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철도
철도(鐵道)는 철 궤도와 철차륜의 마찰을 주행 방식으로 하는 광범위한 운송수단을 일컫는 말이다. 원칙적으로는 평행하는 2개의 철제 레일 상을 플런지 등 조향기능이 부가된 차륜을 이용하여 주행하는 운송수단을 의미하나, 법률이나 기타 용례에 따라서는 전용의 궤도 체계 위를 운행하는 운송수단의 통칭에 가깝게 쓰이기도 한다.
철도는 용어 자체로는 철로 된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실제적으로는 궤도에 의존하는 교통수단의 대표격으로 종종 사용된다. 즉, 고무로 된 차륜과 콘크리트 궤조를 사용하는 궤도 교통시스템 조차도 종종 경전철이라는 철도의 하위 카테고리로 분류되기도 한다. 철도는 따라서 협의의 철도와 광의의 철도로 구분 정의할 수 있다. 협의로서 정의할 경우 철도는 일정한 부지를 점유하고 레일·침목·도상 등으로 구성되는 궤도에서 기계적·전기적 동력을 이용하는 차량을 운전하여 여객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육상의 교통수단을 의미한다. 반면, 광의로서 정의할 경우 "일정한 가이드웨이에 따라 차량을 운전하여 여객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것의 전부"를 통칭한다.
한편, 대한민국의 법령에서 철도는 "여객 또는 화물을 운송하는 데 필요한 철도시설과 철도차량 및 이와 관련된 운영·지원체계가 유기적으로 구성된 운송체계"로 정의되며, 따라서 그 하위 구성요소로 철도시설과 철도차량, 이에 부수되는 운영·지원체계의 종합 체계를 의미한다.
레일을 이용하여 짐수레를 사람이나 가축이 끌었던 일은 기원전에도 있었다. 기원전 600년경의 그리스 코린트 해협의 수레길이 현재에도 증거로 남아 있다. 현대 철도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세계 최초의 운송수단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1556년에 독일의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가 저술한 채광 야금기술의 체계적인 기록 《금속에 대하여》(De Re Metallica Libri xii) 중에 있는 탄차의 그림이다. 당시 선로는 널판지를 잇대어 만들었고 수레바퀴에 홈이 패여있지 않아 탈선하는 일이 잦았다.
16세기 무렵 광산에서는 무거운 광물을 실은 수레를 끌어 올리기위해 목제 레일과 말을 많이 이용하였다. 18세기초 독일 루트 지방의 석탄 작업장에서 홈이 패인 나무 바퀴를 갖춘 석탄운반용 수레가 사용되었다. 이외에 유물이나 문헌으로서 종종 언급되는 것들은 주로 광산에서 목제 내지 석제 궤도를 부설하고 그 위로 인력 혹은 축력으로 움직이는 수레를 다니게 하는 광산철도였다.
광산철도와 철도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 북동부에는 광산철도 노선이 광범위하게 개설되어 '뉴캐슬 로드'라 불리울 정도였다. 이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17세기 말에 비해 19세기초에 석탄 수요가 열 배나 늘어났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광산에서 개별적으로 만들어지던 철도 시설물들은 점차 일정한 형태, 규격, 궤간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좀 더 효율적 활용을 위해 1726년 탄광 운영자 단체인 그랜드 얼라이즈는 공동 노선을 만들고 복선화하였다. 1750년 무렵부터는 목제보다 내구성이 뛰어난 철제레일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처럼 초기 철도는 석탄처럼 무거운 광물을 탄광에서 강, 바다, 운하까지 효율적으로 운송하고자 하는 해묵은 고민을 해결하면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주로 말을 이용한 마차철도였으며 초기에는 석탄과 같은 광산 화물운송을 주로 하였고 점차 여객수송을 하기도 했다. 1807년 영국 웨일스 남부의 스완지와 멈블스를 잇는 8 킬로미터 철도는 정식으로 요금을 받고 승객을 운송하는 꼬마 열차를 운행하였는데, 12인승의 객차를 말이 끌어 움직였다.
증기 기관차의 발명
18세기말 제임스 와트가 기존의 증기 기관의 효율을 개선하여 광범위한 분야에 동력장치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데 성공했다.[9] 이로 인해 철도에도 증기 기관을 활용하는 방안이 시도되었다. 처음에는 특정구간에서 권앙기를 통해 화물열차를 와이어로 끌어당기는 식의 이른바 고정식 증기 기관을 사용한 강삭철도(케이블카) 형태로 이용되었다. 증기 기관을 이용하여 일반 도로용 자동차를 만들고자하는 시도는 프랑스 군사 기술자인 니콜라 퀴뇨(1725~1804)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대포를 끄는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시험주행에서 시속 4km로 운행했지만 벽에 부딪히며 뒤집어짐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다른 발명가들의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던중 1804년, 영국인 리처드 트레비식이 고압 증기기관을 개발하여 기관차를 만들었다.
시범운행에서 시속 8km로 9톤을 실은 화물차를 끄는데 성공했으나 주철로 만든 초기 레일(철로)이 5톤이나 나가는 무거운 기관차를 버티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며 추가 기술개발과 상업화를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1814년, 조지 스티븐슨이 상용 가능성이 있는 증기 기관차를 만드는데 성공하였고 그는 훗날 지속적으로 영국 철도산업 발전에 기여하며 '철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최초의 공공 철도
로코모션 1호 (달링턴 열차 박물관)
1825년에 공공 철도로서 최초의 노선인 스탁턴(Stockton) ~ 달링턴(Darlington) 사이 40km 철도가 영국에서 개통되었다. 이때 스티븐슨이 제작한 로코모션호가 90t의 열차를 견인하여 속도 20km/h 정도를 내었다. 초기에는 주로 석탄만을 증기 기관차로 수송하였는데, 기관차의 고장이 빈번하기로 악명이 높고 신뢰성이 낮았다. 1830년, 무역항 리버풀과 면직물 산업의 중심지였던 맨체스터 간 약 45km의 거리에 복선 철로가 개설되었다. 40km/h 속도로 달리는 이 철도는 개통 후 첫 3년 동안은 하루에 평균 1100명의 승객을 태우는 등 대성공을 거두며 운송혁명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세계 각국에 철도가 개통되는 계기가 되었다.
철도산업의 발전
철도의 보급에 따라 동력차의 성능이 개선되고, 이에 따라 철도 차량과 궤도 시설물도 병행하여 발전하였고, 운영체계 역시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을 거치면서 그 속도와 수송량은 크게 증강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내연 기관 및 전기 철도의 보급, 토목 기술의 발달(터널, 교량 등), 전기·전자·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른 열차 제어의 고도화 등에 따라 도시 내 교통에서 국제 교통에 이르기까지 육상교통의 왕자로서 군림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로 교통의 발전에 따라 철도는 취약한 문전 연결성 등으로 인해 2차대전 이후에는 쇠퇴 기미를 보이게 된다. 도로 교통에 의해 단거리 및 중거리 화물에서 철도의 비중이 감소되었고, 또한 항공의 발달로 장거리 여행편이 대거 철도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도로 교통이 크게 팽창하면서 도로 교통의 경쟁력이 취약해졌고, 또한 최근에 이르러서는 환경 문제와 에너지 과소비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철도 교통의 가치가 재평가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