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07
8월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연중 제18주간 목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efpaVt1fuc
(김동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베드로 사도의 사탄 전락 체험!>
언젠가 세수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한 상습 피로에 잔뜩 찌든 탓도 있었겠지만, 누군가를 향한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한 울적한 얼굴이 영락없이 영혼 없는 좀비요, 사탄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천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자칫 방심하면 사탄의 삶으로 전락하고 마는 우리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 말미에서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복음 16장 23절)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종종 베드로 사도의 ‘사탄 전락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여서 그렇습니다. 어제 그리도 굳건히 서 있었는데, 오늘 속절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어제 살아있는 천사가 따로 없었는데, 오늘은 영락없는 마귀로 둔갑해있습니다. 어제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았는데, 오늘 제대로 된 바닥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소리, 결코 듣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 베드로! 최고야, 에이스야, 넘버원이야!‘ 라는 소리 간절히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한 열망과는 달리 스승님으로부터 들려온 소리는 사탄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에서 사탄으로 전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서 하느님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느님의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인간의 생각, 인간의 일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영적인 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 더 큰 가치, 공동선을 위한 일이 모두 빠져나가고 그저 삼시 세끼 먹고 즐기는 일만 남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 밖의 현실과 철저히 단절된 상태로, 자기 한 몸 챙기기에 빠쁘게 될 때, 우리 역시 사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봉사자들이 본래 종의 모습을 망각하고 사심으로 가득한 형국으로, ‘내가 원장이야, 내가 시설장이야’라고 외칠 때, 우리는 영락없는 사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내 얼굴만, 내 이름만, 내 명함만 크게 드러날 때, 우리는 또 다른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포도주이신 주님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노력, 새 시대에 적응하려는 노력, 유연성과 탄력성을 거부한 채, 경직되고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고수하려는 모습, 어쩌면 이 시대 또 다른 사탄의 모습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KB-JY1Gy9w
++++++++++++++++++
<우유부단 혼합주의가 지배하는 교회: 햄릿이 될 것인가, 돈키호테가 될 것인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는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대사. 이것은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의 극치를 표현한 말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단 두 가지의 경우만 놓고 결정하면 좋은데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선택지를 놓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정 장애의 원인은 선택지가 많아지는 데 있습니다.
어느 식료품점에서 매일 무료 잼 시식 행사를 열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여섯 가지 잼이 진열되었고 어떤 날에는 스물네 가지 잼이 진열되었습니다. 과연 어느 경우에 잼이 더 많이 팔렸을까요? 바로 여섯 가지만 진열된 경우였습니다. 스물네 가지를 진열했을 때보다 여섯 가지만 진열했을 경우 잼을 구매할 확률이 무려 열 배나 높았습니다.
왜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구매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를 선택할 때 잃어야 하는 선택지가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여섯 가지만 있으면 다섯 가지만 못 먹는 아픔이 있지만, 스물네 가지가 있다면 스물세 가지의 잼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사탄이 자신이 제외당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의 선택권을 많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선택지가 많아서 주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으로 명확히 둘만 구분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번역을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할 때,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가끔은 하느님의 일도 생각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반대됩니다. 선택지는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헛갈리게 만듭니다. 사람의 일을 도모하면서도 가끔 하느님의 뜻도 생각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선택해도 된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탐욕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것과 반대되어 청빈해지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혼동시키는 번역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사탄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선택은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다느니,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결정 장애에 빠져 무엇이 하느님 뜻인지, 무엇이 사탄의 뜻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하려면 선택지를 단 두 개로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범죄도시 2’에서 범인은 20억이 든 가방을 들고 마 형사와 마주칩니다. 이때 제안합니다. “5대5로 나눌까?” 마 형사는 묻습니다. “누가 5야?” 범인은 당황합니다. 마 형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잡으려고 한 거죠. 선택권이 많아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습니다. 관객은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넌 안 되겠어. 넌 좀 맞아야 해. 맞다가 죽을 거 같으면 벨 눌러. 내리게 해 줄게.” 햄릿 증후군과 반대되는 상황이 ‘돈키호테’입니다. 돈키호테는 결정론자입니다. 자신이 기사라고 믿으니 그냥 기사로 삽니다. 당시는 기사는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술집 여자를 공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술집 여자 알돈자를 회개시킵니다. 둘시네아가 되게 합니다. 이를 위해 풍차와도 싸웁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믿음을 가진 자를 원하실까요?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숙부가 천국에 갈까 봐 기도할 때 죽이지 못하는 햄릿일까요, 아니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바보 기사를 원하실까요?
어린이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합니다. 세속-육신-마귀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해서 뭐가 좋을까요? 삶에 답이 없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에 선택지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신중’하다고 자기를 높게 평가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탄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이렇게 ‘극단적 이원론’을 놓고 선택합시다. 극단적 이원론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해답을 가지고 삽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86년 군에 입대하면서 1달 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주로 육체훈련을 받았습니다. 제식훈련, 사격 훈련, 태권도, 구보, 행군, 화생방 훈련을 받았습니다. 1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으면서 정신교육을 받았습니다. 군인수첩에는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보초를 서면서, 쉬는 시간에 군인수첩의 내용을 외워야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군인 정신과 군인의 길입니다. 군인정신은 이렇습니다. “군인정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의 기상과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굳게 지녀야 한다.” 군인의 길은 이렇습니다. “하나. 나의 길은 충성에 있다. 조국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둘. 나의 길은 승리에 있다. 불굴의 투지와 전기를 닦는다. 셋, 나의 길은 통일에 있다. 기필코 공산 적을 처 부순다. 넷, 나의 길은 군율에 있다. 엄숙히 예절과 책임을 다한다. 다섯, 나의 길은 단결에 있다. 지휘관을 핵심으로 생사를 같이 한다.” 36년 전의 아련한 추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엘리야가 왔다고도 합니다.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도 합니다.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왔다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흡족해 하시면서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네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야단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키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받았어도,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을 넣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하느님의 법을 새겨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입니다. 맞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13-23 :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 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신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먼저 제자들의 생각을 묻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아마 사람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비교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도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엘리야는 예수님이 다시 태어난 엘리야이거나, 어딘가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어려서부터 예언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사람에게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떤 예언자보다도 위대한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물으신다. 이 말씀은 줄곧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으며, 당신과 함께 많은 이적을 행한 제자들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라고 대답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이렇게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른다. 이 고백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기 때문에 하느님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바위라고 하신 뒤, 그 반석 위에, 즉 그 고백과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권한에 대해 말씀하신다.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가 주어졌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9절)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편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라고 꾸짖으신다. 아버지께 계시를 받고,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다.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 하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히브리 말로 “반대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그분을 따르는 일과 하느님의 아들의 가시는 길을 바꾸어 놓으려한 것이 사탄의 일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5-16)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 또는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으로 생각하면, “너희는 왜 교회에 다니느냐?”, 또는 “너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 무엇을 얻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느냐?”입니다. (만일에 명확한 이유나 목적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취미생활이 될 뿐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이유로 교회에서 멀어지면 그냥 그렇게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저희는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믿고 있습니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저희는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릅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그리스도)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들은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에 도달하지는 않았고, 예수님 부활 후에야 그 신앙을 고백하게 되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신성을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마태 14,33)
신약성경에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들이 더 있는데, 모두 다 중요한 고백들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물론 지금 겪고 있는 어떤 어려움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진짜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 갖지 않고, 예수님께 현세적인 복이나 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이 말씀은, 하느님(예수님)께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고 뽑으셨음을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베드로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와 서간문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실수와 잘못들만 보면서, 사도 자격이 부족하다고 베드로 사도를 깎아내리는 경우가 있는데, 하느님(예수님)께서는 그의 부족한 점이 아니라, 훌륭한 점을 보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것은 그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위대한) 점들이 많았던 사도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뛰어난 점은, 믿음, 사랑, 열정, 헌신, 지도력 등이라고 생각됩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18-20)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베드로라는 한 개인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그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그의 신앙고백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승의 세력’은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세력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 보호를 잘 받으려면 교회 쪽에서도 잘 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도 직무’를 뜻합니다. “땅에서 매면(풀면) 하늘에서도” 라는 표현만 보고서, 주도권이 땅에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사도 직무 수행은 철저하게 주님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늘의 뜻을 땅에서 대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지시는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온전히 믿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름과 함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발견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이신가?’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발견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친구를 구별해 낼 줄 압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에서 오래도록 진실된 관계로 남을 사람들을 구별해 냅니다. 많은 남녀 가운데에서 자기의 신랑감이나 신붓감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사람에게 독점욕이 생기기도 하고 그것을 통제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분노가 잔인하고 격분이 홍수 같다 해도, 질투를 누가 당해 낼 수 있으랴?”(잠언 27,4) 우리의 하느님도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열 번 정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하느님께서는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특성은 예수님께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헤로데 임금의 아들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도시에서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첫째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질문이고, 둘째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많은 사람이 동원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그리고 구약의 많은 예언자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저 다른 많은 이 가운데 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사랑하고 사랑받으셔야 할 유일하신 분으로 예수님을 모십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의 대답은 모범적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예고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온 유일한 구세주, 곧 메시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제 인생 전부를 걸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올바른 깨달음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온전하고 독점적인 사랑을 그분께 드립시다.
=====================
[제주교구 임문철 시몬 신부님]
<베드로와 예수님>
베드로의 경솔함과 예수님에 대한 배반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성인이 아무리 멋진 신앙고백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고 또 천국의 열쇠를 주신 주님이 잘 이해되지 않기도 합니다.
혹 열정의 사도 바오로라면 모를까, 덤벙대기 일쑤이며 주님의 면전에서 헛맹세까지 하며 배반한 베드로를 그렇게까지 대접하시다니…. 논공행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꾸중하시면서까지 가르치고자 하신 ‘하느님의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가르쳤지만, 베드로는 그 은총의 산증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신을 전혀 모른다고 잡아떼는 베드로를, 고개를 돌려 돌아보시며, “베드로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눈길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눈길은 베드로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라는 말은 한 개인을 두고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를 두고 한 말이라는 해설도 있지만, 저는 그 모든 배신도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예수회 이인주 베드로 신부님]
<현문현답>
우리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산다. 궁금한 것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느냐에 따라 그 답 또한 대단한 편차가 있다. 그러기에 좋은 답을 얻으려면 좋은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영적인 질문 안에서 영적인 답을 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깊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질문에 영적인 답을 하지만, 주님의 속 깊은 영적 차원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해 추락하는 아주 쓴맛을 보게 된다.
늘 우리가 깊게 봐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이 아니다. 내면에 흐르는 천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다른 제자들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라고 대답하지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보다 더 정확한 답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영적 차원의 현답을 함으로써 베드로는 예수께 칭찬을 받는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그 복이 그대로 하늘에서 쏟아진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은총 관리를 잘하라고 했던가? 그런데 베드로는 은총 관리를 잘못했거나 아니면 사탄의 시기를 받았는지, 현답을 한 후 곧 낭패를 본다. 무엇이 그에게 쓴맛을 보게 했는지 잘 보아야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 아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어찌하여 수난 예고에 대하여 눈치를 채지 못할까?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완강하게 반박했고 예수께서 그대로 직격탄을 날리신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그러기에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역풍을 만날 수도 있다. 잘 모르면 되물어야 하고, 아무리 사랑과 충정이라 해도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충정과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길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반기를 드니, 이는 예수님을 걱정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안겨드리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예, 저도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
[부산교구 김종남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꾸짖으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에 극찬을 받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만류하다가 크게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사탄아! 너는 나의 걸림돌이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호되게 꾸짖고 계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을 실현하시려는 예수님의 단호한 모습과 그 앞에 고개를 떨구는 베드로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하느님의 일에는, 부활과 영광만이 아니라 십자가와 수난과 죽음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만을 바라본 채 그 뒤에 감춰진 십자가를 부정하려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할 하면서부터 늘상 들어왔던 십자가. 이 십자가의 의미를 잘 표현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하느님께서 천국의 문을 들어가기를 바라는 두 사람에게 천국의 문까지 큰 통나무를 지고 가야 하는 숙제를 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통나무를 지고 투덜거리며 걸어갔고 다른 한 사람은 묵묵히 통나무를 지고 걸어 갔습니다.
길을 가는 중에 이 두 사람은 모래 길을 만났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이내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버렸습니다. 또 길을 걸어가다가 자갈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역시 투덜거리는 사람은 또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버렸습니다. 결국 투덜거렸던 사람은 가벼워진 통나무를 짊어지고 여유롭게 천국 문 앞에 도착했고 다른 한 사람은 땀을 흘려가며 묵묵히 통나무를 지고 왔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져온 통나무는 천국의 계곡을 건널 다리가 될 것이다. 이제 각자가 가지고 온 통나무로 다리를 만들어 계곡을 건너오너라.” 이 말을 듣고 통나무를 놓아 보니 묵묵히 걸어왔던 사람의 통나무는 계곡의 길이와 딱 맞아떨어져서 천국의 계곡을 건너갈 수가 있었고 반면 투덜거리는 사람은 울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워주시는 십자가는 바로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영광된 부활을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듯이 우리 또한 구원과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이겨 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가장 힘들다고 느끼는 것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가족일 수도 있고, 지금 처한 나의 환경일수도 있고,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이 십자가를 내 스스로가 포기해 버린다면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나에게 주어질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이겨내려고 하는 사람은 분명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로 남아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넘어설 줄 아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분명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지가는 예수님께서도 힘겨워하셨듯이, 우리에게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가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길임을 알고 있고 당신께서 함께 도와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하느님은 분명 우리 각자가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를 주십니다.
“주여!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길 원치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그 고갯길을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이 노랫말처럼 우리의 상황에 맞게 지워진 십자가를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힘이 들 때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며 당신께 십자가를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십사고 오늘 하루 기도드립시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음에 깃든 뜻>
마태오 16,13-23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물음에 깃든 뜻>
나를
나로
대하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내가
되라시며
물으십니다
그대에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된
나로서
오롯이
당신 앞에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마주하라시며
물으십니다
그대에게
나는 누구입니까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환시를 통해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베드로는 그것에 관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의를 내세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어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 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렇게 저렇게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프로야구를 보다가 예전에 잘 듣지 못했던 용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발투수가 내려가고 구원투수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투수를 향해 해설자가 ‘추격조’가 올라왔다고 말합니다. 10점 차 이상의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약간 실력이 떨어지는 투수를 올립니다. 어떤 때는 투수가 아닌 야수가 투수판에 올라와 공을 던지기도 합니다. 선수 자원을 아끼기 위한 작전입니다. 이때 올리는 선수를 예전에는 ‘패전 처리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추격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패전 처리조’라고 하면, 팬들도 이 투수의 실력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습니다. 또 선수들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팀에서 ‘우리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추격한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답니다. 그러자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실제로 경기를 뒤집어 승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단어 하나로도 경기의 승패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의 마음가짐이 아닌, 긍정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또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나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신의 인기를 물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이었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는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참 위상을 깨우쳐 주셨는데,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눈이 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 주님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문제는 아직 완전하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은 아니어서 수난 예고에 부활의 승리를 덧붙였지만, 부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치욕의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에만 충격을 받아,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유혹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러가라는 말은 꺼져 없어지라는 뜻이 아니고, 내 앞길을 가로막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뒤로 물러나서 따라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의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계약의 사람들>
-‘걸림돌’이 아닌 ‘바위’같은 사람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제 좋아하는 시편 성구입니다. 바로 새계약의 사람들인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주제는 새계약이며 그 내용이 퍽 고무적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맺어줄 새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겠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오늘이 바로 새계약이 실현된 그날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주님의 새계약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새계약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마음 깊이 새겨진 주님의 법을 새롭게 발견하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새계약을 통해 주님을 새롭게 체험함으로 우리는 복음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감격하신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 이름의 선물에 이어, 황송스럽게도 베드로를 초석 삼아 교회를 세우겠다는 교회 창립 약속,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는 약속, 매고 푸는 권능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선물로 받은 베드로였지만 이어지는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위 고백이 불완전한 고백이고 주님을 제대로 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발하는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충격적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돌아서서 거침없이 베드로를 직격하십니다. 베드로의 무지를 일깨우는 벼락같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에서 꼭 기억해야할 말씀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 걸림돌이 되게 하고 내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반석에서 졸지에 사탄이 되어 버린 베드로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광야에서 주님을 유혹하는데 실패했던 사탄이 이렇게 재차 무지한 베드로를 통해 주님을 유혹했던 것이고, 영적 본능으로 즉시 깨달은 주님의 직격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충격이었지만 분명 큰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무지의 눈이 활짝 열리는 체험이었을 것이며 후에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함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주님이 주신 이름 반석이란 베드로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에 여정에 결코 값싼 은총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통해 새롭게 파스카의 주님을 만남으로 베드로의 마음 깊이 새겨진 주님의 새계약이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 안에 깊이 새겨진 새계약의 법인 파스카 예수님을 새롭게 확인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저절로 앞서의 시편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우리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새계약의 파스카 예수님과 늘 함께할 때 비로소 걸림돌이 아닌 반석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절로 나오는 새계약의 파스카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저희 마음에 새겨진 영원한 새계약의 당신이십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의 선물이옵니다.”
그러니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확인해야할 새계약의 파스카 주님이요, 날마다 새계약을 살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결코 값싼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좋은 결정적 증거인 새계약의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참 자랑스러운 보물인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성인들로 조화된 아름다운 가톨릭 교회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똑같은 성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성인들 모두가 새계약의 파스카 예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참 역설적인 진리가 파스카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내 고유의 참 얼굴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8월4일은 전세계 모든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아르스의 본당 신부' 라고도 불린 성 요한 마리 비안네 사제 기념일입니다. 역사적으로 파란만장한 격동기에 만73세 선종때까지 참 치열하게 살았던 성인의 감동적 생애를 일부 인용하고 싶습니다.
“성 비안네는 주민 230명이 거주하는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 발령받았다.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결과 산산히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무관심했고, 아르스 주민들은 주일에도 들판에서 노닥거리거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춤추며 노는 날에 불과하였다. 성당에서 미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비안네는 마을 주민들의 회심을 위해 하루중 10시간 이상을 기도와 성체조배, 미사봉헌, 고해성사. 교리교육, 상담등으로 성당과 고해소에서 보냈으며, 틈틈이 가정과 환자 방문을 하였다. 사제관의 의자, 식탁, 이불과 베개 등 거의 모든 물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딱딱한 침대에 짚을 깔아 사용했고, 그것마저도 조금씩 덜어 가난과 극기의 삶을 실행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마을 주민들은 이런 비안네 사제의 한결같은 모습에 감동받아 점차 감화되어 갔으며, 몇 년후 아르스 본당은 비안네가 처음 부임하던 당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주민들은 비안네를 크게 존경하였으며, 미사시간을 알리는 성당 종소리가 들리면 성당은 금방 신자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을 즉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비안네 신부의 명성과 카리스마는 널리 퍼져, 1827년부터 그를 만나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1855년 한 해에 방문한 숫자만 2만명에 달했으니 하루 평균 60명이 방문한 셈이고,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10년동안 계속되었고, 하루 최소 16시간에서 최대 18시간까지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하루 평균 두세시간의 수면밖에 취하지 못했다. 1859년 8월4일, 41년 5개월 동안의 사목활동을 마치고 향년 73세로 선종한 날, 아르스의 모든 사람이 슬피 울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요한 마리 비안네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의 참된 모범”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반석과 같은 새계약의 성인, 주님의 참 좋은 선물 비안네 사제였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반석이자 새계약의 사람들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받쳐주소서.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시편51;12,14,19).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오늘은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1786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신 비안네 신부님은 평생을 겸손하고 가난한 삶을 사셨고, 신부님을 찾아오는 많은 신자들에게 영적 가르침과 고해성사를 잘 베푸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신부님의 이런 열정적인 모습이 본당 사목을 하고 있는 사제들이 갖추고 있어야 본질적인 모습이기에, 비안네 신부님을 '본당 사제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고 생각합니다.
본당 사제들은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때로는 한없는 자비로, 때로는 엄한 채찍으로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말씀'(마태16,20)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마태16,21-23)입니다.
베드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갑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 물음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완벽한 신앙고백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칭호를 얻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님으로부터 아주 호되게 야단 맞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지금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예수님은 나의 스승님이시고, 지금 나와 함께 계신 살아계신 분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나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이신가?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굳게 믿고 있는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이 물음에 멋진 답을 찾아보는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eVMRq_g6A4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 23)
믿음의 민낯을
또 보는 오늘의
시간이다.
초보운전같이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사람의 일에서
하느님의 일로
점차 바뀌게 된다.
사람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 했음을
진실로 반성한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리는 일이다.
마음에서 오는
고통은 다름아닌
우리의 십자가로
풀어야 한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십자가로
우리의 삶을
나누는 것이다.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뜨겁게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고생 끝에 얻는
참된 기쁨이다.
함께 나누면
십자가는
부활이 된다.
우리가 아프면
하느님께서도
아프시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가 십자가에
공감하는 일이다.
십자가가
신앙의 바탕이듯
마음의 바탕은
우리의
공감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십자가로
우리를 성장시키신다.
십자가로
일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여름이 깊어가면
가을도 멀지 않았듯
십자가에서 참된
마음의 기도
마음의 눈물을
만나는 믿음의
매순간이다.
+++++++++++++++++++
(2)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살아가면서 날마다
절실히 깨닫게 되는
감사의 주님이십니다.
늘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우리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진리이십니다.
참된 생명의
길이 되시어
우리를 껴안고
다시 걸어가시는
새로운 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를
건강한 삶으로
초대하시는 충실하신
빛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묶인 곳을
풀어주시는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