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과 설령 (외 2편)
박제영
가령
이것이 시다,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설령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다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
남탕
세상의 모든, 아비들이 실은
꼭꼭 숨겼던, 남근들이 죄다
저리도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뻣뻣하게 거드름 피운 것도 생각해보면
가늘고 무른 속이, 흔들리는 제 뿌리가
드러날까 두려웠던 것
세상의 아비들은 다만
살기 위해 딱딱해져야 했던
무골(無骨)의 가계(家系)를 숨기고 싶은 것이다
-----------------------------------------------------
뜻밖에
젊은 날엔 시를 쓰기 위해 사전을 뒤져야 했다
몇 번의 실직과 몇 번의 실연이 지나갔다
시는 뜻밖에 뜻, 밖에 있었다
-----------------
박제영 / 강원 춘천 출생.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소통을 위한, 나와 당신의』『푸르른 소멸―플라스틱 플라워』『뜻밖에』. '빈터' 동인. 현재 강원도 개발공사 팀장.
카페 게시글
좋은 시 읽기
시
가령과 설령 (외 2편) / 박제영
강인한
추천 0
조회 227
08.03.02 17:21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