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무'먹방'에 여수가 나와서 하마터면 여수 밤바다로 내려갈 뻔 했습니다. 마트에서 새코시와 씨알 굵은 전복을 사다가 한 잔 했어요. 맛은 생각 보다 별로입니다. 이번 주 내에 바다를 한 번 갈 생각도 있습니다만 혼자 갈 수도 없고 누가 저랑 바다 갈 사람 있나요? 며칠 째 포스트모더니즘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구조주의'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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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구조주의의 연결 선상)에서 먼저 후기구조주의의 역할을 이해한 다음, 구조주의를 해체하는 패턴의 작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칸트가 생각한 것처럼, 사물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간이 사물을 수용하고 개념화하는 활동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modernism)에 접두어 ‘포스트’(post-)를 붙인 합성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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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두어 ‘포스트’는 ‘이후’ 또는 ‘다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나 ‘다음’에 도래하는 어떤 사유의 흐름을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통상 19세기까지 지속된 근대 사상의 지배적 사유 경향 다음에 오는 어떤 사유의 새로운 파고를 일컫는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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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이후’나 ‘다음’은 단지 시간적 선후 관계만을 가리키지 않아요. 그것은 이전의 관습이나 사유를 답습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의지나 지향을 담고 있습니다. 만일 이전과 같은 사유 방식을 지향한다면 굳이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와 ‘다음’은 모더니즘 이후에 도래하는 새로운 것, 모더니즘과는 다른, 모더니즘을 벗어난 어떤 것을 의도한 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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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포스트모던’을 거대 서사에 대한 회의”(Lyotard 2018, 21)라고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거대 서사’(meta-narrative)란 이성을 기반으로 삼은 합리적 정신이 벼려 낸 보편적 질서나 과학적 진보의 이야기를 일컫는 것 같아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주의에서 상정하는 질서에서 배제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려는 경향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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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불리는 사상가들에게 사유의 원천 역할을 했다고도 평가되는 하이데거는, “주체성의 형이상학”(Heidegger 2012, 181)에서 "삶과 세계의 질서 밑바탕에 자리한 최고 존재가 인간 주체"라고 하더이다. 곁가지로만 알았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이 이토록 무겁고 비중 있는 주제라는 걸 나만 몰랐네요. 우리 에스더가 아빠도 모르는 양자 역학을 20대에 알고 있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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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이유'라는 김종환의 유행가부터 존재론에서 말하는 '있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인류의 오랜 화두였다고 하더이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라는 것을 확실히 표명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고, 존재는 그 존재자들의 '존재'를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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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복잡하고 반복되지만 골자는 간단합니다. 파르메니데스-플라톤으로 시작되어 하이데거 이전까지 2.000년 동안의 고대 존재론은 '보편적 존재론', 즉 '전재자'로 대상 자체를 지칭했다면 하이데거는 '존재를 인간으로 한정'하고 '현존재'로 의미 부여를 시킵니다. 현 존재의 본질은 실존에 있다는 뜻입니다. (왜 존재하는 지 당위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 보다는 여기 지금 살고 있음에 주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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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존재)이었던 사물이, 내가(존재자)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즉 나와 관계 맺음을 했을 때 '용재자'로서 의미 부여가 된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존재를 형성하는 주체다." 존재는 존재자(나)를 넘어서고 모든 존재(우주,사물)는 존재자(나)의 존재입니다. 그러니 존재는 존재자(나)를 언제나 초월합니다. 해서, 어떤 개인도 개인의 역사성을 못 넘어간다는 것 아닙니까?
2024.7.7.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