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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에 맞게 그의 청년시절 이야기를 영화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근소한 차이를 예측하였지만 뜻하지 않게(?) 넉넉히 승리하였습니다. 짐작하는 바로 대다수 미국 국민이 미국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었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작금의 상태를 한 마디로 싫어한 것이지요. 오로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에 환호를 보냈으리라 짐작합니다. 어찌 보면 시기를 잘 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마침 그러한 때에 대선을 치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영화 ‘록키’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들이 바라는 것은 ‘강한 미국’이라는 사실이지요. 대국으로서 그리고 강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입니다. 어찌 될까요? 좋은 쪽으로 나아갈까요, 어려운 쪽으로 나가게 될까요? 사실 크게 우려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하든 이겨내며 살아가는 민죽이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하나로 단결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분렬이 되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매우 혼란 속에 빠져있는 듯하여 좀 걱정이 됩니다. 하기야 이것도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여하튼 ‘조선’(Chosen)의 정기를 이어받은 ‘선택된’(Chosen) 민족이니까요. 아직 우리가 바라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지지고 볶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ㅎㅎ
조금 쌀쌀해지나 싶더니 뭐, 그게 그거네요. 아무튼 주말입니다. 아우성쳐도 신나고 즐거운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11월 9일 김종우 목사 드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신명기 1 : 17)
<어프렌티스>
본 적이 있습니다. 재판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이것이 현실이라면 도대체 세상에서 믿을 곳이 어디인가 싶습니다. 사회에서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그래도 마지막 기대볼 곳이 있다면 법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조차 힘에 밀리고 돈에 밀린다면 기댈 곳이 없습니다. 알아도 당하고 몰라도 당하며 살아야 하는 곳, 그런 세상이 될 것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자신이 힘 없고 백 없는 것을 탓하며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합니다. 우리 예전에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억울하면 출세를 해라, 출세를 해.’ 가진 자 반열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뭔가 이루어도 이루고 억울한 일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점점 더 있는 자 편에 서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개천에서도 용 나는 경우가 있었지만 요즘같은 사회라면 용은 고사하고 뱀조차 나오기 힘듭니다. 나면서부터 경쟁의 도가니로 몰려가는 환경 속에서 소위 일류대 가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더 빨리, 더 많이,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이미 경쟁의 대상이 되기 어려워집니다. 처음부터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은 ‘공평한 사회’를 외치고 있지만 결코 공평하지 못한 현실을 당합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하며 발버둥치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니게 됩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도 그런 환경에 처해버립니다.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습니다.
분명 그는 금수저로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좀 특별한 유전자까지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믿고 삽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남다른 야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데 거칠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삶을 전쟁으로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기면 됩니다. 승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승자에게는 그런 권력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패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싶어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는 우군이었다가도 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종종 보는 일입니다. 손을 잡았다가도 경우에 따라서 돌변할 수 있습니다.
그가 ‘로이 콘’ 변호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단한 정치변호사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 바로 이기기 위해서 재판에 들어섭니다. 우리가 흔히 감명 깊게 보고듣는 법정 이야기에서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법리에 맞는 논술도 변론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기면 됩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어떤 변칙이나 반칙도 불사합니다. 중요한 것은 최종 판결을 하는 재판장도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로이는 말 그대로 대단한 사람이지요. 그 사람의 약점을 세밀하게 조사해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 시점에 찌릅니다.
‘트럼프’가 로이에게서 배운 인생관, 성공관은 자기 인생 속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첫째, 공격 둘째 부인(否認) 셋째 승리 고집. 경기에서도 전쟁에서도 흔히 나오는 전술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어쩌면 상대방이 당혹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서 뒤돌아 고양이를 공격하는 생쥐와도 같습니다. 전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당황하고 멈칫합니다. 쉴새 없이 공격하여 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를 죽이고 결국 뜻밖의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불리한 경우 무조건 모른다고 우기고 아니라고 고집합니다. 상대방은 난감할 뿐입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일입니다. 결국 내가 이겼다고 우깁니다. 거참!
여기는 ‘법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법을 지키지 말고 사람을 지켜야 합니다. 이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 긍정이 될 수도 있고 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법보다는 사람이 우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법이 존재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나라와 사회를 지키기 위해 법이 만들어졌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법을 무시하게 되면 자연스레 무질서가 닥칠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이 법이 되어 독재가 이루어집니다. 로이가 자신의 직업을 지키려고 애쓴 부분도 법보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속된 말로 그는 발이 넓었습니다. 정치권의 막강한 사람들과도 연줄이 많았지요. 그래서 아무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트럼프는 젊어서 운 좋게(?) 로이와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도 금수저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부자나 권력층과 가까이 지낼 수 있을 만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남다른 야망을 지니고 있고 추진력까지 가졌습니다. 기댈 곳이 있으니 배짱도 가질 수 있겠지요. 막무가내로 밀어붙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됩니다. 나아가 잘 아는 대로 최강국의 지도자까지 되었습니다. 다만 걱정스로운 것은 그 힘이 옳은 것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나라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어느 정치가나 권세가가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자기 힘을 누린 적이 있답니까? 영화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를 보았습니다. ‘견습생, 도제’라는 뜻인데 결국 스승을 넘습니다.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 땅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파송된 유대 총독이 있고 또 다른 한편 유대지역을 나누어서 분봉왕을 두어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이름이야 왕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제후, 즉 한 지역의 영주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예수님 오시던 때는 우리가 잘 아는 헤롯대왕 때입니다. 가장 정치적이고 잔인했던 왕이지요. 메시야가 태어났다 하니까 베들레헴 근처 두 살 이하 어린아이들을 모두 찾아 살해했던 왕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아들들이 나누어 분봉왕으로 그 지역을 나누어 통치했습니다. 헤롯에게는 여러 아내들이 있어서 아들들이 대부분 이복형제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헤롯이라고 나와도 어느 헤롯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마 14장에 분봉왕 헤롯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을 처형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헤로디아는 사실 또 다른 이복형제의 딸이지요. 그러니 따지고 보면 조카와 결혼한 것입니다.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에게서 아내를 빼앗아 왔고 당연히 헤로디아의 딸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이 헤로디아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막 6 : 17 - 18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요한이 싫은 소리하니 헤로디아가 짜증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 헤롯을 충동하여 요한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감히 처형하지는 못합니다. 이유는 19 - 20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아마도 나름 위로를 받았겠지요. 자기 잘못을 알고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망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아무튼 어정쩡하게 지내다가 좋은 기회가 생깁니다. 21 - 22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쌔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그래서 결국은 어미의 사주를 받은 이 딸이 무엇을 구합니까? 바로 요한의 머리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듣고 배우고 알고 있는 바로는 세례 요한은 순교자입니다. 요한의 부모가 누구입니까?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어떤 사람들이었지요? 눅 1 : 5 - 6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이 부부가 모두 제사장 가문의 사람들이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더구나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태어날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리라 한 것까지 말씀해주십니다. 13 - 16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다시 말해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사명입니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세례 요한의 사명이 무엇임을 말씀해주십니다. 당연히 구약의 예언 되어있는 선지자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처음에는 그 사명을 잘 지켜나갔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몰랐듯이 세례 요한도 몰랐던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에게 너는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요 1 : 22 - 23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이것은 말 그대로 이사야의 글에 예언된 그대로입니다. 사 40 : 3절 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 그대로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종합 평가를 하십니다.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상에 여자가 낳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있다, 없다? 없답니다. 그러면 누가 가장 큰 자다? 세례 요한이 역사상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가장 숭앙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요? 모세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보다도 크다 그 말이지요. 가장 숭배하는 왕이 있습니다. 누구? 다윗입니다. 지금도 저들이 꿈꾸는 왕국이 바로 다윗왕국입니다. 그러면 다윗보다도 크다 그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모세를 하늘처럼 생각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뒤집어졌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질문하십니다. 마 21 : 25 - 26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대답하지 못합니다. 자기네는 믿고 싶지 않은데 백성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유대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이 세례 요한이 없어져준다면 아주 좋겠지요. 사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 특히 하나님의 택함 받은 목자라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아보시고 예언된 목자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도 인정해주신 사명을 받고 온 선지자입니다. 문제는 그 사명을 끝까지 잘 지키고 감당하였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제 그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 속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니다. 마 11 : 7 - 10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옛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신 것입니다. ‘기록된 바’하고 말씀하시지요? 누가 기록한 것입니까? 말라기 선지자입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여기 두 사자가 나옵니다. 하나는 ‘길 예비 사자’요 또 하나는 ‘언약의 사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어느 쪽입니까? 예, ‘길 예비 사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설명해주시는 예수님이 바로 ‘언약의 사자’입니다. 요한은 메시야 앞에 먼저 와서 길 닦아주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본인을 그렇게 이해하였습니다. 마 3 :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태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 3 : 1 - 3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사 40 : 1 - 3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 예언의 말씀을 마태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예언의 말씀을 어디에 고하여 외치라고 하십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 백성에게 고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예루살렘에 외치라 하시고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하십니다. 어찌하여 광야이고 사막에서 예비해야 하는가,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광야와 사막 같이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사막에 양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 백성이 먹어야 할 양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나님 백성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요?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들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 뭐라고 질타했는지 보면 압니다. 마 3 :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들을 가리켜 뭐라고 하지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뱀입니다. 성경에서 뱀은 마귀지요. 마귀에게서 하나님 말씀이 나오겠습니까? 말씀이 없습니다. 양식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그곳은 광야이고 사막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때마다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말이야 ‘하나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나오고 있을까요? 십자가 달아놓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예수님 때도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들에서 선포한 예수님의 말씀과 성전에서 선포한 서기관 제사장들의 말과 어느 것이 하나님 말씀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5 : 7 - 10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무엇으로 가르치고 배웠다고 합니까? ‘사람의 계명’으로. 그러니 듣고 깨달으라 경고하십니다.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계명인지 사람의 계명인지 분별해야 하겠지요. 이것을 모른다면 우리가 생수를 마시고 있는지 구정물을 마시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무조건 아멘, 아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분별해서 먹어야 합니다.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분별해서 듣고 먹어야 합니다.
길 예비 사자로써 세례 요한은 마땅히 예수님의 길을 준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다니다 보니까 예수라는 청년이 자기 스승처럼 세례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 와서 고자질합니다. 우리 스승만 할 수 있는 일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가 하는 것이지요. 요 3 :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그 때 요한이 설명해줍니다. 요 3 : 28 - 30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제대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제자들도 누구에게 보내야 합니까? 그리스도이신 예수닙에게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쇠하여야 할 자기에게 붙들어 매놓으면 어찌 됩니까? 제자들 죽이는 일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계속 잡고 있습니다.
처음에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고 언약의 사자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줄 때 확신했지요. 요 1 : 32 - 34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싶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깨닫고 떠나기를 기다렸을까요? 아무튼 그리고 시간이 지나갑니다.
얼마 후 세례 요한은 앞에서 본 이야기 곧 헤롯의 집안 일 간섭하다가 옥에 갇힙니다. 헤롯은 유대인도 아닙니다. 이방사람 가정사에 껴들었다가 잡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리가 없겠지요. 왜요? 이미 자기 사명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해야지 왜 딴 짓을 합니까? 길 예비 사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하나님 떠나시니 예수님에 대한 확신도 흔들립니다. 그래서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습니다. 마 11 : 2 - 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언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하더니 이제는 당신 맞아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이 명을 어기고 다른 일을 하면 그에게서 떠나십니다.
즉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긴다고 하십니다. 계 2 :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은 ‘길 예비 사자’로써 하나님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 백성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기가 데리고 있던 제자들도 보내주어야지요. 그런데 끝까지 데리고 있었습니다. 생각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니 딴 짓이나 한 것이지요. 벧전 4 :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여기 ‘남의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일이 아니라 이방사람의 일입니다.
생각해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위해 고난 받았습니까? 과연 순교자라 할 수 있습니까?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힌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앞에서 보았듯이 이방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면 당연히 질책하고 벌을 주어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면 그냥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천국에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천국의 경계선 위입니까, 아래입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겠지요?
흔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혹은 배운 것에 너무 가치를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자기 목숨 붙들고 있듯이 붙잡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참이 아니라면 서슴없이 내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 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지혜의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잠언, 전도서 등 성경까지 기록하였습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맞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끝에 가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겔 33 : 12 - 13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우리는 여전히 주의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합니다. 세상의 교육과정을 마쳤다고 하나님의 종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말씀을 바르게 알고 있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하나의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지 다른 영이 같이하는지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는 기초부터 다지면 됩니다. 하늘 이야기를 하는지 땅 이야기를 하는지부터 분별합시다. 성도 여러분, 세상 이야기나 들으려고 교회 다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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