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산은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나뭇가지를 드러낸 스산한 모습이다. 눈이라도 소복이 내려서 가려 주기 전까지는 그대로일 터이다. 겨울 산은 쓸쓸하기는 하지만 그러기에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나온 일 년을 곱씹어 보기에 더없이 좋은 분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방한 재킷과 동계용 침낭만 갖추면 아직은 야영하는 것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야영장을 물색해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송년 모임을 가지면 멋질 것 같다.
이번 달 산요리는 요즘 같이 추운 날씨에 어울리기도 하고 그 냄새만으로 옛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돼지고기보쌈과 청국장찌개를 선택해 봤다. 일상생활에서야 자주 즐기는 음식이지만, 이와 유사한 재료를 사용하는 삼겹살구이와 된장찌개의 인기에 밀린 탓인지 산에서는 좀처럼 맛볼 기회가 없었다. 아예 이번 기회에 산 요리 레퍼토리에 추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더욱이 돼지고기를 삶으면 구울 때보다 기름기가 적고 나쁜 성분도 제거되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청국장은 돼지고기의 지방 성분과 콜레스테롤을 배출해 주기 때문에 두 음식의 궁합도 아주 잘 맞는 편이다.
추운 날 야외에서 돼지고기보쌈을 조리할 때 몇 가지 물품을 더 챙겨 가면 큰 도움이 된다. 조리용 비닐장갑 몇 장, 집게, 가위, 도마, 화력 좋은 버너가 그것인데, 돼지고기를 덩어리째 삶고 자를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가위는 야채, 파, 고추를 손질할 때 편리하다.
질 좋은 고기를 확보하면 일단 돼지고기보쌈의 90%는 성공한 셈이다. 슈퍼마켓에 가서 대충 냉동 포장육을 집어 들지 말고, 꼭 단골 정육점에 양질의 암퇘지를 부탁해서 준비하도록 한다.
돼지고기는 삼겹살이나 목살 부위로 덩어리째 준비해서 찬 물에 30분 정도 담가 핏물을 제거한다. 큰 코펠에 물을 붓고서 된장, 생강, 통후추, 양파, 마늘, 대파, 인스턴트 커피를 한꺼번에 집어넣고 끓인다. 모두 돼지고기의 누린내를 제거하고 육질을 연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재료들이다.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돼지고기 덩어리를 넣고 뚜껑을 덮는다. 반드시 물이 끓을 때 고기를 넣어야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센 불에서 거의 1시간 가량 푹 삶아야 하므로 연료통이 크고 화력이 강한 휘발유버너를 쓰는 것이 좋다.
젓가락으로 고기를 찔러 봐서 핏물이 흘러나오지 않고 부드럽게 들어가면 다 익은 것이다. 고기를 건져내서 표면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고, 얄팍하게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다음, 새우젓을 곁들여내면 된다. 새우젓에 매운 고추, 마늘, 파, 참기름, 통깨를 넣고 양념을 하면 더 맛있어진다.
찬 물에 30분 정도 담가 핏물 제거해야여기에 보쌈김치까지 챙기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야외인 점을 감안해서 잘 익은 신 김치로 대신하면 아쉬운 대로 구색은 맞출 수 있다. 돼지고기보쌈은 조리시간이 조금 긴 게 흠이지만 좋은 고기를 준비하고 몇 가지 주의사항만 지키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마을잔치를 벌일 때면 으레 돼지를 한 마리 잡았다. 돼지를 잡고 가마솥과 장작불을 준비하는 일까지는 남자들 몫이었고, 조리와 서빙은 여자들 몫이었다. 잔칫집 마당 한 구석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 놓고 장작불을 지펴서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할 때면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끓는 물에 된장을 풀고 돼지고기의 온갖 부위를 덩어리째 삶아 즉석에서 큼직하게 썰어서 새우젓, 신 김치를 곁들여 잔칫상에 올렸다.
마을 어른들은 술안주로 비계가 절반쯤 붙어 있는 삼겹살이나 내장, 머리를 차지하고, 아이들에게는 퍽퍽한 살코기가 돌아갔다. 삶은 돼지고기가 물릴 때쯤이면 제육복음과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 두부찌개가 번갈아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잔치의 대미를 장식하는 음식이 나오는데, 온종일 고기를 삶아낸 국물에 남은 돼지고기를 뭉텅뭉텅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인 돼지국밥이었다. 다들 손으로 길게 찢은 배추김치를 얹어서 국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서야 잔치는 끝이 났다. 맛있는 고기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쌀밥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생각하는 농경민족의 후예다운 마무리였다.
쌀뜨물 쓰면 멸치 비린내 등 없애
안주용으로 돼지고기보쌈을 만들었으니, 이제 식사용으로 청국장찌개를 끓여 보자. 먼저 무청시래기를 준비한다. 말린 시래기를 집에서 미리 삶아 가면 조리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삶은 시래기는 찬 물에 담가 두었다가 여러 번 헹구고 물기를 짜낸 다음, 1~2cm 길이로 잘게 썬다. 잘게 썬 시래기에 청국장, 갖은 양념을 넣고서 버무려 놓는다.
코펠에 쌀뜨물을 붓고 멸치를 넣어서 끓인다. 맹물보다 쌀뜨물을 쓰면 멸치 비린내와 무청시래기의 아린 맛을 없애 주고 국물 맛이 한결 구수해진다. 20분 정도 끓이다가 멸치를 건져내고, 청국장과 갖은 양념에 버무려 놓은 시래기를 넣고 계속 끓인다. 시래기를 미리 삶아 놓았기 때문에 익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시래기가 다 익으면 두부를 넣고 한 번 더 끓여 주면 청국장찌개가 완성된다. 끓일수록 깊은 맛이 나는 된장찌개와 달리 청국장찌개는 오래 끓이면 텁텁한 맛이 나고 영양소가 파괴된다. 조리시간이 짧아야 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추운 날 버너 위에 찌개를 올려놓고 부글부글 끓이며 먹는 맛도 포기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어떤 맛을 포기하고 어떤 맛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취향에 달린 문제다.
청국장은 생긴 모양을 보면 된장과 비슷하지만 강렬하고 자극적인 냄새로 다른 음식들을 압도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겨울이면 따끈한 아랫목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무언가를 낡은 이불까지 덮어 며칠을 고이 모셔 두었다가 그걸로 찌개를 끓여내곤 하셨다. 나는 며칠에 한 번씩 밥상에 오르는 그 무언가의 구리한 냄새가 싫어서 툴툴대며 코를 막았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이 맛있는 걸 마다한다고 핀잔을 주셨다.
그 때는 그 무언가가 뭔지 관심조차 없었지만, 이제는 고약하기만 했던 청국장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지고 아버지의 핀잔까지 따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