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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15~17,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오늘은 추수 감사절입니다. 매년 11월 3째 주일을 우리나라에서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본래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이 시작되었는데, 미국은 11월 넷째주 목요일에 지키곤 합니다. 이 절기는 영국과 네덜란드 등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인 미국에 건너와 첫 추수를 하고 하나님의 돌봐 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지키기 시작한 절기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에서 지켰던 세 가지 절기 곧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중에서 맨 마지막 절기인 장막절과 성격이 거의 같습니다. 장막절은 모든 한 해의 추수를 다 끝난 후에 그 은혜를 감사하려고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면서 지키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11월 셋째 주일로 그 날짜를 정하고 드려오고 있는 추수감사절 역시 이러한 성경적 전통과 종교 개혁 후의 개신교의 신앙 정신이 조화롭게 스며들어서 지키는 절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인 우리를 돌보아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는 복된 추수감사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래 추수감사주일의 유래가 된 배경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험난한 대서양의 파도를 건너 북 아메리카 동부 해안에 도착한 개신교도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대서양 바다 위에서 잃고 수장하면서 그 해 겨울을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넘겨 씨를 뿌려서 첫 수확을 한 후에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교회에 모여 감사함으로 시작되었다 할 것입니다. 험난하고 고달프고 가난하고 모든 것이 부족하였을 때에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풍요로운 가운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몹시 가난하고 힘든 여건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에서 우러나온 감사함이 기독교 신앙의 진면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왜 가난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느냐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복된 은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많은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권력과 무력으로도 차지할 수 없는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구원의 축복은 우리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앙인들은 배를 타고 네덜란드나 영국의 항구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널 때에 이미 그 항해가 너무 힘들어서 가는 도중에 가족들 중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출발했던 것입니다. 그 예상대로 배멀미와 질병과 폭풍우의 시련을 겪으면서 어린 자식도 잃기도 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잃기도 하면서도 기꺼이 그 항해를 다하여 자유의 땅 신대륙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믿고 바른 신앙의 진리를 굳게 지켜서 영혼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답게 마음껏 하나님을 진리 안에서 예배하며 사는 것이 최고 최상의 삶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목숨보다 신앙의 진리를 고수하고 지키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 죽는 것이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굶주림 속에서 씨앗을 뿌려서 마침내 추수하였을 때에 이미 사랑하는 이들을 많이 잃었지만 그러한 모든 고난과 역경 중에도 추수하고 정착할 수 있었음으로 인하여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경배하였습니다. 또 자기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농사 짓는 법을 알려준 인디언들까지 초대하여 함께 감사의 축제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어 죄사함과 의롭다 함과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가장 큰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 고린도후서 6:8 이하의 말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행복한 자들인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들인지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8~10)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욕을 먹고 가장 세상의 염병이라는 악한 이름으로 불려질지라도 사실은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복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이라고 조롱을 받으나 참된 진리를 가진 자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천사가 부러워하는 하나님 나라의 스타들입니다. 저 북한의 수용소에서 이름도 없이 감춰지고 억눌린 삶을 사는 북한의 형제 자매들은 사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없어서 근심하는 자들로 세상 사람들은 보지만 사실은 항상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영광스러운 소망 때문에 항상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는 땅 한평 없고 허름한 초가집, 스레트 집에 살면서 폐지를 주으며 사는 가난한 자들일지라도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호화로운 맨션 집이 있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고 있으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서 천국 모두를 누리는 자들이며 다른 이들을 부요하게 하는 진정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구원받은 자들로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들은 이러한 내적 부요함과 행복이 충만하기 때문에 비록 현실에서 어려움과 핍박과 실패와 가난과 질병과 고난을 겪는다 해도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과 부요 의식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넘치는 복을 복음 안에서 베풀어주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을 인하여 진심 가득히 감사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은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골로새서 3:15~17 말씀만 보아도 3절에 불과한 짧은 구절에서 세 번에 걸쳐서 반복하여 감사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라”,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사도는 말씀하였습니다.
또 골로새서 2:6,7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구주로 믿어 신앙 안에서 교훈을 잘 받고 믿음이 자란 사람은 넘치는 감사의 열매를 주렁 주렁 맺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사람, 믿음의 사람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사도가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니라”(로마서 1:8)
고 적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 말씀에도 보면, 사도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에베소서 1:15,16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중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 보면 이르기를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라고 쓰고 있습니다.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 보낼 때에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디모데후서 1:3)
그 외에도 사도가 감사하는 고백을 하는 내용이 그의 편지에 자주 나옵니다. 사도가 이처럼 감사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성도들에게도 늘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자주 가르치곤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감사하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써 우리의 진홍 같은 모든 죄를 완전히 사해주시고, 저주와 사망과 영원한 지옥 불에서 구원해주시고 값없이 의롭다 인정해주시고 천사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시고 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늘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또한 우리를 구원해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늘 사랑하사 동행해주시고 인도해주시고 도와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기도에 응답해주심을 인하여 또한 감사함을 드립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만 아니라, 우리 곁의 사람들에게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먹는 배추 등 채소나 과일들, 돼지고기와 소고기나 고등어나 갈치나 바지락이나 김이나 미역 등 우리가 직접 기르거나 잡거나 양식하는 법 없이 수고하는 농부, 어부, 산나물 채취하는 분들의 손길을 통하여 얻습니다. 전기, 기름 등도 그러하고, 차량과 차량 정비도 그러하고, 버스, 전철 운행도 그러하고, 집의 수리도 그러하고, 우리 혼자로서는 도저히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정부 기관이나 기업들에서 많은 정치인, 공무원들, 기업가, 근로자들이 힘을 합쳐서 일함으로 국민들인 우리가 잘 살 수 있도록 늘 도와주고 챙겨주고 있습니다. 수출로 많은 이익을 벌어든 기업에서 세금을 많이 냄으로써 국가 재정에서 가난한 국민들을 위한 의료 재정 지원이나 노인 복지 재정 지출을 해주고 뒤쳐진 이들을 많이 도와주니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되니 결국 우리를 늘 돕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를 지키느라 우리 젊은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느라 청춘의 때를 희생해주니, 우리가 그래도 평안하게 이렇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경찰들이 각곳에 CCTV를 설치하고 위급할 때 출동해주고 사기꾼들과 보이스피싱범들, 악한 폭력범들을 잡아주니, 우리가 그래도 안심하고 일상 생활을 해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마약 사범들을 세관에서 잡아주고 경찰들이 술집들을 급습하여 마약을 몰래 사용하는 이들을 잡아내니 그래도 아직 사회 전반에 마약이 퍼지는 것을 막아내고 있어서 우리 자녀들이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저 미국에서는 그 동안 민주당 정권이 성적 다양성을 추진하고 대마초 흡입을 합법화하고 각종 마약류 단속에 해이하더니 현재 대표적인 미국 서부의 대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도시의 한 구역 전체가 좀비처럼 걷는 마약장이들이 노숙자들과 떼를 이루고 도시를 점령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미국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가 성적 다양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마약에 대하여 관대한 까닭입니다. 미국의 대다수 유권자들은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좀 이상한 성격인 트럼프를 찍었던 것입니다. 트럼프가 특이하고 괴팍한 사람이지만 술은 일체 마시지 않고 종교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번에 그가 미국의 균형을 바로잡아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대통령으로 뽑은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이렇게 경찰, 검찰, 법원, 정부, 그리고 심지어 국회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니, 세상의 모든 이들에 대하여 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돈을 내서 옷 사입고 내가 돈을 내서 차량 수리하고 내가 돈을 주고 채소 과일 고기 사먹는데, 무엇이 감사할 것이냐고 냉소적인 마음을 갖는 사람이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 곁에 정부와 어부, 농부, 기술자, 택시, 버스 회사, 도로 건설 회사 기술자 등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살기 어렵습니다.
제가 잠깐 필리핀에 갔을 때 학교 옆에 살던 전도하던 아이들 집에 가는 도중에 보니, 부자들은 산 하나를 자기 정원으로 삼고 크고 대단한 성채들을 집으로 삼아 살고 관리인들이 총을 가지고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도하였던 아이들은 헛간 같은 곳에 살고 화장실도 없는 골짝에서 아무 곳에서나 대소변을 해결하고 그 좁은 한 방에서 칠팔명이 가는데, 가구라고는 거의 없이 사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저 중남미 아이티와 같은 나라들은 도로가 다 진흙탕이고 치안이 다 무너진 상태입니다. 갱단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저 아프리카 중서부 남부 지방의 나라들 우간다, 콩고와 같은 나라들은 너무나 사회 질서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냥 3시간 정도면 차량으로 가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그들은 진흙탕 도로에서 며칠씩 가는데, 가는 차량도 우리나라에서라면 수십 번 폐차했어야 할 차들이 굴러다닙니다. 가다가 멈추기를 여러번 반복되는 택시 하나에 승객이 10명이 함께 타고 가는 생활을 하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넓게 세상을 살펴보면, 이 세상은 너무나 험하고 불안하고 거칠고 가난한 곳이 많습니다. 그런 세상 나라들과 비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부요하고 안전하고 평온한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데만 몰두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사회와 우리 주변의 모든 이들을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르기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3,4)
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입술의 말을 쓸데 없는 일, 희롱하는 말, 더러운 말, 남을 비방하는 말, 거짓말은 잘하면서, 정작 마땅히 해야 할 감사하는 말은 하지 못합니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좋지 않은 말들은 입에 내지 말고 그 대신 말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것 곧 감사하는 말을 입술로 내라고 여기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감사하는 말을 하는 것에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합니다. 더욱이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잘 못합니다. 우리 나라의 오랜 전통 문화가 체면 문화이기 때문에 남에게는 고맙다고 하면서도 내 가족, 내 식구들에게는 낯 간질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할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자기 가족들입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했던 분으로서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유태영 박사가 한 간증입니다. 그가 덴마크 왕 프레드릭에게 무작정 편지를 써서 선진 농업을 배우고자 한다고 유학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 나라 왕실 비용으로 덴마크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덴마크인의 한 가정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는데, 그 가족들이 식사 자리에서 계속 하는 말이 ‘탁’이라는 말이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탁’이라는 이 단어는 덴마크 말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식구가 물 한 컵 주세요 하여 갖다 주면 ‘탁’, 냅킨 하나 건네주면 가족끼리도 ‘탁’, 계속하여 식사 도중에 ‘탁, 탁, 탁’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덴마크 사람들이 가족끼리도 늘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노라고 말한 것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이 권면한 대로, 다른 말은 좀 못하고 아끼더라도 가까운 가족들에게 늘 ‘탁’, ‘고맙습니다’라고 넘치도록 표현하는 성도가 됩시다. 교우들에게나 친구들에게나 직장 동료에게나 차를 타고 내릴 때에도 기사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늘 표현하는 것을 생활화합시다. 그것이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함을 실천할 때에 참으로 많은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은 우리 삶에 슬그머니 찾아와서 자리잡는 원망과 불평을 물리치는 해독제입니다. 또한 낙심과 절망을 막아주는 방파제입니다. 또한 우리 삶에 행복을 깃들게 하는 행복의 경비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삶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더해주십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 때에 요단강 동편 땅에 거주하는 모압과 암몬 족속과 남단에 살고 있는 세일산 사람들이 연합하여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대규모 침공군으로 인하여 어찌할 바 모르는 유다 백성들은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전쟁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자 왕은 백성들과 상의를 나누고 유대 군인들 앞에 성가대를 세웠습니다. 그 다음날 전쟁할 때에 성가대가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적군끼리 서로 죽이기 시작하여 완전히 전멸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부르자 천사가 적진 안에서 일하여 서로 죽이도록 역사한 것입니다. 감사의 찬양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에도 감사하는 자가 복을 받은 경우를 봅니다. 주님으로부터 문둥병을 고침받았던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에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축복하사 그의 육신의 치료에다가 영혼 구원의 은총까지 더해주시는 말씀을 베푸셨습니다. 참으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 50:23)
고 하신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다시 한번 우리의 미흡한 감사 생활을 점검합시다. 구원받은 은혜를 새롭게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항상 절대적인 감사 생활을 하는 저희가 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크고 놀라운 구원을 인하여 늘 감사해야 하는 너무나 큰 부자요 천사들보다 더 존귀한 권세자들입니다. 가장 큰 막강한 후원자가 함께하는 가장 큰 권력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진 자이므로, 모든 이들에게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합시다. 그렇게 늘 감사 생활이 풍성해질 때 우리 신앙은 그 만큼 더 성숙해진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한 감사의 성도는 세상을 훈훈하게 하고 모든 불평과 원망을 내몰고 또 나누어 주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또한 감사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놀랍고 풍성한 은혜가 더해질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감사의 열매가 더욱더 풍성해지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