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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입니다!」 외 1편
하 은 유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킥!
환승입니다!
쿡!
사람들이 마을버스에 오를 때마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지만 나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 웃음의 주인공이 민철이란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키득, 키득!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만 나는 꿋꿋이 창밖만 바라본다. 민철이는 내가 눈이라도 부릅뜨고 돌아봐주기를 바라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름 가지고 놀림을 받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일이 상대하면 나만 피곤하다. 그래서 꾹, 참는다.
내 이름은 환승이다, 유환승. 버스 환승 제도 같은 게 생길 거란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아빠가 기뻐할 환, 이길 승. 그 뜻도 거창하게 지은 이름이다.
물론 내 이름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유빈이나 준영이 같은 폼 나는 이름은 아니었지만 큰 불만도 없었다. 그때까지는 유치원 버스가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마을버스를 타기 시작하면서 환승 제도라는 게 있다는 걸 나와 아이들이 알고부터였다. 사실 그 전까지는 내 이름이 그렇게 유명한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어이, 환승입니다!”
특징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저게 내 별명이다.
“어이, 환승입니다!”
다시 또 내 이름을 부르는 민철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끈질긴 녀석. 아마 내가 인상을 쓰면서 고개를 돌릴 때까지 계속 저러고 따라올 것이다. 가끔은 선심을 쓰듯 뒤돌아봐 주기도 하지만 오늘은 나도 끈질기게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 난 민철이의 유치한 장난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빠가 어제 가출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뜩해요? 우리는 다 같이 길바닥에 나앉아요?”
며칠을 머리를 싸맨 채 누워만 있던 엄마가 무섭게 노려보며 말하자 아빠의 고개는 점점 더 밑으로 떨어졌다.
사실, 아빠는 며칠 전에 회사를 관뒀다. 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머리를 싸매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는 것만 벌써 세 번째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번에도 경기가 좋지 않아서 회사가 망했다고 한다. 나는 아빠가 회사를 관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망하는 회사만 골라 취직을 하시는지 그게 오히려 더 궁금하다. 게다가 이번엔 엄마 몰래 빌려준 돈을 친구가 갚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하기는 이것도 처음은 아니다.
아빠는 작년에도 친구 대신 보증이란 걸 해 줘서 엄마를 기절시켰고 재작년에는 친구의 병원비 때문에 우리 집 고물차까지 팔아버렸으니까.
말하자면 내게 기쁘게 승리하란 거창한 이름을 지어준 아빠는 승리는 고사하고 매번 사고만 치는 우리 집의 문제아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가 심각한 거 같았다. 다른 때 같으면 엄마의 그런 잔소리 정도는 실실 웃으며 “아, 괜찮아, 다 잘될 거야!” 하던 아빠가 이번엔 본드로 입을 붙여 놓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아빠는 가출을 했다. 통장과 보험 증서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야, 환승입니다! 너 왜 대답 안 하냐?!”
바로 등 뒤까지 따라온 민철이 투덜거린다. 아침 등교 시간에 이 녀석을 만나면 늘 있는 일이다. 그랬다. 늘 있는 일.
퍽!
마을버스에서부터 꽉 쥐고 있던 주먹이 민철이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이건 늘 있는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민철이와 싸운 이후로 처음이기 때문이다.
“너, 이씨! 미쳤냐?!”
퍽!
민철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순간 내 주먹은 다시 날아갔다. 방금 전에 나간 주먹은 민철의 볼에 스쳤을 뿐이었지만 이번에 나간 주먹은 정확하게 민철이 코에 명중했다.
주룩!
민철이의 납작한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 이건, 진짜로 처음 있는 일이다.
“유환승, 너 왜 그랬어?!”
입을 꾹 다물고 버티는 나를 보던 선생님께서 내가 말할 기미가 없자 이번에는 민철이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으셨다.
“강민철, 니가 말해 봐!”
“제가 환승이한테 어이, 환승입니다! 하고 놀렸어요. 그러니깐 제 잘못이에요”
내가 민철이의 유치한 장난에도 불구하고 계속 친구인 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녀석의 이런 솔직함 때문이다.
“니들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름 가지고 싸워? 그리고 환승이 이름이 어디가 어때서? 부르기 쉽고 외우기 쉽고 얼마나 좋은데? 선생님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환승이는 평생 기억할 거 같은데?”
“선생님도 자가용을 사시면 아마 까먹으실 걸요?”
민철이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시는 선생님도 학기 초에는 내 이름을 부르다 세 번이나 웃으셨다.
“어이고, 이 일을 어쩜 좋으냐!”
문손잡이를 잡던 내 손이 할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 때문에 멈췄다. 아, 역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뉴스에서 봤던 끔찍한 사건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며 손잡이를 잡았던 손에 힘이 스륵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문 앞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힘겹게 문손잡이를 돌렸다. 차라리 이대로 문이 안 열려서 나쁜 소식을 영원히 듣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어쩌기는 뭘 어째요? 자기 발로 나갔으니까 자기 발로 들어오겠죠!”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엄마의 퉁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반갑다. 다른 때와 엄마의 목소리는 똑같았다. 그건 아직은 아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단 증거다.
“너는 이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냐, 넘어가!?”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바닥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엄마는 양푼 가득 시뻘건 비빔밥을 담아 드시고 계셨다. 물론, 이 모습도 처음은 아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봤었다. 그러니깐 아빠가 보증 섰을 때랑 고물차를 팔았을 때도 엄마는 양푼 가득 시뻘건 비빔밥을 만들어 드셨었다.
“유환승! 왔으면 얼른 밥부터 먹어!”
엄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가방을 내던지고 엄마가 먹던 비빔밥 그릇에 얼른 수저를 꽂았다. 이럴 때 행동이 느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 너희 엄마가 머리 싸매고 누워있을 때보다 밥 먹을 때가 더 무서워! 먹고 힘내서 아빠를 한 대 때릴 거 같거든!”
작년에 보증을 선 걸 알고 난 후 엄마가 비빔밥을 드시는 걸 보고 아빠가 한 말이다. 그리고 그땐 몰랐는데 오늘은 왠지 아빠의 그 말이 조금은 이해될 거 같았다. 지금 엄마의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수저를 들고 전쟁터를 나갈 태세니까.
“어머님도 얼른 오셔서 한 수저라도 드세요! 먹어야 힘이 나고 힘이 나야 찾으러 나가든지, 뭘 해도 하죠!”
“넌 네 남편이 걱정도 안 되냐! 어이고, 영구야!”
할머니가 아빠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나는 그만 속도 없이 풋! 웃고 말았다.
그렇다, 우리 아빠의 이름은 영구다. 빛날 영, 구할 구. 아빠가 내 이름을 지은 것처럼 할아버지 역시 그 뜻도 거창하게 지으셨지만 안타깝게 아빠의 이름은 바보들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빠의 별명은 내 별명보다 더 특징이 없는 “띠리리” 다.
“띠리리리, 영구 없다!” 의 그 띠리리 말이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아빠의 이름을 참 많이 닮았다.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도 한 손엔 치킨을 들고 오고 친구한테 돈을 받지 못해도 친구를 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눈을 흘기며 “당신은 어쩜 그렇게 이름이랑 닮았어요?” 라고 핀잔을 주는 엄마에게도 아빠는 영구처럼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한 마디로, 아빠와 나는 이름 때문에 평생 놀림을 받아야 하는 동지인 셈이다.
“야, 띠리리! 진짜 바보처럼 이럴래? 너, 당장 안 들어오면…… 가만 안 둔다!”
엄마에게 연락을 받은 상철이 아저씨와 명규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신 건 밤 열시도 훨씬 넘어서였다. 상철이 아저씨는 대전에서 일을 하다 오시고 명규 아저씨는 병원에서 바로 오셨는지 환자복 차림 그대로였다.
두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상철이 아저씨는 아빠가 작년에 보증을 서준 친구고 명규 아저씨는 재작년에 우리 집 고물차를 팔아 치우게 한 주인공들이다.
“제수씨,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어떻게든 찾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상철이 아저씨와 명규 아저씨는 아까부터 자신들이 가출을 한 사람들처럼 엄마에게 계속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아저씨들을 빤히 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가세요!”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엄마 앞에서 미련하게 같은 말을 하고 또 하는 모습이 역시나 영구의 친구답다는 걸.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빠를 기다리며 나는 내 이름을 백번도 넘게 들었다. 그러자 새삼스레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빠, 내 이름을 환승이라고 지은 거 원망하지 않을게요. 나중에 어른이 돼서도 이름 바꾸지도 않을게요. 그러니깐 제발, 돌아오세요.”
나는 어느새 속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환승아!”
그때였다.
막 도착한 버스에서 아빠가 내게로 달려오셨다. 환승아! 내 이름을 부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지? 생각하니깐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이대로 확 죽어버릴까? 싶기도 하고. 그래서 일단 아무 버스나 올라탔는데 네가 아빠, 빨리 집에 돌아와요! 하잖아?”
“내가?”
“응. 환승입니다, 아빠 보고 싶어요. 환승입니다, 아빠 힘내세요! 이렇게 말이야. 아빠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놀라서 보는 나에게 아빠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묻듯이 바라보셨다.
“응! 맞아!”
“그럼 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아참, 그리고 오늘 아빠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말해 줄까?”
“뭔데요?”
“아빠도 네 이름처럼 다시 또 환승하면 된다는 걸 알았어. 버스도 다시 내리면 환승할 수 있는 것처럼 직장도 다시 구하고 돈도 벌고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잖아. 그치?”
“응!”
“유환승, 어때? 아빠가 네 이름 잘 지었지!?”
“응! 그리고 할아버지도 아빠 이름 잘 지으신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 이름은 아무리 슬플 때 들어도 웃음이 나오잖아!”
“뭐?!”
“띠리리리! 영구 여기 있다!”
내가 아빠처럼 영구 흉내를 내며 아빠를 꽉 껴안고 올려보자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던 아빠의 얼굴엔 바보 영구 같은 웃음이 환하게 번졌다.
그리고 그렇게 바보 영구 아빠는 하루 동안의 가출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오셨다.
“어이, 환승입니다!”
어제 그렇게 맞고도 민철이의 유치한 장난을 오늘도 시작됐다. 끈질긴 녀석.
“왜 불러!”
나는 오랜만에 선심이라도 쓰듯이 인상을 쓰며 민철이에게 고개를 돌려주었다.
녀석이 좋다고 활짝, 웃는다.
750){/*window.open*/(this.src)};" [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mouseover='if(this.width>750){this.style.cursor="hand"; this.title="원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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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면 알아요!」
“할머니, 빨간색이 뭐야?”
“으응, 고건 빨간 띠 세 개, 홍단색이구먼!”
“그럼 주황색은?”
“흠…… 고것은…….”
할머니는 한참 뜸을 들이다 탁, 소리도 경쾌하게 화투장을 내리치신다.
“옳지! 고건 요 벚꽃이구만. 주황이나 분홍이나 다 고게 고거여!”
“노란색은 풍단의 사슴색, 초록색은 초단색, 파란색은 청단색이지?”
“그렇지! 어이고, 내 새끼 참말로 똑똑도 허네!”
요새 할머니의 색깔은 화투장이다. 왜 하필이면 화투장이냐는 엄마의 탐탁지 않은 핀잔에도 할머니는 화투장 색이 제일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할머니, 그러면 남색이랑 보라색은 뭐야?”
“고것은, 흠, 고건…… 아야, 고건 몰라도 되는 색이여.”
화투장을 한참이나 뒤척이다 끝내는 비슷한 색깔을 찾지 못했는지 할머니의 색깔 찾기는 오늘도 남색과 보라색에서 끝났다.
내 이름은 강찬, 12살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병을 심하게 않고 난 후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한다. 할머닌 내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깜깜해진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내가 할머니의 색깔을 더 이상은 믿지 않는다는 건 모른다. 세상에! 빨간색이 홍단이고 주황색이나 분홍색이 고게 고거라니! 내가 아무리 앞이 안 보인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5년 전, 그러니깐 일곱 살 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주름진 손으로 화투장을 뒤척여가면서 설명을 해도 그 색들이 어떤 색인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내가 아직 할머니와 이러고 노는 이유는 순전히 다 할머니를 위해서다.
엄마가 요새 들어 자주 깜빡, 깜빡하시는 할머니의 치매 예방에는 이렇게 머리를 쓰는 게 제일로 좋다고 하셨으니까. 물론 고스톱을 같이 쳐 주는 게 더 좋긴 하지만 그건 내가 눈이 안 보이니 어쩔 수 없고.
“찬아! 뭐 허냐? 아직도 멀었냐?!”
내가 지팡이를 막 챙겨들 때 문 밖에서 할머니의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꼭 오늘 가셔야 해요?”
곧이어 들려오는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
“그려, 오늘 가야 혀!”
그에 대답하는 할머니의 단호한 목소리.
아침부터 엄마는 같은 소리를 몇 번을 물으시고 할머니는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하고 계신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은 할머니와 나, 둘만의 첫 외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아빠나 엄마가 꼭 같이 외출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두 분 다 일이 있으셔서 같이 가실 수가 없는데도 할머닌 오늘 꼭 외출을 하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거다.
하지만 앞이 안 보이는 나와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의 외출이 걱정스러워 죽겠는 엄마의 마음도 할머니의 고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어여, 가자!”
내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할머니는 내 팔에 손을 걸고 현관 쪽으로 끌고 걸어간다. 행여 엄마가 앞을 가로막을까 봐 다른 날보다 걸음도 빠르시다.
“찬아, 차 조심하고 천천히 걷고 할머니 손 절대 놓치면 안 돼!”
문 밖까지 쫒아 나오는 엄마의 걱정스런 목소리를 들으며 나와 할머니, 둘만의 첫 외출은 이렇게 시작됐다.
“찬아, 여기가 일층으로 가는 버튼이여.”
할머니께서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일층 버튼에 가져다 대며 말씀하신다.
또 시작이다. 할머니의 숫자 놀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찬아, 여가 관리실이여.”
내 걸음으론 다섯 걸음이면 되지만 할머니는 열 걸음을 걸어간 후에 관리실이 있는 곳을 일러준다.
“찬아, 여기는 층계여.”
“응!”
난 사실 엘리베이터 일층 버튼도, 관리실도, 층계도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다.
이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벌써 12년을 살았으니까. 하지만 난 다 알면서도 순전히 할머니의 치매 예방을 위해서 모른 척 응! 하고 대답한다. 치매 예방에 숫자 놀이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도 난, 알고 있으니까.
탁, 탁, 탁, 내 다리보다 먼저 나간 지팡이가 길가에 돌멩이가 없는지 난간은 없는지를 조사한다.
“할머니, 앞에 난간 있어!”
내가 말하면 툭, 툭, 툭, 이번엔 할머니의 지팡이가 그 뒤를 따라온다.
엄마와 아빠랑 걸을 땐 내가 뒤에서 걷지만 할머니랑 걸을 땐 내가 앞장서 걷는다. 내 다섯 걸음이 할머니에게 열 걸음이 될 즈음부터 할머니의 눈도 나랑 비슷해 졌기 때문이다.
“할머니, 층계 조심해!”
아, 드디어 오늘의 난코스! 지하철 층계에 도착했다!
탁, 탁, 탁, 내 지팡이가 땅을 더듬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혹시 할머니가 작년 겨울처럼 발을 헛디뎌 넘어지시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층계를 겨우 다 내려오자마자 할머니의 숫자 세기는 다시 시작됐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서른 둘!”
할머니의 숨찬 목소리가 드디어 멈췄다.
“찬아, 여가 매표소구만.”
“으응.”
“할미는 공짜니께 니 표만 끊으면 되는구먼.”
아니, 이게 또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일까? 나보고 표를 끊으라니!?
“어여, 표 안 끊고 뭐 하는겨?”
“할머니, 보이지도 않는데 내가 어떻게 표를 끊어?”
아! 내가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신 걸까? 아니면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아예 잊어버리신 걸까?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스친다.
“안 보인다고 표를 왜 못 끊냐? 역무원 아저씨한테 부탁허면 되지!”
“싫어! 할머니가 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어떤 얼굴로 나를 보는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부탁이란 걸 하는 거다. 그건 할머니도 물론 알고 있다.
“찬아!”
“아, 싫다니까! 나한테 이런 거 시킬 거면 그냥 택시 타고 가!”
굳이 택시를 마다하고 지하철을 타자고 했을 때 할머니의 속셈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번엔 내가 한 발 늦게 알아차렸다.
“찬아!”
“왜?”
대답하는 내 목소리에 뾰쪽한 가시가 돋아 할머니를 콕 찌른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할미 소원인디 요것도 못 들어주냐?”
아, 맙소사! 할머니의 색깔 찾기와 숫자 놀이에 이어 소원 타령이 또 시작됐다.
“할머니, 어제도 할머니 소원이래서 다리 주물러 주고 그제도 할머니 소원이래서 두 시간이나 책 읽어줬잖아!”
“어제는 어제고 그제는 그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넌 어제 밥 먹었다고 오늘은 배 안 고프냐? 할미 다리 아파 쓰러질 거 같으니께 어여, 표 사고 들어가자!”
아, 정말이지 그 누가 말릴 수 있을까. 할머니의 저 똥고집을!
“저기요, 어린이 지하철 표 한 장만 주세요.”
어쩔 수 없이 나는 손을 더듬거려 구멍이 뚫린 곳에 돈을 집어 넣으며 말했다.
“어, 그래. 여기 있다.”
상냥한 아저씨의 목소리와 함께 지하철 표가 내 손에 닿았다.
“얘야, 잠깐만 기다려라. 아저씨가 도와줄게.”
곧이어 안에서 서둘러 나오신 아저씨의 커다란 손이 내 팔을 잡았다.
“아니요, 저 말고 우리 할머니를 잡아 주세요. 전 괜찮아요.”
“어이고, 젊은 총각, 봤수? 우리 손자가 저렇게 효자라우!”
바로 그때였다.
까맣게 타는 내 속을 모르는 듯 할머니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건!
혹시나 할머니를 놓칠까, 할머니가 다칠까, 조바심을 내며 할머니와 내가 도착한 곳은 한복집이었다. 보름 전, 할머니는 엄마에게 한복을 해 달라고 하셨고 오늘은 바로 그 한복을 찾으러 온 길이었다.
“어머, 꼭 새색시 같으세요!”
호들갑스러운 아줌마의 목소리에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신 모양이었다.
“그려? 참말로?”
곧이어 들리는 할머니의 기분 좋은 목소리.
“네! 남색 저고리에 보라색 노리개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 저도 몰랐는데! 할머님 센스가 대단하시네요. 너무 아름다우세요!”
“찬아!”
“네?”
“……어떠냐? 할미, 예쁘냐?”
할머니가 나에게 묻자 갑자기 호들갑스럽던 아줌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보이지도 않는 나에게 할머니가 예쁘냐고 묻는 게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에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할머니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척! 치켜들었다.
“찬아, 참말로 곱다! ……근디 찬아, 암만해도 이 할미는 이 남색 치마저고리랑 요 보라색 노리개 색깔을 뭔 색깔인지 설명을 못하것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할머니는 연신 한복과 노리개를 담은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속상한 듯 중얼거리셨다. 어차피 할머니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설명을 해 주어도 나는 볼 수가 없는데도 할머니는 그게 내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셨다.
“찬아.”
“응?”
“할미 마지막 소원이 뭔 줄 아냐?”
“소원이 또 있어?”
“그려. 내중에 우리 찬이가 할미보다 더 늙었을 때 다시 또 할미를 만나게 되면, 그때는 말여. 할미 남색 저고리, 보라색 노리개만 딱! 보면 우리 할미구나 하고 알아봤으면 좋겠구먼!”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내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나는 안 보여도 알 수 있다.
지금 할머니의 촉촉한 눈이 내 눈, 내 코, 내 입을 바라보고 계신 걸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거 같아 할머니의 귓가에 대고서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걱정하지 마. 척, 보면 알아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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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하은유의 단편동화 「환승입니다!」는 이름에 대한 불만을 유머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삶의 역경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건강함이 돋보인다. 함께 응모한 「척 보면 알아요」는 시각장애인 소년의 내면에 드리운 명암을 과장하지 않고 건강한 시선으로 그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손자와 할머니 사이의 따뜻한 사랑이 곳곳에서 느껴지며 마지막엔 가슴 뭉클함까지 선사한다. 두 작품 모두 단숨에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아 작가의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아주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뚜렷하고 작가의 따뜻한 시선으로 구현해 낸 주제의식이 매우 건강하다.
하 은 유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오랜 시간 빵을 만드는 제빵사로 살았다. 읽으면 마음이 배부르고 행복해지는 동화를 쓰는 것이 꿈이다. 2011년 단편동화 「환승입니다!」외 1편으로 제9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첫댓글 역시 환타지님의 열성은입니다요
감사합니다. 내 뜨거운 열정을 콩새님이 눈치 채셨군요.
녀석이 좋다고 활짝, 웃는다..할머니, 걱정하지 마. 척, 보면 알아요!..마지막 문장들이 참 상큼해요..ㅎㅎ
환타지님이 올려주신 동화 덕분에 저 역시..활짝, 미소짓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