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大雪)에 관한 시모음<1> [대설(大雪) 시] [24 절기 시]
대설(大雪) / 안도현
상사화 구근을 몇 얻어다가 담 밑에 묻고 난 다음날,
눈이 내린다
그리하여 내 두근거림은 더 커졌다
꽃대가 뿌리 속에 숨어서 쌔근쌔근 숨쉬는 소리
방안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누웠어도 들린다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나는 뜨거워졌다
몸살 앓는 머리맡에 눈은
겹겹으로, 내려, 쌓인다
대설(大雪) / 정양
마을 공터에 버스 한 대 며칠째 눈에 파묻혀 있다
길들이 모두 눈에 묻혀서 아무 데나 걸어가면 그게 길이다
아무 때나 들어서면 거기 국수내기 화투판 끝에
세월을 몽땅 저당잡힌 얼굴들이 멸칫국물에
묵은 세월을 말아 먹고 있을 외딴집 앞
눈에 겨운 솔가지 부러지는 소리
덜프덕 눈더미 내려앉는 소리에
외딴집 되창문이 잠시 열렸다 닫힌다
잊고 살던 얼굴들이 모여 있는지
들어서서 어디 한번 덜컥 문을 열어보라고
제 발자국도 금세 지워버리는 눈보라가
자꾸만 바람의 등을 떠민다 *
* 정양시집[철들 무렵]-문학동네,2009
대설 / 나상국
남한강 기슭을 헤매던
칼바람이
북서풍에 휩쓸려
탄금대 아래
남한강 시-퍼런 강물 속으로
떨어져 나리고
때 없이 오락가락 하던
조각구름도
비늘처럼 부서져
황쏘가리 등에 업혀
빠르게 빠르게
거친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남한강 시퍼런 바람....
여주 신록사 절벽 난간에
기대어 잠시 머물던
햇살도 산산이 조각으로 부서져
강물의 비늘이 되어
강물을 박차고 오른다
동안거에든
노스님의 검정색
털고무신 아래
하얗게 하얗게 부서져
겹겹이 쌓이고 쌓이어
끊지 못한 연들이
발목을 잡고 수북이 덮는 밤
남한강 댓바람 울음소리
산등선을 타고 올라
놀란 산 까치가 날아든
광화문 사거리
산 까치의 깃털이
무더기로 부서져 나려
거대한 빌딩 숲의
검은 그림자를
이불처럼 하얗게 하얗게
덮고 또 덮는다....
대 설 / 김경희
애타던 날들의
깃발은,
그래서
천만 번 흰 것을....
낙목의 시절
혼자 영글은 동백은,
그래서
죽도록 붉은 것을....
지치고
무성한 것들이여-
돌아와야만 해
돌아와야만 해
망향의 귀신이 되어
일흔 살이 되어
조국이 되어.
대설에 핀 개나리꽃 / 최홍윤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에
어쩌자고 노랗게 피었는냐
겨울 나목들은
을씨년스러워 하는데,
하늘은 울먹울먹 눈 내리려 하는데,
이 철부지들아!
고사리 손들이
겨울을 호호 불 때
개나리 울타리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노란 개나리꽃
웃는다고
봄이 냉큼 오려나?
묵은해의 끝자락에 피었다가
성큼 봄이라도 오면 어이하려고
노란 꽃아,
너를 따다
그리운 님에게 가려 해도
폭설이 내 가는 길을
가로막을 것만 같구나.
대설(大雪)날 / 황동규
-故 김현에게
겨울하고도 흐린 날
눈도 제대로 내리지 않고
눈송이 몇 공중에 날려놓고 바람만 불다 말다 하는 날
이 식은 지구 껍질에 미열(微熱)이나마 심을 것은
그래도 버섯구름이 아니라
알맞게 거냉(去冷)한 술 한 잔이라면
오늘 양평 네 잠들어 있는 곳에 가
찬 소주 대신
가슴에 품고 온 인간 체온의 청주 한 잔 땅에 붓노니
그 땅이 네 무덤이건
우리 자주 들른 ‘반포 치킨’이건
그냥 지나쳐버린 어슬엇슬 산천이건
작정한 듯 검푸른 하늘
바람이 눈송이 하나 무덤 위에 띄워놓고
술 방금 받은 부운 위(胃)처럼 한번 부르르 몸을 떤다
대설(大雪) / 윤보영
대설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처럼
내 안에 기쁨이 쏟아져도 좋고
생각 속에 즐거움이 쌓여도 좋습니다
기억 속의 눈처럼
즐거움이 계속 이어져도 좋고
행복이 가득 담겨도 좋습니다
대설입니다
내가 주인공인 대설입니다.
대설에 첫 눈이 온다 / 김해인
돋보기 너머로 첫눈이 내린다
대설치레는 꾸어다 가도 한다는 날
싸래기처럼 흩날리는 눈 을 바라보니
덮어 버려야 할 하 많은 세상사를
보다못한 하늘이 덮어 주시려나 보다
씻을것이 쌓이면 비 가 오고
덮을것이 많으면 눈 이 온다 더니
그래 그렇게 하늘은 무심하지 않은가 보다
하늘에 그물이 얼마나 크고 촘촘하기에
그물 코 도
그물 눈 도
하늘에 그물은 보이지를 않건만
그물 그 사이로 내리는 눈발은
얼개미를 빠져 나온 싸래기 눈 이다
눈 이 온다
싸래기가 쌓여 간다
햅 쌀 이듯 너무나 하얀
그리움이 되어 내 마음도 하얗게 덮어온다
내 안의 대설특보 / 김은식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낯선 거리를 이유도 없이 펑펑 쏘다니었소
발자취는 끝 간 데 없이
내 흔적을 미행하듯 찍고 또 찍는
일상의 발자국들
오늘은 그만,
따라오지 마라
혼자 걷고 싶은 날이거늘
하늘은 온통 잿빛에 홀연한 나는
내 그림자마저 벗어두고 길을 나섰나니
해도 달도 눈을 감고 모르는 채
눈만 펑펑 내리는 날
그동안 함께 했던 이들과
못 다 했던 일들과도 작별을 고하리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날은
이미 이별한 이들에겐
아득하게 더 멀어질 오늘을 용서해다오
지금은 하늘도 요량이 없고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흰 눈만 펑펑 내리는데
미로 같은 세상을 하얗게 덮은
한 치 앞도 분간 없는 눈보라 속에서
여직 방황하던 세상 보는 눈을
이제 다시 뜬들 뭣하리
나는 아득한 자유의 종소리 언덕 너머로
걷고 또 걷고 쓰러지고
비로소, 그 많았던 기회의 오늘 중
대설을 기해
펑펑 눈 되어 넘어서 가리
大雪 / 윤의섭
파르르 떠는 문풍지
소리한 밤 새도록 울다
지쳤는지
잦아든 문밖에는
하얀 눈발이 소곤대듯
어둠을 사렸다
시루에 백설기 쪄내듯
금세
소복이 쌓인 가루를
말아 쪄내니
마당엔 금세 질퍽한
눈雪물 바다라.
대설 / 정태현
너무나
하얀 것이 부끄러워
소리 없이
사뿐사뿐
무엇을
그렇게 감춰 두려고
세상 가득
소복소복
얼마나
급한 사연 있기에
밤을 새워
차곡차곡
대설(大雪)에 겨울비 / 최홍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백두대간 고요한 자락에 산불도 요란했는데
겨울비, 빗줄기가 제법 굶구나
등 푸른 산맥이
검은 띠 두른 지 몇 날이 지났다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애절한 지평선 스멀스멀 속절없이 다가서네
배고픈 멧돼지 습생으로
도전하는 사람 사는 세상
한쪽에서는 흰 밥에 고깃국 타령이고
한쪽에서는 설원에 차량들만 북새통이네
대설에
비가 오려나, 눈이 오려나
철들은 곳에는 비가 내리고
철부지에는 눈이 내리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산 첩첩
물 겹겹 백두대간 동녘에는
대설에도 빗줄기 하염없이 내리네
우리가 빗줄기라면
이대로 진눈깨비로 내리면 안 되겠네
우리가 눈발이라면
대설에는 함박눈으로 내랴야 하겠네.
대설 大雪 / 오보영
너 오는 날 미리 알고
선조들이
달력에 기록해놓은 이유를
오늘 네가
가는 길을 막아서니 알겠구나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님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으니
오래 기억될 수밖에
이런 내 맘은 아랑곳없이
그저 저만 좋다고
마냥 좋아 흩날리는 널 보고 있노라니
좋아하던 모습조차
미워지려 하누나
대설주의보 / 최성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대설주의보 / 임영준
막힌 가슴
실마리도 없는
거친 땅
가뜩이나
거북한 일상을
철부지들이
좌지우지하는데
족히
몇 날쯤 덮어두는
눈 천지는 어떨까
민심도 천심도
잠시
순백이 되는
은근히 고대하는
대설주의보
눈 없는 대설 / 백원기
큰 눈이 온다는 대설
달력이 장난했는지
눈 씻고 봐도 눈이 없다
이른 새벽부터 꽁꽁 묶고 덮고
싸매주었다
철갑을 두른 듯 무거운 옷에
빠꼼하게 눈만 내놓고
뒤뚱거리며 걷는다
불을 지펴서 맞서려는
굳건한 방어심리 였지만
상대 없는 대결에 맥이 빠진다
사람은 워낙 약삭빨라서
당일치기로 살려하지만
자연의 위대한 섭리는
예습의 삶 살기를 당부한다
대설 / 나상국
남한강 기슭을 헤매던
칼바람이
북서풍에 휩쓸려
탄금대 아래
남한강 시-퍼런 강물 속으로
떨어져 나리고
때 없이 오락가락 하던
조각구름도
비늘처럼 부서져
황쏘가리 등에 업혀
빠르게 빠르게
거친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남한강 시퍼런 바람....
여주 신록사 절벽 난간에
기대어 잠시 머물던
햇살도 산산이 조각으로 부서져
강물의 비늘이 되어
강물을 박차고 오른다
동안거에든
노스님의 검정색
털고무신 아래
하얗게 하얗게 부서져
겹겹이 쌓이고 쌓이어
끊지 못한 연들이
발목을 잡고 수북이 덮는 밤
남한강 댓바람 울음소리
산등선을 타고 올라
놀란 산 까치가 날아든
광화문 사거리
산 까치의 깃털이
무더기로 부서져 나려
거대한 빌딩 숲의
검은 그림자를
이불처럼 하얗게 하얗게
덮고 또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