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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연 문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만큼이나
무모하고도 막연한 것이지만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삶의 매순간 어떤 식으로든
문화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습니다.
자연물 외에 우리가 보고 접하는 유형(有形)의 사물들은
물론 제도나 관습, 지식처럼 우리의 삶에 관여하고 있는
무형의 것들까지 모두 문화의 소산이며,
우리의 행동과 생각, 어쩌면 우리의 느낌과 감정의
대부분이 모두 문화의 바탕 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너무나 항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잘 의식하지 못할 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사회에 속해 살아가는 한
그 사회의 문화를 호흡하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가 그 사회의 공기라면 삶은 그것의 호흡인 셈입니다.
문화는 좁게는 철학, 종교, 예술, 과학등으로 볼수 있는 데 종교는
문화의 가장 독특한 주요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문화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종교를 문화와 함께 폭넓게 파악하여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문화는 변화 발전하게 마련인데 주변의 자연환경에 의해서 변화하기도 하고
다른 민족이나 지역으로
부터 전래되어 문화가 전파되며 두 개의 문화가 공존할 경우
문화접변이 일어나고 아니면 강대국에
의해서 문화이식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흙문화로 대변되는 오리엔탈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소아시아를 끼고 있는 인더스 문화는
서로 넘다들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서 법화경의 내용이 성경에 이입되는
사례를 살펴볼수 있습니다
2. 예수의 행적에 대하여
예수의 행적중 13세 때부터 29세때까지가 전혀 행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그는 13세때 소아시아반도를 거쳐서 티벳의 라마사원으로 들어가
소승교와 희두교의 베다경전을 의경으로 해서 수행하게 되는 데 그의 이름을
“성(聖) 이사”라고 했습니다.
* 니콜라스 노도비치는 1887년 인도와 티벹지방을 여행하다가 라닥지방의 수도인 레(Leh),근처 하이미츠사원에서
티벹어로 기록된 예수에 관한 기록을 발견 1894년 불어판으로
<<알려지지않은 예수의 생애ㅡ성(聖) 이사(ISSA)의 일대기>>를 출판한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
었고 이책은 곧 영어로 번역되었고 속속 독일어,스페인,이태리에서 출판되였음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면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한 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Eli Eli Lama Sabachthani :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로 번역되어 왔음)
라는 말 한마디를 크게 소리친 뒤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예수의 최후의 말씀은 티벳 라마불교의
진언(眞言)인"엘리엘리 라마 삼먁 삼보리 다라니"
(Eli Eli Lama Sammach Sam Bori Daranii :
성자의 위대한 바른 지혜의 총지라는 뜻)로 밝혀졌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는 극도로 탈진해 생사를 가늠하는 마지막 순간에
라마불교의 주문을 암송한 것입니다.이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의 인도․티벳의 구도 생활을 밝혀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신의 아들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토마스복음 같은 것은
예수 제자중에서 예수의 13~29세 까지의 기록을
가장 인간적인 면에서 많이 다루었는데
동로마 황제의 힘의 배경을 등에 업은 성서학자들에 의해서
토마스 복음서는 통째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13세부터 무수한 인도에서의 종교 철학을 답습하고
최종 10년 동안 히말라야에서 불교(밀교)승려로서 수도하는 기록은
통째로 빠지게 된것을 알수 있는것입니다
토마스 복음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이다 만일 너희들이 이끄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한다면
새가 너희들 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갈갈 것이다
만일 그들이 바다속에 있다고 말한다면
물고기가 너희들 보다 하느님 나라에 먼져 갈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속에 있다
동시에 너희들 밖에 있다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안다면
너희들은 아버지인 하느님의 아들이
너희들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면
너희들은 가난한 나라 안에 있고
가난함이란 너희들 자신일 것이다“
하느님이 너희들 속에 있고 동시에 밖에 있다는 말은
불교에서의 불성내재론의 표현이고
토마스복음서의 존재는 예수의 사상이 불교사상 그중에서도
불성 내재를 역설한
법화경과 유사한 것을 입증하고 있으며
신약성서의 <탕자의 비유>도 법화경의 유명한 <장자궁자>의 비유에서
빌려간것입니다 그외에고 예수의 기적으로 손꼽는 물위로 걷는것 떡으로
여러사람을 먹이는것도
불교경전의 내용보다 조금 축소된 정도를 볼수 있습니다
유태교의 토양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발생할 여지가 없으므로
불교의 법화경 사상이 실크로드를 거쳐 이스라엘까지 간것으로 생각할수 있고
기독교 신약성서의 수많은 내용이 불교의 법화경에서 옮겨간 것은
민희식 교수(한양대학 불문과교수)가 지은 <법화경과 신약성서>라는 책에서
많이 논술되여있습니다
실제로 로마가 통치하던 시절에도 불교의 법음이 북아프리카
에집트지역까지도 전파된 기록이 있습니다.
그 옛날 기독교 초기에는 불교의 윤회설을 믿는 신부들이 상당히 많았 었는데 나중에
억압적으로 그런 것은 없는 것으로 교리를 통일하게 됩니다.
상기의 예는 바로 불교문화가 오리엔탈 문명에 전파된 예인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3. <바가바드기타>와의 관계에 대하여
석가모니세존은 적어도 기원전 544년전(불기2554년설) 또는
1040년전(불기 3050년설)에 태어난 분이십니다.
흰두교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는 석가불 이후 300-500년 이후에 생겨난 경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불의 법화경이 기타의 영향을 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 바가바드기타 : 흰두교의 베다, 우파니샤드와 함께 3대경전의 하나로 기원전 4-2세기경에 설립된 경전으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
해 골육상잔을 일삼는 현실에 회의를 품은 고대 인도국 왕자 아르주나가 스승인 크리슈나에게 고뇌을 털어놓으
면서 나눈 대화를 묶은 것으로 모두 7백구의 시로 이뤄져 있다. 바가바드 기타는 산스크리트어로 '거룩한 자의
노래'란 뜻.
“기타”의 내용을 살펴보면 두 나라 군대가 서로 대치해 있고,
많은 친구와 친척, 심지어 할아버지가 적군에 정렬해 있는 것을 보고
아르주나 왕자는 주저합니다.
그는 정의롭지만 잔인한 전쟁에 참가하느니보다 적군에 항복하여
살해당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스승인 크리슈나에 의해 전사로서 의무감을 회복하게 되는데,
크리슈나는 사적인 승리나 전리품 획득과 같은 이기심없이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전쟁에 임하며, 자신의 의무를 냉정히 수행하는 것이
더 위대한 길이라고 그에게 지적해줍니다.
〈바가바드기타〉는 윤리문제로 출발하지만
그것을 훨씬 넘어서서 신의 본질과 인간이 어떻게 신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광범위하게 고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영원성, 선악을 초월한 절대묘의 경지,
불성의 내재성, 추후에는 최고의 신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되는 원리는 법화경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리고 무량의경의 42비와도 상당히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종교의 유사성에 대하여
예수가 티벡에서 흰두교와 불교를 배우고 자신의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가서 설교를 하였던
바가바드기타가 법화경에서
그 가르침의 일부를 차용하여 쓰고 있던
또한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집중하여 바라보아야 할 것은 바로 문화의 전파에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는 문화의 교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류의 문화라는 것은 절대로 혼자서 고립하여 발전되는 것은
극히 드문일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인류학자들이 지역의 민담 설화나 민족의 신화나 모든 전래동화를 분석해 보면
거의 유사성이 많고 해서 민담을 체계화하여 유사성끼리 묶으면
그 컨텐츠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문화의 전래증거를 대신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이슬람교, 흰두교, 불교가 그 내용의 유사성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일 것입니다.
불교의 내용중에 제석천왕 대범천왕등은 전부 흰두교의
신들을 차용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어본존인 만다라에는 천조태신, 팔번대보살등
일본민족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석가불이 이런 인도의 민족신을 끌어다 쓰듯이
일본 씨족신을 차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5. 문화현상 상호텍스트성에 대하여
기독교나, 흰두교, 이슬람교, 불교등 원전속에는 문화교류의 영향을 받아
서로의 텍스트들이 넘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상호텍스트성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문화현상중의 하
나로 혼성모방, 패러디를 등을 통해 컴퓨터의 발달로 인하여
예전보다 엄청난 량이 서로 경계를 넘
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구획을 정한 다음 “복사”한다음 “붙이기”를 하면
금방 한페이지 정도는 거튼히 완성이 되지 않습니까.
* 상호텍스트성 : 과거나 미래의 모든 담론들과 상호의존하는, 텍스트의 성질이다. 1960년대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어떠한 새로
운 문학 텍스트들도 곧 텍스트들의 교차(intersection)라는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그것들은 변형된 과거의 텍스트들을 흡수하였고, 또한 미래의 텍스트들에 의해 흡수되고 변형되리라는 것
이다. 이 용어는 다른 문학 이론가들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응용되었다.
저는 예산을 분배해주는 일에 관여 하고 있습니다.
민간으로부터 지원신청을 받으면 그것을 검토하여 지원하는 것인데
최근들어 실재 현장과 페이퍼가 서로 차이가 너무나 심하다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워딩작업을 너무나 잘한 페이퍼 들은 한번쯤 의심해봅니다.
남의 것 베겨다가 화려하게 보이기입니다.
거기에는 신청자의 사업계획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그냥 구획 정하여 복사한다음 붙이기를 하여 전체를 잘 구성합니다.
이런 것들은 저의 오래된 경험을 통해 직관지를 이용하여
금방잡아냅니다. 서류로 찍으면 딱잡힙니다.
최근 문화현상의 하나로 손 꼽히는 상호택스트성 범람의 한 예입니다.
글을 차용해서 쓰지만 마음은 잘 따라 가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속이 빈 글들이 아곳 저곳으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도 이종교의 원전에 다른 종교의 내용이 들어 있어도
그것은 그냥 문화교류현상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석가불이 새벽에 대오각성한 이후 50년간 설법을 하였는데
그동안 설법한 팔만법장을 전부 한글로 번역하면 보통 트럭한대분 분량입니다.
그 설법내용 속에는 분명히 그 동시대 공간에서 만연되어 있는
문화를 베이스로 하여 설법을 전개하였을 것은 뻔합니다.
문화란 동시대 동지역의 인간들이 같이 호흡하고 공유한
공기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의 의식구조에 부합되는 설법내용이 아니고
어디서 뜽금없이 가지고 와서 펼쳤다면 전혀 그들을 이해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제대로 깨달음의 원할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코드가 맞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의 산물입니다.
석가불은 당시의 사회에 문화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었던
윤회설, 인과이법, 역겁수행, 죄장소멸등의 이론을
그대로 활용하여 사용한것입니다. 전부 힌두교의 교리입니다.
전생에도 부처였던 석가불은 태어나서 언어를 배우고 나서 성불을 하고
바로 설법을 개시하면 될 것을 왜 30살까지 성도를 기다려야 했을 까요.
그것은 그 성장기간동안 중생들의 문화정보를 부던히 읽히고 나서
그것에 부응하여 설법해야 했던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 팔만법장은 바로 동시대의 인도문화를
집대성한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석가불의 설법은 자신의 새벽녘의 대오각성한 마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문화를 배경으로하여 한올씩 솔솔 풀어나갔습니다.
그 성불한 마음이 설법을위하여 끌고 들어오는 텍스트들은
그의 설법구조속에서는 이제 그냥 텍스트가 아닙니다.
바로 다르마(법)로 변환되는 것입니다.
밖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서 널려 있던 아니면
타종교의 원전에 있던 텍스트들은 소승경인 아함경을 설법하기 위해
석가불이 설법의 의도에 맞게 텍스트들의 끌어당겨 활용해 쓸 경우
그 텍스트들은 이제 동시대의 문화속에서
방황하는 텍스트들이 아닙니다.
또한 남의 종교원전에 있던 텍스트가 아니고
이제 아함경의 마음을 대변하는
다르마(법)으로 탈바꿈 되는 것입니다.
방등경의 극락정토사상도 마찬가지이고
반야경도 금강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법의 의도에 맞는 마음을 가진 법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가령 상호텍스트성의 한예로 문화교류에 의하여
서로의 경전에 들어 있는 것중의 하나가
성경구절의 “심은 대로 거두리라”(성경 : 갈라디아서 6 : 6 – 10 : 6)은
불교의 소승교의 인과이법과 상호텍스트되고 있습니다.
이 글귀가 성경 속에 있으면 분명 나른한 외도의 교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힌두교에서 사용하면 힌두교의 마음을 나타내는
교설이 될 것이고 석가불의 아함경의 설법의도에 같다가 놓으면
“인과이법”이라는 다르마로 거듭나고
이것을 법화경의 설법의도인
제법실상 여시인...여시과로 활용해서 쓰면
그 텍스트는 적문의 실상으로 되어
“인과구시”로 변환되는 것입니다.
대성인의 불법인 근본법 “남묘호렌게교”를 체로 마음에 세우면서
제법실상 여시인...여시과를 읽으면 제법의 실상으므로
엄청난 진리의 파우워가 구현되어 탐욕스러운 덩어리인
나의 몸은 "법신여래"로 바뀌고
그 다음 또 한번 읽으면 화를 잘내는 나의 몸덩어리는 "보신여래"로 바뀌고
또 한 번 읽으면 우치(미혹)의 나의 몸둥이는 "응신여래"로
바뀌는 힘을 지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른한 힘아리 없는 인과이법이 어떤 마음을
가진 분의 설법의 의도속에 들어가 있는 가에 따라
그 영향력이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성인께서는 법화경의 핵심사상인 일념삼천을
대일경을 의경으로하는 진언종쪽에서 훔쳐서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다고
파절하시는 것에 대하여 아무리 텍스트가 법화경의 일념삼천이라고 하더라도
대일경의 논석으로 들어가면 그 빛을 잃고
이전경화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텍스트의 역할과 기능을
설하시고 계십니다.
화엄경의 심여공화사속의 글을 이용하여
일념삼천론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그 곳에는 부처의 불성의
깨달음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보살계의 마음으로
변태되어 진다는 것입니다(화엄경은 보살들을 위한 보살계 구현의경임)
6. 결론을 내며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종교창시자들의 설법마음의 차별성과 관련하여
그렇다면 예수의 마음, 브라흐라의 마음, 석가의 마음,
천태의 마음, 대성인의 마음이 설법을 위해 문화적인 시류속에서
방황하는 텍스트를 끌어당겨 사용하였다고 하고
그 마음의 구조 속에 들어간 텍스트
들이 그 설법당시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하면
어느 마음이 최고의 마음인가
그 마음을 대상으로 나의 것으로 신앙을 하면
나도 사제불이에 의해 그런 사람이 될수 있다는 것인데
어떤 마음이 진짜 최고 최선의 마음일까
바로 그에 대한 답이 “종교비판의 원리(교상판석)”입니다.
천태의 교상판석은 “오시팔교”이고 대성인 께서는
종교의 오강(교,기,시,국,교법유포의 선후),
오중상대(내외,대소,권실,본적,종탈상대), 삼증(문증,이증, 현증)입니다.
어떤 종교라도 이 종교비판의 원리에 의해서 대입하면
종교의 고저천심을 따져 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봄이님이
< 불교를 믿는 사람, 기독교를 믿는 사람, 대순진리를 믿는 사람 그들과 대화 해보면 우리 종교를
믿는 사람 이상으로 너무나 진리를 확신하고 있거든요. 결국 종교는 어떤 가치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과 방식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했습니다. 무엇을 믿든 순수한 신앙심과 수행에 대
한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각자 자신에게 가장 잘 맏는 종교를 택하면 되는
건 아닐지요. >
정통불교, 기독교, 대순진리, 샤머니즘, 통일교,
JMS, 그 엤날의 백백교, 신천지교, 자신들이 믿는대상이
최고라고 확신하며 믿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는 결과의 “마음의 수준”이 어떠한 가입니다.
자신들이 남의 종교믿는 마음 수준상태를 전혀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 믿다가 저종교로 갔더니 그때 그종교보다는 이종교가 좋았더라라고
하는 것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믿는 마음의 결과는 논리계가 아니라
감각계의 영역으로서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의 달콤한 첫키스
이것 논리계가 아니라 감각계인데
머릿속에 좋았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지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 첫 키스를
또 하면 또 새로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감각계는 정확히 기억해낼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확인은 가능하겠지요 “바로 이 느낌이야”입니다.
그러나 종교간의 실감은 비교분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과 조건등 여러 가지가 동원되어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종교비판의 원리에 의해서 분석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종교는 고저천심이 있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이 있습니다.
저도 기독교를 믿다가 남묘호렌게교로 개종을 한사람입니다.
그 실감이 다릅니다. 그러나 저의 실감의 차별성을 아무리
여기에다가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종교간에 넘나드는 교리의 내용이 아니라
믿고 따라야 할 대상인 종교 교주들의 마음의 고저 천심에 있습니다.
분명 수준높은 깨달음 우주의 진리와 맞다은
마음을 가진자의 마음이어야 됩니다. '
그래야 탈이 없고 행복해 질수가 있습니다
바로 종교창시자들의 깨달음의 차별성이 중요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마음은 어떤 마음 이었을까.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악을
혼자서 짊어지겠다는 외침을 하였을 때
그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바가바드기타의 주인공 아르주나왕자와 스승인
아르주나는 번민을 멈추고 깨달음을 열어 전장에 나가 할아버지
친족들을 전부 죽이고 승리를 안고돌아오는 데
그 두사람의 대화에서 피어난 마음상태는 어떻했을까
불교의 창시자 석가불이 보리수나무밑에서 오전 4시경 깨달음을 열었을 때
그 마음의 심경은 어떻했을까입니다.
그리고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16을 설했을 때 그는 어떤 마음상태였을까입니다.
최종적으로 대성인님이 상행보살이라는 외용의 모습을 버리고
내증인 본불님의 모습을 나타낸 다쓰노 구치 법란시의 발적현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타종교에서는 그 깨달은 마음을 그냥 문학적인 방법으로 화려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불교는 거기다가 추가하여 상당히 과학적으로 논석을 가하고 있습니다.
약왕보살은 석가불의 제자로 그의 설법을 듣고 법화경회좌에서 깨달음을 열었는데
1500년후에 중국에 천태지의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는 출가하여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서 확 깨치고
그때의 실감을 숫자로 잘게 분석하여 나타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의 일념삼천입니다.
석가나 사제불이된 자신이 깨달은 마음의 내용을 3천의 숫자로 나열시키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분의 머리는 도대체 어떤 구조로 생겼을까요?
정말 경이롭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200년후 제자 묘락대사(妙樂大師) 가로되
「마땅히 알지어다, 신토(身土)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라.
고(故)로 성도(成道)의 때에 이 본리(本理)에 딱 맞아서
일신일념(一身一念)이 법계(法界)에 널리 미침이라」
등(等) 운운(云云).
(통해)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의보 정보일체가 일념삼천입니다.
그러므로 석가불의 새벽의 보리나무아래서의 성불의 때에
그 성불의 마음을 잘 분석해보면 바로
이 일념삼천의 원리가 작동된 것입니다.
바로 석가불의 일념이 법계(삼천)에 널리 미친것입니다.
묘락대사는 성불이란 바로 일념삼천의 실제적인 작동의
원리가 표출된 것이라고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석가불의 새벽녘의 깨달음의 마음은
바로 일념삼천의 원리가 현실화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더욱 깨달은 생명상태를 가시화 시키고 있는 것이
니찌렌대성인의 발적현본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의 일념삼천의 마음이며 대어본존님으로 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는 상당히 과학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감각의 느낌을 계량화하여 표현하고
그것을 한폭의 만다라라는 최고의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는 지
경이롭습니다.
그러니 봄이님이 말씀 하시는 종교간의 유사성은
문화의 교류현상으로 폭넓게 거시적으로
이해하시어야 된다고 보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상호텍스트성에 의한 가름침의 의미구조를
파악하시면서
결론으로는 종교비판의 원리를 활용하여
판단하시어야 된다는 것으로 저의 소견을
끝을 냅니다.
첫댓글 흐름님 감사합니다. 흐름님의 논리정연함과 분석력과 핵심을 찌르시는 글에는 항상 감탄하고 놀라울 따릅니다.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봄이님의 어머님 문제, 아버지의 퇴전, 할머니의 광포부원제의 과도한 참여등을 놓고 보면 봄이님의 주변에는 너무나 강력한 삼장사마가가 맴돌고 있는 것 같고 정말 불교믿기 힘든 상황속에서 이렇게 버팅겨 오신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저도 대성인님의 불법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확신 하고 있고 이 금생에 이런 아리까리한 학회를 만나서 상당한 고민을 하여 오고 조직에 대한 여러가지 회의감, 분노심등이 일어났지만 그러나 그것 보다 몇배의 형편이 안좋은 봄이님과 같은 종교적 상황에 처할 경우 나 자신은 어찌 되었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끔 되묻곤 합니다. 여기까지 오시면서 조석근행등 수행을 해나가시고 있다는 것은
님의 신심이 그래도 남다른 훌륭한 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어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몸속의 그분(불성)의 도움이 아니였으면 벌써 쓸어졌을 텐데 그래도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국내에서 몇번째 가지 않는 획고부동의 신심을 견지하시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만약 다른 분들이 그런 일들을 격었다면 백이면 백 죄다 퇴전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삼세시방의 제불제천이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아물어지고 더욱 견고한 마음으로 바뀌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저 같은 사람은 감히 봄이님 같은 확고부동한 신심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흐름님의 글 전개에 놀랍습니다.
화엄경은 心如工畵師심여공화사
입니다.
흐름님의 글에 힘입어 저의 글을
따로 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자신들이 남의 종교믿는 마음 수준상태를 전혀 알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 믿다가 저종교로 갔더니 그때 그종교보다는 이종교가 좋았더라라고 하는 것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
<저도 기독교를 믿다가 남묘호렌게교로 개종을 한사람입니다. 그 실감이 다릅니다. 그러나 저의 실감의 차별성을 아무리 여기에다가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느낌은 ‘감각계’라 믿을 것이 못되고, 흐름님의 느낌은 ‘논리계’라는 말씀입니까?
그 실감을 말로 표현할수 없다고 있으니 저도 또한 감각계이지요. 종교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믿고 확신해갈 수 밖에 없습니다. 주요한 것은 삼증의 차이에 의해서 구별시킬수 밖에 없습니다. 그감각계가 얼마나 문서상의 근거가 있는가 그다음이 논증적 근거가 있는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시화되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가 입니다. 저는 종교비판의 원리중 삼증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