한 모습만 보이는 정현이었다. 남들 다 걸린다는 감기 한 번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남자친구 장정현이었다. 그래도 내심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누가 안테나를 제대로 맞춰놓았는지 지지직거리던 하늘 위 초승달이 이제는 제대로 된 빛을 내고 있었다.
유나는 우산을 접고 기왓장 지붕으로 되어있는 3층 원룸 입구로 들어갔다. 분명 혼자만 재미보고 왔다며 심술부릴 현주가 문 앞에 서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꼭 기다리기라도 했었다는 듯 하늘은 다시 한번 거센 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비에 흠뻑 젖은 검은 그림자 하나가 전봇대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빗물에 젖은 긴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얼굴에 붙어있었다. 유나가 들어간 입구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곧이어,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찢어진 바지 사이를 가리고 있었던 몇 가닥의 실이 지금은 다 뜯어져, 빗물에 한 대 뭉쳐,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물방울을 바닥에 떨구며, 뒤로 휘날렸다.
한 폭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는 하얀 소파에 초로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 앞의 기다란 탁자 위엔 주둥이가 길게 튀어나와 있는 기이한 양주병과 얼음이 가득 차있는 통이 놓여져 있었다. 남자는 한 손에 양주잔을 들고 그윽한 눈동자로 몇 걸음 앞 벽에 걸린 풍경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을 덮고 있는 금테 안경이 위에서 내리쬐는 하얀빛에 반짝였다.
감상의 바다에 빠져 기분 좋게 허우적거리던 그 남자의 세계는, 삐거덕거리는 문소리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화를 냈겠지만, 웬일인지 지금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리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마치 억지로 웃는 듯 입술 아래가 파르르 떨렸다.
"없습니다, 회장님."
그 말에 남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예상한 대로군. 어디 한번 해보자는 것이지. 이 썩어빠진 세상을 위한다고? 흥, 웃기지 말라지. 이 나라는 언제고 망하게 되어있어. 해결해."
"알겠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삐거덕 문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손에 들린 양주잔을 앞으로 집어던졌다. 풍경화가 그려져 있는 큰 액자 겉 유리에 맞은 양주잔은 진한 갈색 액체를 수놓으며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액자 유리엔 조금의 흠짓 하나 생기지 않았다.
첫댓글 재미있어요..다음편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