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8.mp3 4.11MB 2021. 9. 28. 연중 제26주간 화요일(루카 9,51-56)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예수님께서 미리 보낸 심부름꾼들이 할 일은, 예수님과 사도들을 위해서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고 박해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짐 산’의 성전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말은, 뜻으로는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사람들을 불살라 버린 일은 엘리야 예언자가 한 일인데(2열왕 1장),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그것과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한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심부름꾼들에게 한 일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루카 9,20)”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런 죄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들이었다면 자신들이 당한 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1). ‘심판’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악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것을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자신들이 직접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가 됩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에게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와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살라 버릴 능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것은 여기서는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마치 하느님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처벌하려고 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너무 나쁜 악인들을 보았을 때 천벌이 내리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심정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4).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는 가르침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고, 악인이 회개해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에제 33,11).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은(마태 5,45), 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5).”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늦기 전에’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신앙인들이) 할 일은, 안 믿는 사람들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심판받고 멸망을 당하는 것을 바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그 자신이 한때 박해자였기 때문에, 이 말에는 그만큼 더욱 절실한 심정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스테파노 순교와 종교박해 당시에 신자들이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박해자 사울을 죽였다면? 그러면 우리에게는 바오로 사도라는 위대한 사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5) 이 일을,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성전에서 믿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박해자는 유대인들이었고, 사마리아인들은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당한 일은, 유대인들에게 당한 일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작은 앙갚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했던, 또는 박해하고 있는 일들을 먼저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의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면서 하느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자비의 시간’입니다(2베드 3,9).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우선 먼저 ‘자비’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지만, 그 ‘정의’는 ‘무자비한 정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사는, ‘자비를 바탕으로 한 정의’이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