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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운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상운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한라산에 봉화가 올랐다…
밤마다 남로당의 우익
'숙청'이 벌어졌다
1948년 제주 4·3 사건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
< 일러스트=한상엽 >
제주도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은
남제주 대정 출신으로 본명은
이승진이었다.
‘김달삼’이라는 가명은 장인 강문석에게
물려받았다.
강문석은 해방 이전부터 공산당 운동에
투신해 박헌영의 오른팔로 남로당
중앙위원, 선전부장 등으로 활약한
좌익의 거물이었다.
1925년에 태어난 김달삼은
4‧3 무장봉기 당시 23세였다.
어려서 대구로 이주해 소학교를 다녔고,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주오대에서
공부하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육군예비사관학교를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직후 해방을 맞았다.
귀국 후 대구에 거주하던 김달삼은
1946년 ‘대구 10월 사건’에 가담했다.
검거망이 조여 오자 고향 제주로
잠입해 대정중학교 교사로 역사와
공민을 가르쳤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식이 열렸다.
식이 끝난 후 일부 청년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기마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났고,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8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3‧10 총파업’을 주도해 관공서를 포함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파업하는 유례 없는 성과를 얻었다.
이를 기획‧주도한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차세대 리더로 떠올랐다.
1948년 2월 남로당이 주도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는 경찰과 서북청년회(서청)
등 극우 세력의 좌익 탄압이 거세졌다.
무장투쟁을 주장한 김달삼·이덕구 등
20대 강경파는 40대 온건파로부터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김달삼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4.3 진압에 동원된 미군정 기마 경관----
< 제주4.3평화재단 >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오름마다 일제히 봉화가 올랐다.
이를 신호로 인민유격대 350여 명이
제주도 24개 경찰 지서 가운데
12개 지서, 서청 숙소, 대동청년단 등
우익 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했다.
그날 밤에만 경찰 4명, 우익 인사 8명,
유격대 2명이 사망했다.
이후 한라산으로 들어간 유격대는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경찰 지서,
관공서 습격, 경찰‧우익 인사 테러‧
살해, 협조를 거부하는 양민 납치‧살해,
전선‧통신선 절단, 도로 파괴 등을
자행하다가 날이 밝으면 아지트로
돌아갔다.
제주읍을 제외한 제주도 전역이
밤에는 유격대, 낮에는 미군정과 경찰이
지배하는 끔찍한 상황에 빠졌다.
"단독선거 반대"
라는 남로당의 목표는 대성공이었다.
유격대는 양민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산으로 끌고 가 격리했고,
총선 당일까지 투표소 습격‧방화,
폭발물 폭파, 경찰‧공무원 살해 등
방해 난동을 이어갔다.
그 결과, 제주도 지역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갑구(43%)와 을구(46.5%)가
투표율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당선자를 내지
못한 선거구는 북제주 갑‧을구뿐이었다.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의 아이들----
< 제주4.3평화재단 >
이를 악물고 남한의 총선거를 막은
김달삼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지하선거에는 발 벗고 나섰다.
북한은 남한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할당하고 그 3배수인 1080명의
인민대표를 지하선거로 뽑게 했다.
말이 거창해 지하선거였지,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 가는
수준이었다.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 대표 6인도
이런 식으로 ‘선출’되었다.
남한 전역에서 선출된 1080명은
1948년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
(이하 ‘대회’)를 열어 최종적으로
360명이 적힌 명부에 찬반 투표하는
방식으로 대의원을 선출했다.
김달삼 일행은 비밀리에 한라산을
내려와 배편으로 목포로 가서 38선을
넘어 해주로 향했다.
소련 잠수함을 타고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달삼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21일 대회 첫째 날 주석단 선거에서
김달삼은 박헌영·홍명희·김원봉·허헌·
이승엽 등 내로라하는 좌익 인사
34명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대회 휴식 시간에 김달삼을
휴게실로 불러
“제주도 인민들의 피어린 항쟁은
조국의 통일 독립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
이라고 격려했다.
김달삼은 대회 마지막 날 대의원 투표에
앞서 연설했다.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해 인민군,
즉 ‘산(山)사람들’이 총궐기했습니다.
지금까지 지서 습격 31회, 경관 100
명 이상 숙청(살해), 독촉, 서청 기타 반동
400명 이상 숙청, 지서 소각 5곳,
전선 절단 893건, 그 밖에 무기 다수를
노획했습니다.
북조선 민주 개혁이 남조선에서도
하루속히 실시되도록 용감히 싸웁시다.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1948년 5.10 총선거가 끝난 후 유격대에
풀려나 하산하는 제주 주민들----
< 제주4.3평화재단 >
이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김달삼은 9월 2일 평양에서 열린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허헌 등 49명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김달삼은 남한에서 활약할 혁명
간부 양성을 위해 평양 인근 강동군에
설립한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
교육을 받았다.
1949년 3월 태백산지구(제3병단)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임명돼 300여
명의 대원과 함께 남파되었다.
안동‧영덕 방면으로 침투한 김달삼
부대는 민간인과 국군 탈주병을 규합해
한때 600명이 넘는 대부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거듭된 국군의 소탕 작전으로
궤멸 위기에 몰렸다.
김달삼은 북상해 월북을 도모하다가
1950년 3월 강원도 정선군 반론산에서
사살되었다.
빨치산 수괴의 처단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의 지명은
"김달삼 모가지 잘린골"
로 변경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때 김달삼은 월북에 성공했고
전열을 정비해 6‧25 발발 직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가 전사했다고 기록한다.
사후 그에게는 국기훈장 1급이 서훈되었고,
애국열사릉에 가묘가 설치되었다.
김달삼이 월북한 후 이덕구가 인민유격대
사령관 자리를 이어받았다.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0월 23일 이덕구는 50여 곳에 봉화를
올리고 인공기를 게양하고는 이튿날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4개월 동안 유격대와 진압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고,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 과정에 다수의
무고한 양민이 학살되었다.
4‧3사건으로 2만5000~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압군(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86%, 유격대(남로당)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14%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진압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되었고,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
에 대해 사과했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아직
사죄하지 않은 다른 편 가해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청산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김달삼의 가묘----
< 우남위키 >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마운틴 전
다수의 제주인들이 망국좌파의 편을 드는데,
남노당의 반란으로 시작된 43사건이 엉뚱하게
무고한 제주민이 죽은 사건으로만 기억되는
망국 좌파의 선동 프레임에 너무 빠져 있는 탓이다.
억울한 피해자도 있겠으나, 사건의 발단은 남노당의
반란이고,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많이
죽은 불행한 역사임에도, 원인을 야기한 남노당을
거론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의 어리석음에
한심한 생각만 든다.
회원64902197
극악무도한 이승만 친일 패거리들이 선량한
제주 양민을 무차별하게 죽였다.
제주43사건이 이토록 참혹하게 된 시초는 군경의
살육이 원인이다.
duduqls
좌파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4.3사건과 역사뒤집기에
대한 정확한 단죄가 필요하다.
회원02419186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
저 인간 하나때문에 수 많은 희생자 발생!!!!
나아으리
민주당, 좌파, 문제인에 의하면, 이승만 정권이
무차별 양민을 학살했다느건데,
왜 그랬지?
미쳤나?
죄없는 양민을 마구 죽였다?
'남로당의 봉기를 그냥 둘 수 없어 제거하다가
무리해서 양민도 많이 죽게 되었다'라 해야 하지
않을까?
공산 남로당을 그냥 두어야 했던거야?
그렇게 무차별 때려 잡았기에 우리 자유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나?
다리꺼리
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북의 지령에 의하여
방해한 사건이다.
후손들이 잘 알수 있게 홍보 활동을 잘 해야
할 것이다.
노란기차
여론가상과 팩트!
지도자의 사상과 편견!
4.3사건을 시대의 비극이라고 본다면 좌우서로
아픔이고 비극이 맞다!
그러나 팩트를 보면 빨지산 김달삼의 좌익
공산주의자들과 부역자들이 선량한 제주도민과 경찰의
살해와 습격으로 희생이 시작이다!
먼저 본인의사 부역자 공산주의자들은 4.3의
테두리 안에서 존중받을자들 아니고 대한민국내
공산당이였다!
제주도민중 그들후예들은 반성부터 해라!
어데서 좌꼴 대통 밑에서 무조건 군경의
폭력 희생으로 당한것 처럼 ..
그들에게 희생된 도민 군경은 뭔 죄인가?
전국곳곳서 6.25 양민학살만 부각시키지 골수
빨지산 들의 이 민간이 대량 총기. 죽창학살은
온데간데없다! ㅠㅠ
bu
제주 4. 3사건을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다.
그러니 오해를 하여 무조건 우리군과 경찰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 하였다고 좌파들은
선전한다.
먼저 김달삼 좌익 일당들이 양민과 우익인사
경찰관을 학살하였다.
5. 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하여 경찰서를 습격하고
선관위와 선거를 하기위하여 모인 양민을 납치
살해하는 짓을 하였다.
진압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죽은 것이 팩트다.
알면 바르게 나가고 모르는 것이 더 무섭다.
노무현과 문재인 종북주의자이며 극좌다.
허키
노무현, 문재인 같은 색깔이 다른 것들이 수장이
되었었으니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준산
김달삼 이 자는 한민족의 학살자이고 대한민국에
대한 반국가세력이며 제주도민을 죽음으로 이끈
한민족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반민족 행위자이다.
대구에서는 대구폭동으로 수 많은 대구 시민을
학살하고 자기 한 목숨 건지고자 제주도로
도망가서 어떤 세력의 비호하에 학교 선생으로
위장 취업해서 수많은 제주도민을 학살하는 난동을
부린 후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북한으로 가서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을 학살한 행위를 마치
영웅적인 행위라도 한 듯이 의기양양하게
학살행위를 떠벌리다가 북한 앞잡이로 허울뿐인
직책을 부여받고 다시 꼭두각시로 대한민국에
쥐새끼처럼 침투하여 폭동을 일으키려다가 정의의
칼날에 의하여 참수당한 자에 불과하다.
하늘과
공산 반란 문제앙 이었는데.........
억울한 희생자만 부각시켜 43사태 반역을 미화시킨
문제앙 정부........
또생각하는구나
남로당에 의한 희생자들을 경찰에 의한 희생자라고.
주장해온거 아니요 혹시?
대가리에 똥싸뿔라
제주도에 불난 줄 착각하겠네.
북한에 사죄 요청 편지 내가 써주께.
북한에 사는 김정은이는 얼른 제주도민을 희생시킨
4.3 사건에 대해 사죄하라.
스카르피아
한강은 이런 사실을 알고 소설을 썼나?
몰랐으면 무식한 거고 알았으면 나쁜 사람이다.
입바른소리
법원이 이재명의 선거법 위반 2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던 날도 경상도 산골 곳곳에서 산불처럼
봉화가 타올랐다.
직필논객
지금 인민유격대 대장은 리잼명
국민
제주 4.3폭동은 한마디로 공산당이 주도해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공비토벌 작전에서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이
있을뿐 이다.
helpman
이런 사람들이 국회에 많다.
흑강
지금에도 공산주의자가 남아 있다면 발본색원(처단)
하여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을 지켜내야 할 것이다.
sansaram
이와 똑같은 친공 좌익들이 대 환장으로 한때
일부지역을 무법천지를 만들었음에도 이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만들고 그 유공자를 몇십배로 만들어
국민혈세를 흡혈귀처럼 빨아대며 유공자명단을
공개하래도 밝히지도 못한다.
안녕하세요네
철저 가려야 합니다
회원59227452
지금도 잡히고 있는 간첩들에게 선동되지 않도록
지금도 정신 차려야 한다!
선암
글은 잘 읽었는데 빠ㄹ개 ㅇ 이들 쳐부순
경찰등이 극우인가요?
그리고 24.1.11. 제주 4.3위원혀서 결정된 희생자는
14,822명인데 에서 사망 3만명은 어디서 나온
자료인가요?
빨치산 사망자를 희생자로 둔갑시키려는 의도가
있나요?
살며_생각하며
무고한 희생자도 있었겠지만, 정부군에 의해 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공 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그들을 묶어서 용서하면 안 된다.
구로디지털
이념이 개입되면 똑똑한 사람이 완장 차더라.
끝이 안 좋더라.
시베리아 늑대
역사를 왜곡하여 제주4.3폭동을 무슨 민주화운동
처럼 각색,미화한 노무현정권과 문재인정권,
제주도민 표를 위해 이에 부화뇌동 한 보수정권도
비겁한 역사 왜곡의 조연이었다.
이준석 같은 인간도 지금은 원수가 된 허은아의
영향으로 제주폭동을 양민학살로 왜곡한 장본인이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 폭동자들에게, 귀순 기회를
열어주고 설득했으나, 끝까지 관공서 습격, 폭파,
살상등을 일삼아 부득이 군이 진압하는 과정에
발생한 피해만 부각시켜 양민학살로 둔갑한 것이
제주 폭동의 실체
산곡인
제주4.3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킨 개버린이와
더불어만짐당 인간들 역사를 왜곡하면 반드시
벌 받습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시라
무근
이래도 제주 4.3사건이 민주화운동?
우라질 것들.
코헬렛
예나 지금이나 좌빠리들은 죽음을 악용하여 반정부
폭동을 획책하는 일이 여전하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으로 그렇게 선동질하며
이용하더니 무안공항 참사에는 왜 조용한건가?
4.3 때 제주 양민의 죽음은 애석하지만 그들을
진짜 공산주의자와 구별하기가 심히 어려웠던 점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