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된 '나아만'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도 이해는 됩니다. 아이들이 예배를
방해하고, 아이들 때문에 예수님의 스케줄이
꼬이고 늦어지는 것에 대하여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을 예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반면, 예수님 입장에서는 이 아이들을
더 축복해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꼬아서 듣고, 이해하려고만 하고, 내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어른들에 비해서
아이들은 그냥 순수하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아이들은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이 아이들을 내 쫓으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조차도 어른들은 잘
받아들이지 않지만 아이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그들은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른들은 꼬아서 생각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산타크로스도 인어공주도 용왕이야기도
아이들은 그냥 다 받아들입니다.
천국이야기도, 천지창조도, 홍해의 기적도
아이들은 그냥 다 받아들입니다.
단지 어른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아이들을 축복하셨고,
그들에게 당신의 집 천국을 개방하셨습니다.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높은 신분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문둥병에 걸려서 밀려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단한 위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엘리사 목사님을 소개한 사람은
어린 소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아이!
그 아이의 믿음이 나아만을 엘리사에게로
인도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아만은 아직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그대로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꼬아서 들었습니다.
이성적으로 판다하며 과학이나 경험을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때 신하들의 도움으로 나아만은 동심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나 노는 냇가에 가서 목욕을 했습니다.
멱 감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씩이나!
위엄의 상징인 흰말에서도 내려와야 했습니다.
계급장이 붙은 옷이나 장신구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상처 난 내 부끄러운 몸을
신하들에게 보여야 했습니다.
어른이라면 못 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된 나아만 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릴 적 뛰어 들었던 냇가에 뛰어들 듯이,
그렇게 창피함도 잊고 요단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동심을 회복한
나아만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왕하 5:13]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
누가복음에 나오는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그날 그는
동심을 회복했습니다.
어린이들이나 올라가는 나무에 어른이 올랐습니다.
체면도 자동차도 옷도 구두도 다 포기하고 올랐습니다.
어린이가 된 세리장 삭개오를 주님은 맞아주셨고
용서하셨고 구원의 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아무나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마음!
하나님 앞에서 그 동심의 세계가 살아나야 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