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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高麗太祖) 왕건(王建) 家系의 이설(異說)
20124년 06월 30일
○ 「동사(東史)」란 곧 「동국사(東國史)를 말하고 것이고, 동방사(東邦史)이며, 동이국(東夷國)의 역사서(歷史書)」를 말하는 것이다. 옛 동사(東史)에서 말하기를 :
➡ 〈値金雞自滅之期,乘丙鹿再興之運,不離鄕井,便作闕庭,定遼浿之驚波,得秦韓之舊地,十有九載,統一寰瀛. : 금계【金鷄 新羅】가 스스로 멸(滅)하는 시기를 만나고, 병록【丙鹿 麗】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運)를 타서, 향리【鄕里 松岳】를 떠나지 않고, 문득 그대로 대궐(闕庭)이 되어, 요수ㆍ패수[遼浿]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天下)를 통일【統一寰瀛】하였다〉라고 하면서,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큰 업적(業績)을 말하고 있는데,
「신라(新羅)를 병합(倂合)하고, 백제(百濟)를 쳐 항복(降服)을 받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고, 요수(遼水)와 패수(浿水)를 안정(安定)시키고, 후고구려(後高句麗)가 일어나 삼한(三韓)을 하나로 하니 이를 칭(稱)하여 “통일환영(統一寰瀛) 곧 천하통일(天下統一)”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개국(開國)시킨 “왕건(王建)”은 누구냐? 하는 질문(質問)은 너무나 합리적(合理的)인 물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질문(質問)에 대한 답(答)은 매우 불합리(不合理)한 측면(側面)이 매우 강(强)하다. 무려(無慮) “일천(一千) 년(年)”이란 세월(歲月)이 흘렀지만, 누구도 “왕건(王建) 가계(家系)”에 대해서 설명(說明)이 없다.
➡ 그러나 왕건(王建) 이후(以後) “400여 년(餘年)”이 흐른 뒤의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는, 그 시조(始祖)까지도 밝혀져 있다고 자랑스럽게 내밀고 있다. 과연(果然)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어디까지 신뢰(信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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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高麗史節要 卷之二 / 成宗文懿大王 [壬午元年(982), 宋 大平興國七年,遼 乾亨四年]
〈於是,値金雞自滅之期,乘丙鹿再興之運,不離鄕井,便作闕庭,定遼浿之驚波,得秦韓之舊地,十有九載,統一寰瀛,可謂功莫高矣 : 이에 금계【金鷄 新羅】가 스스로 멸망(滅亡)하는 때를 만나고, 병록【丙鹿 : 麗: 高駒驪】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서, 향리【鄕里 松岳】를 떠나지 않고, 편하게 그대로 궐정(闕庭 : 宮闕)이 되어, 요수(遼水)와 패수(浿水)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를 통일【統一寰瀛】하였으니 이보다 높은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업적(業績)」에 대해 말한 것이다.
➊ 「得秦韓之舊地 : 진한(秦韓)의 구지(舊地)를 얻었다.」 :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되어 있다. 또한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한 적이 있다.
도대체 「진한(秦韓)의 옛 땅」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진한(秦韓)의 구지(舊地)”가 한반도(韓半島) 경상도(慶尙道) 땅일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진한(秦韓)」이라는 옛 나라는 한반도(韓半島) 땅에 존재(存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진(秦)」이라는 이름을 가진 옛 나라는 딱히 두 나라(國家)가 있다. 그 하나는 「진(秦)」이요, 또 하나는 「대진(大秦)」인데, 문제(問題)는 이곳에서 전쟁(戰爭)과 사역(事役)과 정치적(政治的) 박해(迫害)와 굶주림(餓) 등을 피해 나라를 버린 백성(百姓)들이 ‘수십(數十)∼수백(數百) 년(年)’인지 모르는 세월(歲月)을 정처(定處)도 없이 떠돌며, 유랑생활(流浪生活)했다는 것이다.
➡ 이를 무엇을 증거(證據)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언어(言語)가 진(秦)과 같았고, 그들의 조직(組織) 명칭(名稱)이 진(秦)과 같았고, 농사(農事)짓는 것들, 스스로 말하기를(自稱) “진인(秦人)”이라고 했다」라는 것이 바로 그 증거(證據)다.
만약(萬若)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말대로라면 : 한반도(韓半島) 경상도(慶尙道) 땅에 ‘주(周)의 제후국(諸侯國) 진(秦)나라가 있었는가? 또 대진(大秦)이 있었는가?”라고 할 텐가?
「진한(秦韓)의 구지(舊地)」라면 : 그곳이 어디를 말하는 걸까? 바로 옛 「진(秦)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진(秦)인가? 대진(大秦)인가? 에 대해서는 추후(追後) 논의(論議)할 예정(豫定)이다】
이러한 옛 기록(記錄)을 보면 : 「동방(東方)이니 해동(海東)이는 하는 땅은 바로 오늘날의 아세아(亞細亞) 대륙(大陸)」을 말하는 것이고, 「동이(東夷)니, 구이(九夷) 또는 구한(九韓)이니, 삼한(三韓)이니, 삼국(三國)이니 하는 옛 나라(國家)들은 한반도(韓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의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➋ 「향리(鄕里)인 송악(松岳)을 떠나지 않고, 이곳을 도읍지(都邑地)로 했다」라는 말이니, 「이곳이 금성태수(金城太守)가 있었던 곳이요, 발아참성(勃禦槧城)이 있는 곳이다」라는 이야기다.
➌ 더불어 패수(浿水) 연안(沿岸)을 토벌(討伐), 무마(撫摩)하고, 요수(遼水) 연안(沿岸) 또한 토벌(討伐)하여 무마(撫摩)시켰다는 뜻이므로, “요수(遼水)”는 고려(高麗) 영토(領土)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➍ 통일환영(統一寰瀛) : 「환영(環瀛)」이란, 기내(畿內) 곧 천자(天子)의 땅과 바다(瀛)를 아우르는 말이니, 곧 “세상(世上) 천하(天下)”를 말하는 것이다. “왕건(王建)”이 19년 만에 삼한(三韓)을 하나로 한 것은, 바로 「천자(天子)의 땅을 포함(包含)한 세상천지(世上天地)를 하나로 했다」라는 뜻으로,
「당시(當時)의 삼한(三韓) 곧 삼국(三國)의 땅은, 천하(天下)를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말과 같다. 한반도(韓半島) 땅을 “천하(天下)”라고 한다면 : 「우리는 우물(井) 속에 갇혀 사는 세상물정(世上物情) 하나 모르는 개구리(蛙) 신세(身世)일 뿐이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왕건(王建)은 누군가? 그러나 그 답(答)은 없다. 누구도 “왕건(王建)”에 대해 설명(說明)하지 않는다. 왕건(王建)의 부(父), 증조(曾祖), 고조(高祖) 및 그 선대(先代)는 누구냐? 하는 것에 ’누구도 답(答) 곧 설명(說明)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率直)하게 말하면 : “왕건(王建)과 그 선대(先代) 조상(祖上)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라는 것이다.
아래의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보는 :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의 세가(世家)
[한국어 위키백과] : 〈가계는 증조부 이전은 다소 불확실한데, 언제부터 그가 왕씨 성을 사용했는가는 불확실하다. 증조모 진의(정화왕후로 추존)는 고구려 유민인 강호경과 강충의 후손으로 신천의 호족인 강씨(康氏) 가문이었다. 고려 때 관찬된 편년통록에 의하면 그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라 하며 이름은 '왕건'이다. 다만, 전설적인 면이 강하여 사실성은 의심받고 있다. 고려 왕실 공식 족보인 고려 성원록, 왕대종족기에는 작제건이란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고 증조부와 조부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따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 신천 강씨 일족은 왕건의 증조부의 외가쪽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의종때 김관의가 태조 왕건의 족보를 채집해 기록한 고려편년통록(高麗編年通載)에 의하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증조모 정화왕후 강씨(貞和王后 康氏)는 고구려계 신라 사람인 강충(康忠)의 증손녀이자 고구려 출신의 신라 장군 강호경(康虎景)이 그녀의 증조부이다. 태조 왕건은 집안 가계 상 고구려의 먼 후손에 해당한다.[6][7] 중략(中略). [출처(出處) 인용(引用) : 한국어 위키백과]〉하였는데, 즉(卽), 「아는 사람이 없다」라는 뜻이다. 살펴보면 :
➊ “왕건(王建)”의 선계(先系) 기록(記錄)을 참고(參考), 인용(引用), 고증(考證)한 것이 아니라 : 일부(一部)의 참고(參考) 인용서(引用書)를 보면 : 오늘날의 세계일보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6> 진주 강씨, 신천 강씨 등을 인용(引用)했다는 것은, 기가 막히는 일이다.
“한반도(韓半島)인들의 선계(先系)에 대한 족보(族譜) 타령(打鈴)이 유난하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 너무 의외(意外)라 할 수 있다. “왕건(王建)의 가문(家門)은 그 이상(以上)은 알 수 없다.”라는 뜻이다.
또 한편으로는, 사학자(史學者)들이 공부(工夫), 연구(硏究)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면 : 「21세기(世紀) “뿌리 찾기” 논문(論文)을 가지고 10세기(世紀), 왕건(王建)의 선계(先系)와 연계(連繫)시키겠는가! 하는 한심(寒心)함이다.」
➋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선계(先系)는 알 수 없다」라는 것이고, 「증조부(曾祖父)까지는 알려져 있으나, 그 이상(以上)은 모른다」라는 말은 곧 「왕건(王建)은 신라인(新羅人)이 아니었다」라는 뜻과 같고, 이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특히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했다면 : ’고구려인(高句麗人)‘이어야 맞는 말이다.
’왕건(王建)의 선계(先系)‘도 모르는 판에 : 「정화왕후 강씨(貞和王后 康氏)는 고구려계 신라 사람인 강충(康忠)의 증손녀이자 고구려 출신의 신라 장군 강호경(康虎景)이 그녀의 증조부이다.」라는 것은 21세기(世紀) 오늘의 설명(說明)일 뿐이다. 무엇으로 일천(一千) 년(年) 전(前)이나 또 그 전(前)의 선대인(先大人)에 대해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➌ 여기서 왕건(王建) 이후 ‘5 백년(百年)’이 지난 뒤의 조선(朝鮮)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선계(先系)【선원록(璿源錄) : “조선(朝鮮) 왕실(王室)의 족보(族譜). 숙종(肅宗) 때 처음 간행(刊行)한 뒤에, 새 임금이 즉위(卽位)할 때마다 보간(補刊)하다가 광무(光武) 1년(1897)에 모두 합(合)쳐서 펴냈다. 총서(總序), 범례(凡例), 선계(先系), 계서도(繼序圖), 세계(世系), 팔고조도(八高祖圖) 따위를 수록(收錄)하였다”라고 전해진다.】를 보면 :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이한(李翰)은 선원선계(璿源先系)에 의하면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結婚)하였고,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이다.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때도 족보(族譜)가 있었다? 가계도(家系圖)가 있었나? 이건 쉽게 말해 “뻥”이다. 적당(適當)히 만들어낸 창작물(創作物)과 같은 것이다.
➍ 「왕건(王建)은 신라(新羅) 말(末)에 태어났음에도 증조부(曾祖父) 그 이상(以上)의 선계(先系)를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이성계(李成桂)의 선계(先系)는 적당(適當)히 만들어낸 것이다」라는 것이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일 수밖에 없다.
‘5∼10’ 대조(代祖)도 아니고, 겨우 증조부(曾祖父)【아버지(父)의 할아버지(祖父)】밖에 모른다? “증조부(曾祖父)” 그 이상(以上)의 선대(先代)는 알려진 바 없다는 뜻은, “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事件)이 아니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 또 하나의 예(例)를 들어보자.
고려 세조(高麗 世祖)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고려 세조(高麗 世祖)【? ~897년 5월 (음력)】: 고려 세조 왕륭(高麗 世祖 王隆, ? ~ 897년 음력 5월)은 후삼국시대 후고구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고려의 추존왕이며 태조 왕건의 아버지다.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송악의 호족이었다가 892년 궁예가 군왕을 자칭하고 거병하자 송악군의 사찬(沙湌)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그의 휘하에 들어갔고,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역임하였다. 초명은 용건(龍建)이라 전하나 고려사의 원본인 고려실록과 고려 왕실 공식 가계인 왕대종족기, 고려 성원록 같은 정사서나 왕실 계보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자는 문명(文明), 묘호는 세조(世祖)이고, 시호는 위무대왕(威武大王)이다. 1027년(현종(顯宗) 18)에 원열(元烈)의 시호가 추가되고 1253년(고종(高宗) 40)에 또 가하여 민혜(敏惠)라 하여 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이 되었다. [출처(出處) : 한국어 위키백과]
➊ “왕건(王建)”의 아버지(父)는 왕륭(王隆, ?~897)으로, 후고구려(後高句麗)의 정치인(政治人), 군인(軍人)이었다. ➋ ‘송악산(松岳山)=송악산(松嶽山)’ 남(南)쪽 기슭에서 살며, 지방의 ‘호족(豪族)=토호(土豪)’였다.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飡)으로 궁예(弓裔)의 휘하(麾下)가 되고, 금성태수(金城太守)를 지냈다. ➌ 「초명(初名)은 용건(龍建)이라 전하나 고려사의 원본인 고려실록과 고려 왕실 공식 가계인 왕대종족기, 고려 성원록 같은 정사서나 왕실 계보 등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 송악군(松嶽郡) : 여러 설명(說明)이 있지만 「개성(開城) 땅」을 말하는 것이다.
• 송악군(松嶽郡)의 토호(土豪)=호족(豪族) : 이곳 땅의 ‘토호(土豪)=호족(豪族)’ 출신가(出身家)가 자신(自身)들의 4대조(代祖) 조상(祖上)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땅,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었다고 하는 「수많은 성씨(姓氏)들의 족보(族譜)는 모두가 가짜라는 이야기가 뭐가 다른가?」 특별(特別)한 몇 가계(家系)를 뺀 대부분(大部分) 족보(族譜)는, 대한제국(大韓帝國) 말기(末期)로부터 일제(日帝)시대를 거쳐 1,980년대에 정점(頂點)을 이뤄, 이때 “족보(族譜) 장사”가 쾌 ‘큰돈을 벌었다’라고 전(傳)해지기도 했는데, 이때 각 족보(族譜)에 이름을 올릴 자(者)들이 대부분(大部分)이었는데, 오늘날 이들이 큰소리치며 “몇 대 선조(先祖)를 들먹이며 입에 침을 튀긴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금성태수(金城太守)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보면 : 「世祖,爲松嶽郡沙粲,以郡歸于裔,裔喜,卽以爲金城太守. : 세조(世祖)는 송악군(松嶽郡)의 사찬(沙飡)이었는데, 그 고을을 거느리고 궁예에게 귀부(歸附)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즉시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라고 하였는데,
금성태수(金城太守)가 있는 곳이 어떤 땅이냐? 하는 것이다. 위의 기록(記錄)으로 보면 : 송악(松嶽)의 토호(土豪)요, 호족(豪族)이었으니 당연(當然)히 송악군(松嶽郡) 태수(太守)로 임명(任命)했어야 합당한 것인데, 갑자기 금성태수(金城太守)라니 이게 뭔 일이겠는가?
결국(結局) 「송악군(松嶽郡)이 금성(金城)이요, 이곳 태수(太守)가 되었다」라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어디가 “금성(金城)”이라는 건가? 김화군(金化郡)이니 금성현(金城縣)이니 하는 강원도(江原道) 땅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전혀 관계(關係)없는 땅이다. 이곳을 금성군(金城郡)으로 하고 이곳에 태수(太守)가 있을 만한 곳인가? : 그 전고(典故)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금성군(金城郡)이 김화군(金化郡)으로 다르게 부르게 된 이유(理由)는 뭔가?
➡➡ 동사강목(東史綱目) 병진년 진성 여주 10년(당 소종 건녕 3, 896) : 「弓裔以王隆爲金城太守。王建爲勃禦槧城主。: 궁예(弓裔)가 왕륭(王隆, ?~897)을 금성 태수(金城太守)로 삼고 왕건(王建)을 발어참성주(勃禦槧城主)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니, 곧 「발아참성(勃禦槧城) : 개성(開城)에 있다」라고 설명(說明)한다. 결국 “금성(金城)은 곧 개성(開城)”을 말하는 것이다.
• 본래(本來)의 이름이 「용건(龍建)」인바 : 고려실록(高麗實錄), 왕대종족기(王代種族記), 고려(高麗) 성원록(聖源錄)등의 정사(正史)에도 왕실계보(王室系譜) 등에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 이와 같은 설명(說明)에 따르면 : “왕건(王建)은 한반도(韓半島) 출신(出身)이 아니었다”라는 주장(主張)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원전(原典), 한글 해설서(解說書) 등 이곳저곳 찾아봐도 “왕건(王建)”의 선계(先系)는 3 대조(代祖) 이상(以上)을 찾을 수 없다. 또 그의 아버지(父)와 관계(關係)되는 것 조차도 불확실(不確實)한 기록(記錄)이 대부분(大部分)이다.
「삼한통일(三韓統一)를 이뤄, ‘통일환영(統一寰瀛)=천하통일(天下統一)’을 이룬 것은, 단군(檀君) 이래(李來) 최대(最大)의 업적(業績)이었다. 더불어 한 지방(地方)의 ‘호족(豪族)=토호(土豪)’가 될 수 있었다면 이곳 땅에서 여러 대(代)에 걸쳐 살면서 공(功)을 이루고 부(富)를 축적(蓄積)하여 왔다는 것인데, 몇 대(代)는 고사하고 아버지(父)에 관한 것조차 불분명(不分明)하다」라는 말은,
「“왕건(王建)”은 한반도(韓半島)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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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唐) 숙종(肅宗)의 손자(孫子),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
〈原文 : 芝峯類說 卷三 君道部 世代 : 輿地勝覽。載唐肅宗潛邸時。欲遍游山川。涉海到松嶽郡。寶育以女薦枕。留期月而別。遂生男曰作帝建。卽高麗太祖之祖也。世傳忠宣王在元。有翰林學士謂曰。聞王之先。出於唐肅宗。何所據耶。閔漬對曰。非肅宗。乃宣宗也。學士以爲然。按周官六翼曰。宣宗隨商船渡海。又事文類聚曰。唐宣宗微時。以武宗忌之。遯迹爲僧。遊方外云。考其時世則宣宗似然矣。[출처(出處) : 고전번역원 DB]〉
➊ 〈輿地勝覽。載唐肅宗潛邸時。欲遍游山川。涉海到松嶽郡。: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당(唐) 숙종(肅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산천(山川)을 유람(遊)하고자 하여, 바다를 건너 닿은 곳이 송악군(松嶽郡)이다. 寶育以女薦枕。留期月而別。遂生男曰作帝建。卽高麗太祖之祖也。: 귀하게 자란 여자를 만나 한 달 정도 머무르며 잠자리 시중을 들고 헤어졌는데, 마침내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제건(帝建)이라 하였다. 즉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할아버지(祖)이다. ➡ 世傳忠宣王在元。有翰林學士謂曰。聞王之先。出於唐肅宗。何所據耶。閔漬對曰。非肅宗。乃宣宗也。學士以爲然。: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고려 충선왕이 원(元)에 머무르고 있을 때, 한림학사가 이르기를, “너의 왕조(王祖)는 듣기로, 당(唐)의 숙종(肅宗)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근거(據)로 한 것이냐? 하였다. 민지(閔漬)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숙종(肅宗)이 아니라 선종(宣宗)이다”라고 하니 학사(學士)가 그런 것이냐 하였다. 按周官六翼曰。宣宗隨商船渡海。又事文類聚曰。唐宣宗微時。以武宗忌之。遯迹爲僧。遊方外云。考其時世則宣宗似然矣 : 안(按) 주관육익(周官六翼)이 말하기를, “선종(宣宗)이 상선(商船)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하였고, 또 ‘사문류취’에 따르면, 당(唐) 선종(宣宗)이 어렸을 때이다. 무종(武宗)은 이를 꺼려하였으나, 달아나 승(僧)이 되었다는 소문을 남겼다. 사방 밖으로 유람하였다고 전한다. 상고해 보면, 이 시대는 선종(宣宗)과 같은 때이다」라고 하였다.〉
➋ 위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인용(引用)한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대해서 원전(原典)을 보지 못했으니, 다만 “지봉유설”의 글 속에서 확인(確認)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당(唐) 숙종(肅宗)의 아들이 곧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의 할아버지(祖父)였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당(唐) 숙종(肅宗)의 후손(後孫)”이란 이야기다.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또 다른 고증(考證) 자료(資料)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왕건(王建)의 선대(先代)에 대한 자세(仔細)한 기록(記錄)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위의 설명(說明)이 어떤 암시(暗示)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나아가 “당(唐)은 곧 신라(新羅)”라는 증거(證據)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➌ 결과론(結果論)이나, “고려(高麗)”는 반도(半島)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 대륙(大陸)의 제국(帝國)이었다』라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고려(高麗)를 이은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 역시 대륙(大陸)의 제국(帝國)이었음은 부인(否認)할 수 없다.”
(3) 국조사(國祖祠) :
국조(國祖)는 국조 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 보육(寶育)을 말한다. 보육의 딸 진의(辰義)는 당 숙종(唐肅宗)에게서 작제건(作帝建)을 낳고 작제건(作帝建)은 융(隆)을 낳고, 융(隆)은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을 낳았다. 이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의논이 분분한데, 자세한 내용이 《송경지(松京誌)》 권7 〈고적(古蹟)〉에 보인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위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왕건(王建)의 가계(家系)는 3대조(代祖) 그 이상(以上)은 모른다는 말과 연계(連繫)되는 내용이다. 곧 고조(高祖)가 바로 당(唐)의 숙종(肅宗)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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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東國輿地志 2권 / 경기우도(京畿右道) 장단진(長湍鎭)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高麗金寬毅《編年通錄》云:中略. 唐肅宗潛邸時,欲遍遊山川,以天寶十二載癸巳春,涉海至松嶽郡,抵摩訶岬養子洞,寄宿寶育第,見兩女悅之,請縫衣綻。寶育認是中華貴人,卽令長女應命。纔愈閾,鼻衄而出,代以辰義,遂薦枕。: 고려(高麗)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의하면 : 당(唐) 숙종(唐肅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자 하여 천보(天寶) 12년(753) 계사년 봄에 바다를 건너 송악군(松嶽郡)에 이르러 마하갑 양자동(養子洞)에 도착하여 보육(寶育)의 집에 기숙하였다. 두 딸을 보고는 기뻐하면서 터진 옷을 꿰매 줄 것을 부탁하자, 보육(寶育)이 그가 중화(中華)의 귀한 사람임을 알아채고는 즉시 장녀(長女)에게 명을 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장녀가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나니 진의(辰義)에게 대신하게 하여 마침내 천침【薦枕 : 잠자리 시중을 드는 것】하게 하였다. 留期月,覺有娠,臨別云:‘我是大唐貴姓’ 與弓矢曰:‘生男,則與之’ 果生男曰作帝建。後追尊寶育爲國祖元德大王,其女辰義爲貞和王后。: 약속된 한 달을 머물렀는데 진의(辰義)가 임신한 것을 알고는 이별 때에 말하기를 : ‘나는 대당(大唐)의 귀성(貴姓)이다.’라고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그에게 주라.’라고 하였다.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이 작제건(作帝建)이다. 후에 보육을 추존하여 국조 원덕대왕(國祖元德大王)으로 삼고, 보육의 딸 진의는 정화왕후(貞和王后)로 삼았다.” 하였다.〉
〈忠宣王在元,有翰林學士從王遊者,謂王曰:“嘗聞王之先出於唐肅宗,何所據耶?肅宗自幼未嘗出閤,祿山之亂,卽位靈武,何時東遊,至有子乎?” 王大慙不能對。: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한림학사 중에 충선왕과 종유한 사람이 있었다. 충선왕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왕의 선계(先系)가 당 숙종(唐肅宗)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무엇을 근거로 한 것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대궐을 나간 적이 없고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언제 동쪽으로 유람하여 아들까지 둔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충선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閔漬從旁曰:此我國史誤書耳。非肅宗也,乃宣宗也。 민지(閔漬)가 곁에서 말하기를 : 우리 국사(國史)에 잘못 기록된 것일 뿐입니다. 숙종(肅宗)이 아니고 바로 선종(宣宗)입니다.”라고 하였다. 學士曰:若宣宗久勞于外,庶或然也。: 학사가 말하기를 : 만일 선종(宣宗)이라면 외지에서 오랫동안 고생하였으니 혹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5) 동사강목(東史綱目) 제 5 하 [기묘(己卯) 三年, 甄萱二十八年 高麗太祖二年(919)]
〈高麗追封三代。曾祖爲國祖元德大王。妃爲貞和王后。祖爲懿祖景康大王。妃爲元昌王后。考隆爲世祖威武大王。妃韓氏爲威肅王后。: 고려가 삼대(三代)를 추봉(追封)하였다. 증조는 국조 원덕 대왕(國祖元德大王)이라 하고, 비(妃)는 정화 왕후(貞和王后)라 하였으며, 할아버지는 의조 경강 대왕(懿祖景康大王), 비는 원창 왕후(元昌王后)라 하고, 아버지 융(隆)은 세조 위무 대왕(世祖威武大王), 비 한씨(韓氏)는 위숙 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
삼(三) 대조(代祖) 그 이상(以上)은 “모른다”라는 것과 연계(連繫)되는 것으로, 위의 글 ‘(3)’의 설명(說明)과 똑같은 내용(內容)이다.
(6) 성호사설 제27권 / 경사문(經史門) 왕건세계(王建世系)
王建世系 : 按麗史王太祖父世祖名隆祖懿祖曽祖元徳大王實為始祖妃貞和王后皆太祖追尊者也 : 〈고려사〉를 고찰하건대, “왕태조(王太祖)의 아버지인 세조(世祖)의 이름은 융(隆)이고, 조부는 의조(懿祖)이며 증조는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니 실로 시조가 되고 비(妃)는 정화왕후(貞和王后)이다.”고 하였으니, 모두 태조가 추존한 것이다. 㩀松都志聖骨將軍虎景生阿干康忠康忠生居士寶育是為國祖元徳大王王生女辰義配唐貴姓生作帝建是為懿祖懿祖生龍建是為世祖所謂貴姓指宣宗云 : 송도지(松都志)에 의하면,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의 자호(自號))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居士)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가 국조(國祖)인 원덕대왕이며, 대왕이 딸 진의(辰義)를 낳아 당(唐)나라 귀성(貴姓)에게 시집가서 아들 작제건(作帝建)을 낳으니 이가 의조이고, 의조가 용건(龍建)을 낳으니 이가 세조이다.”고 했는데, 이른바 귀성이란 당선종(唐宣宗)을 가리킨 것이다. 寶育之女為貞和公主則見扵牧隱集而元徳之妣為貞和后此豈有誤然則貴姓指元徳而松都志之誤無疑作帝建為懿祖龍建為世祖隆與龍音相類而訛也.三世皆以建名則王建之非姓王而一字名可知 : 그러나, 보육(寶育)의 딸이 정화공주(貞和公主)라는 말이 〈목은집〉(牧隱集)에 나타나 있는데, 원덕(元德)의 비(妃)가 바로 정화후(貞和后)이니, 이는 혹시 틀림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귀성이란 원덕을 가리킨 것으로서, 송도지가 틀렸음이 의심없다. 그리고 작제건이 의조가 되고 용건이 세조가 되었는데, 융(隆)이라 한 것은 용(龍)자와 발음이 서로 비슷한 관계로 그릇된 것이다. 삼대(三代)가 모두 건(建)으로써 이름하였으니, 왕건(王建)은 ‘왕’자가 성이 아니고 ‘왕’자 하나만이 이름임을 알 수 있다. 太祖之未生道詵已說與世祖曰明年必生聖子宜名王建因作實封題其外曰謹奉書百拜獻于未来統合三韓之主大原君子足下王建之二字名尤明諸侯祀及四世而止扵三世者為元徳以上不知也 : 태조가 출생하기 전에 도선(道詵)이 세조에게, “명년에는 반드시 성자(聖子)를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이라 하라.”하고는 이어 봉서[實封]를 만들고 그 피봉에, “삼가 이 글을 받들어 백배(百拜)하며 앞으로 삼한을 통합할 임금 대원군자 족하에게 올린다.”[謹奉書百拜獻于未來統合三韓之主 大原君子足下]라고 썼으니, 왕건 두 글자가 이름임이 더욱 분명하며, 제후(諸侯)는 사대(四代)까지 제사하는 것인데 삼대에 그친 것은, 원덕 이상은 알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貞和之父寶育以上三世則是異姓之祖故不在世數盖將軍阿干非賤人而女嫁客商其不冐李姓者或羞耻不欲顯言故耶然既云 : 즉 정화(貞和)의 아버지 보육 이상의 삼대는 이성(異姓)인 조상이므로 대수(代數)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장군이나 아간(阿干)은 미천한 신분이 아닌데, 딸이 객상(客商) 따위에게 시집갔으므로, 그 이가(李哥) 성을 무릅쓰지 아니한 것은 혹 수치스러워서 나타나게 말하지 않으려고 한 까닭이었는지? 貴姓則當是宗商而其曰宣宗東人之濫引也宣宗鞱晦僅免豈敢與外國交通乎 : 그러나 귀성이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종실(宗室)의 후예일 것이지만 당 선종이라고 한 것은 우리 동방 사람들이 외람되게 끌어댄 것이다. 선종은 그 자취를 감춰서 겨우 생명을 보존하였는데, 어찌 감히 우리 동방과 더불어 통상하였겠는가? 金寬毅通錄唐肅宗随客舶到開州之錢浦云云忠宣王之在元有學士謂王曰甞聞王之先出扵唐肅宗肅宗何甞東逰至有子乎王不能對閔漬従旁對曰我國史誤書耳非肅宗乃宣宗也學士曰宣宗乆勞于外庶或然也 :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당 숙종(唐肅宗)이 객선(客船)을 따라 개주(開州)의 전포(錢浦)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충선왕(忠宣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적에 어떤 학사(學士)가 왕에게, “일찌기 듣건대, 왕의 선조가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숙종이 언제 동방에 나가 놀았으며 아들까지 두게 되었었는가?”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지 못하자, 민치(閔漬)가 옆에 있다가, “우리나라 역사를 잘못 쓴 것이다. 숙종이 아니라 바로 선종이다.”고 하였다. 그제야 학사가, “선종은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하였으니 혹 그랬을 듯도 하다.”고 하였다. 然則國史之所傳實肅宗而以其世數遼逺故閔漬剏為臆對如李齊賢金鷄垂柳之類都無根㩀而元徳王之為外國人則信矣 : 그렇다면 국사에 전해 오는 바로는 실로 숙종인데, 그 대수(代數)가 멀기 때문에, 민치(閔漬)가 억견(臆見)을 내세워 대답한 것이며, 이제현(李齊賢)의, 금계수류(金鷄垂柳)라는 유(類)도 도무지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원덕왕은 외국 사람임이 사실이다. 既不襲貴姓則寕依神僧所命名而為姓故王姓而建名耶. : 기위 귀성을 따르지 않은 지라, 차라리 신승(神僧 도선(道詵)을 이름)이 명명한 것에 의하여 성(姓)으로 삼았으므로 성을 왕(王), 이름을 건(建)이라고 한 것이 아닌지?〉라고 하였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올바른 주장(主張)인가?
위의 여러 글을 보면 : 왕건(王建)의 선대가계(先代家系)는 증조부(曾祖父)가 끝이다. 그럼 증조부(曾祖父)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동물세계(動物世界)에서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 이건 “왕건(王建)의 고조부(高祖父)에 대한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작품(作品)이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實際) 왕건(王建)의 고조부(高祖父) 그 이상(以上)의 선대(先代)」에 대해서는 : 당시(當時)의 대신(大臣)이나 학자(學者)들은 그 선대(先代)를 아름답게 미화(美化)하고 의로운 영웅(英雄)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고조부(高祖父)에 대해 밀 못할 사정(事情)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게 바로 당(唐) 숙종(肅宗)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합리적(合理的)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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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海東繹史 고려(高麗) : 「당(唐) 선종(宣宗) 계(系) 왕건(王建)」
海東繹史 12권 世紀 12 고려(高麗) 1 : 〈葢高麗起於高句驪舊地故。稱高麗也。: 대개 고려(高麗)는 고구려(高句驪)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고려(高麗)라고 칭한 것이다. 王氏之先。東史或以爲。出於唐宣宗。而此不可詳。: 왕씨(王氏)의 선조에 대해서 동사(東史)에서는 혹 당나라 선종(宣宗)에게서 나왔다고도 하나 이는 자세히 알 수 없다. 然世仕新羅。至太祖父金城太守隆。始居松嶽。生太祖。: 대대로 신라에서 벼슬하다가 태조의 아버지인 금성 태수(金城太守) 왕륭(王隆)에 이르러서 비로소 송악(松嶽)에 살면서 태조를 낳았다. 而薛居正舊史唐餘錄。歐陽史徐兢圖經皆云。王氏代高氏得國。: 그런데 설거정(薛居正)의 구사(舊史 : 舊五代史)와 당(唐)의 남은 기록들 및 구양수(歐陽脩)의 신오대사(新五代史),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모두, “왕씨(王氏)가 고씨(高氏)를 대신해서 나라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宋史因之亦云。後唐同光天成中。其主高氏累奉職貢。長興中權知國事王建。承高氏之位。遣使朝貢。皆誤也。: 송사(宋史)에서는 이를 따라 역시 “후당(後唐) 동광(同光)과 천성(天成) 연간에는 그곳의 임금인 고씨(高氏)가 여러 차례 조공하였고, 장흥(長興) 연간에는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이 고씨의 왕위(王位)를 이어받고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 이 모두가 “오(誤)”라고 한다면 : 그럼 무엇이 진실(眞實)이었다는 말일까? 또 아래의 기록(記錄)을 보자.
그 첫머리에 : 「按高麗之麗 : 살펴보건대(按) ‘고려(高麗)의 려(麗)’는… …」라고 하였으니,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저자(著者)가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곧 “해동역사(海東繹史)의 저자(著者)가 보건대 사서(史書)에 기록된 내용(內容)은 모두 오류(誤謬)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답(答)이 있다. 첫째는 “해동역사(海東繹史) 저자(著者)가 진실(眞實)로 오류(誤謬)라고 생각한 것”이고, 두 번째는 “교정(校訂), 교열(校閱), 재편찬(再編纂)등의 이유(理由)로 첨삭과정(添削過程)을 거쳤을 것”이라는 이유(理由)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개인(個人) 문집(文集) 및 동사(東史)의 여러 사서(史書), 지리지(地理志) 등 대부분(大部分)이 일제식민(日帝植民) 시대(時代)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여러 이유(理由)로 재간(再刊)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원(願)하는 바에 따라, 첨삭(添削)이 가능(可能)하고, 원문(原文)을 보면서 그 원문(原文)과 전혀 다르게 새로운 역사서(歷史書)로 탈바꿈, 편집(編輯)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문(原文)은, 열도(列島) 땅에 보관(保管)되어 있는 것들도 있으며, 이를 필사(筆寫)한 것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문집(文集)에도 포함(包含)되어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7)- 1) 〈自立復稱高麗王。以開州爲東京。平壤爲西京。建儉約寡厚。國人安之。: 자립(自立)하여 다시 고려왕(高麗王)이라고 칭하였으며, 개주(開州)를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왕건(王建)은 검소하고 관대하였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라고 하였다.
➡ 자립(自立) 스스로 일어나, “다시(復) 고려왕(高麗王)이라고 칭(稱)했다”라는 말은, 「이전(以前)의 ‘고려(高麗)=고구려(高句驪)’의 왕(王)을 이었다」라는 뜻이다.
더구나 「‘개주(開州)=개성(開城)=송악(松嶽)’을 동경(東京)으로 삼고,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삼았다」라는 말은,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다.
옛 고구려(高駒驪)와 같이 ‘동서(東西) 6 천리(千里)’로 뻗쳐있을 때, 「서(西)쪽의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하고, 동(東)쪽에 있는 개주(開州)=개성(開城)=송악(松嶽)을 동경(東京)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원문(原文) 내용(內容)에 따르면 : ‘개주(開州)=개성(開城)=송악(松嶽)’의 서(西)쪽에 평양(平壤)인 서경(西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곧 「고려(高麗)는 반도(半島) 땅에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7)- 2) 〈資治通鑑。本註。徐兢高麗圖經曰。高麗王建之先。高麗大族也。: 자치통감(資治通鑑) 본주(本註)에는,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말하기를, ‘고려 왕건의 선조(先祖)는 고구려(高句驪)의 대족(大族)이다. 高氏政衰。國人以建賢。遂共立爲君長。: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미해지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王建)이 어질다고 여겨 드디어 함께 추대해서 군장으로 삼았다. 後唐長興三年。自稱權知國事。請命于明宗。乃拜建大義軍事封高麗王。: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932)에 권지국사(權知國事)라고 자칭하면서 명종(明宗)에게 청명(請命)하니, 명종이 대의군사(大義軍事)를 제수하고 고려왕(高麗王)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著者)인 서긍(徐兢)은 이러한 사실(事實)을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當然)히 사신(使臣)으로 고려(高麗) 땅을 방문(訪問)했고, 이러한 사실(事實)은 고려(高麗)의 관리(官吏)들로부터 전(傳)해 들었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確實)한 것이다.
〈按徐兢宣和之間。使高麗進圖經。紀載踈畧。因其國人傳聞。遂謂建得國於高氏之後。不知建實殺躬乂而得國也。: 살펴보건대, 서긍이 선화(宣和) 연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고려도경을 올렸는데, 기재된 내용이 아주 소략하다. 이는 그 나라 사람들이 전해 주는 말을 듣고 드디어 왕건이 고씨의 뒤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면서 왕건이 실은 궁예(躬乂)를 살해하고서 나라를 세운 것임을 모른 것이다.” 하였다.〉
➡ 이 역시(亦是) “안(按) 곧 살펴보건대”라고 하였으니, 해동역사(海東繹史) 저자(著者)의 이야기다. 궁예(躬乂)가 실존(實存) 인물(人物)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궁예(躬乂)가 궁예(弓裔)」인가?
그러나 송악군(松嶽郡)의 ‘호족(豪族)=토호(土豪)’로서 여러 대(代)에 걸쳐 명성(名聲)과 부(富)를 축적(蓄積)하여 지방의 호족(豪族)이었다는 가문(家門)에서 : 고조부(高祖父)도, 가계(家系)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가필(加筆)일 수밖에 없다는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을 받을 수밖에 없다.
〈晉高祖天福元年。太祖十九年。高麗王建。用兵擊破新羅百濟。於是東夷諸國皆附之。有二京六府九節度百二十郡。: 진(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元年), 태조(太祖) 19년 고려왕(高麗王) 건(建)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新羅)ㆍ백제(百濟)를 격파(擊破)하였다.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가 모두 내부(附)하였다. 2경(京), 6부(府), 9절도(節度), 1백 20군(郡)이 있다.〉라고 하였다.
➡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격파(擊破)하였다.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왕건(王建)에게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한반도(韓半島) 영내(領內)에 신라(新羅)와 백제(百濟), 고려(高麗) 외(外) 어떤 나라들이 있었을까? 위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 동이(東夷)의 제국(諸國) 곧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들이 스스로 와서 항복(降服)했다고 했잖은가!
“한반도(韓半島)”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도 스스로 맘속에서는 “그렇다”라고 백번(百番) 수긍(首肯)하고도 남을 일이다.
(7)- 3) 〈資治通鑑, 南唐書。吳天祚二年。當晉之天福元年。高麗王建敗新羅百濟。: 자치통감(資治通鑑) 남당서(南唐書)에는, “오(吳) 천조(天祚) 2년(936)은 진(晉) 천복(天福) 원년에 해당하는데, 고려 왕 왕건이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於是倭耽浮驩於羅鐵勒東夷諸國皆附之。: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 昇元二年。遣使來上書稱牋。儀式如表而不稱臣。烈祖御武功殿。見其使賜宴。其後史冊殘缺。來與否不可攷矣。: 승원(昇元) 2년(938)에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리면서 ‘전(牋)’이라 칭하여 격식을 표(表)와 같이 갖추면서,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 열조(烈祖)가 무공전(武功殿)에 나아가 사신을 알현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 뒤에는 사책에 빠져 있어서 사신이 왔는지의 여부를 상고할 수가 없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 「於是倭耽浮驩於羅鐵勒東夷諸國皆附之。: 이에 왜(倭)ㆍ탐부(耽浮)ㆍ환어라(驩於羅)ㆍ철륵(鐵勒) 등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諸國)가 모두 고려(高麗)에 내부(附)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한반도(韓半島) 땅에 왜(倭)도 있었고, 탐부(耽浮)도 있었고, 환어라(歡於羅)도, 철륵(鐵勒)도 있었다”라는 것인가?”
왜(倭) : 당시(當時)에는 열도(列島)에 없었다.
탐부(耽浮) : 탐라(耽羅)인데, 탐라(耽羅)와 제주(濟州)는 전혀 다른 땅이다.
환어라(歡於羅) : 알 수 없다[미상(未詳)]
철륵(鐵勒) : 「장안(長安)으로부터 최소한(最小限) 8,000리∼17,600리 사이에 있었던 칙륵(勅勒) 종족(種族)」을 말하는 것이다.
➡「遣使來上書稱牋。儀式如表而不稱臣。: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리면서 ‘전(牋)’이라 칭하여 격식을 표(表)와 같이 갖추면서, 신(臣)이라 칭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독자적(獨自的)인 독립국(獨立國)으로 황제(皇帝)를 칭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 「삼한통일(三韓統一) 곧 천하통일(天下統一)을 이룬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업적(業績)은 ‘5 천년(千年)’ 동사(東史)에서 찬란(燦爛)한 빛을 발한 역사적(歷史的) 사건(事件)이었음에도,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신라(新羅)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했다는 식(式)으로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얼버무리며 평가절하(平價切下)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理由)가 있을 것이고, 이는 곧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과 맥락(脈絡)을 함께 한다. 신라(新羅)가 언제 삼국(三國)을 통일(統一)한 적이 있었나? 웃기는 얘기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유치원(幼稚園)부터 초등(初等), 중등(中等), 고등(高等)에 이어 대학(大學)과 연구소(硏究所), 취직(就職) 등 모든 곳의 시험(試驗)에서 “신라(新羅)의 삼국통일(三國統一)”을 말하지 않으면 “빵점”처리(處理)기 된다. 그래서 손자(孫子) 손녀(孫女)에게도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진실(眞實)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불행(不幸)한 나라는 : 지구(地球)라는 이 행성(行星) 내(內)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국가(國家)다. 그래서 “무식(無識)해 용감(勇敢)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2024년 06월 3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왕건(王建)과 왕건(王建)"과의 비교 및 그 가계(家系)를 추적해 보고자 하였는데,
날은 더우니 책상에 앉아 있기가 고통이니,
가을 이후로 '가계비교'는 미뤄야 겠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가계는 "없다"는 것인데, 아버지 없는, 할아버지 없는 자식은 있을 수 없으니,
아마도 고의적으로 기록에서 누락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왜? 숙제라고 봅니다.
"고려 태조"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1. "왕건(王建)"의 姓(성)은 "왕(王)"이 아니라고 했고, 이름이 "왕건"이라고 했다는 설명도 있다.
2. 또 고려 태조의 세계(世系)는 3대 이상은 알 수 없다고 했고,
3. 아버지(父)에 대한 것조차도 이름도 다르고, 명확한 것들이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하며,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악군에서 여러 대에 걸쳐서 호족또는 토호로써 지방의 유지였다고 말하면서도, 그 가계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건 왜곡이요, 조작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5. 그러면서도 왕건의 조상보다도 휠 씬 윗대 '신라 '이성계의 가문의 시조 이한'이란 말은 :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다음 게재물은,
"이성계와 그 가문에 대한 이야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다음 게재물인 "이성계"와 관계되는 인물중에,
"시조 이한"이라는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출생년도도 모른다. 사망년도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로 신라에서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하여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다"라고 여기 저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 여기서 이해불가한 것은,
출생년도도, 사망년도가 전혀 모르는 '이한' 이라는 분이, 어떻게 무열왕의 10손이라는 군윤(軍尹) 김 아무개의 딸과 혼인를 하여 아무개를 낳고, 또 아무개를 낳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전주가 고향인가?
"이한인가? 후대의 고려 이의방인가?" 아니면 이린인가?
그럼 '전주이씨'는 언제부터 '전주이씨'라고 불렀는가?
말 그대로 전주이씨는 "차령산맥 이남으로 그곳 인물은 절대로 중용하지 말라"는 "왕건"의 유언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소설같은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이 조선사다.
특히 이성계의 선대는 신라인? 고려인? 몽고인?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어떤 곳(? : 전주 이씨 일파 중)에서는 :
시조 "한"은 조선인이 아니며, 원래 중국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왔다고 한다.
결국 이런 설명에 따르면 오늘날의 전주이씨는 중국사람이라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 이러한 이야기는 시조 "이한"은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다.
그럼 조선왕조도 중국 왕조일까?
참 대단한 한국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