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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만들었나' 경이로운 이집트 돌항아리
고대 이집트 선왕조시대의 공예품들. 출처/ Wikimedia Commons
이집트의 카이로박물관이나 영국 대영박물관에 가보면 고대 이집트 시대에 만들어진 돌항아리들을 볼 수 있다. 이 항아리들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너무나 정교해서 몇 개 갖고 싶은 유혹이 절로 생긴다. 그런데 이런 꽃병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생각하다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앞 글("청동기 시대에 세운 대피라미드 건축의 수수께끼")에서 회전톱이 석관을 파내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플린더스 피트리의 주장을 소개했는데 그는 돌항아리에 대해서는 오직 수공업에 의존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이것들을 회전시키며 깎았을 가능성뿐 아니라 돌리면서 외부를 연마했을 가능성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집트학자인 맨 화이트(J.E. Manchip White)는 이런 돌항아리들을 제작하는 데 구리 드릴이 사용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구왕조 초기 시대부터 만들어져 왔던 훌륭한 석기 그릇과 꽃병의 중심에 구멍을 뚫기 위해 관(管) 모양의 구리 드릴들이 사용되었다. 비록 충분한 근거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지만, 절삭용 보석들이 종종 드릴의 관 끝부분에 박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주 기본적인 형태의 다른 공구를 고정시키고 돌릴 수 있는 손잡이나 거기에 끼울 수 있는 날들 또한 사용되었다. 또, 미세한 작업을 위해서 넓은 범위의 정교한 청동제 기구들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석기 그릇이나 꽃병의 중심에 처음 구멍을 낼 때 위의 방법 대로 드릴을 사용했을 수 있고, 아마 연마제를 함께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피트리 경은 돌항아리 내부에 금강사(金剛砂)를 넣고 갈아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돌항아리 하나를 만드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오늘날의 실험고고학자들도 이론적으로 이런 가공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아주 기본적인 가능성을 실험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처음 논란이 된 후 1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돌항아리 비슷한 것을 만들려고 시도해본 일조차 없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충분한 끈기와 정열의 미덕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특별한 종교의식을 위해 몇 개 정도의 석공예품을 광신적인 집착을 통해 탄생시켰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선왕조시대 초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정교한 돌항아리들은 그 수효와 종류가 너무나도 많아서 대영박물관에서 펴낸 안내 책자에는 많은 수효(great quantity)가 제작되었음을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사카라 고분군에서 발견된 석기 항아리만도 3만 점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장인들이 이 많은 석기들을 손으로 일일이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일부 이집트학 학자들은 한 명의 장인이 평생 동안 돌항아리 한 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 눈 앞에 있는 고대 이집트의 돌항아리들은 그런 것들을 만드는 데 단지 시간과 인력의 투입이 중요한 요소가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고도의 기술이 투입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담겨 있다.
영국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University College London)의 이집트학 교수였던 월터 에머리(Walter B. Emery)는 고도의 정밀도로 다양한 형태의 돌항아리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냈던 고대 이집트의 기술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기술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는 이런 석기 그릇을 만드는 데 사용된 방법에 대한 만족스런 설명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비록 몇몇 과정에 대해 안다손치더라도 대부분의 다른 과정은 완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어떻게 밑이 얕은 그릇이나 접시 둘레에 손가락을 대고 돌려보았을 때 완벽한 원으로부터 벗어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정도로 최고의 정밀도를 달성한 것일까? 어떻게 수정으로 관상(管狀)의 항아리를 만들면서 그 두께가 1밀리미터가 채 안 되도록 깎아낼 수 있을까? 비록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시의 기술자들이 고정된 공구에 대해서 피가공물을 회전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음이 거의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횟수를 반복하고 세심한 노력을 들여서 측정을 한다고 해도 순전히 수가공에 의해 그런 정밀도를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구를 고정시키고 피가공물을 회전해서 가공하는 방법, 이것은 다름아닌 ‘선반 가공’이다. 실제로 크리스토퍼 던은 고대 이집트 유물 중에 나온 섬록암(diorite)을 깎아 만든 그릇 바닥의 거칠기를 측정해보고서 그것이 두 개의 원이 겹친 형태로 가공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선반 작업을 했다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맨 처음에 선반 같은 것에 물리고 회전시키면서 가공하다가 회전축이 정확히 그릇의 중앙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정확한 중심을 찾아 다시 가공했다고 결론지었다. 정말로 고대에 선반이 사용되었던 것일까?
사카라의 조세르 계단 피라미드 내부에서 돌항아리를 발굴한 독일의 고고학자 쿠르트 랑게(Kurt Lange)도 직접 돌항아리 내부의 미세한 가공결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선반의 사용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들은 단단하고, 광택이 나는 완벽하게 균질한 물질로 만들어졌다. ― 그 내벽은 오직 오늘날의 초현대적 회전식 도자기 제조 장치로만 만들 수 있는 매우 규칙적인 미세한 홈들이 나 있다. 이 홈들을 보려면 좋은 조명 장치와 확대경이 필요하다. ― 분명히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 일종의 도자기 회전대와 같은 것이 사용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단단한 물질을 가공했을까? ― 그 정도로 완벽한 모양을 흙으로 빚어 도자기를 만드는 장치도 아주 최근에 발명되었는데 이런 정교한 형태는 여태까지 만들어진 어떤 것보다 가장 단단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그 옛날의 원시적인 도구를 사용해 만들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고대 이집트 선왕조시대의 돌항아리들.
도대체 어떻게 쇠보다 더 단단한 화성암을 아주 최근에 제작되는 정밀한 모양의 도자기와 같은 수준으로 가공해냈을까? 선반 작업에서는 피가공물의 재질에 따라 어떤 형태와 재질의 공구를 사용하여 어떤 회전 속도에서 가공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 화성암으로 만든 돌항아리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기술 지식으로도 정확한 답을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산업 현장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어느 조각가도 이런 재질로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공의 문제에 대해 에머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실린더 모양의 꽃병 내부를 깎아내는 데 적합한 튜브 드릴은 좁은 주둥이에 볼록한 형태를 한 항아리의 내부를 파내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도대체 항아리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의 내부를 파내는 데 바깥쪽으로 가해지는 압력은 얼마나 되었을까?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아직까지도 적절한 답이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아마도 그 옛날 이런 것들을 만들던 공장 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계속 미제로 남을 전망이다.”
정말로 돌항아리를 제작하던 고대 이집트의 공장 터가 발견된다면, 그곳에는 오늘날의 고성능 선반보다 훨씬 뛰어난 선반이 있든지 아니면, 합성 도자기 제조의 초고온, 고압 가마 시설이 있을지 모른다. 프랑스 출신으로 미국 플로리다주 배리대학(Barry University)의 응용고고과학연구소(Institute of Applied Archeological Sciences) 소장인 조셉 다비도비츠(Joseph Davidovits) 박사는 고대 이집트 돌항아리들이 돌가루에 특수 시멘트를 반죽해서 틀에 넣거나 도자기 회전대 위에 놓고 가공한 뒤 초고온이나 초고압에서 합성하여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집트 선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것과 같은 좁은 목에 아래 부분이 부푼 화성암 항아리를 직접 선반으로 가공해 만드는 것은 현대의 초첨단 기술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설령 다비도비츠 박사의 견해를 따른다 하더라도 고대 이집트인들이 굉장한 기술 수준을 향유했다는 점에서 크게 변하는 것은 없다. 초고온 고압에서 돌을 합성하는 기술은 선반으로 돌을 깎는 기술 못지 않게 첨단 기술이기 때문이다.
돌항아리를 만들 때 오직 선반 가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한을 두었을 때에 다비도비츠 박사의 주장이 유효하지만, 그런 제한을 풀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크리스토퍼 던은 화성암의 가공에는, 현대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선반이나 드릴 등과 같은 형태의 공구들뿐 아니라 돌항아리 안쪽 깊숙한 곳과 같이 그런 것들로 가공이 불가능한 몇몇 부분에서는 개념이 전혀 다른 새로운 공구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석재가 견고하기는 하지만 연성이 작아 잘 부서진다는 점에 착안해서 초음파 공구를 제안한 것이다. 이런 공구는 초당 수만 번의 충격을 가공하려는 석재에 국소적으로 가함으로써 그 부분에 천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돌을 가공하는 데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음파를 사용했으리라는 가정은 돌에 가는 구멍을 뚫은 고대 이집트의 다른 가공품을 보면 더욱 확신이 생긴다. 카이로 박물관의 'b5860'이라는 번호가 매겨진 반암으로 만든 조그만 꽃병에는 작은 손잡이와 바닥을 가진 꽃병(vase with small handle and feet)이라고 짤막한 소개가 붙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묘사가 필요하다. 그 손잡이는 손으로 직접 잡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니라 끈 같은 것을 꿰어서 그 끈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끈을 꿸려고 꽃병의 상부 양옆에 만들어놓은 손잡이용 구멍이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 없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이 구멍은 지름이 3밀리미터가 채 되지 않았고, 길이가 10밀리미터 정도나 되었다. 도대체 어떤 공구를 사용해서 반암에 이렇게 미세한 구멍을 뚫을 수 있었을까? 오늘날 이런 정도의 구멍을 화성암에 뚫을 수 있는 기계는 아주 최근 들어서야 개발되었는데 바로 초음파를 이용한 것이다.
정말 그 옛날에 음파를 사용해 작업을 했다면, 또 한 가지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음파를 이용해서 돌을 운반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음파를 발신하는 장치의 맞은편에 반사경을 두면, 적당한 음파 진동수에서 입사파와 반사파가 골을 형성하는데 여기에 물체를 가두어 둘 수 있다. 즉, 어떤 물체를 쉽게 부양시켜서 운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실험실에서 공기돌 정도의 가벼운 것들을 공중에 띄우는 실험이 고작이지만, 저 먼 옛날의 초고대 문명에서는 수톤에서 수십톤에 이르는 돌들을 이런 방법을 이용해서 운반했던 것은 아닐까?
정말로 음파를 사용해서 거석을 들어올렸던 것 같은 묘사가 남미 볼리비아의 티와나쿠 거석 유적과 관련해서 전해온다. 전설에 따르면, 큰 돌이 트럼펫 소리와 함께 허공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또한 중미의 멕시코 팔랑케 근처의 유적 건설 때에도 피리를 불어 큰 돌을 움직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런 기록은 구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한 점토판에는 소리가 돌을 공중으로 들어올릴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실제로 이 주장은 현대의 음파 공학에서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피라미드 건설에도 이런 방법이 사용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놀랍게도 정확히 그런 사실에 맞아떨어지는 기록이 있다. 아랍 세계의 옛 기록에 의하면, 대피라미드 건설시 음파를 이용하여 돌들을 50미터 이상 띄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록들의 신빙성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크리스토퍼 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 먼 옛날에 이미 오늘날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의 어떤 기술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늘날 주류 이집트학 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3000년부터 2700년 사이인 고대 이집트 구왕국 1,2왕조까지 지하 분묘를 만들다가 3왕조에 이르러서 갑자기 층계형 피라미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형태가 잠시 나타났다 4왕조에 접어들면서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피라밋을 중심으로 한 기자의 피라미드 군은 이런 피라미드 시대의 절정기이며, 기원전 2500년으로 넘어가면 갑자기 피라미드의 규모가 크게 작아지고 그 기술적 수준도 형편없이 조악해진다. 이것이 고대 이집트의 분묘 건축을 기준으로 한 이집트학 학자들의 고대 이집트 문명 진화 이론이다. 즉, 기원전 3000년에 시작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기원전 2700~2600년 경에 절정을 이룬 후 바로 쇠락해버렸다는 시나리오다. 한편에서는 4왕조에서 5왕조로 넘어가는 것이 쇠락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즉, 비록 건축은 조악해졌지만, 피라미드 내벽에 최초의 문자를 새겨넣는 등 문화적인 성숙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명 발전 이론은 앞에서 살펴본 돌항아리를 기준으로 본 문명 발전이론과 전혀 맞지 않는다.
가장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돌항아리들은 주로 선왕조 시대, 즉 선(先)이집트 문명기인 기원전 4000년 경에 집중되어 있고, 주류 이집트학 학자들이 고대 이집트 왕국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시점인 기원전 3000년 경에 이르면, 무른 암석과 단단한 암석이 반반 비율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주류 이집트학 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대영박물관의 이집트관을 가보면 이런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런데, 왕조시대에 접어들면 무른 돌을 사용한 돌항아리 비율이 급격히 늘어나 제3, 4 왕조시대가 되면 거의 대부분 매우 무른 돌인 설화석고로 만든 것이 사용된다. 모양 또한 선대의 것들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조잡해진다. 리모델링 하기 전에 영국 대영박물관에는 1왕조부터 6왕조까지 돌항아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진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진열장에 진열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작품성이 있는 선이집트 문명과 초기 이집트 문명의 것들만 선별해 진열하기로 한 모양이다. 돌항아리에 적용된 기술과 관련해서 피트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사시대(기원전 8000∼5500년)의 작업은 조형미보다는 훨씬 더 기계공학적 능력을 보여준다. 가장 단단한 돌들을 가공한 기술은 기가 막힌다. 화강암과 반암을 마치 석회암이나 설화석고처럼 자유자재로 다뤘다. 완벽하게 정형적인 꽃병들이 선반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다듬어졌다. ― 역사시대는 사용된 돌들의 질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제1 왕조에서는 단단한 돌들을 사용한 횟수가 줄어들고, 점판암이나 설화석고처럼 무른 암석이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피라미드 시대에는 대부분 무른 암석을 사용한 꽃병들이 만들어졌고, 단단한 돌들 중에서는 단지 섬록암을 사용한 것이 매우 드물게 만들어졌다. 구왕국 12왕조에서 18왕조에 이르러서는 설화석고 이외에는 돌을 사용한 꽃병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몇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다. 피트리가 선사시대로 꼽은 기간인 기원전 8000~5500년은 오늘날 주류 이집트학 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4000~3000년으로 재조정되었다. 물론 나는 오늘날의 주류 이집트학 학자들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령 오늘날의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을 달라질 게 없다. 돌항아리 기술은 지속적으로 퇴보하여 이른바 찬란한 왕조시대에 진입하면서 거의 바닥 수준이 된 것이다. 피트리는 선사시대의 뛰어난 공예 기술에 감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선반과 같은 회전 절삭 기구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공구가 사용되었든 이런 공예 기술이 후대에 급격히 몰락한 것은 정말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강철보다 단단한 돌을 떡주무르듯 했던 그 기술력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어쨌든, 돌항아리를 기준으로 보면, 이미 선이집트 문명에서 빼어난 기술적 성취가 있었지만, 오히려 왕조시대에 접어들면서 단조적으로 퇴보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피트리는 피라미드 시대에 대부분 무른 암석을 사용한 꽃병들이 만들어졌음을 지적하는데 그는 이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저서에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무척 이상한데. 극단적으로 4왕조기를 놓고 보자. 주류 학계에서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극성기라고 지적하는 이 시기에 돌항아리 기술은 형편없이 추락해 있다. 사실, 4왕조 때나 5,6왕조 때나 거의 차이가 별로 없는 바닥 수준이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나? 나는 이것이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4왕조 때 만든 것이 아님을 가리키는 강력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명백히 돌항아리가 보여주는 증거들은 기자 대피라미드가 선이집트 문명의 작품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실험 고고학적 연구로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선왕조시대의 공예품들. 출처/ Wikimedia Commons
1986년 스위스 취리히의 방사선 가속장치를 사용해서 마크 레너 박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자 대피라미드가 다른 어떤 피라미드보다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것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1000년이나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모르타르를 탄소 동위원소법으로 분석해서 얻은 것이다. 레너 박사는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피라미드 건설 시기는 기원전 3809년부터 2869년까지로 나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 건설 시기는 이집트학 학자들이 지목하는 쿠푸 왕의 시기보다 훨씬 이른 시기를 가리키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측정한 샘플에 따라 탄소 동위원소법의 결과는 그 건설 시기가 기존 이집트 연대기에서 적게는 200년에서 1200년까지 벗어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것은 정말로 혁신적이다. 그래서, 정통 이집트학 학자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한다. 기자 피라미드는 그들이 믿고 있는 것보다 평균적으로 따져도 4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뒤죽박죽의 역사를 그들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또한 지금까지 제3왕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던 사카라 고분군도 탄소 동위원소법에 의한 연대 측정 결과 400년 정도 이전에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이 결과는 현재 정설로 자리잡은 연대기 대로 분류했을 때 왜 문명의 단절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적절히 설명해준다. 대피라미드는 선왕조 문명에 속한 것이고, 조잡한 제5, 6 왕조 시대의 피라미드는 왕조시대 문명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4왕조 시대의 왕들은 선왕조 때 만들어진 피라미드들을 자신들의 소유로 한 모양이다. 이렇게 연대기를 다시 쓰면, 선왕조 시대에 발달했던 석공예 기술이 왕조시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몰락한 사실과도 잘 부합된다. 이미 왕조시대에는 돌을 정교하게 깎을 기술도, 그리고 돌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쌓아 올려 수천 년을 유지할 수 있는 건축 기술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연대 결정을 주도한 마크 레너 박사 자신의 대피라미드 건축 이론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당연히 오랜 숙련과 다양한 지식의 축적 결과로 만들어졌어야 할 가장 거대하고 완벽한 대피라미드가 어떻게 다른 조잡한 피라미드보다 제일 먼저 만들어졌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