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구두
변인섭
늘 신던 신발인데 오늘따라 발이 편치 않다. 성당에 가려고 나서는데 꼭 남의 신발을 신은 것 같다. 걸음을 몇 번 옮기다 멈춰 서서 발을 내려다본다. 살펴보니 어느새 뒷굽이 많이 닳아있다.
무릎과 허리가 안 좋아 신발에 관심이 많은 나는, 좋다고 광고하는 기능성 신발을 별 망설임 없이 산다. 그래서 신발장에는 계절별로 꽤 여러 켤레의 신발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늘 신던 만만한 신발에만 손이 간다. 어떤 신발은 사놓고도 몇 번 신지 못한 채 신발장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가죽이 삭아버리기도 한다. 발이 행복한 신발이라기에 충동적으로 샀다가 막상 신어 보니 발이 불편해 그대로 밀려나기도 하고, 아끼다 보니 오히려 신지 못한 채 잊히기도 한다.
오늘은 다른 신발을 신어 보려고 신발장 문을 열었다. 그런데 기억에도 없던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온다. 분명 내 신발인데도 낯설다. 아마도 첫눈에 들어 혹하고 샀다가 발이 불편해 몇 번 신지 않고 넣어 두었거나, 늘 편한 신발만 찾다 보니 자연스레 잊혔던 모양이다. 신발을 꺼내 잠시 신어 보았다가 다시 벗어 놓는다. 역시 발이 편한 신발이 제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예쁜 것보다는 발이 편한 신발을 고집하게 된다. 중요한 자리나 결혼식에 갈 때도 마음속으로는 조금 더 단정하고 멋스러운 신발을 신어야 할 것 같아 망설이지만, 결국은 늘 신던 편한 신발에 손이 간다. 젊을 때는 모양이 우선이었는데 이제는 발의 편안함이 먼저다. 이것도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굽이 닳은 신발을 신발장에 넣으려다 문득 오래전 보았던 아버지의 구두가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날은 학교에 행사가 있는 날 이어서 많은 손님이 학교를 방문했다. 우리 6학년 아이들은 평소보다 일찍 등교하여 교실 청소도 하고, 교문부터 학교 건물까지 마당도 쓸고, 유리창도 닦았다.
내가 맡은 일은 현관에서 손님들이 벗어 놓으신 구두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교장실로 들어가신 뒤, 나는 현관에 나와 구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겨진 빈 구두는 주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먼지 하나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보며 멋지다고 생각했다. 수십 켤레의 구두를 정리하다가 유난히 초라한 구두 한 켤레를 발견했다. 깨끗하긴 하나 다른 구두에 비해 눈에 띄게 윤이 덜 났고, 발등에는 세월의 주름 같은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뒤축은 헤지고 가죽까지 닳아있는데 찌그러지지 않은 게 다행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구두가 낯이 익었다.
그날 저녁, 나는 대문 쪽을 수시로 내다보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저녁 식사까지 밖에서 하시고 늦게 오셨다. 아버지께서 옷을 갈아입으시는 동안 나는 얼른 현관으로 달려 나가서 아버지의 구두를 살폈다. 아, 맞다! 그 낡고 초라한 구두의 주인은 아버지였다. 그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늘 단정한 옷차림에 위엄 있고 반듯한 모습만 보이던 아버지가 그렇게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니실 줄은 미처 몰랐다. 광이 바랜 그 구두 위에는 세월의 주름이 촘촘히 배어있었고 발등이 접히는 부분에는 깊게 파인 골이 있었다. 그 구두는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 구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아버지의 어떤 낯선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그때 나는 문득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우리에게는 늘 좋은 신발을 사 주셨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새 운동화를 사 주셨고, 신발이 조금만 작아져도 발이 불편하면 안 된다며 새것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늘 새 신발을 신고 학교에 다녔는데, 정작 아버지의 구두가 언제부터 그렇게 낡아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 내가 본 아버지의 그 낡은 구두는 오래도록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사는 동안 내가 아버지께 구두 한 켤레 제대로 사 드린 적이 있었나 싶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선뜻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 그날 아버지의 낡은 구두를 보며 마음 아파했던 기억은 또렷한데, 정작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야 부끄럽고 죄송하게 느껴진다. 내가 사들인, 나만을 위한 신발들이 눈에 들어오니 곁에 안 계신 아버지가 더 그립고, 아버지의 그 낡은 구두가 더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도 굽이 닳은 신발을 신고 다닌다.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을 때마다 아버지의 구두가 떠오른다. 그 낡은 구두에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며 묵묵히 걸어오신 아버지의 시간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늘 말없이 우리보다 앞에서 걸어가셨다. 우리는 그저 그 뒤를 따라 걸어왔을 뿐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날 보았던 아버지의 낡은 구두는 단순히 오래된 신발 한 켤레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먼저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의 삶, 그 묵묵한 발걸음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신발을 신으며 조용히 생각한다. 아버지가 걸어가셨던 그 길 위를, 이제는 내가 아버지 닮은 신발을 신고 조금씩 따라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