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7장 14절 – 16절
새벽이 어둠속에서 시작되듯이 교회의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과 교회의 회복과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아주 어두운 시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미 어떤 자들에게 역사하셔서 신앙의 회복과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앙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보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탄식하며 이 세상의 길이 아닌 하나님아버지의 길을 알기를 열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회복과 부흥을 향한 갈망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눈을 가리울 때 하나님이 신앙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부르시는 자들은 그런 현실에 대한 아픔을 가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그 어두운 시기에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문제는 그 때에도 이 세상에는 선지자라고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완악하고 상처당하고 조롱당하고 있는데 애써 그 현실을 외면하고 평강과 축복을 선포합니다. 그러닌까 완악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욱 눈멀고 귀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선지자노릇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어두운 시대에 참선지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참선지자들은 마음이 완악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이 너무나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먼것과 같이 다릅니다. 그러닌까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외면하고 대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길로 행하길 고집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길로 행하여야 한다고 말해도 외면합니다.
이 완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려면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마주 보게 됩니다. 하나는 광야의 현실로 인해서 낙심하고 불평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광야의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완악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선지자들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위로를 구하는 자는 참선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암흑의 시기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자들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드는 시기에도 평안을 누렸습니다. 비록 육신은 고달프고 눈물나더라도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이 예레미야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앙의 회복과 부흥을 시작하실 때 보면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온갖 우상이 가득합니다.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얼굴에는 이 세상사랑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름뿐인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름 뿐인 성도들만 가득한데도 어떤 자들은 자부심을 갖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