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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었고 생각을 했던 화랑세기를 조금 쓸려고 합니다 위작이라고 하는 분들이 많나 봅니다.
화랑세기는 소지왕 법흥왕보다는 내물왕을 알아야 시작이 됩니다. 내물왕은 광대토태왕비에
잘 나옵니다 400년 신라 매금이 직접 찾아 오지 않았는데 왔다고 삼국사기에는 겨울 10월, 임금이 타던 왕성의 말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라고 나옵니다
내물왕은 아들이 3명 있습니다(내물왕이라기 보다는 내물이사금이 맞겠죠)
내물왕
눌지왕 복호 미사흔(미해)
내물왕 다음왕은 눌지왕이 아닌 실성왕(내물왕때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습니다) 입니다 실성은 네이버 삼국사기를 찾아보시는게 슬프지 않습니다(삼국유사는 실성과 복호가 혼합해서 나오더군요)
눌지왕이 실성왕을 암살합니다.삼국사기에는 실성이 시켜서 고구려 암살자가 눌지를 암살하려다가 눌지에게 감복하여 고구려 자객이 암살계획을 눌지에게 알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눌지왕이 실성왕을 죽입니다
소지왕 다음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어(소지왕 아들이 왕후에게 없음) 복호 아들의 아들 소지왕과 5~6촌인 지증왕에게 왕위 계승권이 넘어갑니다 그때가 지증왕의 나이가 64이라고 삼국사기에 나옵니다
왕이된후 늙은 지증왕의 아들인 모즉지(법흥왕 백제왕은 동성왕 동성왕은 암살당함 그 다음왕은 무녕왕)가 백제에 있다가 신라에 오게 됩니다 이게 화랑세기 출발점입니다
진덕여왕이 없네요
지소태후(진흥왕엄마 위와 동일인)----이화랑
↓
만호태후----동륜태자
↓
진평왕
만호태후에게 아들이 또 있습니다 국반갈문왕이 있는데 동륜태자와 만호 태후의 아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원체 성에관해서는 관대한 사회라서요 하여튼 국반갈문왕의 딸이 진덕여왕입니다
그리고 북한산 순수비로 유명한 진흥왕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어려서 왕이되어서(진흥왕 초기는 엄마인 지소태후가 정치를 한겁니다) 만 나이로 42세 한국나이로 43세에 사망합니다
*화랑제도의 탄생배경(삼국사기 진흥왕 37년 편에 잘 나옵니다)
삼국사기: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사람들 여럿을 모아 함께 놀게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후 천거하여 쓰고자 하였다. 마침내 두 미녀를 뽑았으니 하나는 남모(南毛), 하나는 준정(俊貞)이었다. 3백여 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무리들은 화목을 잃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잘생긴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 짓고 그들을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김에 멀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됨의 악함과 바름을 알게 되어, 선량한 이를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즉 인재를 뽑기위한 한 방법이였습니다
원래는 원화제도 였으나 살인사건의 발생으로 화랑제도로 바꿨다는 내용입니다 화랑세기에는 비슷하지만 1세풍월주인 위화랑의 이름에서 화랑이되었다고 나옵니다
원래 원화는 준정이었으나 남모에게 넘기라는 법흥왕의 명이 나옵니다 그래서 준정이 시기 질투하여 술먹여 물에 빠져 죽입니다 그래서 원화제도를 없애고 대장을 위화랑으로 세웁니다
남모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법흥왕은 왕이되기 전에 국공으로 백제(동성왕)에 있습니다
백제에 있을때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와 사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법흥왕이 신라로 돌아 가고 그후에 보과공주가 백제를 탈출하여 신라로 옵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그 첫째 딸이 남모입니다
지소태후와는 엄마가 다른 형제입니다
참 삼국사기는 진흥왕때 화랑제도가 탄생한것 처럼 나옵니다 화랑세기는 법흥왕 말기에 탄생한것으로 나옵니다
무엇이 맞을까요 남모가 법흥왕의 딸이라면 법흥왕때 태어난건데 진흥왕 37년에는 최소 나이가 37세이상됩니다 젊은 화랑들이 나이 많은 여자를 따를까요
*1세 풍월주 위화랑
소지왕(비춰왕)의 마복자
마복자:임신한 여자가 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과 상통하여 낳은 아들
정치적,사회적인 가족관계를 유지한다(참 희안하죠 지금 기준으로는 있을수 없지만 그때는 그랬나 봅니다)
소지왕의 마복칠성
화랑세기에느 1.법흥왕,2.아시공,3.수지공,4.이등공,5.태종공(이사부 독도는 우리땅),6.비량공,7.융취공 보혜기라는 책에는 이등공이 빠지고 위화랑이 마복7성에 들어간다 어느것이 옳은지 알수가 없다고 나옵니다 법흥왕도 소지왕의 마복자란 사실 참 재밌죠
그건 그렇고 위화랑은 화랑세기에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의 딸 옥진,금진 그의 아들 이화랑의 역할이 크니까요 물론 화랑이란 말도 위화랑에서 비롯되었지만요
랑은 존칭같은 접미사고 진짜 이름은 위화입니다
그의 누나는 벽화이고 소지왕 말년에 벽화는 소지왕의 와이프가 됩니다 화랑세기에는 벽화후로 나오는 걸로 봐서는
첩이 아니라 왕후가 된 겁니다 그 자식이 아들이면 차기 왕위 계승을 할수 있고 지증왕에게는 넘어 가지 않았겠지만
넘어 간걸로 봐서는 소지왕의 아들이 없어야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아들이 있다고 나오는데 화랑세기에는 없습니다
벽화는 법흥왕과도 관계를 했고 비량이라는 사람과도 관계를 했고 훨씬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했습니다
벽화와 비량의 아들이 구리지이고 구리지와 금진의 아들이 사다함입니다
참 왜 이렇게 남녀관계가 복잡하냐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인류가 기록한 책을 보면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집트로 가볼까요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동생하고 결혼합니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을 한 카이사르하고도 관계를 합니다(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도망가서 카이사르가 잡으로 옵니다) 카이사리온이란 아들이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죽은후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랑 관계를 합니다 자식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빠질뻔 했는데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에 태어났습니다 화랑세기는 눌지왕 기준으로는 417년(눌지왕이 왕이된 해) 5~600년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당시 기득권을 유지 하려는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할까요 본능에 충실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을 겁니다
성경으로도 가볼까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있습니다 이삭의 와이프는 레베카(한국 성경 리브가)입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 형제의 자식입니다 이삭의 아들은 에서와 야곱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가질 장자상속권을 받아 도망칩니다 어디로 갈까요 외삼촌이 있는 지역으로 도망갑니다 외삼촌 둘째딸 라헬을 좋아합니다 결혼하려고 7년간 양을 키웁니다 외삼촌 첫째딸이 밤에 옵니다
외삼촌이 이야기 합니다 첫째가 먼저 가야지 또 7년을 양을 키웁니다 둘째 딸 라헬은 드디어 아내로 맞습니다
첫째딸의 시녀 둘째딸의 시녀까지 해서 야곱은 4명의 여자가 부인입니다 아들 12을 얻습니다 이야기는 기원전 2000년 전후의 이야기 입니다 아!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은 자기 딸들과 관계를 합니다 다윗의 큰아들도 배다른 동생인 다말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근친혼과 지금은 이해 못할 성관계가 과거에는 늘 있었습니다
화랑세기도 비슷한 이야기들 입니다
또 좀 복잡한 가계도 좀 볼까요(그리고 몇개의 가계도만 이해하시면 화랑세기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영실은 법흥왕의 조카가 됩니다 그 부인이 위화랑의 큰딸인 옥진입니다 법흥왕은 영실을 좋아합니다
또 그 부인인 옥진도 좋아합니다 옥진과 법흥왕 사이에 아들이 생기는데 비대입니다 어떻게 보면 비대는 법흥왕의 아들이 아니라 영실의 아들일 수도 있는데 자라면서 법흥왕과 많이 닮았나 봅니다 헐띁는 자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법흥왕은 왕후에게서는 아들이 없습니다 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다음 왕이 되겠지요 옥진은 왕후가 아닙니다
법흥왕이 죽으면 다음 왕은 입종갈문왕(사부지)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537년 입종갈문왕이 사망합니다(천전리각석 원명,추명중 추명에 나옵니다 원명:입종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이 놀러온 이야기 추명:보도(부걸지비),지소태후(지몰시혜),진흥왕이 원명을 보러오는 이야기 )
그래서 법흥왕은 다음 왕위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나 봅니다
1. 진흥왕에게 준다
2. 비대에게 준다 (법흥왕이 비대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위화가 자기딸은 골품이 없고 영실과 살아서 안된다고합니다)
3. 영실과 자기 딸이자 사망한 사부지 갈문왕의 와이프인 지소태후와 결혼시켜 영실에게 준다
진흥왕에게 줄 생각이 법흥왕은 별로 없었나 봅니다 3번이 법흥의 결론이였나 봅니다 하지만 지소태후의 활약으로 540년 법흥왕 사망이후 진흥왕이 왕이 됩니다 옥진은 가만히 있었을 까요 자기 아들 비대가 왕이 될수 있고 남편인 영실이 왕이 될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았겠죠 옥진의 딸인 사도와 진흥왕이 결혼합니다
화랑세기에 대원신통 진골정통이야기가 나오는데 대원신통은 옥진의 딸과 그딸들이고 진골정통은 지소의 딸과 그딸들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소지왕 와이프인 선혜후입니다 소지왕과 선혜후사이의 딸이 보도인데 지소의 엄마입니다 선혜후가 묘심과 사통을 해서 낳은 딸이 오도인데 옥진의 엄마입니다 선혜후 두 딸들의 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선혜후는 대가야와도 관계가 있는데 다음에 적어보겠습니다
진골정통 대원신통
선혜후 선혜후
보도 오도
지소태후 옥진
숙명공주,만호태후 사도태후,미실
두파는 참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2세 풍월주 미진부
미진부는 미실,미생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첫번째 부인이 원화제도때 물에 빠져 죽은 남모라는 사실 빼면 별 없습니다
미생(550~609)은 생몰년도가 정확하게 화랑세기에나오는데 미실은 생몰년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미실 출생년도를 알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화랑세기 여러 기록으로 출생년도를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사다함은 561년 대가야 반란 사건에 참전하는데 그때가 16살입니다 사다함 546년생
문노 554년에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때가 17살입니다 문노 538년생
문노 와이프는 윤궁인데 문노와 10살 차이난다고 나옵니다 윤궁 548년생
윤궁은 미진부 여동생의 딸입니다 미실과 사촌지간인데 "동생인 윤궁이 문노와 어울리는데 문노가 지위가 낮아 걱정이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사다함을 미실이 형이라고 부르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다함보다는 나이가 어리고 윤궁보다는 나이가 많다 547년생입니다 정확한거는 아닙니다 추정입니다
그럼 언제 죽었을까요 설원(549~606)을 보면 설원이 죽었을때 미실이 슬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547~606년이상까지 살아있는 겁니다
* 3세 풍월주 모랑
모랑은 굉장히 짧게 나오는데요
가계도는 위에서도 기술했던 왕이 되기전 법흥왕이 백제에 있을때 보과공주와 사통을 했는데 신라로 돌아오고 보과공주도 백제를 탈출하여 신라로 오고 낳은 원화제도때 물에 빠져 죽은 남모의 남동생입니다
화랑세기에는 풍월주가 있고 부제가 있는데 대부분 풍월주의 여자와 형제지간인 남자가 부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4세 풍월주는 이화랑인데 모랑의 친누나인 준화가 모랑의 부인이 였다는 사실을 잘 보십시요
그리고 모랑은 술을 많이 좋아 했나봅니다
9세 풍월주 비보랑편에 대세(이사람 삼국사기에도 나오던군요)라는 화랑이 나오는데 대세는 자기를 모랑과 완적(중국 술 좋아하는 사람)에 비교하며 술먹고 번번히 울었다고 나옵니다
모랑은 술을 잘 먹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갑작스레 비사벌에서 죽는다고 나옵니다
그의 와이프인 준화와 딸인 준모는 설원(설화랑)편에 다시 나옵니다
생각 : 화랑세기에 나온 이야기를 재밌게 써야 되는데 능력이 부족하네요 더 복잡하게만 하네요 그나마 관대하고 복잡한 그 시대 성관계를 알면 실제 역사는 그렇구 그렇게 흘러 갔구나라고 쉽게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벗어 나서 이야기 한다는 건 화랑세기가 위서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에게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도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 같고 이 걸 보시는 분들에게도 허구를 이야기하는 거 같아요 그러면 안될거 같아요 있는 그대로 재밌게 써야 되는데 능력이 부족하네요
* 4세 풍월주 이화랑
이화랑 쓰기 전에 법흥왕은 화랑세기 근거로 아들이 비대도 있고 모랑도 있습니다
왕위는 둘 다 받지 못했습니다 "왕후의 아들은 아니다" 제가 보는 성골 개념입니다 추측이지만요
이화랑 이분은 역사적으로 신라에 공헌한 업적은 미소한데 여자관계와 자식들이 우리가 책에서 봤던 사람들이라서 보실때 성에 대해서는 빼고 보시는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소태후는 이화랑을 좋아합니다
지소태후와 이사부의 딸인 숙명공주도 이화랑을 좋아합니다
엄마와 딸이 한 남자를 좋아합니다
지소태후는 좀 욕심이 많은 사람인거 같습니다
사도태후(옥진의 딸 태후칭호는 뒤의 이야기 겠지만 그냥 적습니다)가 진흥왕과 결혼한거는 위에서 볼수 있습니다
지소태후는 이사부와의 자신의 딸 숙명공주와 입종(사부지)과의 자신의 아들 진흥왕과 결혼을 시킵니다
엄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의 결혼 일 수도 있지만 지소태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식의 자식이 계속 왕이된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숙명공주는 이화랑과의 사통이 여러 번 발각되고 그 때마다 엄마인 지소태후가 울며 불며 구해 줬나 봅니다
숙태자 또한 진흥왕의 아들이 아니라 이화랑의 아들이 아니냐는 말들도 나옵니다(비대때 법흥왕의 아들이 아니라 영실의 아들이 아니냐랑 비슷합니다)
숙명은 왕후의 자리를 상실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이화랑한테 갑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만호(지금 족보로는 진흥왕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여동생)와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와 관계에 진평왕이 태어 납니다
화랑세기 위서론에 근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나오니까 네이버,다음에 찾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제가 본것은 진평왕 엄마이자 지소태후의 딸인 만호 였습니다
만호는 몇살때 진평왕을 낳았을까?
3세 풍월주 모랑이 죽고 난 다음 4세 이화랑이 풍월주가 됩나다
3세 모랑이 비사벌에서 죽은 년도가 555년입니다 4세 이화랑이 풍월주가 된 것도 555년이어야 합니다
그때 지소태후가 이화랑과의 자식인 만호를 임신하고 있었고 이화랑이 출산을 기다려 떠났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만호태후는 최소 555년생이 되어야 합니다
진평왕은 13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진지왕 말년과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해가 같아야 됩니다
삼국사기를 볼수 밖에 없습니다 579년입니다 그때 진평왕의 나이가 13살입니다 그럼 태어난 년도는
579-12=567년입니다
만호태후가 최소 555년생이니까 진평왕을 낳을때(567년)는 13살 만으로는 12살 입니다
이때 어린 여자아이가 임신을 한 것인데 이게 가능한지는 제가 남성이라 모르겠습니다
이글을 보시는 여성분이 계시다면 답을 주십시요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에 늘 그렇게 까지 하고 도를 넘어 상상 할수 없는 일까지 합니다
뭔가 싸질러 놓고 정리하는 느낌도 조금 있는 것 같지만 8~90%이상에서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뭔가 그때 그자리에서 의리는 있는 데(내가 너 도와 줬으니 너 나 힘들때 도와줘) 그럴 거 같은데 자신의 소명과 자신이
귀족임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습니다
화랑세기는 복잡하고 관대한(관대의 기준이 상위 귀족인건만 같아요) 귀족들의 성에 대해서 그리고 태어난 그 자식에 대해서 김대문과 김대문 아버지인 오기공이 그 당시 자기가 보고 경험한 걸 쓴 그때 기준의 글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쓰지 않고 자기가 쓴 것처럼 할수 도 있겠죠)
이화랑에게는 새달이라는 첩(이게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있습니다
새달은 다음 풍월주인 사다함의 누나인 것 같습니다 사다함의 형인 토함의 여동생이라고 나옵니다
이화랑이 죽을 때 "신은 공주(숙명)와 같이 산게 40년이 되었고 태후와 대왕(지소태후와 진흥왕)을 따라 옥경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다"숙명공주와 같이 죽자는 내용이 나옵니다 숙명은 "낭군이 향하는바를 따라야한다"며 같이 죽습니다
새달은 그 뒤를 따라 죽는 거 같습니다 (순장?) 결국 지소태후의 능 옆에 장사를 지냈다는 군요
지소와 지소딸 왕후를 포기한 숙명, 이화랑 어떻게 보면 사랑이고 어떻게 보면 "아 뭐지"입니다
* 5세 풍월주 사다함
제가 본 풍월주 중에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다함은 엄마인 금진(옥진의 동생)의 빚을 자기 지계에 지고 엄마의 빚을 해결하려고 하는 인물입니다
또 칙칙한 가계도를 그려볼까요
왜 옥진,비대,사도,만호,위화,미진부,모랑,이화,금진,선혜후,설성,미실,미생...이런 사람들이 삼국사기에 왜 나오지 않을까요
화랑세기에는 나오는데 왜 없을까요 이분들이 뭘 했을까요, 조금이라도 역사에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이분들이 한게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자신을 위해서 뭔가를 했지만 역사 기록에 남을만한, 백성을 위해서는 뭔가 한 일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미생(미실의 동생)을 보면 동륜태자가 개한테 물려 사망할때 측근으로 나옵니다(동륜 사망 이야기도 참 뭐하지만 다음에 쓰겠습니다) "동태자와 더블어 어색을 하러 다녔다.그때 나마 당두의 처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사람들이 공에게 알려 주었다 공(미생)은 태자와 함께 밤에 그집을 찾아가 관계를 맺었다 . 태자가 죽고 나서 공(미생)은 당두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자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쓰기도 짜증 날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미생은 아들만 100명이 넘습니다 딸까지 하면 자식이 200명 이상이겠죠,그리고 재물이 엄청 났나 봅니다 미생이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습니까, 백성을 위한 어떤 업적이 있습니까 제가 삼국사기(김부식이 썼을까요 김부식은 제작자 정도라 봅니다) 를 쓰는 사람이라면 업적이 하나도 없는 이런 사람을 쓰지 않겠습니다 벌지,덕지 이사람들은 화랑세기에 잠시 나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잘 나옵니다 전쟁에 참전하여 공이 있으니까요 5세 풍월주인 사다함도 나옵니다 대가야 반란의 평정에 공이 있으니까요
첫댓글 성경을 읽고 있는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나오는데..비슷한 시대에 비슷한 내용들 좀 이해되네요.
화랑세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고대사 전공자가 아니라서 딱히 댓글을 달기가 뭐하네요. 다만 말씀하신대로 고대사회에서 족보가 꼬이는건 광범위한 문명에서 보이는 특징이지요.
다만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원본이 나온게 아니라서... 아쉽게도 사료로 쓸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죠.
잘 보았습니다.
고구려유기, 백제서기, 신라국사.... 고대삼국을 대표하던 역사서들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진게 두고두고 아쉽네요... 사대주의 김부식이쓴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만이 남아있으니 말입니다.
저에게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었어여
삼국사기니 뭐니 이런 것도 다 한참 지니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겁니다. 진짜 한국 고대 역사는 알길이 없습니다. 지금 현재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중국 역사서에서 따온 겁니다. 하지만 자기네 역사에 유리하게 편집되고 왜곡된 중국 역사책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강단사학이 일제시대에 들어오는 바람에 현재 한국 역사는 제대로 된게 뭔지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한국 역사는 실제보다 많이 축소되고, 왜곡되서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수준입니다. 더 않좋은 건 이런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게도 잘못된 역사를 물려 주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