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추적거리는 밤거리. 음울하게 깔린 어둠 속에 숨어 눈동자를 빛내는 한마리 짐승처럼 네온사인은 어둠속을 수놓는다. 하지만 십년전과 달리 이제 밤거리의 지독한 암흑속을 수놓는 것은 네온사인 혼자가 아니다. 진보에 발빠른 자들이 만든 증강현실 광고업체를 통해 폭발적으로 증가한 증강현실 광고판은 이제 현실을 모방한 인간만의 증강현실 디지털세계 곳곳을 메우고 있다.
현실세계 위에 덧씌워진 새로운 세계, 증강현실 세계, 반투명 디스플레이를 렌즈 형태로 가공해 만든 증강현실 렌즈는 이제 현대인의 새로운 필수품이다. 구글을 비롯한 전세계 유수의 IT 기업들이 협업해 무선인터넷을 핏줄로 삼아 구축한 증강현실 세계는 현실세계 위에 덧씌워졌으며 증강현실 렌즈를 가진 현대인만이 그 세계를 볼 수 있고 오로지 그 세계를 보는 자들만이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분명 같은 국가 같은 도시에서 같은 사람 둘이 같은 길을 걷지만, 둘중 한명만 증강현실 렌즈를 가지고 있다면 사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증강현실 렌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실 빼곡한 침엽수림을 보며 걷고 있을 수도 있고, 중세시대 고성에서 탐방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증강현실 전화를 걸어 서로간에 놓여진 수만킬로미터라는 거리를 초월해 바로 곁에 있는듯 서로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수도 있다. 증강현실 렌즈가 없는 사람이 하늘을 보면 하늘만 보이겠지만, 증강현실 렌즈가 있는 사람이 하늘을 보면 하늘과 함께 그 하늘 위에 덧씌워진 별자리가 보일 수도 있고, 현재 시간, 날씨, 습도, 등등이 구름의 형태로서 보일지도 모른다.
증강현실 렌즈가 없는 사람에게 도시의 거리는 그저 콘크리트와 도보블락일 뿐이지만, 증강현실 렌즈가 있는 사람에게 도시의 거리는 도로 위에 겹쳐져 보이는 화살표 형태의 네비게이션 프로그램, 머리 위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프로파일을 둥둥 띄우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득찬 곳이다. 도로를 보면 버스노선이 도로 위에 겹쳐져 보이며 어떤 종류의 버스가 이 노선으로 다니고 몇분안에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 도착할지가 보이고, 버스정류장을 바라보면 어떤 종류의 버스들이 몇분마다 도착하는지가 간략화 된 버스노선과 함께 보인다. 버스 너머를 보면 진짜 튜닝을 하는대신 증강현실 튜닝을 차량위에 달아서 증강현실 렌즈를 장착한 사람들의 눈에만 휘까번쩍하게 보이는 차량들이 도로를 가득 메운 모습이 보인다. 건물을 바라보면 그 건물에 사람이 몇명이나 들어가있는지가 각 인원의 페이스북 프로파일과 함께 보이고, 건물 자체는 어떤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만약 상가 건물이라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상점이 입주해있는지와 해당 상점에 대한 네티즌들의 리뷰가 자동으로 주르륵 나온다. 증강현실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대도시란 바로 이런 곳이며 이것이 바로 현실세계와 현실세계 위에 덧씌워진 디지털세계의 차이, 바로 현실과 증강현실의 차이다.
이제 현대인은 한번에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 분명 그들의 몸은 현실세계를 걷고 현실세계를 숨쉬며 현실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두뇌는 현대인의 교묘한 기계장치가 감각장치를 속여서 보여주는 가상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모두가 마법적인 능력을 발휘해 시공과 시간을 초월해 보고 싶은 것을 언제 어디에선지 어떻게던지 볼 수 있는 증강현실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무선인터넷을 통해 현실세계 위에 덧씌워진 증강현실 세계, 만인이 만인과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곳, 단순히 청각적으로 연결되거나 한낱 글자를 통해서나 연결되어 있을 수 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시각적으로도 만인이 만인과 연결될 수 있는 곳, 현대인의 영혼은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아 숨쉰다. 두 세계에서 동시에 태어나 동시에 숨쉬는 자들, 동시에 걷는 자들, 동시에 시퍼렇게 불타오르는 예리한 논리의 성화를 한손에 쥐어서 동시에 휘두르는 자들, 그들은 인간이 태어난 세계에 두발을 디딛고 우뚝 서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를 향해 손을 뻗어 마침내 그 달콤한 과실을 입안 가득 베어물었다. 아, 증강 된 인류여, 아바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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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실 뭔가 좀 멋들어진 단어로 끝내고 싶었는데, 뭔가 떠오를락 말락 하면서 영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번에 두 세계에서 동시에 태어나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현대인, 이 문장을 좀 멋들어지고 함축적으로 줄이고 싶은데 그럴만한 단어가 영 떠오르지 않네요. 혹시 떠오르시는 분 있으면 댓글로 좀... 고뇌하는 글쟁이를 도와주세요 ㅜㅜ
여담이지만 이건 오랜만에 쉐도우런 확장팩이 나왔길래 함 하다보니까 갑자기 삘 받아서 써봤습니다. 조르만 위즈맨 얘네는 왜 증강현실 안 건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쉐도우런 룰북 7판까지 봤는데 여전히 딱히 증강현실이랄만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요. 매트릭스는 현실 위에 디지털 세계를 덧씌운다는 의미로서의 증강현실이 아니고, 쩝 매우 매력적인 소재인데 얘네가 영 안 써먹어서 아쉽습니다.
이왕 쓰기 시작한거 계속 써보자면, 제가 여기에 쓴 증강현실 기술은 대강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CES 2014를 보면 이미 증강현실 렌즈가 선보여졌습니다. 지금이야 기술한계상 원시적인 형태일 수 밖에 없지만, 핸드폰도 원래는 솥뚜껑만한 무전기에서 시작했고 스마트폰도 원래는 128비트였나 256비트였나 여하튼 조악한 해상도의 화면을 가진 휴대용 단말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일단 발전의 가능성만 있다면 세월이 흐를시 열이면 아홉 대단한 형태로까지 발전하고, 그것은 제 생각에 증강현실 렌즈가 아닐까 싶습니다.
http://www.gizmag.com/ioptik-ar-contact-lens-ces/30310/
이노베가(Innovega)라는 회사의 iOptik이라는 제품이 바로 제가 말한 증강현실 렌즈인데, 이건 아직 제가 상상했던 증강현실 렌즈와는 제법 차이가 있습니다. 이건 마이크로 디스플레이가 달린 렌즈를 눈에 쓴 후, 안경을 통해 렌즈의 마이크로디스플레이에 이미지를 보내서 현실세계와 증강현실 영상을 합치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뭐, 그래도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요. 구글도 하나 개발중이긴 한데, 당장은 증강현실보다는 당뇨병 환자를 위한 의료용기기에 더 가깝지만 뭐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http://googleblog.blogspot.kr/2014/01/introducing-our-smart-contact-lens.html
그리고 증강현실을 얘기하면서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정보를 보내주는 상호관계성을 위에서 적었는데, 이건 이미지 인식을 통해 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http://www.ted.com/talks/matt_mills_image_recognition_that_triggers_augmented_reality?embed=true&language=ko
오라스마(Aurasma) 개발자 매트 밀스의 TED 강연입니다. 여기서 이미지 인식을 통한 증강현실을 보여주는데, 정말 매력적이기 그지 없습니다. 여기 나온 앱은 오라스마라는 앱인데, 안드로이드와 애플 둘다 무료로 다운해 사용가능합니다. 앱스토어나 플레이스토어에 걍 Aurasma라고 치면 곧장 나옵니다. 저도 다운받아서 아주 간단한 증강현실 오라(Aura, 그 앱을 통해 만든 증강현실을 오라라고 부르더군요)를 만들어 가족들한테 보여줬는데 다들 어찌 신기해하던지. 여하튼, 이미지 인식 기술은 이미 어느정도 발달 됬고 미래에는 더 발달 될 것입니다, 훨씬 더요.
무선인터넷을 통해 증강현실 세계가 현실세계 위에 구축되어 있는 것은, 구글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감안하면 구글이 타국의 타기업과 협업해 진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구글 스트릿뷰, 구글 어스, 구글 맵, 모두 정말 대단하기 그지 없습니다. 현실세계가 디지털 속에 담겨있으니까요. 물론 전세계 주요핵심도시들로 제한되겠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거기에 소셜네트워크가 밀접하게 상호연관되어 있는 것은 그렇게 디지털 세계가 현실세계와 하나로 합쳐진다면 거인으로 성장한 소셜네트워크가 끼어들지 않을리 없다 생각해서 적어봤습니다.
뭐, 대강 적을건 다 적었네요. 제 짧은 단편을 읽어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혹시 ‘한번에 두 세계에서 동시에 태어나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현대인’ 이 문장을 멋지고 함축적으로 줄인 단어 떠오르는 거 있으면 좀 도와주세요 ㅜㅜ 증강인류는 뭔가 좀 그렇잖아요.
첫댓글 아바타
오오 멋지네요 ㄳ합니다. 이걸로 수정해야겠네요.
저 역시 맥루언에 푹 빠져있었긴 합니다만, 근래에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합니다. 수단은, 아무리 세련되어진들 목적이 될 순 없죠.
말씀하시는 증강현실 렌즈는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무언가-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백이면 백, 계층의 분리를 가져오겠죠.
비슷한 맥락으로 가끔 이곳저곳에 올라오는 여러 글을 읽어보면서 느끼는 겁니다만,
당장 이 카페에서만 해도 지적 수준이 낮고 정치의식이 낮은, "평범한 이들" 의 의견수렴은 잘 이뤄지지 못합니다.
논리와 근거를 대며 가르치려 들고, 어려워하면 다그치고, 혼란스러워하면 재촉하죠.
우수한 두뇌로는 이해가 쉽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똑똑하진 못합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본문에서처럼 "만인이 만인과 연결될 수 있는 곳" 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hot한 미디어", 첨단을 걸어가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마찰-로 국가, 혹은 국민의 개념이 삭제되고
언어와 민족은 과거의 유산처럼 고색창연한 것이 되어버릴때 무수히 많은 이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소외되어버리겠죠.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챙겨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없기에
오늘도 이땅의 무수한 아이들은 국어공부보다 영어공부에 매달리는 거겠죠.
앞선 이들은 소외된 이들에게 답을 내놓기보단 자신의 우월적 권리를 주장하기 바쁘지요.
청소년 왕따, 청년 실업을 고민하기보단 자기 아이를 조기유학 보내니까요.
시대의 변화에 마주해 재편되고 소외된 이들과 온전히 동화되어 오롯이 챙겨낼 것-은 지금껏 소설이 담당해온 역활이었습니다.
폭력과 폭압에 밀려난 인간성, 철도와 산업에 얼어붙은 인간성, 전쟁에서 소멸한 인간성, 자본주의에 찢겨나간 인간성.
소설과 세상의 오랜 투쟁의 역사가 계속되어 왔지만 이제는 소설이 스스로의 생존 자체를 걸고 싸워야할지도 모릅니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한국어를 고집해야하는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판국이니까요.
그리하여 소설가로서 먼저 눈에 담아야 하는 것은 앞선 선진 문명이 아닐 겁니다.
누군가 달콤한 과실을 마음껏 취하고 있을때- 외면 당하고 빼앗길 이들의 눈물부터 바라봐야하겠죠
프랑스 문학이나 남미문학이 핫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러한 위기감에서 기인합니다.
전자는 소설의 목적의식을 견고히 하려는 의식의 반영으로도 볼 수 있고
후자는 주도권을 잃은 문학이 어떻게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느냐라는 해답이라는 측면에서 그러하겠죠.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지켜본 바, 항상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기이하게도 소설은, 완벽하게 소외된 사람이거나 완벽하게 첨단을 걷는 이가 쓰게 되더군요.
@바람의집 글쎄요. 스마트폰과 소셜메디아가 이미 사실상 21세기 최대의 격변중 하나를 일으키며 사회구조와 경제구조를 새롭게 재편해냈지만, 그 진보에 적응한 자와 적응하지 않은 자 사이의 골이 그렇게까지 깊은가 하면 의문이 듭니다. 세계의 스마트폰 보급률이 이제 15~16%인가 이정도고 발달 된 선진국은 70%와 30% 사이인데 이 수치는 여전히 스마트폰이라는 진보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여전히, 심지어 기술적으로 앞서나가는 지역에도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인물들은 스마트폰이 가지는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사회의 해악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타인을 억압하려 하기도 합니다.
@작은꽃 하지만 그래도 사회적 분열이라고 할만한 갈등까지는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계속 소외받는 자들이 착취된다, 빼앗긴다, 그런 얘기를 하고 계시는데, 너무 사회를 착취하는 자와 착취받는 자의 흑백논리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계신 것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챙겨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를 보면 전세계에서 엄격한 기준으로 섬별 된 엘리트 의료진이 전세계로 퍼져나가 온전히 소외받은 자들 하나만을 위해 자신들의 재능을 바치고 있고, 전세계 곳곳에 존재한 많은 인권단체들은 소외된 이들에게 자행되는 인권침해를 위해 매일같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작은꽃 아예 소외된 이들을 도와주는 학문인 사회복지학과 소외된 이들을 도와주는 직업인 사회복지사가 있고,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의 국가에서 복지는 아주 핵심적인 역활을 맡고 있습니다. 당장 한국 2014년 예산안을 봐도 그것은 나옵니다. 대한민국 예산안에서 가장 높은 금액을 배당받은 분야가 어딜까요? 국방비? 아뇨, 복지가 가장 많은 예산을 받았습니다. 혼자서 무려 대한민국 예산중 1/3을 차지하고 있을만큼 거대하지요. 사회가 착취하는 자와 착취받는 자로 나뉘어졌다면 복지를 위해 한 인생 바친 사람들과 대한민국 예산 1/3을 차지하는 복지예산은 무엇입니까? 착취하는 자는 극소수이고, 착취받는 자 또한 비교적 소수이며, 나머지
@작은꽃 대다수는 착취하지도 그럭저럭 착취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애초에 착취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고 계신 것 같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전 제가 써야할 것을 쓰고 싶지 않고 대신 쓰고 싶은 것을 쓸 것입니다. 사회비판적 소설만 소설이 아닙니다. 님이 착취라는 개념에 그토록 집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님 자유입니다. 다만, 저에게까지 강요하진 마세요. 만약 사회비판적 소설을 쓰고자 하면 그때는 쓸 것이요, 쓰고 싶지 않다면 안 쓸 것입니다.
@작은꽃 음, 꽃님께서 말씀하시는 "착취" 와 제가 이야기하는 "인간 소외" 는 다른 문제죠.
소설이 오늘날 가지는 위상과 역활, 당면과제와 더불어 위기감은 매번 술자리 안주잖아요.
문학에 대한 고찰에서 떨어져나온 비듬 같은 단상이랄까.
짧은 글이나마 카페에 올리시길래 그냥 우리 한번 이야기 해 보아요~
하며 던진 화두이기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도 궁금하셔서요.
인간소외든 착취든 그런건 너님이나 쓰시고 나한테 참견하지마시라능!
하며 저에 대한 격한 반응을 비치시니 에 음, 그..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의도치 않게 작은꽃님 기분을 안좋게 한듯 하네요. 제 접근이 잘못된듯 합니다. 건필하세요~
@바람의집 음, 제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군요. 제가 죄송합니다.
재미있는 소설이네요.
그런데 저러면 정말 계층이 나뉘어질것 같은 불안감이 생기네요;;
그 소설 생각나네요. 미래에는 합성조미료가 발달해서, 돈 없는 사람은 소금도 설탕도 비타민도 없는 세상에서 살게되어 결핍으로 기괴하게 변이되고 결국 계급이 종족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거요.
그런데 긍정적인 특이점주의자인 Kevin Kelly가 'What technology wants'라는 책에서 말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인터넷이 문제였고, 스마트폰이 문제라고요? 그것은 문제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해야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걱정해야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입니다. 몇몇 사람만이 TV 스크린을 통해 홈쇼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걱정했지만, 이내 우리는 홈쇼핑 채널을 확보하는데 문제를 겪어야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