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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의 肖像
조 승 기
1
바람이 도적떼들처럼 산동네 곳곳에 떼지어 뭉텅이로 쏟아져내렸다. 바람은 골목길을 재빨리 지나쳐서는 헐렁한 집들을 골라 오랫동안 들쑤셔댔다. 방문뿐
만 아니라 부엌문이나 창문과 벽들을 마구 두드려서는 심히 삐걱이게 했다. 낡
은 육신을 찾아 관절과 근육을 두드려대는 류마치스처럼. 그렇지 않아도 허름한 집들이 바람에 맞아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부서졌다간 어떻게 간신히 주워모아 집의 형태를 맞추면, 이내 바람은 다시 와 무참히 박살을 내놓곤 했다. 가만히 보면 집들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산동네가 의지하고 있는 산의 뿌리 전체가 바람에 맞아 이리 비를 저리 비틀, 비틀거리고 있었다. 창섭은 그 모두를 잠결에 느끼고는 눈까풀을 열었다. 눈알이 씀벅씀벅했다. 손으로 부벼보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어서 물을 마시기 위해 잠을 깬 것이다. 맨처음 눈에 띈 것은 왼쪽으로 기울어진 채 붙어 있는 달력이었다. 창섭은 달력을 보자 짜증이 났다. 그는 하고한 날 달력과 씨름해왔다. 지난 연말에 돈암동 육교 위에서 몇푼 주고 산 싸구려였는데 집에 와서 보니 못에 걸 고리 부분이 없었다. 돈을 치르고 옷벗은 여자들에 정신이 팔려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압정을 사용해 벽에 붙이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번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어지게 꽂아졌다. 그는 천장의 선을 따라 붙였었다. 그래도 한쪽으로 치우쳐 보였다. 천창의 선 자체가 맞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로 재어서 한가운데를 압정으로 눌렀다. 한동안은 그게 반듯하게 보였으나, 어느날 그것은 다시 삐뚜름하게 창섭의 시선으로 다가왔다. 창섭은 그 다음부터 아예 달력을 바로 잡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집 이 눈에 안 보이게 기울어지고 있다거나, 땅덩이가 비스듬히 돌고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 하고 생각해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창섭은 일부러 한쪽 귀퉁이에다 압정을 눌렀다. 그런데 그뒤부터 창섭은 달력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벽에 달력을 왼쪽으로 기울게 해놓고 외출한 날은 자신의 왼쪽 어깨가 땅으로부터 가깝고, 또 달력을 오른쪽으로 기울게 해놓고 외출한 날은 자신의 오른쪽 어깨가 땅으로부터 가깝게 느껴졌다. 또 이건 그 일과 관련이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의식이 자신을 괴룹힐 때 바지 호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어 만져보았다. 어깨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는 그의 남성이 분명 왼쪽으로 가 추욱 처져 있고, 어깨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때는 그의 남성이 분명 오른쪽으로 가 추욱 처져있었다. 그때마다 창섭은 그의 남성을 한가운데에 두려고 한사코 노력해보았는데, 허사였다. 한가운데로 올 때는 소변 볼 때뿐이었다. 그렇다면 창섭은 방 안에서 유일한 장식품인 달력을 반듯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방에 여자를 끌어들인다면 그게 가능할지도 몰라. 키를 거만하게 세운 나의 남성이 여자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 여자를 정확히 절반으로 쪼갤 테니까 말야. 그야말로 우뚝 솟아서, 공중탕의 굴뚝처럼 말야. 창섭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다는 생각을 하다간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버렸다. 창섭은 중얼거렸다.
“절대로 저 달력은 바로잡을 수는 없어!”
그의 방에서 하나뿐인, 주간지 크기의 창으로 바람이 침입헤와 달력을 떼어내럴 듯이 움켜쥐었다. 그 바람은 창섭의 살갗을 뚫고 들어와 뼈를 우드득우드득 갉아댔다. 창섭은 이불에서 몸을 반쯤 빼내어 주전자의 꼭지를 입에 대고 펑펑 물줄기를 뽑아올렸다. 찬기운이 머리카락 끝에서부터 발톱까지 구석구석으로 날라져갔다. 방이 내뿜는 한기 때문에 그는 간단히 무너져 부서졌다. 창섭은 내친 김에, 하는 식으로 담배를 피워물고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옷가지가 들어 있는 트렁크가 둘, 취사용 도구, 또 그를 덮고 있는 캐시미론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그의 살림의 전부였다. 아니, 또 있다. 머리맡의 손목시계. 그의 손을 뻗쳐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두시 이십 팔분이 었다. 전자시계 였는데 수자가 금방 바뀌어졌다. 창섭은 한 달쯤 전에 그 시계를 샀는데, 태엽을 감아줄 필요가 없다는 말에 귀가 피뜩 뜨이었었다. 시계 태엽을 매일 감아줘야 한다는 사실이 그에겐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었다. 또 그는 굳이 시간을 알아볼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만큼 생에 주늑이 들어 있었다. 심심해서 거리를 지나가다가 사겠다는 뜻이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갔었다. 세상은 자신과는 동떨어져서 정말 편리하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창섭은, 그럼 바테리를 자주 갈아야겠군요, 하고 물었었다. 주인은 한번 갈면 2년은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때 창섭은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내가 죽더라고 시계는 내 옆에서 2년 동안은 살아 있겠구나. 시계를 손목에 차고 나오면서 얼마나 깊은 절망을 느꼈던가. 점포를 나서자 밖은 햇빛속이었는데, 눈가장자리에 햇빛이 괴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었다. 창섭은 요를 깔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방바닥이 내뿜는 열을 다 몸으로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꽁초를 재털이에 버리고 몸을 다시 눕혔다. 이불을 끌어 머리를 덮었다. 발이 차례로 걸어나왔다. 두 발로 이불을 잡아내렸다. 헤딩을 하려는 듯이 머리가 달려나왔다. 그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다음, 이불 속으로 전신을 구겨넣었다. 그는 눈을 붙이려 했으나 좀처럼 잠이 다시 찾아와주지 않았다. 이 방은 문 쪽 한 군데만 불같이 뜨거웠다. 바랜 누런 비닐장판이 거기만 시꺼멓게 타들어가 있었다. 삐걱이는 방문을 열면 불과 30센티 정도의 마루가 있고, 그 마루 바로 밑에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무슨 방이 까맣게 탄 부분만 뜨거웠다. 방안 공기는 또 몹시 찼다. 열대와 한대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창섭에겐 그 조그만 뜨거운 부분이 몸 구석 어디에도 없었다. 창섭은 그게 안타까왔다. 어느날, 예고없이 육신을 빠져나가더니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또 산자락을 찢고 있었다. 산은 노여움으로 부르르부르르 몸을 떻었다. 부스림딱지 같은 집들을 털어내버릴 셈인 모양이었다. 산은 하나의 커다란 욕망의 덩어리였다. 그 많은 뒤척임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배설의 쾌감을 얻을 수 없는 짐승이었다. 산은 배설을 향해 끝없이 으르렁거리고만 있었다. 창섭은 수많은 적병에 둘러싸였다. 적병들은 모두 창칼을 휘두르며 창섭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창섭은 온몸에 땀이 솟았다. 웬지 손이 말을 안 들었다. 자신의 의지는 칼집 쪽으로 손을 자꾸 보내는데, 손이 응해주지를 않았다. 흐르던 땀이 식어서 이내 차가와졌다. 적병들은 한사코 가까이 오는데, 창섭은 몸이 굳어 있었다. 적병들은 창섭의 허리에 걸려 있는 우람한 칼을 보고 지레 검에 질려 있었다. 때문에 감히 달려들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하게 맞닿을 시간이 지났는데도, 적병들은 제자리걸음을 하듯 계속 걸어오고만 있었다. 드디어 창칼들이 창섭의 갑옷을 스쳐 지나갔다. 얏. 창섭은 힘찬 고함을 내지르며 그 큰칼을 뽑아들었다. 적병들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창섭은 거대한 손잡이 부분을 힘껏 움켜쥐고 칼을 무슨 깃발처럼 높이 휘둘렀다. 와아, 적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일시에 몰려들었다. 창섭은 갑작스런 변화에 뽑아든 칼을 한차례 쳐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힘이 쏴아,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손잡이 부분은 우렁찬뎨, 칼날 부분은 흐느적거리는 긴 풀잎이었다. 아아. 창섭은 창칼을 이리저리 피해다니다가 쓰러졌다. 그는 얼굴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수히 빛나는 햇살들이 날카로운 금속으로 변해 두 눈으로 뛰어들었다. 적병들은 일제히 그를 손짓해대며 혀를 뻬물고 웃고 있었다. 이마의 땀을 씻었다. 방의 한부분으로 까맣게 타들어갔던 창섭은 서서히 펴지면서 추위를 느꼈다. 이불이 등뒤로 밀려나 뭉쳐져 있었다. 캄캄한 밤의 저편에서 2월 초순의 메운 바람소리가 날아와 창섭의 살갗을 긋고 지나갔다. 긁힌 자리로 바람이 파고들었다. 바람은 살속으로 와 박혀 뼈들을 덜그력거리게 했다. 창섭은 재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기관차에서 석탄이 없는 상태를 자신과 비교했다. 태워야 할 그 무엇이 없었다. 그는 재떨이를 더듬어 담배를 댕겨물고 어둠속에서 빠알갛게 타들어우는 불빛을 응시했다. 그 불빛속에서 한 사내의 모습이 그에게로 넘어왔다. 창섭은 아침에 산을 내려가면서 가끔 만나는 사내가 육신의 일부를 재로 떨구면서 자꾸만 그에게로 다가드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겨울에 산동네에서 저 밑동네르 건너가는 일은 몹시 힘이 든다. 산비탈을 깎아 집들을 지었기 때문이다. 좁은 마루에서 서너 발자국쯤 걸어가면 담이 있고, 담에서 서너 발자국쯤 걸어가면 앞집 뒤꼍이다. 술이라도 마신 날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까딱 잘못하면 깎아지른 앞집의 뒤꼍으로 굴러떨어져 목뼈를 부러뜨리기 쉽기 때문이다. 산으로 오를수록 방값이 싸다. 산비탈에는 초겨울에 내린 눈이 겨울이 다 갈 떼까지 녹지를 않는다. 또 내려선 거푸 쌓이는 까닭이다. 이 가파른 골목길을 내려가려면 곡예사라도 된 느낌이 든다. 한 차례 굴러버리면 미아리고개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나 편리한 점도 있다. 눈이 쌓이면 집집마다 연탄재를 담 밖으로 버린다. 이것은 날씨가 풀리면 골치다. 눈이 녹아 질척거리고, 또 깨진 연탄재들이 마구 산동네를 점령해 있는 것이다. 제일 불편한 점은 물을 긷는 일이다. 산 밑에 공동수도가 있는데, 물지게를 메고 혼들리며 올라오는 일은 정말 고역이다. 하여튼 이 겨울 산동네를 오르내리면서 창섭이 만나는, 시선이 부딪치는 사내가 하나 있었다. 그 사내는, 산중턱 쯤의 구멍가게에서 창섭이 담배를 사거나 이홉들이 소주를 살 때면, 가게 안쪽 나무의자에 앉아 있다가 얼굴을 돌려 창섭을 쳐다보았다. 창섭은 늘 그 야롯한 시선에서 공범자와 같은 그 무엇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그것의 실체는 알 도리가 없었다. 자취방에 돌아와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홀짝이며 생각해보았는데, 허사였다. 두무지 짚이지가 않았다. 왜 그 사내는 퀭한 눈으로 자신의 하찮은 행동 하나까지도 훑고 있는지 창섭은 궁금했다. 비탈을 오를 떼나 내릴 떼나 사내의 시선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무한히 갈구하면서도 어딘지 비어 있는 그 눈, 아무도 모르는 일을 자기만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눈. 아뭏든 그 시선을 받으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을 창섭은 늘 받곤 했다. 창섭은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몹을 한껏 구부려서 둥그렇게 만든 다음, 한 점 점으로 까맣게 타들어갔다. 온밤 내내 바람은 한시도 쉬지 않고 산동네를 할퀴고 다녔다.·
창섭은 눈을 떴다. 바람이 부러진 창과 화살촉 등을 모조리 데리고 산등성이
를 넘어 멀리 가버렸는지 조용했다. 이미 산 밑 동네에서는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쪼록쪼록 공동수도 물 떨어지는 소리, 아낙네들의 아귀다툼, 차들의 경적소리들이 마구 뒤범벅이 되어 산동네를 기어오르다간 미끄러지고, 또 기어오르고 있었다. 창섭은 방문을 열었다. 바람이 자고 새벽에 눈이 내린 모양이다. 밤새 산동네 곳곳에 박혀 있는 나무들이 회초리 내려치는 소리로 떨고 있었는데, 이 아침 그들은 밤새 축복이나 받은 것처럼 가지마다 고개를 숙이고 나직한 음성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산동네의 모든 것들, 이를테면 함석지붕, 흙벽, 찌들은 얼굴, 또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한 가난까지도 한결 아름답게 느껴졌다. 정답고 가깝게 다가왔다. 창섭은 다시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 한잠을 늘어지게 잤다. 눈을 떴을 땐 오후 한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는 밥을 해먹을까 하다가 산을 내러갔다. 조심을 했는데도 네 차례나 굴렀다. 비탈을 따라 올라오는 시멘트 전신주를 만나야 겨우 몸의 중심을 잡는다. 그는 미아리고개에서 어느 쪽으로 내려갈까 망설였다. 그는 돈암동 쪽으로 서너 발자국 가다가 뒤로 돌아 방향을 길음동 쪽으로 바꾸었다. 길음시장으로 가 점심을 메울 요량으로 빈대떡 둘에 막걸리 한 되나 마셨다. 그제서야 어제 늦도록 마신 술이 좀 진정되었다. 그는 이 일대를 어느 곳이고 안 가본 데가 거의 없다. 근 2년 동안 모아놓은 돈 하릴없이 축내며 싸다니고 있었다. 시장을 걸어나오면서 오늘은 어디 가서 시간을 죽이나 했다. 그는 고개 바로 밑의 극장 쪽으로 갔다. 입구에 〈온방완비〉라 쓰여 있었다. 그걸 보자 오싹 추위가 달려들었다. 간판에는 남녀 한 쌍이 얼싸안고 있었고, 최루탄 어쩌고 하며 손수건을 준비해 들어오라는 문장이 추위에 파랗게 열어붙어 있었다. 더구나 동시상영 이었으므로 두말 없이 들어갔다. 샐비어가 잔뜩 피어 있는 언덕에서 남녀가 한쪽은 무덤덤하게, 다른 한쪽은 애절하게 헤어지고 있었다. 이때 언덕 저 밑에서 한 아이가 달려왔다. 그 아이는 “엄마아!” 하고 외치며 뛰어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카메라가 아이의 깨진 무릎을 잡았다. 아이를 멀리서 보는 여자는 눈물을 뿌리며 급히 띠났다. 아이는 눈물에 가려 앞이 잘 안 보이는지 거푸 넘어졌다. 남자는 자신의 앞까지 겨우 온 아이를 가슴에 안고 아이가 온 길을 되내려왔다. 아이는 남자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두드리며 “엄마아!”를 되풀이했다. 남자는 화난 얼굴을 하고 “엄마는 나쁜 사람이야.” 했다. 창섭은 그제야 어둠이 눈에 익어왔다. 극장 안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층은 팅 비어 있고, 아래층엔 예닐곱의 관객이 보였다. 창섭은 옷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의 눈에 연탄난로가 보였다. 일층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는데, 관객들은 난로와 떨어져 화면에 열중이었다. 그는 다가가 냄새가 지독히 풍기는 뚜껑을 열었다. 마악 갈아넣은 모양으로 허연빛이 몇 가닥 새까만 연탄에 늘려 찌그러져 있었다. 꼭 떼가 잔뜩 낀 배꼽 같았다. 그는 난로의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술기운에 온몸이 풀려 나른해쳤다. 눈을 감은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인데, 창섭은 무언가가 자신의 무릎에 걸려 비칠하는 느낌을 받으며 눈을 떴다. 화면 가득 샐비어가 피어 있었는데, 아까 본 아이의 무릎에서 배어나온 핏빛이 그대로 깔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강럴한 붉은 빛이 창섭을 몹시 허전하게 했다.
“미안합니다.”
창섭은 그 말을 듣고서야 시선을 돌렸다. 그쪽도 창섭을 보았다.
“아니!”
“아니!”
창섭은 그가 바로 산동네를 오르내리며 구멍가게에서 늘상 눈길이 마주치던
사내라는 것을 알았다.
“앉으시죠.”
“고맙습니다.”
창섭은 화면보다는 사내에 대해 더 신경이 쓰였다. 무언가 가득 채워져 있다가 그 기운이 흘러넘쳐서 없어진 게 아니라, 밑의 조그만 구멍으로 몽땅 빠져나가버린 것 같은 저 눈빛. 아무리 뒤져도 어떤 내용물이 없을 것 같은 저 눈빛. 창섭은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는 영화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슬쩍 물었다.
“동시상영이라 해서 들어왔는데, 같은 영화를 또 돌리고 있군요. 우리 나가 차나 한잔 할까요?
“그럽시다. 나도 시간을 죽이러 왔으니까요.”
사내는 창섭을 따라 나왔다. 밖엔 차가운 햇살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차들은 체인을 바퀴에 감고도 고개를 오른다기보다는 오히려 미끄러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체인을 감은 바퀴에서 마찰로 얼음들이 잘게 분말로 피어올라, 그 모습들을 환상처럼 만들어주었다. 길은 이미 미끄러져서야 비로소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말과는 달리 다방이 아니라 술집을 찾아 시장통으로 들어갔다. 돌곱창집으로 자리를 잡았다.
“길창섭입니다.”
“곽동민입니다.”
주인 아줌마가 돌그릇을 화덕에 올러놓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소주잔만 돌렸다. 한 병을 더 시켰다. 창섭이 먼저 말문을 터 자신의 경우를 늘어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대기업에 부품을 대주는 중소기업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음결제에 견디다 못해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다. 회사를 날린 것이다. 실의에 젖은 아버지는 매일을 술로 소일하다가 급성간염으로 세상을 떴다. 그가 세 살 때였는데, 창섭을 할머니가 맡고 며느리를 개가시켰다. 창섭은 공고를 나와 군대에선 중장비병으로 근무했다. 제대 후 그는 중동으로 나가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두 번씩이나 해외취업 사기단에 걸려 돈을 날렸다. 그 때문에 할머니가 화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할머니가 홀몸이 된 뒤 가정부로 일해 오랫동안 서럽게 모은 돈을 그놈들에게 사기당한 것이다. 그는 사우디로 나갔다. 더위에 절어 20개월을 근무했다. 매달 그는 한 푼의 낭비도 없이 적금을 해 귀국 후에는 꽤나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는 본사로 와 근무하면서 경리과에 있는 한 아가씨와 장래를 약속했었다. 세 달여 연애 끝에 여관에 갔었다. 그런데 남성이 일어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부풀어오르기는커녕 더욱 움츠러들었다. 우습게도 그는 방광의 통증과 함께 요의를 느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몇번이고 시도를 했으나 헛수고였다. 아가씨가 침착하게 이끌어주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아가씨는 처음엔 어이없어하다가 나중엔 오히려 안도감을 갖는 표정이었다. 여자 경험이 전혀 없었느냐고 물어왔었다. 그러나 세 번 여관에 들고 나서 아가씨는 창섭의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창섭은 그 뒤 몇 여자를 돈으로 샀으나, 고장난 공중전화기처럼 단한번의 통화도 못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발기불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병원에서는 심리적 요인 어쩌구 하면서 앞으로 차차 회복될 거라는 둥, 기후풍토가 달라 적응이 잘 안되어서 그런다는 둥 불확실한 말만 해댔다. 창섭은 밤마다 괴로왔다. 무르익은 남자가 혼자서 밤을 맞는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 충격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최저액으로 생활하기 위해 산동네로 올랐다. 그는 거의 매일 밤에 몇 차례고 깨어나 소리죽여 울었다. 행위는 죽었는데, 그놈의 욕망은 왜 그리 왕성하게 살아나는지 몰랐다.
창섭은 여기서 임을 다물었다.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섭이 아줌마를 불
러 육수를 더 달라고 했다.
동민은,
“내 짐작이 맞았읍니다. 어떤 종류의 욕망이든 발산을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닮게 마련힙니다. 호모가 호모를 바로 알 수 있듯이, 은연중에 저절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했다.
창섭의 고개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동민이 입을 열었다.
“내 경우는.”
그의 어미니는 국민학교 교사였는데 그가 두 살 때 백혈병으로 죽었다. 그는
이모에게로 떠맡겨지고, 그의 아버지는 재혼했다. 이모는 그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조그만 개인회사에 취직해 있었다. 이모는 동민을 잘 보살폈다. 혼담이
몇 번 있긴 했어도 아루어지진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까 동민이가 혹시 이모가
낳은 자식이 아니냐 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모는 동민이 열 살 될 때까지 키워주고, 울면서 스물아홉에 시집을 갔다. 아버지에게로 넘겨졌는데 갖은 눈치를 받으며 컸다. 계모와 이복동생들에게서 받은 천대는 이루 말할 수 었었다. 국민학교를 늦게 들어갔으므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갔다. 그는 파월을 원했다. 우방을 돕는다거나 자유를 지키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고, 오직 돈을 모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이모에게 부탁해 사병계에게 돈을 꽤나 썼었다. 그는 일병 때 갔는데 재복무를 원했다. 복무기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1년을 더 있기로 한 것이다. 그는 귀국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작전에 투입되었다. 아군이 설치해놓은 클레이모어의 살상판을 적이 돌려놓은 줄을 모르고 아군이 접선기를 눌러버렸다. 그 때문에 아군이 당했고, 파편을 하복부에 맞고 정신을 잃은 동민은 후송되었다. 그는 성신경을 다쳐 목양은 멀쩡히 있는데도 기능을 잃어버렸다.
돼지 창자가 돼지똥 냄새를 풍기며 타고 있었다. 창섭은 육수 대신 술을 부었다. 동민은 창섭의 손에서 술병을 뻬앗아 자신의 잔에 채웠다.
“술을 구워먹을 작정이오?”
창섭은 잔을 들어 술을 목안으로 타악 털어넣었다. 그들은 일어섰다. 오후 해가 상당히 기울어 있었다. 동민이 창섭을 끌었다. 다음은 자신이 사겠다는 것이었다. 둘은 비칠비칠하여 허름한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라면을 계란 풀어 하나씩 끓여 달래서 먹고, 다시 소주병을 깠다. 동민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 진흙탕 수렁을 기진 않았읍니다. 마을로 들어가 총구로 문짝을 찔러대며 긴장하지 않았읍니다. 살아서 돌아가면 내가 목숨을 내건 만큼의 보상이, 개인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걸로 알았었읍니다.”
“난 귀국해서 한동안 즐거웠읍니다. 여자의 입술을 알았을 때 말이죠. 그러나 여자가 아직 피우지 않은 담배라면, 나는 이미 타들어간 꽁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여자가 향기로운 바람으로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의 가슴은 풀풀 날리는 재입니니다. 우리의 육신은 너무 메말라서 푸석푸석 날리는 재입니다.”
“조그만 불씨 하나가 한곳에 불을 지릅니다. 불은 차츰차츰 번져갑니다. 불은 커져서 도시 전체를 태웁니다. 여자는 육신을 세차게 혼들어댑니다. 여자의 몸 속에선 사람들의 아우성, 흐루루기 소리, 앰뷸런스 달리는 소리, 소방차 소리가 잇대어 쏟아집니다. 그러나 우린 두꺼운 방화벽 입니다. 타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곤죽이 되도록 마셨다. 무슨 소린지 지껄이며 빈 술독에 술을 채워넣
듯 마셔댔다.
창섭은 여느날처럼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기울어 걸러 있는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지 옆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창섭은 비스듬히 누워 잠들어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무던히 많이 보아왔던 모습인데 짚이지가 않았다. 그는 오래 생각해보았다. 창섭은 두 눈에 눈물이 괴었다. 그게 언제부터이던가 늘 보아왔던 바로 자신의 프로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창섭은 까칠한 얼굴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어젯밤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술집에서 몇 시에 나왔는지, 어떻게 산동네를 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창섭은 시계를 보곤 이미 정오가 지나 있음을 알았다. 그는 일어나 앉아 담배를 댕겨물었다. 얼마가 지난 뒤에 동민이 눈을 뜨고
물을 찾았다.
동민은 거처를 창섭의 방으로 옮겼다. 무엇보다도 둘의 관심은 잃어버린 욕망을 어떤 방법으로 살려내느냐에 있었다. 둘은 귀국해서의 얘기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2
창섭은 오늘도 고속버스 터미널로 나갔다. 요즘은 상대를 만나지 못해 늘 우울했다. 여섯시가 좀 지나 있었다. 그는 버스가 와닿는 곳으로 갔다. 저녁을 먹지 않았으므로, 구석에 쑤셔박혀 있는 간이식당에서 우동을 하나 홀쩍거렸다. 그에게 있어선 무엇보다도 식욕이 우선이었다. 배가 불러야 모든 것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는 언젠가 밤늦게 버스에 실려가면서 한 노파를 보았었다. 주름살로 기워진 노파는 운전기사 옆쪽에 걸터앉아, 무릎엔 때에 절은 보자기를 덮은 그릇을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창섭은 노파의 바로 옆에서 손잡이에 매달려 갔다. 노파가 보자기를 들추고 지푸라기가 묻어 있는 쭈글쭈글한 홍시를 하나 꺼냈다. 어느 시장바닥에서 벌여놓고 몇날 며칠을 팔다 남은 것인 듯했다. 노파는 누더기에 홍시를 살짝 문질렀다. 아마 노파는 문지르는 흉내만 내었을 것이다. 힘을 조금만 주어도 구정물 같은 액체를 흘려댔을 홍시가 터지지 않은 걸로 보아서 창섭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노파에겐 식욕이 먼절까, 성욕이 먼절까. 창섭은 지푸라기까지 베어무는 노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었다. 창섭은 그릇을 들어 홀훌 우동국물을 목구멍 건너 깊숙이로 쏟아넣었다. 그는 마지막 한 방울을 먹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말끔히 비웠다. 일렬로 주욱 늘어서 있는 공중전화 부드 앞을 어슬렁거렸다. 마땅한 대상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간이식당의 옆, 구석지에서 그는 발톱과 이빨을 일으켜세우고 기다렸다.
지난 여름 그는 북적대는 시장통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접촉을 배웠다. 여자와 스치거나 부딪치면 몸에 열기가 전해져왔다. 성기의 극대화라고나 할까, 온몸이 성기가 된 셈이다. 미친 듯이 쏘다녀서 피하는 척하며 원하는 신체부위와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가 순간적으르 떼는 방법으로 희열을 얻었다. 여자의 신체부위에 따라 느낌이 달랐다. 창섭은 회수가 거듭될수록 접촉부위를 극소화시켜서 짧고 강렬한 쾌감을 얻어내야겠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는 실천에 옮겼다. 우선 자신의 몸에서 쓸모가 없는 부분이 있는 허리 이하를 버렸다. 그는 많은 노력 끝에 여자 몸이 아무리 부딪쳐와도 버린 부분에서는 전혀 희열을 얻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엔 목 윗부분을 버렸다. 눈으로 본다든지, 귀로 듣는다든지, 키스라든지 하는 것은 자신의 성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되었다. 기회를 만들기가 어려운 것을 미련없이 버린 셈이다. 끝까지 남은 것이 두 손이었다. 왼손을 버렸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남은 게 오른손 무명지 중에서도 첫째 매듭이었다. 창섭은 그곳으로 자신의 성기를 옮긴 것이다. 주위가 사뭇 어두워쳤다. 이곳은 조명이 별로 시원스럽지 못했다. 창섭은 마중 나온 여자들 중의 하나를 노리고 있었다. 시장바닥에서 죽어서 둥둥 떠다니는 먹이보다는, 살아서 한사코 먹히지 않으려는 먹이를 그는 원했다. 잡히므로 해서 푸들거리는, 그래서 삶의 싱싱함을 전달해주는 대상을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먹이 하나를 지목했다. 그런다고 해서 다 밥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신중하고 세련되게 투망질을 해야 했다. 그는 슬금슬금 붉은 투피스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가까이 갈수록 붉은색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는지 긴장한다. 다가오는 대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한 불안을 갖기 시작한다. 뱀 이 땅꾼을, 소가 도축수를 알아차리듯이. 이게 중요한 것인데, 창섭은 그런 것을 느끼는 대상만을 골랐다. 상대가 느껴주지 않으면 자위행위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는 일정 거리까지 접근을 하면, 이번엔 주위를 느리게 돈다. 눈치를 못 차리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 그러나 이 경우의 눈치를 못 차리도록이란 말은, 공공연한 비밀이란 말의 내용과 같다. 말하자면, 그걸 알아차리게 하면서도 동시에 무력감을 주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창섭은 시도 중에 그가 실수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게 되거나, 상대방이 자신의 얼굴을 봐버리면, 그 먹이는 미련없이 버렸다. 창섭의 온몸은 어두컴컴한 어느 구석지에 틀어박혀 있고, 오른손 무명지의 첫째 마디만 먹이를 향하여 걸어나갔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온몸은 그곳에 없고, 다만 창섭이 노리는 접촉부위만 덩그마니 남아 허공에 떠 있는 것이다. 첫째 마디가 멀리서 빙글빙글 헤매다가 점차 붉은색과 간격이 좁혀져가자 이번엔 직선으로 재빨리 간다. 여기서 행위가 벌어진다. 첫째 마디가 앞만 바라보고 있는 붉은색의 왼쪽 엉덩이를 찌익 스친다. 그 동작은 누가 보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아닌, 또는 하루에 수십 번씩 있을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외로운 한 사내의 눈물겨운 정사(情事) 현장인 것이다. 첫째 마디를 통해 엉덩이 선을 만진 다음 창섭은 꼿곳이 걸어간다. 그러나 그는 격심한 쾌감으로 최고조로 혼들리며 가는 것이다. 짧고 간단한 의식으로 붉은색은 겨우 고개를 들어 사라져가는 창섭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창섭의 첫째 마디엔 성감이 그득해서, 그야말로 흔들리지 않고 간다. 붉은색의 엉덩이 선도 그득한 성감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붉은색은 서서히 신비스러운 깊이로 떨어져내려 온몸이 나른해짐을 느낀다. 맥이 빠진다. 주저앉고 싶다. 눈을 감는다. 창섭은 만지는 것만으로도 여자를 몇 차례고 오르가즘에 도달시킬 수 있다구 생각한다. 그는 버스에 실려가면서 오늘의 노획물을 바라본다. 그가 짧게 만진 동안, 여체가 작은 부위를 통해 내던져 준 커다란 요동을 본다. 그것은 오른손 무명지의 첫째 마디에 살아남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단지 그것으로 창섭은 오늘밤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창섭은 문득 깨달았다. 성행위시 항상 똑같은 자세로 임하는 것은 신선감을 주지 못할 뿐더러 지루함까지 보태준다는 사실, 또 행위 자체를 단조롭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그는 자극을 느끼는 부분을 신체의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우선 그는 오른손 무명지의 첫째 마디에 붕대를 두껍게 맨 채 가을 동안 사용하지 않음으로 해서 일단 죽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옮길 마땅한 부위를 찾지 못한 채 겨울을 술로 보내고 있었다.
귀국해서 제대한 뒤, 동민은 알음으로 조그만 출판사의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회사는 잔일이 밀려 거의 ˙매일 야근을 하는 형편이었다. 일이래야 오십여 페이지 정도의 소책자나 각급 학교의 교육계획, 또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각종 양식의 인쇄를 맡아 했으며 석사학위 청구 논문 등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다른 곳보다 가격이 저렴해 늘 바쁘나, 일하는 양에 비해 보수는 보잘것 없었다. 따라서 임금이 싸게 먹히니까 활마를 줍는 공원은 전부 중졸 정도의 여자애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동민은 그곳에서 견적이나 떼어주고,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현금 입출금이나 하고, 인쇄물을 배달도 했다. 하루는 동민이 변소에 앉아 있었다. 이곳의 변소는 벽을 사이에 두고 두 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내용물이 모이는 부분은 공통이었다. 여자용에서 쏟아내는 소리가 동민의 귀를 타고 내려 온몸을 적시었다. 이때 동민은 묘한 포근함, 쩌릿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줌소리가 신체의 각 부분에 봄비처럼 여리게, 그러나 촉촉히 젖어듦을 알았다. 전신이 오줌소리에 두드려맞아 습해졌다. 동민은 그 소리들을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오랫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나중에는 발이 저려 일어설래도 일어설 수 없게 될 때까지. 소리는 동민의 온몸 어디에나 묻어 있고, 또 괴어 있었다. 동민은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겨우 비칠 일어섰다. 그때 몸 안에서 울려나오는 맑디맑은 종소리를 들었다. 찰랑찰랑 괴었던 소리들이 부드럽고 우아하게 퉁겨올랐다. 그는 틈만 있으면 변소로 달려가 귓속에다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가 걸려들기를 꾸준히 기다렸다. 사무실에서는 그를 가리켜 방광이 특이하게 작다느니, 잠자리에서도 틀림없이 조루일 거라니 놀려댔다. 동민은 처음엔 그 말들을 듣고 당황했으나, 나중엔 더 편했다. 어떤 일에나 인정을 받으면 어느 정도 쑥스러움이 가시는 법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당연히 그래야 될 것으로 인정을 해준다. 동민이 먹이를 낚아챌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있으면 발이 저려오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엉거주춤 앉은 채로 체중을 오른발로, 왼발로 옮겼다. 먹이는 예고없이 갑자기 온다. 여자용의 변소문이 열린다. 동민은 이 최초의 소리에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는다. 먹이는 변기 양쪽으로 다리를 놓는다. 먹이는 이어 본격적인 전기(前技)로 들어간다. 지퍼를 내려 두 쪽으로 쪼개는 소리, 작업복 내리는 소리, 내려온 바지가 무릎께에서 매달리는 소리, 팬티스타킹 내리는 소리, 팬티가 흐르는 소리. 이 소리는 언제나 신중해서 마치 메스로 피부를 얇게 벗겨내는 소리를 연상케 한다. 소리가 이지경에 이르면, 동민은 이마에 미열이 오르고, 입안이 마르고, 손발이 약간씩 경련을 일으키며, 호흡이 가빠오고, 얼굴이 붉어진다. 먹이가 앉는 소리, 이 소리에 이어 재빨리 배꽃이 하얗게 열리는 소리가 달려온다. 동민은 손바닥에 땀이 배인다. 전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행위에 돌입한다. 드디어 배꽃을 가르고 소리가 튀쳐나온다. 이 소리를 몇 초 동안 그대로 받는다. 그러다가 돌연 으흠, 하는 헛기침을 날려보낸다. 먹이는 찔끔, 하며 소리를 가둔다. 옆칸에 납자가 들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때 동민은 지금까지 자신을 적셔왔던 모든 소리들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참을 만큼 참은 먹이는 죽었으면 죽었지 더는 인내할 수 없다라는 듯이, 혹은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듯이 감춰둔 소리들을 털어내놓는다. 그 소리들은 일단 밑으로 쏟아졌다가 물안개로 튀어올라 동민의 귀에 괸다. 그는 현기증을 느낀다. 몸이 얼얼해온다. 귀에 잡힌 소리는 나무처럼 온몸 구석구석에다 잔뿌리를 무성하게 내린다. 육신이 갇힌다. 비칠한다. 순간 쓰러지려 한다. 그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손등에 이마를 가져각다. 소리가 문득, 그리고 감자기 끊어진다. 사방이 고요해진다. 귀에 괸 소리가 번져나간다. 온몸이 젖어들어 축축해진다. 살갗 어디를 쓸어봐도 습한 소리들이 묻어난다. 먹이는 소리를 다 끝낸 게 아니다. 고맙게도 비장의 무기를 하나 더 간직해놓고 있다. 열을 소모했으므로 짧게 진저리를 치는 것이다. 이˙ 소리의 출현으로 동민의 몸은 얼큰해진다. 일어서는 소리, 활짝 열렸던 배꽃이 접히는 소리, 팬티 오르는 소리, 팬티스타킹 뒤 따르는 소리, 작업복 날으는 소리, 변기 양쪽에서 메는 발소리, 이어 열렸다 닫히는 변소 문 소리. 이 소리들은 후기(後技)에 속한다. 동민은 잠시 후 코날개의 땀방울을 문지르며 자신의 견고한 성(城)에서 몸을 뻬낸다. 어떤 때는 같은 먹이가 걸려드는 수가 있다. 그때마다 동민은 단박에 알아차린다. 소리의 길이나 소리의 폭에 의해 구별해낸다. 마치 얼굴을 보고 사람을 구별해내듯이, 그는 배꽃에서 빠져나오는 소리만으로 먹이의 신장이나 체중 흑은 엉덩이의 크기까지도 짐작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여름에 가장 더운 장소가 변소다. 좁은 공간에서 무한한 힘으로 자신과 싸워야 하니까. 겨울에 가장 추운 곳이 변소다. 까고 앉았는데 밑으로 찬바람이 숭숭 몰려드니까. 먹이가 내지르는 소리는 겨울이 그만이다. 찬바람 때문에 피부가 수축되어 내는 소리는 양성모음처럼 작고 부드러우며 한결 곱다. 활자 줍는 여자애들이 많지 않다 보니까 눈치를 차린 탓인지 좀처럼 먹이가 잡히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 기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자 동민은 쾌감을 느끼는 부위를 귀에서 눈으로 옮기기로 작정했다. 좀더 대담해진 셈이다. 그는 먼저 귀를 무디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귓속으로 쑤셔담았다. 그 소리는 워낙 강력해서 오줌소리를 비교적 쉽게 잊을 수가 있었다. 동민은 다음 행동을 위해서 여자용 변소의 시건장치를 살폈다. 문에는 밖에서 열 수 있는 것과 안에서 열 수 있는 것,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민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가면서 안에서 잠그는 것의 끝부분을 제거해버렸다. 그는 남자용이 빈 것을 확인하고 여자용을 열젖히려니까 기회 잡기가 몹시 어려웠다. 더구나 이젠 얼굴을 들이밀어야 하므로 이쪽이 바로 드러나버린다. 열었다 닫는 순간에 모든 사태를 파악해야 한다. 처음엔 눈에 들어오는 게 옷뿐이었으나 차근차근 냉담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누가 보기엔 짧은 시간이겠으나, 그는 그 시간을 지루할이만큼 길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여자용 변소를 확 열었는데, 거의 동시에 무엇에 의해 들리다시피 하여 뒷덜미를 잡혔다. 공장장이었다. 여공들이 부끄러워 다른 사람에게는 쉬쉬 하고 있는 줄로 알았었는데, 이미 얘기가 좌악 돌아서 그쪽에서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예전엔 모두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여공들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작업시 치마로 바꾸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동민은 몇의 동료들에 의해 시꺼멓게 그슬린 개처럼 사지를 하늘을 향해 들리워서 내팽개쳐졌다. 동민은 그 사건 이후 지금까지 다른 직장을 구하려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산동내에 얹혀 살면서 모진 겨울을 모질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둘이 서로 들려준 이력은 이상과 같았다. 둘은 똑같은 상처 부위를 들여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부스럼을 긁어대고 상처를 넓고 깊게 후벼팠다. 거기서 오는 쾌감은 늘 둘을 서럽게 만들었다.
2월도 하순으로 점어드는 어느 날, 그들은 욕망을 풀 방법을 하나 떠올렸다.
둘은 길음동 앞쪽으로 흐르는 개천가의 술집으로 갔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는데 흘로 앉아서 마셨다. 저녁 때가 지나자 아가씨들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젖가락으로 유행가 가락이란 가락은 차례대로 꺼내 눅신하게 두들겨팼다. 젖가락도 목이 쉬어 오히려 작년 것만 남을 때쯤 해서 창섭이 입을 열었다.
“야, 요강 하나 가져와라.”
“홀의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바로 변소가 나와요.”
“가져오라면 가져와!”
“뭣 하게요? "
“용무를 보려고 그래.”
“술맛 떨어져요.”
말을 마친 아가씨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요강을 가져왔다.
옥색의 사기요강이었다. 창섭은 좌중을 조용하게 한 다음, 자신의 짝인 아가씨에게 요강에 오르도록 했다.
“우릴 뭘로 아는 거예요?”
“설마, 승마 선수로 알진 않아.”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다 시키는 거예요?”
“위하여!”
“뭐, 술 선전하는 거예요? ”
“좌우간.”
창섭은 지폐를 한 장 꺼내 가슴팍에 꼬깃꼬깃 끼워주었다. 그제서야 아가씨는 까짓거 하는 투로 엉거주춤 요강에 올랐다.
“이제 뭐 하는 거예요?”
“누어야지.”
“네에?”
“오줌을 싸라구!”
“별꼴 다 있네!”
아가씨는 매미처럼 날개를 비벼서 음향을 하나 길게 만들어냈다. 매미울음은 요강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낱낱이 둘의 가슴으로 또르르또르르 굴러들었다.
그들은 매미 울음소리를 가슴에다 깊숙이 집어넣었다. 석기시대에 불씨를 간직
하듯, 보다 큰 욕망을 위해 언제라도 키위 쓸 수 있게 재를 파헤치고 저 안에다 숨겨놓았다. 동민의 짝인 아가씨도 요강에 올랐다. 그 매미울음은 첫번보다 더욱 날카롭고 강렬했다. 이번엔 소리가 둘의 온몸을 할퀴고 다녔다. 둘의 피부는 긋는 대로 금이 갔다. 둘은 아가씨들의 잔에 술을 거푸 채웠고, 또 아가씨들은 요강에 오줌을 거푸 채웠다. 그러면 둘은 매미울음을 몸 안에다 거푸 채우는 것이었다. 자정이 가까와서 그들은 소리가 한 방울이라도 새어나갈까봐 몸을 직선으로 세우고 뻣뻣하게 술집을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다음날 하루종일을 이불 속에서 뒹굴며 불씨를 꺼내 가슴에 큰불을 질러댔다. 불은 안 보이게 일어나 전신을 까많게 태워댔다. 그러면 그 타고 남은 잿속에다 작은 불씨를 하나 남겨서 고이 간직해두곤 했었다. 그러다가 깜박 불씨를 잃으면, 다시 개천가의 술집에 가서 담아다 날랐다. 얼마 안 가 그들은 그 일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또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며칠이 지난 후, 그들은 밤이 으슥해지면 산동네를 내려왔다. 무대를 변두리에 있는 모 여대 부근으로 잡았다. 지방 출신이 대부분인 그 여대생들은 개학이 되자 우르르 모여들었다. 둘은 서로 거리를 두고 이빨과 발톱을 감춘 상태로 먹이를 노렸다. 깜깜한 밤, 으슥한 곳에다 덫을 쳐놓고 꾸준히 기다렸다. 이 부근의 집들은 거의 모두가 그 여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몇씩은 박혀 있었다. 둘은 게들이 제 굴에서 밖으로 나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게들은 모로 걷기 위해 굴을 빠져나온다. 그들은 그 게들을 간단히 나포하면 된다. 이 여대 부근은 유난히도 골목들이 이리저리 만수산 드렁 칡처럼 얽히고 설켜 있었다. 여대생은 하도 수자가 많아서 연극관람이나 데이트에서 늦기도 하고, 느닷없이 설사나 소화불량, 혹은 준비없이 통증이 몰려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길고 짧은 골목을 휘척휘적 걸어나와 골목 밖의 약국으로 간다. 그들은 여대생이 다시 돌아와줄 때를 기다렸다. 그들은 방범등이 깨진 전보대 옆에 어둠처럼 서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껴안고는 달아났다. 그녀들의 몸 뒤트는 싱싱한 동작 입도 못 벌리는 경악, 떨어져나가려는 꿈틀거림 등등이 몸속을 곰실곰실 기어다녀, 그들은 몇날이고 쾌락의 물살에 젖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궁리끝에 과감한 투자를 하기로 했다. 둘은 은행에 맡긴 돈을 찾아 여대에서 가까운 곳에 가게를 하나 계약했다. 그들은 서둘렀다. 실내장식을 하는 사람을 구해다가 한 주일을 허비했다. 드디어 그들은 휴게실 〈두리〉를 개업했다. 돈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분위기 위주로 좌석수를 적게 배치했다. 손님이 다 들어찬다고 해야 열 명의 시설이었다. 실내는 고풍하게 꾸몄으면서도 현대감각을 풍길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음악은 다 클래식으로 준비해 수준이 높음을 과시했고, 좌석은 두 개 단위로 해 전부 간막이를 사용했다. 그들은 떼지어 오는 손님은 원치 않았고, 그저 하나나 둘이 와 조용히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했다. 강의시간이 비어 다음 강의에 대려고 몇 시간씩 죽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책을 읽기도 했고, 원고를 쓰거나 번역을 하기두 했고 잡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들은 끊임 없이 기회를 엿보았다. 그녀들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 왔고, 또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실내에 하나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기회 얻기란 첩첩산중이었다. 그들은 그 방법을 남용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실내에 단 한 명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함부로 거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들은 모처럼 먹이를 하나 구했다. 이른 아침이어서 청소를 막 끝냈는데, 청바치 차림이 들어왔다. 둘은 입을 헤헤 벌렸다. 풍만한 몸매였다. 청바지는 구석지의 간막이 안으로 들어가며 커피를 주문했다. 창섭은 커피 한 잔을 들고 갔다. 동민은 분홍빛깔의 아련한 멜로디를 실내에 주욱 깔아놓았다. 창섭은 시선을 책으로만 주고 있는 청바지 앞에 잔을 내렸다. 청바지는 그 자세에서 손만 내려 잔을 들어올렸다. 창섭은 몇걸음 뒤로 물러선 채 서 있었다. 한 모금 흘짝이던 청바지가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 책에서 눈을 뗐다. 창섭과 눈이 마주쳤다. 청바지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을 느꼈다. 청바지는 책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었던 커피잔을 놓친다. 잔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아앗!”
청바지는 어디론가 잦아들고 허공엔 잠시 비명만이 걸려 있었다. 창섭은 눈을 크게 떠서 청바지의 미간에 잡히는 주름살, 가늘게 경련하는 입술의 양끝, 일순 얼굴 전체로 재빠르게 지나가는 두려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포획 했다. 청바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른 채 멍하니 있었다. 이어 눈물이 맺혔다. 창섭의 하의는 무릎께에 걸려 있었다. 청바지가 간막이를 밀고 뛰쳐나와 거리로 달려갔다. 이어 괴상한 웃음을 물고 창섭이 나왔다. 그런 식으로 가끔씩 하의를 내릴 수 있는 기회가 둘에게 왔었다. 가게문을 닫은 뒤, 이불에 파묻혀 먹이가 뱉어낸 모든 배설물을 그들은 온몸에 묻혀댔다. 먹이가 문을 밀고 들어오던 표정, 점잖게 차를 주문하던 표정, 결정적 순간에 놀라 몸을 작게 구기던 동작들을 회상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놀라서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제일 오래 남았다. 손발이 다른 만큼이나 비명소리가 다 달랐다. 비명소리는 주인의 입을 빠져나와 둘의 육신 어느 곳에나 날카롭게 화살촉이나 비수처럼 깊이깊이 박히는 것이었다. 일단 소리에 잡히면 둘은 생이 주는 무의미, 무력감에서 벗어나 불고기처럼 뒤척였다. 온몸에 비늘이 돋기 시작하고, 비늘들이 하나씩 몸속 깊은 곳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그물에 철렁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몸속을 궤뚫고 지나간 비명소리의 흔적을 찾아 밤을 밝히곤 했다.
그것을 찾으면서 둘은 껴안고 소리죽여 울었다. 그들은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중반이라는 시대의 풍요가 가져다준 기막힌 개인의 적막감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월남으로, 중동으로 진출해 부유해진 나라 안에서, 그 부를 만들어냈던 그들은 지독한 소외감 속에서, 개인의 하픔 속에서 매일을 쓰라리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 둘이 울 때면, 그 둘의 저 밑바닥에 깔려 있던 외로움도 잠깐씩 떠올라 함께 울었다.
그 둘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휴게실 〈두리〉의 문을 열고, 먹이상자인 여자대학 건물을 바라보았다.
-끝-
2016년 3월3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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