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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묵상글 들 ( 2022년 12월 21일. - 아가의 연인처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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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22년 12월 21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가의 연인처럼
오늘 독서는 아가이고 연인을 만나는 설렘을 묘사합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주님의 오심을 코앞에 둔 지금,
그리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복음을 듣는 오늘
이 아가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우리 전례는 왜 아가를 오늘 독서로 배치했을까요?
짐작컨대 그것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기다림과 주님과 우리의 만남이
이러해야 하지 않은지 일깨우기 위함이고,
우리의 기다림과 만남의 실제는 어떤지 성찰케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주님을 사랑하는 기다림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다림은 연인의 기다림만큼 설레입니까?
저는 이 점에 있어서 열등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하느님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 다른 아무 이유가 없고
오직 사랑하기에 만나고 싶고 기다리는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거나 저의 사랑이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보고 하느님 사랑하지 않냐고 물으면 단언컨대 지체함 없이
사랑한다고 그리고 모든 것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남자이기 때문인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 같고,
마르타와 마리아 사이에서 저는 마르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열등감은 마리아에 대한 마르타의 열등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감히 얘기한다면
저의 열등감은 보통 사람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성인들에 대한 열등감이고 성령을 모시지 못한 자의 열등감입니다.
주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들은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느님의 일도 열정적으로 하게 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일이 별개가 아니고,
하느님 사랑에서 하느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합니다.
성탄을 앞두고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성인들,
성모 마리아도 엘리사벳도 성령으로 충만한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 오심을 기다리다가
오시는 주님을 아가의 연인처럼 맞이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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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22년 12월 21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노나니”(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 할 것이다.”(시 35,9)라는 시편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노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에 대한 찬미노래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들어 높여 앉게 되고, 당신께서는 ‘모후’의 “왕좌”에 올려졌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욥이 말한 것처럼,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부 베네딕도께서도 구체적인 찬미를 말씀하십니다. 곧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수도규칙> 머리말 30).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토록, ‘성모님의 노래’는 오늘 우리에게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드려야겠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제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주셨습니다.”(루카 1,54).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가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 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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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22년 12월 21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한 사람
합동판공성사의 일정이 끝났지만 여전히 고해소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맑고 밝은 영혼들을 만나게 되면 피로를 잊게 됩니다. 어둠을 벗어버리고 밝은 빛을 비출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도구 역할을 하면서 신부 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무릎을 꿇고,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에 주님의 자비를 전달할 수 있음이 큰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이런 기쁨은 언제라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길을 떠납니다. 서둘러 떠났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되었으면 지체없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루카1,36).는 천사의 말 한마디가 그를 움직였습니다. 경청의 결과입니다. 손과 발을 서둘러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서둘러 떠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한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마리아가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는 행복합니다.
믿음은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브12,2).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7-28)고 하셨습니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고, 제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믿고, 믿는 만큼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유혹하며 손짓하지만, 그것을 거절하며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며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것을 행복으로 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품고 사셨던 성모마리아와 함께 주님만이 내 행복의 전부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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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22년 12월 21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의 장례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을 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뉴욕 맨허턴의 신자들과 따뜻한 사랑으로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장례미사에는 신부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던 많은 교우들이 신부님께서 천국으로 가는 길을 배웅하였습니다. 천상에서 신부님의 가족들이 기뻐하며 환영할 것 같습니다. 한국 가톨릭 미술의 선구자였던 아버지 장발 루도비코, 한국의 정치인이었던 큰 아버지 장면 요한 총리, 춘천교구 교구장이었던 사촌 장익 십자가 요한 주교님이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젠가 하느님 품으로 가면 어릴 때 사탕을 주셨던 할아버지, 휜 수염이 멋있으셨던 외할아버지, 용돈을 주셨던 외할머니, 그리운 부모님, 먼저 하느님의 품으로 갔던 큰 누님, 작은 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위안을 받는 것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지상교회, 정화교회, 천상교회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에서 반가운 분들을 보았습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 성가대 단장을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평화신문에 글을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뉴욕에 처음 왔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던 부부도 만났습니다. 장흔 고르넬리오 신부님께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것 같았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함께 식사하면서 신부님과의 인연을 들었습니다. 부부는 신부님께 혼배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 교리를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니 악은 피하고 선을 베풀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 과연 만대가 나를 복되다 할 겁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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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22년 12월 21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물이 담긴 컵에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컵에 담긴 물이 빨간색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빨간색 잉크 두 방울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바닷물이 빨간색이 변할까요? 아니었습니다.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잉크를 섞어도 공간이나 부피에 따라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바다는 부피가 너무 커서 잉크를 섞었을 때의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의 크기가 적은 사람은 어떤 말과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큰 사람은 말과 행동에 어떤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마음의 크기는 주님과 함께하면서 커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가면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우리 마음의 크기가 커져서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준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바다와 같은 큰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모두를 포용하듯 사람들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바다와 같은 큰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셨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분이 뱃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교통이나 치안이 좋은 시절이 아니었는데, 당신 아들의 날을 준비할 엘리사벳 뱃속의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가십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찾아가는 것, 그만큼 큰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엘리사벳도 놀라 말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이 넓은 마음은 엘리사벳의 말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라고 믿으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은 마음의 크기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내 마음의 크기를 넓혀야 합니다. 작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 바다와 같은 마음을 주님 안에서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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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디를 걷고 있는가? 그곳이 다른 누군가의 길은 아닌가? 그렇기에 걷기 힘들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제 자신만의 길을 걸어라. 그러면 멀리까지 갈 수 있다(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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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22년 12월 21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우정
-주님과 나, 나와 너-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주님께 새로운 노래를 불러라.”(시편1과 3ㄱ)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다는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지론입니다. 따로와 함께의 여정이요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 생각납니다. 반가운 이들의 방문을 대할 때 드렸던 ‘오늘은 형제님(자매님)의 방문 축일입니다’라는 덕담이 생각납니다.
참 좋은 도반들의 방문은 빈손으로와도 구원의 방문처럼 반갑고 흡사 도반들의 방문 축일처럼 즐겁고 기쁩니다. 어제도 여러분의 방문을 받고 그랬습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은 강론 주제로 사용한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짧기도 하지만 때로 길게 여겨지는 삶의 외롭고 쓸쓸한 여정에서 제가 특히 강조하는 것이 도반이요 도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여기서 저는 두 도반의 예를 들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영적 도반인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영적 도반이 주님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 도반과는 달리 인생 여정 다하는 날까지 영원히 함께 하는 동반자同伴者이자 반려자伴侶者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과의 영적 우정이 참으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영적 우정의 도반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는 애인의 창가에서 벌어지는 감미로운 에로스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성간의 열렬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은 이런 사랑의 관계를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간의 사랑으로, 또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견주어 해석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 대 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 같은 신비가들은 주님과 우리의 사랑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영원한 연인처럼 마치 에로스적 사랑의 감미로 체험한 신비가들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사부 베네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성규 마리말49)
참으로 잘 성숙한 사랑의 수도자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러면 정결 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오늘 아가서중 창가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황홀해 보이는 지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 본답니다.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요,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세상에 이런 이성간 연정戀情의 사랑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쓰다보면 오늘 제 1독서뿐 아니라 아가서 전체를 써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습니다. 흡사 대림시기 우리 영혼들이 오매불망 그리워 찾아 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 주님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주님을 그리워하는 이상으로 우리 영혼이 그리워 보고 싶어 찾아 오시는 대림시기 우리 주님,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도반이자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의 날로 깊어가는 영적 우정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두 영적 도반인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사랑의 만남은 얼마나 황홀한 아름다움인지요! 두분간의 영적우정에 앞서 전제되는 주님과의 영적 우정입니다. 마리아가 곤궁중에 찾아 나선 영적 도반 엘리사벳입니다. 여러분도 마음 답답할 때 언제나 위로와 격려를 찾아 나설 도반은 있는지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동시에 영원한 영적 도반인 태중의 세례자 요한과 태중의 예수님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감격에 벅차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의 기쁨의 환호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마리아의 십년 체증이 활 풀렸을 것입니다. 흡사 주님의 계약궤 앞에서 기쁨에 넘처 덩실덩실 춤추던 다윗이 생각납니다. 마리아야 말로 주님을 모신 계약궤와 같습니다. 바로 이 앞에서 다윗처럼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 요한이 기쁨에 겨워 뛰놀았던 것입니다.
동병상련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도반인 주님 안에서 이렇게 만남으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큰 위로와 격려의 구원을 받았을 것이며, 둘간의 영적 우정은 날로 깊어졌을 것이고 동시에 예수님과 요한 세례자의 영적 우정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간의 영적 우정도 잔잔한 감동입니다. 지난 토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도 16세 교황 그분을 ‘성인’으로, ‘위대한 영성생활의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분을 자주 방문하여 만날 때 마다 나는 그분의 투명한 시선에 의해 덕성이 함양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분은 좋은 유머 감각을 지닌 분이고 맑고 밝은 분이며 아주 살아 있는 분이다. 그분은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대화도 잘 따라 잡으신다. 나는 그분의 명석明晳함에 감동한다. 그분은 ‘큰 분(a great man)이시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은 물론 눈에 보이는 형제자매 도반들과의 영적 우정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대림2부, 다섯 번째 12월21일 M후렴 “오! 샛별이여(O oriens)”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요. 정의의 태양이시요,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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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21. 2022년 12월 21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엄마와 뱃속 아기>
2022. 12. 21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엄마와 뱃속 아기>
엄마와 뱃속 아기가
함께 서둘러
험한 산길을 나섭니다
엄마가 나섰으니
뱃속 아기는
따를 수밖에 없었겠죠
아니랍니다
뱃속 아기 때문에
엄마가 길을 나섰으니까요
엄마와 뱃속 아기가
함께 서둘러
낯선 거친 길을 나섭니다
엄마도 뱃속 아기도
얼마나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을까요
아니랍니다
뱃속 아기와 함께 엄마는
기쁨 나누러 나섰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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