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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의 비밀
(시 17:1-11)
찬송 545장
시편 17편은 다윗이 원수로부터 구원을 호소하는 기도시입니다.
웬 원수가 이렇게 만나 할지 모르겠지만 정치세계에는 지금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또 이것은 성도의 영적 환경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젊은 사자에게 쫓기다가 이제 막 찢기려는 그런 절박한 위기에서 급한 심정으로 구원을 호소하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여기 “들으소서” “주의하소서”“귀를 기울이소서”“살피소서“ 이런 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가 얼마나 어려움에 처해 있고 응답 받기를 갈망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통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온전히 몰두하는 기도입니다.
한나가 이런 통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만큼 괴롭고 애통한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능력 받는 기도이고 승리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대하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 버려두시는 것 같아도 그래야 부르짖고 능력 받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이 시간 이런 기도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간절한 기도
시편 17:6~15
오늘 저녁에 봉독한 시편 17편은 다윗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사울 왕의 추적을 받으면서 밖으로는 싸움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 때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아뢰며 도우심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 이하를 보세요.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어려운 자리에 이를 때 주님밖에 의지할 이 없고 주님밖에 피할 데가 없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혹 어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다른 곳을 찾아갑니다. 무당을 찾아갑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만 찾고 주님만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5절을 보세요.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치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들어가도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였습니다. 우리가 참 신앙을 알아보는 시금석은 어려운 환경입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나 믿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행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어려운 환경에 들어가게 될 때 웬만한 경우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며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욥 같은 사람을 보세요. 그에게 훌륭한 자녀 10남매가 있었습니다. 재산도 상당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돈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고 가축으로 계산했는데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마리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어서 성경의 기록대로 하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만 신앙을 지키고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생활을 했다면 마귀가 하나님께 한 말처럼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와 그 집 그리고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둘러서 그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이 늘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을 통해서 그의 소유물을 치고 자식을 빼앗았지만 욥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욥기 1장 21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다윗으로 말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 베들레헴에서 양을 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양을 해치기 위해서 맹수들이 달려들 때도 두려움 없이 막아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 장군 골리앗도 물맷돌 하나로 쳐 물리치고 이기는 감격도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지가 자기를 불러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고 기름 부어 주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서 여기저기 쫓겨다니게 되었습니다. 매우 고되고 불안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차라리 대적해서 싸운다면 의욕이라도 생기겠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 아무리 잘못해도 절대로 그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철두 철미한 그의 자세로 육신적으로나 심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런 환경에 놓여 있어야 합니까? 내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나는 순전히 왕의 시기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 이거 너무하십니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3절 이하를 보십시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치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다른 길로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찾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6절에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하였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지겠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가 나타날 것을 꼭 믿었습니다.
본문 7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했습니다. 이 얼마나 확고부동한 신앙의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다 이런 신앙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기적이라는 특수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에게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할 때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십니다. 그리고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해서도 인내로써 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은 실로 기이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자라는 말을 생각하게 될 때 그 말속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는데 매우 복되고 완벽한 향기가 풍기는 낱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이 말씀 자체가 기이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 얼마나 감격적인 마음의 표현입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 자체가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이전에 자기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 백성에게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축복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도록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의로웠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길이와 깊이를 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 벌써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호를 욕되게 하고, 배신하고, 불신하고, 스스로 교만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저희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알게 하소서” 했습니다. “방탕한 길에 있는 저희를 건져 주시고 죄에 빠지는 저희를 건져 주시는 은혜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하나님을 확신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임한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까?
우리를 중한 죄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는 매우 심각합니다. 요사이 어려운 병 가운데는 암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매우 어려운 병입니다. 그러나 이 암이라는 병은 우리의 육체를 죽일 뿐입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영혼을 죽입니다. 죄는 절망적인 병입니다. 이 절망적인 죄를 사하여 주신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각한 고통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에게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이것이 우리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를 모두 고난에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죄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예상외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십니다. 그럴 때 놀라운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가능성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은 진실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깊은 번민 중에서도 여러분이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친구로 만드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친구로 삼은 사람은 대적들이 일어나 치려고 하여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우리를 방어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대적은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 오른손을 반역하는 자들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괴롭혔습니까?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그는 주님께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그렇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면 피밖에 날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고통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8, 9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 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는 하나님에게 자기를 치려는 모든 자들의 시도에서 안전하게 보존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나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나를 단단히 감추소서 그리하여 내가 발각되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나의 육신을 사망에서 건져 주시고 내 영혼을 죄로부터 건져 주소서”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보호를 간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눈동자를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보호합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이렇게 지키십니다.
잠언 7장 2절에 보면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하면서 그리하면 파멸에서 너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스가랴 2장 8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신다”고 하였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는 것같이 매우 따뜻하게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안전하고 따뜻하게 해주소서”
1. 주 날개 밑 내가 평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 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2.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 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3. 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날개 아래 피하는 사람은 누구도 손 댈 수 없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송사해도 주님의 날개로 품고 있는 사람을 뺏어 낼 수는 없습니다.
여기 다윗은 계속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사악한 자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키소서”라는 이 기도는 “그들처럼 되거나 그들처럼 행하지 말게 하소서. 그들의 꾀를 좇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의 길에 서거나 그들의 요리를 먹지 않게 하소서. 그들에 의해 파멸되거나 쓰러지게 하지 마소서.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하는 뜻을 품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더구나 악한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많은 재산을 그들의 자손에게 물려주며, 저희는 자기 기준에 잠겨 있고, 그 입으로는 교만히 말하는데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본문 15절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고난 당한 후에 자기에게 닥쳐 올 기쁨을 염두에 두면서 기록한 시입니다. 복된 미래의 소망을 읊은 시입니다. “나는” 이 말은 엔게디의 동굴에서 쫓기던 다윗이 하늘을 향해서 부르짖는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은 이제 머지않아 왕권을 차지하게 될 목동이 한 말입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했습니다.
다윗은 악인이 번성할 때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왠지 아세요? 악인이 누리는 기쁨과 그가 누리는 기쁨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기는 창조를 욕되게 하는 저주입니다. 바람이 불 때 에덴 동산은 변질되어 더 이상 낙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시기는 악한 것 중에도 가장 악한 것입니다. 시기하는 마음에 기쁨도 평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시기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행이 됩니다.
여러분, 악인은 하나님의 자녀와 같지 아니합니다. 황소가 사자를 시기할 수 있습니까? 음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가 까마귀를 시기할 수 있습니까? 거처가 다릅니다. 여러분, 악인의 번영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작으나 저 세상에 가서 받을 것이 풍성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용기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사십시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누릴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장차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지난 주일 우리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떡과 포도즙을 들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위해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것은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늘 나라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잔치 자리에 참례하는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 잔치에 참례할 것을 생각하면 감격스럽지 아니합니까!
그리고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바란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아노니’라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확신에 넘치는 자세로써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확약을 받은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내가 주의 얼굴을 보리니!’ 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까? 고난 중에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기쁨이 큰 것을 의미합니다. 그립던 주님의 얼굴을 뵈올 때 얼마나 감격할까요? 더구나 그 얼굴을 본다는 것은 만족을 의미합니다. 지식에 대한 만족, 소망에 대한 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너무 부족한 것이 많지만 장차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주님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는 분 계십니까?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겪으시는 분 계십니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주님의 능력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주의 날개로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빛나는 영광스러운 장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십시다.
저는 여러분에게 특별히 권합니다. 삼일 기도회가 끝나는 대로 좀 더 남으셔서 자유로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놀라운 체험들을 합니다. 마음이든, 육신이든, 개인이든, 가정이든 우리 스스로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시는 분 계시면 남으셔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필요 이상 충만한 것으로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요사이 남아서 기도하시는 분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어디 특별한 곳에 가시지 않으셔도 우리 교회에 오셔서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분이 말 할 수 없이 많습니다. 제가 지난 두 주일 동안 주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실제로 체험하신 분의 이야기를 소개했더니 제 집에는 은혜 받은 체험을 이야기하는 전화가 끊일 새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믿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믿음의 기도는 마음과 육신의 병든 자를 일으키십니다.
저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간구를 응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누구든지 문제 있으신 분은 다 남으셔서 해결 받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