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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김병우
8월의 뜨거운 열기가 도서관열람실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아침부터 켜놓은 형광등 불빛은 온종일 열기를 뿜어내고 연륜이 쌓인 나무의자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체중이 버겁다는 듯 삐꺽거린다. 곳곳에 나붙은 음식물 반입금지, 개인 소지품 분실 주의 벽보의 글씨가 눈에 띈다.
한쪽 구석 벽면에 걸려있는 이름 모를 서양화에 눈길이 닿았다. 그림 속에는 일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마차를 기다리며 서 있다. 그 옆을 또 다른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간다. 비포장도로 가장자리에 쌓아둔 장작더미가 낯설지가 않다. 꼭 우리네 옛 시골 풍경을 보는 것 같아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정겹다.
“조용함. 그것은 다른 사람에 있어 편안함입니다.” 열람실 한가운데 천장에 매달아놓은 표지판의 글귀가 선풍기 바람에 흔들거린다. 여러 대의 선풍기에서 나오는 둔탁한 음이 마치 해운대 앞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도서관의 이런 풍경들이 맞춤옷을 입은 듯이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사십여 년 전 시립도서관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입구에서 표를 끊어서 2층 성인열람실로 올라가면 좌석이 몇 개 되질 않는 고풍스러운 작은 도서관이었다. 지정석이 따로 없었으니 먼저 앉는 자리가 그날 종일 지정석이다. 남루한 옷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은 괴짜 고시생들이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그 도서관에서 사시, 행시, 외시 3관문을 패스한 터벅머리 청년이 공부했던 소문난 자리가 있었다. 문 열기 바쁘게 서로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운 좋게도 그 자리에 앉는 날은 종일토록 기분이 좋았고 공부가 잘되었다. 책을 보다 깜빡 졸아 흘린 침에 책장이 엉겨 붙고, 낯짝에 인쇄까지 되어 난감한 적도 많았다.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하건만 강산이 네 번 하고도 더 지나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칸막이가 둘러쳐진 자리에 앉으면 나만의 공간이라는 포근함 때문인지 고향 집 구들방처럼 안온하다. 도서관 체질인가 보다. 나름대로 각각의 사연들을 안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대입재수생, 취업준비생,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집에서는 책이 잘 읽어지질 않아서… 깨알 같은 활자를 뚫어지라 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들이 사뭇 진지하다 못해 눈빛에서 광채들이 난다.
퇴직하고부터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을 같은 장소에서 늘 마주치게 된다. 십 대에서 팔 십대에 이르기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특히 정기간행물실에는 대부분 노인층으로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메운다. 이들은 여러 종류의 신문들을 종일토록 정독하는 것 같았다. 집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 도서관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특히 이 도서관은 예전의 학교건물을 개조하여 도서관으로 사용하다 보니 곳곳에 그런 흔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이 도서관을 거쳐 갔었을 무수히 많은 사람을 생각해본다. 그들 또한 유수와 같은 세월에 나처럼 환갑들을 훌쩍 넘겼을 테지.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화두 같은 서산 대사의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주차장 뒤편에는 예전에 운동장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잔디가 듬성듬성한 마당이 넓다. 그곳에는 책을 보다가 휴식 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운동기구들이 있다. 쉴 때는 누구나 찾게 되는데 나 역시 틈틈이 이용한다. 더군다나 오래된 나무들이 어우러져 그늘을 만들어 주니 쉼터로는 안성맞춤이다.
햇살이 좋은 날 오전에 혼자서 운동구 앞에 서 있는데 웬 낯선 여인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처럼 책을 보다가 머리 식히려 오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뜸 던지는 첫마디가 “아저씨 담배 한 개비 얻을 수 있어요?” 주위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분명 나보고 하는 말이다. 순간 혼란이 왔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퉁명스레 대답했더니 못내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되돌아서 갔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도서관 입구에서 출입자를 통제하지 않으니 누구나 쉽게 들락날락한다. 그러니 도서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가끔 만나게 된다. 한번은 노숙자 차림의 청년을 마주할 때가 있었다. 오랫동안 깎지 않은 수염, 언제 깜은지 모를 엉겨 붙은 산발한 머리카락, 땟국이 흐르는 얼룩진 옷… 청년실업이 많다 보니 취업준비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초라한 행색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았다. 혹여나 취업준비 기간이 길다 보니 제풀에 지쳐버린 ‘3포 족’인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직장,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컫는 말이란다. 그들의 공통점은 짐 보따리가 유난히 크며 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게 일과다.
어느 날 내 옆자리에 그런유의 청년이 와서 앉았다.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무엇하고 해서 모른 척하고 그냥 있기로 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궁금증이 발동하여 벽에 비스듬히 세워둔 그 청년의 커다란 보따리를 훔쳐봤다. 그 안에는 플라스틱 밥그릇, 냄비, 컵, 언제 씻은 지모를 옷가지들로 그득했다. 그런 친구가 앉아있는 주변 자리는 꼭 빈자리가 나게마련이다. 주변에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옆에 앉아 있으면서 이 청년의 행동거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하루 세 끼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며 잠은 어디에서 잘까? 짐작하건대 점심과 저녁 시간 전후로 두어 시간가량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인근에 있는 무료급식소를 찾아가서 매 끼니를 해결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인데… 가슴이 미어진다. 사십여 년 전 그때와 도서관 풍경이 많이도 변했다. 오히려 그때가 더 힘들었지만 이런 노숙자들이 도서관에는 없었다. 물론 입구에서 통제하여 감히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겠지만…
도서관 문 닫음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전 열람실 공간에 울려 퍼진다. 온종일 엎드려 자던 옆자리 청년은 그 소리에 놀라 부스스 일어났다. 양손에 보따리를 챙겨서 걸어나가는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하룻밤 누울 자리를 찾아서 밤거리를 방황할 테지.
오늘도 도서관의 하루시계는 변함없이 흘러갔다. 내일은 또 어떤 사람들로 이 도서관의 빈자리를 가득 메울까? 도서관을 나서면서 들이키는 밤공기의 맛은 세월과 무관하게 어찌 그리 변함이 없는지. 사십여 년 전이나 한결같이 똑같으니 말이다. 어둠이 도서관을 휩싼다. 내일의 새 주인을 기다리면서… (2016.9.23.)
첫댓글 도서관의 낯설었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는사실 부끄러운 소리지만 도서관에서 한권의 책도 읽어본 경험이 없는 터라 정말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도서관에 대한 한편의 글이 우리의 사회현상을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서관의 뒷모습에 관한 글 잘 읽었습니다.
도서관 이용자가 다양함을 알았습니다.오갈때 없는 사람들이 찜질방등을 이용하는줄 알았는데 도서관을 이용하는줄 몰랐습니다.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도서관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책을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간접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지금은 도서관도 많아졌고 열람실을 찾는 고객도 다양화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시험때만 시립도서관 이용하던 그 옛날이 기억됩니다. 손녀를 데리고 도서관을 찾았을때 참 부자나라에 살고 있구나 감동받았습니다. 갖추어진 열람실에 필요한것을 골라와서 시원한 앉아서 읽고 또 대여도 해왔지요. 그런데도 잘 가지를 않습니다.
도서관의 풍경을 잘 스케치 해 주셨습니다. 도서관의 새로운 풍속, 혹시 노숙자의 휴식처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여러 부류의 고객이 찾아드는 도서관. 시대가 변하니 풍속도 변하는 모양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