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지. 사실 우리는 별로 아는 게 없어. 묻지도 않았고, 정말 중요한 일들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어. 시간이 없었지. 대체 뭘 하느라고 그렇게 바빴지?”
마리가 말했다. “아마 일하느라 그랬겠지. 그리고 사랑에 빠지느라고. 그건 엄청나게 시간이 드는 일이니까. 그래도 물어볼 수는 있었을 텐데.”
“이제 자자.” 욘나가 말했다. “배는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이젠 어떻게 해 보기에는 너무 늦었어.” -본문에서
『페어플레이』(1989)는 토베 얀손의 만년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마지막 장편 소설이다. 얀손은 한평생 아동 문학, 회화, 에세이, 소설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줬으나 『페어플레이』만큼 내밀하고 사적인 작품은 없었다. 저자 스스로 ‘자전적’이라고 밝힌 적은 없지만, 작품 속에 연인이자 예술적 반려자 툴리키 피에틸레와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음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결국 『페어플레이』의 주제는, 사랑과 예술이다. 토베 얀손의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힘이자, 최후의 순간까지 기록하고자 했던 소중한 영감의 원천이다.
『페어플레이』는 토베 얀손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두 가지, 창작과 사랑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 책은 창작과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또한 여백으로, 기다림과 거리 둠의 기간으로 충만하다. 이것들은 창작과 사랑에 있어서 덜 드러나지도, 덜 소중하지도 않은 요소들이다. 예술가의 역작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방향을 모색하며 흘려보내는 불확실한 나날. 좀처럼 낭만적으로 창작할 수 없는 시기. “자신만의 외로움”의 시간, 멈추어 서서 혼자 빗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두 아틀리에 사이에 자리한 다락의 기간이며, 창작과 사랑,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너무나 쉽게 놓쳐 버릴 수 있는 기간이다. -한나 루츠
각각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된 『페어플레이』의 주인공은 마리와 욘나다. 한집에 살면서도 오직 다락방을 통해 왕래할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 즉 각자의 아틀리에에서 생활하는 두 사람은 예술가(마리는 글을 쓰고, 욘나는 그림을 그린다.)다. 둘은 얼핏 닮은 듯 보이지만, 마치 서로 상극인 MBTI 성격 유형들처럼, 일거수일투족 달라도 너무 다르다. 마리는 곧잘 달뜬 감정에 휘말리고 욘나는 매사 냉담할 정도로 침착하다. 또 마리는 무엇이든 쉽게 원하고 금세 식어 버리는 반면, 욘나는 하나하나 주도면밀하게 따져 보고 섬세하게 확인한다. 그만큼 마리는 열정적이고 다정하고 사랑스럽지만, 욘나는 무신경하고 무뚝뚝하고 가끔 사납다. 이토록 너무나 다른(영화 한 편을 보고, 식사를 차리고, 여행을 하거나 낚시를 할 때마다 둘은 늘 티격태격한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당최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억지로 자신들의 관계를 흔들지 않는다. 저마다의 아틀리에에서 서로의 영역을 살피고, 그 거리와 차이를 충분히 아끼고 길러 낸다.
“내버리기는 쉽지 않지. 나도 알아. 하지만 너는 단어를, 한 페이지 전부를, 길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다 삭제해야 해.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하지. 그림, 어떤 그림이 벽에 걸릴 권리를 박탈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이 그림들은 대부분 너무 오래 그 자리에 걸려 있어서 눈에 띄지도 않지. 가장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못 보는 거야. 그리고 그림들은 잘못 걸려 있으면 서로를 죽인다고, 봐. 여기 내 그림이 걸려 있고 저기에는 마리의 그림이 걸려 있는데, 서로 방해가 돼. 거리가 있어야 해. 꼭 필요하지.” -본문에서
둘은 서로 “오늘은 일이 잘돼?”라고 묻는 일이 없었다. 20, 30년 전에는 물었는지도 모르지만, 점점 묻지 않게 되었다. 존중되어야 하는 공백이 있다.—그림도 보이지 않고 단어도 찾을 수 없는,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 때로는아주길어지기도 하는 기간들. -본문에서
마리가 말했다. “너 여기는 잘라야겠다. 아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를 거야. 너무 어두워.”
욘나는 프로젝터를 멈추고 천장의 등을 켜더니 말했다. “여기는 아주 까매도 상관없어. 마리가 거기 있었으니까. 안 그래?”
“그래, 내가 거기 있었지.” 마리가 대답했다. -본문에서
『페어플레이』는 토베 얀손의 삶을 사로잡은 두 가지, 예술과 사랑(반려자 툴리키)에 대한 과장 없이 담담한, 아릿할 정도로 진솔한 예찬이다. 마리와 욘나는 분주하게 창작하고 거침없이 사랑하고 전 세계를 유람하고, 가끔 예술관과 취향을 두고 다투거나 제삼자의 개입에 질투하기도 하지만, 쉼 없이, 매번 새로이 서로를 이해해 나간다. 그러면서 얀손은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유한성, 이를테면 생에서 죽음으로, 만남에서 작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위대한 예술가가 관조해 낸 인생의 편린들이 찬란한 은하수처럼 우리 곁에 그윽이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