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학교 총각교사 시절
요즘 나이가 더해갈수록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감을 절감하고 있다. 아파트 뒷산에서 가끔 새소리가 들려올 뿐 여느 때보다 조용한 오후, 서재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3년 동안 바닷 속에 침몰되어 있다가 인양한 세월호를 반잠수선에 싣고 외병도 근해를 지나 목포로 향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그 외로운 섬 외병도에서 총각교사로 열정을 쏟던 50여년 전의 고달프고 외로웠던 내 교단 생활들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왔다.
휴전선 부근 비무장지대에서 순찰병으로 근무하다가 제대 복직한 곳이 진도군 관내 섬 학교였다. 낮에는 학생들과 바삐 어울리지만 밤에는 덩그마니 혼자 남게 되는 외딴 섬 학교 생활. 운동장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바닷가에 나서면 시커먼 파도가 금방이라도 기어 올라올 것 같았다. 가난한 섬마을 학교에서 꼬박 6년 동안 근무하면서 외롭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40여 년 간의 교직생활에서 가장 순수하고 보람찼던 시간들이었다.
1. 지금도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
외딴 섬 진도군 조도면 외병도. 진도에서 북서쪽으로 30여km 떨어진, 정기 여객선도 다니지 않는 절해고도. 바닷가 언덕바지에 조개껍질처럼 들어붙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25호에 130여명의 가난한 주민들이 쓸쓸하게 살아가는 외로운 섬마을이었다.
나는 그 바닷가 마을 학교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섬사람들과 꼭 6년을 함께 살았다. 내 나이 스물넷에 들어가 스물아홉 가을에 나왔으니 내 이십대를 고스란히 그곳 섬마을에서 보낸 셈이다.
혼자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여섯 학년을 복식으로 수업했다. 야간에는 ‘청파학원’을 세워 고아와 문맹자들에게 읽기와 쓰기를, 초등학교 졸업생들에게는 중학 과정을 지도했으며, 초등학생의 일기집을 간행하여 그 인세로 가난한 아이를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게도 했다. 또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파독서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음주와 도박의 폐습을 추방하여 마을 기풍을 쇄신시키기도 했다.
처음 그곳에 들어갈 땐, 딱 2년간만 살다 떠나오리라고 작정했었다. 그런데 그만 가난한 주민들과 애들이 측은해지고 정마저 들어서 선뜻 떠나지 못했다. 1년만 더, 1년만 더 하다가 머문 세월이 6년이나 된 것이다. 기쁨보다는 가슴 아리고 서러운 사연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내 작은 힘으로, 어둡고 그늘진 환경 속에서 외롭게 자라온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대대로 가난하게만 살아온 섬 주민들에게 자기들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뿌듯한 보람을 느낀다. 섬마을을 떠나온 지가 6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도 지금도 그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듯하다.
2. 부임하던 날
1961년 9월 8일자로 진도군 임회면 용등초등학교로 제대복직 발령을 받았다. 고향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그렇게 생소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사범학교 2학년 겨울방학 중에 임회면 죽림리가 고향인 동급생 친구와 함께 비누 장사 차 겨울 내내 누비고 다녔던 경험이 있던 탓이다. 또 미군부대 보초병으로 근무하다가 제대 무렵에는 휴전선 최전방 순찰병 생활을 하다가막 제대한 처지라서 그 어떤 어려움도 두렵지 않았다.
4학년을 담임했다.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이 대부분인 학교에 갓 제대한 젊은 교사가 부임하니 우선 교장, 교감 선생님이 좋아하시고, 특히 학생들이 무척이나 반겼다. 학부형들이나 지역 주민들도 모처럼 젊은 선생이 왔다고 환영했다. 우선, 학교 옆 마을에 허술한 방을 하나 얻어 같은 날짜로 장성에서 전입 발령받은 40대 중반 선배 선생님과 자취를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기혼자로 학교 근처 마을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총각 선생이라고 자주 저녁 초대를 해주는 등 따뜻하게 대해 주어서 생활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준비하던 공부(고시 준비)할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근무 시간에는 교장선생님 이하 여러 선배교사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과중한 업무를 맡아 짬이 나지 않았고, 60여명의 내 반 아이들 수업이 끝나면, 오르간을 치지 못해 음악지도를 제대로 못하시는 선배 선생님의 부탁으로 6학년 2개반 음악지도를 하는 등 너무 바쁜 나날이었다. 차분하게 내 공부할 시간을 전혀 확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내 사정을 눈치 챈 선배 한 분이, 마음대로 공부하려면 교사 혼자 근무하는 낙도 분교장으로 들어가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가끔 그렇게 분교에서 고시 합격한 분들이 있었다면서. 하지만 선뜻 정기여객선도 다니지 않는다는 낙도 분교에서 근무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망설이다가 이듬해 3월 1일자로 분교 근무 희망원을 제출했다. 나로서는 대단한 모험이고 용단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대부분 분교 근무를 기피해서 희망만 하면 거의 발령이 나는 때였다. 내 결심을 말하자 선배 선생님들이 서운해 하고, 특히 교장 선생님께서 많이 걱정하시면서도 반드시 뜻을 이루라고 격려해 주셨다. 내 손을 꼭 잡고 격려해 주시던 그 교장 선생님,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그 자상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분교장으로 발령이 날 것으로 기대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막상 3월 1일자 인사 발령에서 제외되었다. 주위에서 모두들 의외라고 했다. 나도 실망과 허탈한 심정이었다. 담당 장학사에게 어떻게 돼서 발령이 안 난 거냐고 항의성 편지를 보냈더니 바로 다음 날 전화가 왔다. 미혼 교사들을 분교장에 발령하면 혼자 근무하면서 불미스러운 사고를 자주 내서 가급적 발령을 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마치 나를 분교로 발령내면 사고라도 낼 사람으로 예단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항변했더니 다음 기회에 고려해보겠다고 했다. 분교장 근무를 단념하고 새 학기가 되어 5학년 담임으로 바쁘게 근무하고 있는데, 3월 20일, 그토록 열망하던 분교장 근무 발령 통지가 왔다. 중간에 갑자기 인사 요인이 발생해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진도군 조도면 상도초등학교 외병분교. 진도읍에서 여객선으로 세 시간쯤 가서 다시 돛단배로 네다섯 시간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는 그야말로 절해 고도였다.
나는 당초 지역사회 개발이나 가난한 섬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려고 분교장 근무를 희망한 건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이 혼자서 자유스럽게 근무하는 분교장에 가서 전부터 시작한 고시 준비만을 열심히 하자는 뻔뻔스런 생각에서였다. 외딴 섬 생활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것인가도 미쳐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내 꿈을 이뤄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무모하게 결단을 내렸던 것인데, 막상 발령통지를 받고 보니 조금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3월 21일 오후, 학생들에게 이임인사를 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전교생들이 교문 밖 한길 양쪽에 늘어서서 손을 흔들면서 배웅해 주었다. 훌쩍훌쩍 우는 아이들, 선생님 가지마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조도행 선착장이 있는 평목을 향해 출발했다. 짐은 조그만 이불보퉁이와 손가방 하나뿐. 내 반 아이 두 세 명이 서로 자진하여 메고 들고 따랐다. 전송하던 아이들 중 100여 명이 그대로 내 뒤를 계속 따르기 시작했다. 들어가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안 했다. 3월 하순인데도 그날따라 눈보라가 치며 지독하게 추웠지만 한사코 따라오는 아이들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6㎞ 정도나 되는 평목에 도착하니 중간에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60여명이 선착장까지 따라왔다. 목포에서 출발하여 조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세월호 참사로 유명해진 평목항이 되었지만, 그때는 부두 시설이 전혀 없이 바닷가 바위에 가까스로 잠깐 접안하여 승선하고 내리는 형편이었다. 눈보라가 계속 휘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대합실도 없어 아이들과 바위 뒤나 언덕바지에 웅크리고 앉아 떨면서 더없이 순진하고 정이 넘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한없이 고맙고 가슴이 뭉클해왔다.
그 추위 속에서 한 시간 정도 덜덜 떨며 기다리고 있는데, 폭풍주의보 때문에 여객선이 오지 않는단다.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되돌려 보내고 하숙하던 집으로 되돌아왔다. 섬에서는 길 떠나는 나그네가 세 번 인사해야 아주 떠나게 된다는 말이 있지만, 떠난다고 인사하고 나섰다가 다시 들어가게 되니 조금은 멋쩍고 미안했다.
다음날 오후에 다시 부임길에 올랐다. 오후 일곱 시경에 정기 여객선이 다니는 상조도 본교에 도착했다. 다음날 외병도로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불어 닥친 폭풍 때문에 일주일이나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여섯 시간 남짓의 지루한 항해 끝에 겨우 외병도에 도착했다. 배가 접안하는 바닷가 모래밭에 몇몇 주민들과 아이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비스듬한 언덕바지에 조개껍질처럼 들러붙어 있는 초가집들이 퍽 쓸쓸하게 보였다. 마을 이장의 안내로 바로 바닷가 언덕에 있는 학교로 갔다. 전임 교사는 벌써 여러 날 전에 떠나버려서 정돈되지 않은 조그만 학교 건물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열 평 남직 되는 낡은 건물의 한 쪽은 교사 숙소인 방 한 칸과 부엌이고 다른 한 쪽이 교실이었다. 여러 날 동안 불을 넣지 않은 방에 불을 지폈다. 마침내 외롭고 고달픈 긴긴 나의 섬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3. 어려운 결단
다음 날, 첫 수업에 들어갔다. 겨우 여섯 평 정도 되는 좁은 교실에 43명의 학생들이 다 낡은 2인용 의자에 3명씩 엉덩이를 붙이고 꽉 차게 앉아 있다. 게다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여섯 학년의 복식 수업인데, 교실이 좁아 학년별 좌석도, 구분도 없이 마구 붙어 앉아 있으니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할지 그저 답답하고 막연했다. 그래도 고학년들은 학습문제를 제시해 주면 어느 정도는 풀어가는 것 같았지만, 이제 입학한지 2주일 정도밖에 안 되는 1학년들은 언제 어떻게 지도해야 할 것인가? 한 학년을 직접 지도하다보면 다른 학년들도 자기네들 공부는 않고 모두들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교사가 한 사람뿐인 단급 분교장에서 어떻게 6개 학년 복식 수업이 가능할 것인가? 4학년 아동은 단 1명뿐인데 그 1명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다른 42명의 학생들을 자율학습 시키는 건 비능률적이고 불합리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바람직한 교육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복식수업에 대한 극히 상식적인 이야길 조금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두세 개 학년의 복식수업 정도이지 이렇게 6개 학년 복식 수업 방법에 대해선 전혀 문외한이라서 더욱 답답했다. 교실이라도 좀 넓었으면 학년별로 분단 편성해서 앉혀 놓으면 지도하기도 훨씬 편리하고 아이들의 주의도 덜 산만할 것 같은데, 좁은 교실에 꽉 차게 앉아 있으니 그 사이를 비집고 돌아다니기도 여간 불편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하루 수업을 마쳤다.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피곤하고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다는 후회가 앞섰다. 새 선생님이 들어왔다고 큰 기대를 가지고 선생님만을 쳐다보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어떻게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인가? 교육하는 일일랑은 아예 제쳐 놓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준비에 몰두하리라던 내 욕심이 잘못이었을까. 티 없이 까만 눈동자들 앞에서 죄책감이 들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외면해 버리면 저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차라리 내 자신을 위한 계획을 좀 늦추더라도 당분간은 오직 아이들 교육만을 위해 봉사해볼까? 아니야 누가 뭐래도 내 처음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거야.’
앞으로의 내 진로에 대한 갈등으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몇 날 동안 고민했다. 저녁에는 내 계획대로 밀고 나가겠다고 단단히 벼르다가도 다음날 아침 아이들 앞에 서면 내 의지가 흔들리곤 했다. 이렇게 갈등의 날을 10여일 보낸 후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 딱 1년만 이곳에 근무하면서 내 개인적인 계획을 미루고, 오직 가난한 주민들과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다른 학교로 떠나리라 다짐했다. 막상 결론을 내리자 차라리 마음이 가벼워졌다, 후련하기까지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선택’이나 ‘결단’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다.
4. 학습카드로 자율학습 훈련
교수학습방법 개선을 위하여 아동 및 지역 사회 실태 조사에 나섰다. 먼저 2학년부터 차례로 국어 읽기와 쓰기 능력을 검사했다. 학년 단계에 맞게 제대로 읽고 쓰는 아이들은 전 학년을 통틀어 몇 명뿐이고, 떠듬떠듬 겨우 읽고 쓰거나,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더욱이 고학년들까지 아직껏 글자를 제대로 해득하지 못했다는 건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하기야 이런 여건 속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대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더욱이 이곳 학생들은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대부분 상급 학교에 전학하지 못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곧바로 생활전선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그들에겐 초등 교육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이곳에서는 학교 교육이 여느 도시 학교처럼 상급학교 진학 준비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학교 졸업 후 바로 실생활에 필요한 생활교육이어야 한다.
그래서 읽고 쓰고 셈하는 기초.기본적인 교육내용을 철저하게 지도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그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곳 외병도는 한 마디로 비참하리만큼 가난했다. 0.66km2 밖에 안 되는 조그만 섬에 논이라곤 단 한 평도 없고, 산비탈에 일군 좁은 자갈밭에 고구마와 보리를 심고, 해초를 뜯어서 겨우 연명해 갔다. 남자들은 3월경부터 초겨울까지 남의 배에 고기잡이를 나가고, 그동안은 마을에 부녀자와 아이들만 남는다. 그래서 농사철과 해초 뜯는 시기에는 일손이 달려 애들도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 남자들은 몇 달 만에 바다에서 돌아와도 대부분 전혀 가정 일은 돌보지 않고 도박이나 술타령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작은 마을에 술집이 네 곳이나 있었다. 이렇게 조상 대대로 음주와 도박 등에 허송하면서 가난의 악순환이 거듭된 것이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면서도 자기들의 가난한 삶에 대한 비관이나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도 부족했다.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무기력하고 나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들에겐 무엇보다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북돋아 주는 일이 시급하고 중요할 것 같았다.
실태를 파악한 다음 아이들에겐 먼저 읽고, 쓰는 능력부터 길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복식학급의 학습지도방법과 교재를 충실히 연구하여, 학습의 결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이 시급할 것 같았다.
다음 날의 수업 준비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6개 학년 교재를 분석해 학년별, 차시별로 학습문제를 추출하여 학습카드를 만들었다. 학습카드는 다음 해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두꺼운 켄트지를 사용했다. 수업시간에 먼저 학습카드를 학년별로 나누어 주고, 그 카드에 제시된 학습 문제에 의하여 각자 개인학습을 한 뒤, 학년별로 공동학습을 하도록 했다. 교사는 1학년부터 차례로 직접 지도를 해 나갔다. 그러다보니 40분 단위로는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여 1시간 수업을 60분 단위로 늘렸다. 또 학년별로 상호 토의하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했다. 몇 개월이 지나니, 고학년들은 제법 자율학습 태도가 길러져 갔다. 하지만 저학년들은 여전히 교사의 눈이 미치지 않을 땐 주의가 산만해지고 소란해져서 전체 학습 분위기까지 어수선하게 만들기가 일쑤였다. 체육과는 전체 학년을 같은 시간에 지도하면서도 학년별 능력차를 고려하였다. 저, 중, 고학년의 세 그룹으로 나누어 주운동의 내용과 요구 수준을 달리 했더니 무난하였다. 음악과와 미술과는 1,2,3저학년과 4,5,6고학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시간표를 짰다. 한 그룹이 밖에 나가 그리기나 만들기를 할 때, 다른 그룹은 음악 지도를 하였다. 오후 정과 수업이 끝난 다음에는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시간씩 읽기와 쓰기의 특별 지도를 실시했다. 한글 해득을 한 몇몇 학생들에게는 다른 학생들의 개별 지도를 맡도록 했더니 퍽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몇 개월 동안 아이들과 씨름하다보니 1학기 말쯤 해서는 1학년 두세 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더듬거리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5. 바다를 막아 운동장을 만들고
바다가 하늘을 닮아 파래지는 5월이 되었다. 암담하기만 하던 복식 수업에 조금은 익숙해졌고, 학생들의 수업 태도도 차츰 잡혀져 갔다. 3년 전에 부락 자체 부담으로 세운 학교 건물은 낡은 가정집을 뜯어다 지은 거라서 창문이 뒤틀려 여닫이가 잘 안 되고, 유리창은 깨진 것이 더 많았다. 책걸상은 당초 높이를 생각하지 않고 똑같은 걸로 구입해서 저학년에게는 책상이 너무 높아 턱이 책상에 닿았고, 덩치가 큰 고학년들에게는 체격에 맞지 않아 불편해 했다. 또 교실을 나서면 바로 바닷가 모래밭이어서 운동장이 없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모래들이 교실까지 날아들어 문을 닫고 수업을 해야 했다.
톱, 망치, 대패를 사다가 창문을 고치고, 책걸상의 다리를 얼마씩 잘라 내거나 덧붙여 학년에 알맞은 높이로 조절하는데 2주일이나 걸렸다. 페인트를 사다가 교실 내외를 도장했더니 한결 밝고 말끔하게 보였다.
운동장을 조성하기 위해 학교 앞 바닷가에 축대를 쌓고 뒷산을 헐어서 흙을 채우기로 했다. 학부형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더니 적극 협조해 주었다. 남자들은 바다에 나가고 부인들뿐이라서 축대는 고학년 남학생 대여섯 명을 데리고 내가 직접 쌓기로 했다. 남들이 할 땐 그리 어렵잖게 보였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몹시도 어렵고 고된 작업이었다. 기껏 하루 하고나니 허리가 아프고 손끝이 닳아서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허지만 우리 애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저희들 몸무게보다도 더 무거운 돌들을 낑낑대며 들어 올려가면서 열심히 쌓아갔다. 이따금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를 힐끗 보곤 씩 웃는 모습들이 대견하고 기특해 보였다. 저 천진한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이곳을 훌쩍 떠날 수 있겠는가? 5월 한 달 동안, 돌을 쌓고 흙을 나르고 하는 힘겨운 작업 끝에 배구장만한 조그만 운동장이 만들어졌다. 비록 좁지만 연약한 부녀자들과 우리 학생들의 힘으로 바다를 막아 운동장을 만든 것이다. 고마움과 대견스러움으로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듬해 봄에 그 운동장 가에 쭉 돌아가면서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심었다. 새로 매립한 척박한 땅이라서 화장실(재래식)에서 분뇨를 퍼다가 구덩이마다 듬뿍 부었더니 가을에는 학교가 온통 키 큰 탐스런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6. 어린이 일기집 발간
1학기가 지나고 9월이 되었다. 이제 겨우 한글 해득을 한 아이들의 읽기와 쓰기 능력을 발달시키고 글쓰기 능력을 기르기 위해 독서, 일기쓰기, 편지쓰기 등을 중점 지도하기로 했다. 책이라곤 교과서 밖에 없고, 매일 보고 듣는 것이 한정된 조그만 섬 안에서만 생활하기에 아이들의 감정은 몹시 단순하고 메말라 있었다. 어린이다운 꿈들이 부족했다. 그들에게 아름다운 동화나 동시, 그리고 위인전 등을 많이 읽혀서 푸른 꿈을 심어 주기로 했다. 우선 본교에서 몇 권의 동화책을 빌려오고 내 봉급에서 약간을 내어 30여권의 책을 준비했다. 그런데 여전히 읽기에 서투른 아이들이라서 대부분 열심히 읽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뒤적이며 삽화나 보는 정도였다. 그래서 매일 방과 후에 10분씩 시간을 내어 동화를 읽어 주기 시작했다. 흥미진진한 동화를 10여 분씩만 읽어 주는 것으로는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들이더니 차츰 직접 책을 읽는 아이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한편 아이들의 글쓰기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고 훈훈한 인정의 샘물을 맛보게 하기 위하여 편지쓰기 지도를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 교육 평론에 게재된 내 졸고 "바닷가 일기"를 보고 편지를 보내온 전북 이리 여고 학생들과 우리 아이들을 일대일로 자매결연을 맺어주고 서로 편지를 교환하도록 했다. 2학년부터는 모두 편지 노트를 준비케 하여 보낼 편지를 먼저 노트에 써오게 한 다음 내가 일일이 내용, 맞춤법 등을 교정해 주고, 다시 정서해서 발송하도록 했다. 처음엔 쓰기를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라서 편지 내용이 단순하고 부실했다. 하나하나 고쳐 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조금은 짜증도 났지만 꾸준히 지도해 나갔다. 한 달에 한두 번씩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게 되니 아이들의 글씨쓰기와 글쓰기 능력이 나날이 나아졌다. 자매결연 누나나 언니들은 아동도서, 의약품, 학용품 등 값진 선물들을 많이 보내주어 아이들을 더욱 기쁘게 했다. 그러나 그런 물질적인 선물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나 주민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은 소외된 지역에서 이웃에 대한 고마움이나 따뜻한 정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온 터에 그들의 메마른 가슴 속에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틋한 정들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해부터는 3학년 이상 전원에게 일기 노트를 한 권씩 사다 주고 일기를 쓰게 했다. 좁은 섬 안에서 지나가는 비행기는 보았어도 기차도,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구경 못한 단조로운 생활을 그대로 일기장에 옮기려니 자연히 날마다 비슷한 내용의 일기가 계속 되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싫증을 느껴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방과 후 일기쓰기 시간을 특설해서 기어이 간단하게 몇 줄이라도 써놓고 하교하도록 했다. 밤 늦도록 그들의 일기를 일일이 읽고 친절하게 조언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한 하루 생활 내용만을 쓰는 것 보다는 책을 읽고 느낀 점이라든가, 산, 바다, 하늘, 바람 등 자연의 변화에 대한 감정이나, 자신들이 아직 가보지 못한 육지에 대한 동경, 상상 등을 주로 쓰도록 이끌어 갔다. 그들의 생각의 세계가 차츰 넓어지고, 그래서 재미있고 풍성한 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꼬박꼬박 써온 애들의 일기는 모두가 그대로 버리기 아까운 내용들이 되어갔다. 일간 신문에 투고하기도 하고, 발췌하여 결연한 언니와 누나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조선일보 김정호 기자의 주선으로, 6학년 김예자 어린이의 일기집 “차라리 이 섬이 없었더라면”을 출간하게 되었다. 가난한 섬사람들의 애달픈 생활상을 읽고 삽시간에 전국 각지로부터 격려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대대로 가난의 굴레 속에서 체념하며 살아온 이 외딴섬 사람들에게 “하면 된다, 우리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산 증거를 보여 준 셈이다. 예자 어린이는 그 후 일기집 발간에서 얻은 인세 수입으로 이 섬에서는 처음으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고 여상고를 졸업하고 중학교 서무과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목회자의 삶을 살고 있다.
7. 청파학원 설립
이 마을에서는 오래 전부터 소먹일 아이들이 없는 집에선 목포 등지에서 떠돌아다니던 고아들을 데려다 부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 중 성품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매일 함께 어울려 지내야 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63년 3월부터 야간으로 그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음 해 4월엔 그들 고아 6명과 문맹자인 동네 아주머니들을 합해 초등반으로 편성해서 문자 해득 지도를 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중등반이라 하여 중학 과정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항시 푸른 바다처럼 넓고 큰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는 뜻에서 ‘청파학원’이라 명명했다. 교재는 초등반은 초등학교 교과서를, 중등반은 서울통신중학강의록을 준비해 사용했다. 6개 학년의 복식 수업과 학교의 모든 일을 혼자서 하는 것만도 벅찼는데, 밤늦게까지 학원생들을 지도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는 천애의 고아들이 한 자 한 자 글을 읽어가고, 중학교를 가지 못해 애달파하는 졸업생들이 영어, 수학 등 중학교 과정 공부를 한다는 자부심으로 밤 늦게까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뿌듯한 희열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65년 2월 1회 수료생 15명을 비롯해서 67년까지 모두 47명을 수료시켰다. 그
중 남달리 영리하여 초등학교 졸업 시 분교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교육감상을 받았던 김한종 군은 광주 시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졸업생들이 각기 직장에서 충실히 근무하거나 마을의 지도자가 되어 떳떳하게 활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8. 청파독서회 조직
차츰 학교 환경이 개선되어 가자, 마을 주민들의 학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교사를 신뢰하고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음주와 도박의 악습만은 여전했다. 겨울철 한두 달 동안 집에 와 있는 남자들은 자고 나면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려서, 그들이 마을에 있는 동안은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을 보다 바람직하게 교육시키고 가난한 마을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술과 도박을 근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누적된 폐습을 교사 혼자만의 힘으로 개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직적인 힘이 필요했다. 마을의 건실한 청년 몇 명을 중심으로 64년 6월에 ‘청파독서회’를 조직했다. 여기저기서 헌 책들을 모으고, 회비를 거출하고, 목포에 거주하는 동향인 유지들로부터 희사를 받아 백여 권의 책을 준비했다. 또 ‘마을문고 중앙회’에 연락하여 문고함을 준비해서, 누구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마을의 중심이 되는 회장집 방 한 한 칸을 치워 마을문고를 설치했다. 누구든지 틈이 나는 대로 와서 책을 보게 하고,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회원 전원이 모여 그간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발표하거나 좋은 내용의 책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월간 잡지 "마을문고" 등에 회원들의 글을 자주 투고하게 하였더니 전국적으로 펜팔 친구들이 생기게 되었다. 서로 독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해 가면서 독서열은 차츰 왕성해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이들은 학교 일이나 지역 발전을 위한 일에 앞장서 주었다. 그렇게 마을에 차츰 활기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청파독서회의 활동이 활발해져 가자 회원들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주민들의 계몽과 봉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먼저 매주 일요일 아침엔 초등학생들과 함께 마을 청소를 하고 골목길을 고쳐나갔다. 또 회원들이 날마다 윤번제로 산림 감시원을 정해서 함부로 나무를 베어다 때는 도벌 행위를 막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이곳 외병도에서 새마을 운동이 비롯된 셈이다.
65년 겨울엔 마을 주민총회를 소집하여 지금까지 조그만 마을에 네 군데나 있던 술집을 아예 없애자는 의견을 제기하도록 했다. 처음엔 완강히 반대하던 어른들도 청년들의 끈질긴 설득에, “요즘은 젊은 사람들 의견이 제일이여, 우리 늙은 사람들이사 젊은 사람들 하자는 대로 따라 가세.”하고 손을 들고 말았다. 내가 이곳에 부임해 온 이래 술집을 없애려고 벼른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조상 대대로 누적되어 온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떤 비약이나 기적을 바라지 않고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는 그런 인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주민들 모두가 자기들도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안내해 갔다. 무지와 가난의 설움 속에서 외롭게 살아오던 외병도 주민들은 참으로 오랫동안의 긴 동면에서 깨어나 서서히, 그러면서도 힘차게 보다 밝은 내일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40여년의 교직 생활에서, 아니 80년 가까운 내 삶에서 뼈아픈 회한도 많고 뿌듯한 보람을 느낀 적도 더러 있지만, 내 20대 그 푸른 6년 동안 외로운 섬마을에서 외로운 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살았던 그 시간들을, 그 정들었던 얼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첫댓글 임천 선생님, 부끄럽습니다. 노인들을 위한 자서전 작성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기관에서 원고 청탁이 있어 제출했던 건데 하두 오래전 일이라서 멋쩍습니다만, 그때는 참 순수한 열정이었습니다. 교직 생활 내내 그 젊은 시절의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특수학교에 10년 가까이 근무했고, 소외받고 있는 결손가정 아동들과 장애인 재활 문제에 줄곧 관심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전 양해없이 글 앞에 댓글을 쓰고 귀한 글 멋대로 자유계시판에 등제함을 관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늘 젊음의 이상,열정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는 정암선생님은 이시대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어 오셨습니다. 선생님은 신의 선택이라는 은혜의 영광을 받았다고 믿습니다.언젠가 등제된 박노혜시인의 시구절이 떠오릅니다. "신은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자를 단련시켜 큰 일을 마끼신다" 정암선생님을 인도하신 보이지 않는 손,그분께 깊은 감사함을 느낍은 많은 제자 동료들,카페회원들 모두 같은 마음이라 믿습니다.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위 청량리역 근처 밥퍼주기 최일도 청년 목사. 음성 꽃마을의 오신부, 외병도의 청년교사 조춘기 이분들이 신의 부름이 없었다면 한사람의 자기 분야의 목사. 신부, 교사로 우리들의 기억에(역사에) 자리하지 않은 평범한 직업인으로서의 자기삶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