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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매체 그리고 권력
강운석 / 2000년 9월호 특집평론
신문에 나오는 것 중에서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틀림없는 사실일지라도 그것이 그토록 오염된 매체에 실리기만 하면 의심스러워진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1807년
노블J.Norvell에게 보낸 편지에서)
토요일 아침. 신문을 펼친다. 두세 뭉치의 지면들에서 정치ㆍ사회면은 제목만 보고 건너뛴다. 보지 않아도 뻔한 여ㆍ야의 대립과 날치기 파동,
살인, 비리, 그리고 쇠락하는 경제까지. 두번째 뭉치 ‘Books 책마을’이 관심을 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신문이 섹션화 하며 수명이 끝났다는 종이 책들에도 황공하게도 지면이 주어졌다. 섹션에는 수십 권의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경제, 학술, 교양, 문학, 어린이까지. 각 책마다 화려한 표지 사진과 상세한 설명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고명한 문인의 고전 소개 칼럼, 가요 탑 텐을 연상케 하는 자체 베스트셀러 10과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 그것도 모자라서 ‘이 책은 꼭’이라는 타이틀 아래 문화계 인사들의 추천서까지 소개되고 있다.
신문에서 소개된 책을 읽지 않으면 지식인의 대열에서 낙오될 것 같은 강박관념까지 드는 실정이다.
그런데 소개된 책들을 살펴보면 선뜻 읽고 싶은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물론 90년대 이후 베스트 셀러의 대상이 문학에서 실용서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소개되는 책들은 대부분 번역서와 처세술, 경제 서적이 주종을 이룬다. 물론 번역서나 교양ㆍ경제서를 폄하하자는 건 아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바야흐로 경제가 모든 가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시대 아닌가. 문학ㆍ학술 서적은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용도가 폐기되어지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로 신문에 소개된 책들이 최상의 선택인지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이다. 물론 사 보지 않으면 그만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지만, 소개된 책들을 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지식인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처럼 가해지는 신문의 위력은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있다. 바야흐로 신문의 권력 시대이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는 300만 부수를 자랑하는 한 신문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우리에게 책을 선택할 여지조차 남겨 놓지 않는다. 물론 다른 신문들 역시 동일선상에 서 있고 진보를 표방하는 신문조차도 역시 자본주의 논리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 사실이다.
신문의 맨 끝 면 광고란에 게재되어 있는 새로 출간된 유명 작가 소설의 통광고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너희가 정녕코 밑바닥 삶을 아느냐’는 헤드 카피 아래 작가의 소감과 전국 서점 베스트 셀러 순위(구체적으로 어느 서점 몇 위, 어느 서점 몇 위라는)까지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 광고. 90년대 이후 계속 제기되어 온 문학의 죽음은 비평의 죽음과 동일 선상에 놓여 있다.
독자들은 이제 비평을 보지 않고 믿지도 않는다. 문학 자체에 대한 관심도 없는 형국에 고리타분한 비평이라니. 그 비평의 임무를 이제 광고가 대신하고 있다. 김치 냉장고 광고와 동일하게 취급되는 소설가의 작품.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 논리에 의한 결과로 이해를 해보지만 뒷맛은 여전히 씁쓸하다.
대중문화 자체가 하나의 신화가 된다는 롤랑 바르트의 이론이나 후기 구조주의 작가들의 대중 매체의 권력화 이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언론과 광고는 침몰하지 않는 거함의 위상으로 우리 앞에 군림하고 있다. 문학 감상의 ‘작품 → 비평가 →독자’의 도식은 이제 ‘작품 → 언론,광고 → 독자’로 철저히 변형되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원론적으로 그 책임은 철저히 비평의 몫이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비평의 위상이 빚은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비평의 몰락 그 이면에는 여러 구조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신문 및 각종 매체와 문학계의 유착 문제, 문단의 섹트 주의, 자본의 논리에 맹목적인 출판계 등 비평을 둘러싼 구조적인 문제는 단순히 비평의 문제를 넘어서 문학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대 사안이다. 따라서 논쟁 사례를 중심으로 비평과 언론, 매체의 관계를 점검하고 보다 발전적인 비평의 모습을 설정해 보는 것은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1. 사이비 권력 놀음의 의혹―신문의 문화권력
유달리 더웠던 지난 여름, 문학계는 뜨거운 이슈로 달아올라 있었다. 작가 황석영의 <동인문학상> 심사 대상 거부와 관련된 파문이 그것이다. 『조선일보』는 문학상인 <동인문학상>에 관련하여 ‘심사위원 종신제, 심사대상을
단행본(장편ㆍ작품집)으로 확대 개편, 매년 8~10회의 심사위원 독회 개최 및 이의 지면 연재, 상금 5000만원으로 인상’ 등을 핵심 골자로 하는 개정안을 발표하였다. 종신 심사위원으로는 ‘박완서, 이청준, 김주영, 이문열, 유종호, 김화영, 정과리’등이 확정되었고, 몇 가지 수상 원칙이 합의되면서 심사 장소 또한 ‘동인문학상의 방’으로 만들자는 야심찬 기획이 포함되었다. 언뜻 보면 침체된 문학계에 활력을 줄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상의 권위와 공정성은 여타의 문학상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되었다. 더구나 일반인의 참여까지 보장되고 심사과정이 원천 공개됨으로써 문학계는 물론 일반인의 관심까지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하지만 심사 대상 작품들이 선정되는 과정에서 몇몇 작품들이 탈락되고 새로운 작품들이 추천되는 과정이 ‘독회’라는 타이틀로 지면에 공개됨으로써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특히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와 성석제의 『홀림』를 심사 대상에서 탈락시키며 ‘글의 결말이 요령부득인 부분이 있었다. 공연한 겉멋도 보인다’
‘구접스럽고 절제를 모를뿐더러 통일성이 없다’라는 상식 이하의 표현을 쓴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구접스럽다’는 표현은 분명 문학작품의 비평에 걸맞지 않는 저급한 수준의 언어이다. 해당 작가가 이 표현을 보았다면 명예 훼손으로 고발한다고 해도 타당성이 인정될 만큼 도가 지나친 경우였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서도 ‘사실 확인에 오류가 있다. 세계 비전이 하나도 없다. 관계없다. 실제 있었던 것만 다룬다면 사사건건 틀려지는 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식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독회 내용이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당연하게도 격노한 황석영이 「동인문학상 후보작을 거부한다」라는 컬럼을 『한겨레』 신문(7월 20일자)에 발표하면서 문화권력 논쟁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같은 잣대 위에 올려놓고, 공개된 신문지상에서, 불공평하게도 의견을 내놓은 자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은 채, 내용과 별 상관도 없는 말 몇 마디로 ‘탈락’이니 ‘잔류’니 하고 치워 버리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권리인가? 무슨 경품 뽑기 대회도 아니고 불량품 가려내기도 아닐진대,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 식의 사이비 권력 놀음을 당장 걷어 치워라.
황석영의 반론의 핵심은 ‘사이비 권력 놀음을 당장 걷어치워라’였다. 외국의 문학상을 모방한 종신 심사위원이라는 체제 자체가 다분히 무한대의 권력을 부여한 것이었고, 선발된 문인들마저 다분히 편향적인 사실은 그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동인문학상’을 넘어서 조선일보 자체에 대한 비판 여론의 도화선이 되었다. 강준만, 김정란을 필두로 한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운동이 황석영의 심사대상 거부 이후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일반 네티즌들까지 확대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문학상 관계를 넘어서 문학비평과 언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
시사 잡지 『한겨레 21(319호)』에서는 이례적으로 ‘동인문학상 파문’을 특집으로 자세히 게재하였다. 「문화권력이여 장난치지 말라」라는 타이틀에서는 동인문학상 심사과정의 부당성과 황석영의 거부의 입장을 자세히 소개했고, 「마지막 한방울의 물」에서는 미디어 먹이사슬 구조를 비판하는 강준만의 논리를 게재하고 있다. 강준만은 “왜 살신성인인가? 그는 ‘지는 게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문제는 ‘신화’의 문제이다.”라고 비판을 시작하며 ‘구조개혁론’ ‘소비자 주권론’ ‘음모론’의 관점으로 『조선일보』의 권력의 체제를 성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권력 논쟁을 지켜보며 ‘창비’와 ‘문지’에 보내는 한 젊은 비평가의 고언」에서는 『조선일보』뿐 아니라 문화 권력의 다른 한 축인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에 대한 문제점까지 제기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선일보』 측은 8월 10일자 신문에 「심사절차에 대한 비판 겸허하게 수용」이라는 타이틀 아래 ‘세간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문제점은 언제든지 보완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다소 후퇴하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종신제의 지속과 문예지의 안배 문제는 여전히 기존의 입장을 고수해 앞으로의 행보에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하고 있다. 또한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어 비판 진영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던 정과리는 『한겨레 21(320호)』에서 고종석과의 논쟁을 통해 “우리가 실천해 나가야 하는 건 우리 삶 전반을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조금씩 바꿔 나가는 거라고 본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꿔가는 것이다. 절대 정면돌파로 중앙은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동인문학상과 조선일보를 하나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동인문학상’은 시상 이전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시상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 같다.
우리 근대문학과 신문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문 연재 소설은 우리의 장편 소설 문화를 태동시켰고, 신문 지상을 통한 비평가들의 주요 논쟁은 우리 비평문학사의 초석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신문이라는 매체가 없었다면 우리의 문학은 지금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체된 문학계에 거대한 자본을 무기로 한 언론의 권력은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열고자 하는 문학계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할 것은 언론의 태도변화이다. 문언유착의 사슬을 풀고 정말로 독자들에게 좋은 책과 좋은 작품의 정보를 전달하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론의 기본 자세라 할 ‘공정성’을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작가 및 작품의 공정성에 입각하면서도 각 신문사의 개성을 살린 문화면의 변화가 선행될 때 언론과 문학비평은 관계는 새롭게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동인문학상을 새롭게 탄생시킨 것은 우리 문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고자 한 지극히 건전한 취지였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 선발 방식이나 작품의 선정은 신중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신문은 문인들의 자궁(子宮)’이라는 강준만의 냉소를 넘어서 언론이 진실되게 우리 문학의 모체의 역할을 감내할 때 신문과 문학 작품, 문학비평의 축은 문화권력의 오해를 넘어서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2. 그들만의 리그―문예지의 문화권력 문제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 파문 이전에 비슷한 성격의 ‘이상문학상’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었다. 『문학사상』의 주관하에 매년 시행되는 이상문학상의 수상작품집은 매년 1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상업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비슷한 성격의 문학상이 범람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수상작에 대한 논란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1977년에 상이 제정된 이래 20여 년이 넘게 참신한 작품들을 독자들에게 선보인 이상문학상 제도는 우리 문학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수상작에 대한 논란과 수상작품집의 저작권 소유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2000년 수상작품집을 발간하면서 수상작 이인화의 「시인의 길」에 대한 의혹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자사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1월에 발표된 작품을 수상작으로 정하고, 선정 대상에 오른 10편의 작품 중 5편이 『문학사상』에 기고된 점 등은 여러 모로 석연치 않은 것이었다. 이에 『문학사상』은 2000년 2월호에 「누가 이상문학상에 돌을 던지나」를 특별히 게재하면서 세간의 비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단편적인 사건으로 넘기기에는 불신의 고리가 크다는 점을 볼 때 신문 매체의 문화권력뿐 아니라 문예지의 문화권력 또한 심각한 수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예지의 문화권력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던 문제이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대표적 문예지인 『문학과 지성』과 『창작과 비평』이다. 이른바 4·19세대 비평가들인 김현, 김치수, 김병익, 김주연 등이 60년대 문학을 50년대와 차별화 시키면서 출발한 『문학과 지성』과 백낙청을 주축으로 하여 민족문학을 표방한 『창작과 비평』은 우리 문학의 토양을 풍요롭게 한 양대 체제였다. 그들은 우리 비평사에 순수와 참여 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고, 또한 30여 년 동안 많은 작가와 작품들을 배출하며 우리 순수 문학의 산실이 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대 체제가 구축되면서 하나의 문화권력이 되어 왔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학과 지성』은 현실을 포용하는 『문학과 사회』로 탈바꿈하였고, 『창작과 비평』은 민족문학의 닫힌 입장을 넘어 열린 자세로 문호를 넓혀 왔다. 하지만 60년대 이후 구축된 두 잡지의 시스템은 점점 폐쇄적인 양상을 보이며 문화권력화 되는 인상을 주었다. 근래에 들어 이러한 견고한 양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대두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물론 문예지의 권력이라는 것이 앞서 살펴본 신문의 경우나 TV, 방송매체의 영향력에 비춰 본다면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권력의 양상은 미미할 지 몰라도 신인작가 발굴, 각종 문학 논쟁, 출판계의 영향력 측면에서 본다면 심각하게 점검되어야 할 문제이다.
문예지의 권력 문제는 최근 비평계의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다. 주로 90년대 중반부터 권성우, 신철하, 한기를 통하여 제기된 문예지의 권력 문제는 현재에 이르러 김정란, 강준만, 이명원, 진중권 등을 중심으로 강도 높게 비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거대 문예지들이 과거의 영화를 유지하고자 현재의 닫혀진 체제를 옹호하고 문화권력의 아성을 수호하려 한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 된다. 이제 문예지의 문화권력 문제 또한 문학계 내부의 문제가 아닌 일반 비판 담론으로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예지의 권력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룬 본격적인 비평은 권성우의 「비평과 권력」(『리뷰』 1998 여름호)이 중요한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무애』,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의 체제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관행이 되고 있는 주례 비평의 정당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문학정신』의 후신인 『무애』가 창간호에서 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천명하면서도 실제 글에서는 그들의 모토와 모순된 비평을 하고 있는 점, 『창작과 비평』 100주년 기념호에서 백낙청을 인터뷰하면서 평자들이 공정성을 잃고 백낙청의 비평논리를 옹호하는데 급급한 점, 『문학과 사회』의 총평이 예전의 날카로움을 잃어 버리고 자사의 문인들의 찬사에 매몰되어 버린 점 등을 구체적인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비평과 권력의 야합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문학평론가 한기는 「지식인 아비투스의 비평에 대하여(『문예중앙』 1999 봄호)」를 통하여 『문학과 사회』의 핵인 정과리의 비평 자세를 지적한 바 있다. 정과리의 「옛날 옛적에 문학이 있었다」라는 글에 대한 반론의 성격의 씌어진 이 글에서 그는 정과리의 비평태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핵심을 잃고 화려한 수사에만 의존한 문장, 텍스트 분석보다는 이론적인 잣대로 작품을 재단하는 점,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의 구분에 있어 모호한 입장 표명 등은 진정한 비평가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뛰어난 언어운용의 능력을 가진 비평가이자, 동시에 지적, 인식적 면모가 탁월해서 때로는 지적오만의 모습까지도 보여주는 사람이 이 비평가임을 나는 보여주었다. 더하여 절대적인 윤리의 차원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음으로써, 매서운 윤리적 인간, 지사적 태도의 면모까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이 비평가임을 나는 상기시켰다”라며 문화권력의 틀 안에 안주한 한 비평가의 모습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다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지만 그가 이렇게 강경한 어조로 비판한 것은 비평의 권력화가 한 비평가의 문제점을 넘어 문화권력으로 고착화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잡지의 중심역할을 담당해온 한 비평가의 비평 태도의 문제점은 그가 암묵적으로 부여받은 문화권력에 기인한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타당성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핵심 문예지의 문화권력의 문제는 문화적 헤게모니에 경도된 극도의 ‘섹트주의’에서 파생된 현상임을 유추할 수 있다.
신철하는 『오늘의 한국문학, 현상과 극복(『문예중앙』 1999 여름호』)에서 우리 비평계의 헤게모니 쟁취의 부정적 경향을 거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우리 문학판의 주도적 입지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누적된 관행이 분명한 전면적 무시(가령, 미친놈 취급), 왕따만들기(패거리주의), 쟁점분산시키기(김빼기), 절충주의(에라,만고강산,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상대 섹트와의 이질적 동거), 겁주기(알량한 지적 오만과 과시, 협공) 등은 사실 유명한 것이다. 적어도 현실적 이해관계로부터는 어느 정도 비켜선 듯한 문학에서도 흡사 정치판의 생리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문학판 자체가 이미 다른 방식의 아류 정치판인 셈이다. 진정성의 차원에서 가장 순수해야 할 문학이, 그 담론의 유통과정에서 흔하게 발견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대한 진정성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소통의 차이, 더 정확하게는 자기식의 담론과 상동성이 확보되었을 때만 관심을 표명하거나, 그것도 텍스트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우/열, 승/패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텍스트는 문학이 아니며, 다른 것은 아주 중요한 문학으로 취급되고, 그것이 담론의 중심으로 훈육되고 지속적으로 전파된다. 그 핵심에 비평적 헤게모니가 작동하고 있다. (중략) 우리 비평이 어떤 관성에 함몰해 있거나 시대의 변화에 안이하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최고의 지적 담론을 구사하는 그룹이나 섹트가 발화하는 상식 이하의 발언들, 편견과 아집과 오만과 태만, 경박한 추수주의, 근거 없는 우월주의 등이 범벅이 된 오늘의 문학판 담론 책임의 거개는 바로 현재의 문학권력 섹트들에 지워져야 한다.
문학비평은 어떤 경우라도 공정성을 유지하고 텍스트의 진정성에 대해 비판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텍스트 자체보다는 ‘자기 식의 담론과 상동성의 확보’에 의해서만 행해진다면 그것은 비평으로서의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다. 섹트주의에 의한 문화권력의 폐해는 바로 이런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문학과 지성』이 표방했던 ‘열린 지성’과 ‘문학적 다원주의’의 모토가 문화권력에 의해서 훼손된다면 그것은 한 잡지의 몰락이 아닌 궁극적으로 우리 문학비평 전체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과 지성』은 요즘 이러한 원론적 비판 이외에도 여러 논쟁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권력형 글쓰기’의 문제와 ‘4·19 세대 비평가에 대한 비판 논쟁’과 ‘자사 홈페이지 게시판의 폐쇄’ 등이 그것이다. ‘4·19 세대 비평가에 대한 비판’ 논쟁은 문지의 원류를 추적하여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충격을 주었다. 지난 4월 28일, 29일 원주의 토지 문화관에서 열린 김현 10주기 세미나에서 ‘4·19 이후의 한국문학비평: 그 평가와 전망’이라는 주제하에 장경렬, 정과리, 권성우, 김동식, 박철화, 우찬제 등의 평론가들이 발제를 맡았었다. 세미나는 대부분 김현 선생의 업적을 회상하고 치하하는 분위기였는데, 권성우의 「4·19세대 비평의 성과와 한계―비평적 인정 투쟁의 논리를 중심으로」의 평론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이 평론에서 “김현 등 4.19 세대 비평가들의 업적은 인정하나 50년대를 냉혹하게 비판하고 60년대를 적극 평가하는, 비평적 인정 투쟁의 결과로 문학적 헤게모니를 획득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문지측과 대립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그후 이에 관한 논쟁이 게시판 ‘문지마당’에서 계속되고 또 한 시인의 폭력행위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문학과 사회』는 게시판을 폐쇄하는 이해하기 힘든 반응을 보였다. 물론 논쟁이 과열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하에 행해진 조치이겠지만 가뜩이나 토론 문화가 미약한 우리 사회에 토론 자체를 원천 무효화한 행위는 아쉬운 것이었다. 정정당당히 지면을 통해서 기탄 없는 토론이 재개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과 사회』에 대해서 가해지는 비판은 역으로 그만큼 『문학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문학인들에게 지대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겸허하게 비판을 수용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심 문예지의 또 하나의 축인 『창작과 비평』 또한 문화권력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권성우와 강준만은 백낙청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창작과 비평』의 편집 경향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창작과 비평』은 민족문학이 실종된 90년대의 문학성과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물론 90년대의 환경적 요인이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쇠퇴와 직접적 관련이 있겠지만, 90년대 들어 다분히 상업주의 경향을 보인 창비의 변신은 충격적이었다. 문학성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던 ‘최영미’의 시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나, 『동의보감』류의 소설을 집중 광고하여 높은 판매고를 기록한 점 등은 창비의 상업적 변신을 보여줬던 한 예이다. 물론 90년대 내내 창비가 민족문학의 부활을 위하여 노력한 점과 신세대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서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현실의 구체적 모순’을 외면하는 듯한 창비의 태도는 아쉬운 부분이다. 문화 권력 논쟁의 표면에 창비측이 애써 침묵을 보이는 태도는 창비 역시 문화권력의 수호자라는 오해를 받을 소지를 남겨 놓고 있다. 자사의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앞으로 적극적으로 현실 논쟁에 참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그나마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있지만 언제 또다시 논쟁의 회오리에 말려들지 모르는 일이다. 『창작과 비평』측의 문화 권력에 대한 좀더 분명한 입장 표명과 동시에 많은 작가의 작품에 열려 있는 비평 태도 등이 요구된다 하겠다.
문예지의 문화권력에 관련하여 『문학동네』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기존 문예지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90년대에 새로 창간된 『문학동네』는 세심한 기획력과 대중의 심리를 꿰뚫는 작품의 선발로 90년대 문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어쩌면 전술한 『문학과 사회』 『창작과 비평』보다 더한 권위를 취득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90년대의 문제작과 베스트 셀러 작품이 대부분 『문학동네』에서 나왔다는 사실에서 입증될 것이다. 윤대녕, 신경숙, 공지영, 은희경 등 90년대에 가장 문학적, 상업적으로 뛰어난 작가와 작품들이 『문학동네』를 통하여 등장한 바 있다. 따라서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문학동네』의 우리 문학에 대한 기여도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문학동네』 역시 문화권력화 한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심심치않게 등장하고 있다. 『문학동네』 99년 겨울호에 게재된 좌담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이미 그 징후가 포착되었고, 이에 대하여 몇몇 비평가들이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창간 때의 정신을 되살려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점임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3. 권력적 글쓰기와 비판적 글쓰기―새로운 비판 정신의 모색
비평의 이름 아래 행해지던 각종 권력적 글쓰기는 최근 비판 진영에 의하여 집중 공격을 당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신문과 문예지의 문화권력 문제의 핵심은 비평이 본래의 기능인 ‘비판적 글쓰기’에서 벗어나 오히려 ‘권력적 글쓰기’로 탈바꿈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논쟁이 제기되고 지속되는 동안 역으로 비판 진영의 ‘비판적 글쓰기’ 또한 ‘권력적 글쓰기’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각종 매체와 새로운 비판의 장이 된 인터넷을 통하여 힘을 얻은 비판 진영에 대한 권력 논란은 또 하나의 논쟁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인터넷은 이제 단순한 테크놀로지가 아닌 우리 일상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문과 잡지를 통한 논쟁은 지면상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논쟁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롭다. 또한 몇몇 특정인물 사이의 논쟁에서 벗어나 일반 독자들과 네티즌의 적극 동참이 가능하다는 이점도 있다. 기존 신문사 사이트(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등), 문예지 홈 페이지(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등), 각종 웹진과 여러 안티 사이트(자보, 우리 모두 등)의 자유 게시판에는 지금도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중이다. 그 안에서 익명으로 전개되는 담론들은 기존의 비평가를 무색할 만큼 치밀한 논리를 자랑하는 것도 있고, 때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속한 언어와 상식 이하의 논리를 펼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익명에서 오는 한계도 분명하지만, 논쟁의 지속성을 보장한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기존의 권력화된 지면을 얻을 수 없는 비판 논객들이 고정된 공간을 통해 신랄한 비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앞으로도 사이버 공간의 위력은 더욱 확대될 것이고 기존의 비판문화의 틀 역시 재편될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 글쓰기를 통해 유명해진 몇몇 사이트들 역시 비판만을 위한 비판을 계속한다면 그들 역시 문화권력화 되어 간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문학과 사회』 2000년 여름호에 실린 권오룡의 「권력형 글쓰기에 대하여」는 문화권력의 실상과 권력형 글쓰기의 폐해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다분히 인터넷과 매체를 통해 세력이 확장된 비판 진영에 대하여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롤랑 바르트가 ‘권력의 이름은 다수’라고 언표한 이래 모든 것이 다 권력이 되었다. 세상 어느 것 하나 권력 아닌 것이 없게 되었고, 사람의 모든 행위는 권력 의지의 추동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권력은 선험적인 실체가 되어 버렸다. 권력의 이러한 선험적 실체화는 곧바로 용감한 에피고넨들을 양산해냈다. 그들이 용감한 것은 감히 권력과 맞서 싸우기 때문이지만, 이들이 에피고넨인 것은 그 권력이라는 것이 이미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말해 인간의 모든 제도와 행위가 권력의 표상, 권력의지의 추동으로 그 정체가 폭로되어버린 순간 권력은 이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롤랑 바르트의 언표의 가치는 모든 것이 권력이라는 것을 밝혀낸 데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권력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권력의 표지를 박탈해버렸다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로 권력과의 싸움은 이미 죽은 시체에 대한 확인 사살과 같은 비장하지만 손쉬운 싸움이 되어버렸다. 그 싸움은 우선 권력을 스스로 만들고 규정하고 명명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권력형 글쓰기라는 유형의 글이 구체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이 대목에서부터이다. 이미 대상에 붙어 있으나마나 한 권력의 표지를 그들은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새롭게 부각시키고 그것을 새삼스럽게 권력으로 만들어놓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싸움은 시작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지는 권력은 한 일간지나 잡지가 되기도 하고, 한 작가나 교수―논객이 되기도 하고, 한 무리의 비평가가 되기도 한다. 권력형 글쓰기의 자장 속에서 이들은 꼼짝달싹도 못하고 권력이 되어버리고 만다.
자신들의 권력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한데 구태여 싸움을 거는 것은 권력형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권력의 쟁취를 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글의 요지이다. 즉 대중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 문학의 권위 자체가 실종되는 판국에 한 섹트의 문화권력에 논한다는 자체가 ‘죽은 시체에 대한 확인사살’처럼 잔인하고 또한 의미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비판적 글쓰기를 제기한다는 것은 비판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논리는 즉각적으로 비판 진영 평론가에 의해 다음과 같이 반박을 당하였다.
진정한 ‘대화적 글쓰기’란 대화의 파트너를 명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야 비판이든 성찰이든 논의의 ‘구체성’과 ‘적절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권오룡은 「권력형 글쓰기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비판적 글쓰기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마치 권력에 눈이 멀어 돈키호테처럼 돌진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한데, 이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권력이란 음험하고 뭔가 파렴치한 것이라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은 일말의 권력 욕망도 없는 존재이다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권오룡의 태도야말로 매우 위선적이며 단순무식한 권력관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권력의 진공상태를 경험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마치 공기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것과도 같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권력의 유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정당성’과 권력 행사시의 ‘공정성’이라는 점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권력 그 자체를 혐오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권력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절실하고 치열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비판적 글쓰기는 존재하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교정과 비판과 감시의 역할을 수행한다.(이명원, 「권오룡의 돈키호테식 글쓰기를 비판한다」, 『반갑다 논장』 2000년 6월호)
이명원은 권오룡의 논리의 허점을 세세히 비판하면서 권력의 유무의 문제보다 그것의 정당성과 공정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권력 행사시 정당성과 공정성을 위해 치열한 감시자의 역할을 비판적 글쓰기가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교정과 비판과 감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함을 기치로 내세운 비판적 글쓰기와 기존의 권위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권력적 글쓰기의 문제는 이제 동전의 양면과 같이 첨예한 관심사가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권오룡과 이명원의 논쟁은 이미 앞서 살펴본 정과리와 권성우의 『문학과 사회』의 비평 권력 논쟁에서 한 걸음도 진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유무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문학비평의 본래 영역에 충실한 태도일 것이다. 비평의 권력에 관한 문제는 이미 권성우가 논쟁의 시발점에서 제기했던 문제였고 원론적인 문제 이외는 되풀이될 필요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비평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일종의 문학적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 역시 비평가가 지녀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비평이 탈권력적이라고, 혹은 자신의 글쓰기가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글쓰기도 거의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권력과 연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뼈저린 자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약에 자신의 글쓰기가 권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비평가가 있다면, 그는 현대사회이론에 무지하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비평가일 것이다.(권성우, 「비평과 권력」, 『리뷰』 1998 여름호)
결국 많은 논쟁이 오갔지만 핵심은 놔둔 채 주변 문제만이 지리하게 되풀이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권성우는 그후 권력과 비판적 글쓰기의 논쟁의 중심에서 중요한 평론들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는 특히 문화권력화된 진영들을 비판하면서도 비판적 글쓰기 진영에 내재한 문제점(주로 강준만과 김정란의 문체의 문제) 또한 세세히 지적하며 양 진영의 정당한 논쟁을 이끌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비판, 그리고 성찰의 현상학」(『문예중앙』 1999 가을호)에서 비평의 ‘성찰’을 강조하며 양 진영 모두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비판 문화가 확립되기를 희망한 바 있다. 그의 논리를 모두 수용하자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비평의 성찰에 관한 의견은 현 시점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권력적인 글쓰기냐 비판적인 글쓰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학과 비평의 부활이 아닌가. 비평이 비평의 제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겸허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외부적 요인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작품의 내적인 텍스트를 면밀히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매개자, 중계인으로서 일상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조절하고 받아들이는 역할을 수행했던 비평가는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기는 하면서도 지식의 전문화, 이데올로기적 입장간의 싸움 그리고 편차가 상이한 교육받은 독서대중의 증가로 인해 점점 더 설 땅을 잃게 되었다. (『비평의 기능』, 이글턴ㆍ제임슨, 유희석 옮김, 제3문학사, 1991, 58쪽)
이미 19세기에 진행된 비평과 비평가의 위기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당시의 우려대로라면 이미 비평은 종언을 고하고 비평가라는 직함 자체가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비평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것은 문학 작품이 존속하는 한 비평이 사라질 수 없는 당연한 이유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학의 위기’를 이야기했지만 새 천년에도 문학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할 것이고, 그 전달 통로의 역할을 비평은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비평의 위기’ 인식은 이제 모두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작품의 진정한 평가를 날카로운 비평에 담지 못한다면 비평은 역사를 날조한 사관의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작품의 성과를 허장성세의 광고에 의존하고, 거대 언론에 기대어 특정한 작품만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자사 소속 작품들만을 미화하는 비평이 선호된다면 독자들은 철저히 비평을 외면할 것이다. 아니 문학 자체에서 등을 돌릴 것이다.
앞서 신문과 각종 매체의 문화권력의 논쟁을 점검해 보았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비평의 문화권력에 대한 논쟁은 사라져가는 비평정신의 부흥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간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기존 비평 진영과 비판 진영 그 누구도 문학의, 비평의 폐망을 원치 않을 것이다. 단지 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다소 왜곡된 방향으로 흐른 것일 뿐이라고 믿고 싶다.
따라서 급선무는 좋은 작품을 좋다고, 나쁜 작품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비평정신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사약을 받더라도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 애쓰던 역사가들처럼 자신의 비평 한 줄이 우리 문학사의 한 줄기를 형성한다는 소명의식이 진정 필요한 때인 것이다. 진실은 언제든 밝혀진다는 평범한 진리가 우리 비평계를 가득 메울 때 비평은 온당한 의미의 권력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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