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돌’ 대신증권을 빛낸 장면들
IMF 당시 5대 대형사 중 유일 생존, 금융과 부동산 두 축으로 백년대계 꿈꾼다
‘큰대(大) 믿을신(信).’
한자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어도 한국인 가운데 이 글자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1987년 10월 12일 두 글자 캐치프레이즈를 띄운 대신증권 CF가 최초 방영된 이후 지금도 중·장년층은 증권 회사하면 ‘큰대 믿을신’을 떠올릴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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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가 방영된 지 어느덧 35년이 흘렀다. 대신증권은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견뎌 내고 당시 5대 증권사 중 유일하게 생존했다. 대신증권은 6월 20일 창립 60돌을 맞는다. 한국 자본 시장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신증권의 역사적 장면들을 정리했다.
대신증권 첫 본사인 명동예술극장(구 국립극장). 사진=대신증권 제공#. 장면 하나.
“금융의 중심지, 명동과 여의도를 달구다”1976년 현 명동예술극장(구 국립극장)에 화려한 간판이 내걸렸다. 1962년 삼락증권으로 시작해 1975년 중보증권을 인수하며 몸집을 키운 대신증권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창업자 양재봉 대신증권 명예회장은 ‘금융으로 국가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금융 보국의 신념으로 1975년 대신증권으로 사명을 변경, 재창업을 선언했다.
당시 명동 땅은 금융의 중심지로 대신증권 명동사옥의 전광 시세판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명동 증권가의 대명사가 곧 대신이던 시절이다. 10년 후 대신증권은 여의도로 사옥을 이전해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하며 대형 증권사로 도약했다. 특히 당시엔 기업을 공개하려면 대신증권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업공개(IPO) 부문과 회사채 인수 등 발행 시장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3저(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호황과 증시 활황에 힘입어 자본금 1808억원, 전국 55개 영업점, 직원 1700여 명에 이르는 초대형 증권사로 성장했다.
1984년 대신경제연구소, 1986년 대신개발금융, 1987년 대신전산센터, 1988년 지금의 대신자산운용의 전신인 대신투자자문을 잇달아 설립하며 종합 금융그룹으로 진화했다. 대신종합금융그룹의 시작이었다.
초대형 증권사로 성장한 대신증권의 상징인 ‘황소상’. 사진=대신증권 제공#. 장면 둘.
“재벌 아니면 생존 어렵다”1980년대 초 경제 사회 혼란기, 1997년 외환 위기, 1998년 대우채 파동, 2000년대 초 카드채 사태, 2008년 글로벌 신용 위기, 2011년 그리스발 금융 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
1962년 삼락증권으로 시작해 오늘을 맞기까지 대신증권의 지난 60년에는 한국 금융 시장을 뒤흔든 위기의 장면들이 수차례 있었다. 당시 대신증권과 어깨를 나란히 한 1980년 한국 증권업계를 대표하는 5대 대형 증권사 대우·동서·쌍용(현 신한금융투자)·LG(현 NH투자증권)들은 회사가 없어지거나 경영권이 바뀌는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대신증권은 달랐다.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며 리스크 관리 노하우를 터득했다. 단적인 예가 IMF 사태다.
1994년 종합주가지수가 최고치를 기록한 당시 대신증권은 1995년 보유하고 있던 상품 주식을 대거 처분해 단기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다. 경쟁사들이 대규모로 주식을 보유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2년 뒤 1997년 12월 IMF 외환 위기가 발생했고 연 30%에 육박하는 고금리 상황에서 많은 기업들이 부도 사태를 맞았다. 대형 증권사인 동서증권·고려증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 무렵 업계에선 ‘재벌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비재벌 단독 증권사인 대신증권도 위험할 것이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대신증권은 일찍이 단기 차입금을 모두 상환해 무차입 경영을 했기 때문에 IMF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됐다. 대신증권은 주위의 우려를 불식하고 IMF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대신증권 HTS ‘사이보스’ 출시.#. 장면 셋.
한국 최초의 HTS ‘사이보스’증권업계 최초의 장면도 많다. 특히 대신증권은 정보기술(IT) 불모지였던 증권업계에서 혁신을 이끌어 온 IT 선구자였다. 양재봉 명예회장은 오래전부터 전산부문이 증권회사의 성장을 이끌 것으로 보고 전산 쪽에 과감히 투자했다.
1976년 증권업계에서 처음으로 전산 터미널을 도입하고 1978년 자체 전산기를 가동하며 기반을 닦았다. 1979년에는 지금은 증권사를 대표하는 대형 전광 시세판도 한국 처음으로 설치했다. 이듬해인 1980년 전국 영업점을 온라인화하는 등 IT 기반의 증권 서비스를 선도하기 위해 과감히 투자했다.
혁신적인 평가를 이끌어 낸 것은 1997년 첫선을 보인 대신증권 홈 트레이딩 시스템(HTS) ‘사이보스’다. 초기 집중 투자를 통해 온라인 거래 시스템을 구축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HTS에 따라 1999년 이후 온라인 거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온라인 누적 거래액 1000조원을 업계 최초로 돌파하는 등 대한민국 온라인증권 거래 시장을 이끌었다. 대신증권의 또 한 번의 중흥기였다.
이 온라인 플랫폼은 대만의 대형 증권사인 보래증권, 인도네시아 만디리증권, 태국 부알루앙증권 등에 팔리는 등 수출 역군 노릇도 톡톡히 했다.
본사사옥 명동으로 재이전, 60돌 맞아 사옥명 대신343으로 변경.#. 장면 넷.
규모의 경쟁에서 밀린 독립계 증권사의 위기잘나가던 대신증권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2000년대 들어서 대신증권의 지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우수한 투자은행(IB) 인력들이 빠져나갔고 저가 수수료로 무장한 증권사가 등장하면서 주식 중개 부문의 경쟁력이 약화됐다. 수없이 많은 인수 주선 딜을 성공시키며 ‘인수 대신’으로 명성을 떨쳤던 대신증권에 닥친 크나큰 위기였다.
자본의 크기가 증권사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며 금융지주·대기업 계열의 금융 투자회사는 앞다퉈 자기 자본 확충에 나섰다. 자본시장법이 개정되면서 자기 자본 규모에 따라 비즈니스 영역이 결정됐고 자본 크기가 신규 비즈니스에 대한 진입 장벽이 됐다. 증권을 모태로 성장한 독립계 증권사였던 대신증권은 규모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리스크도 터졌다. 양 명예회장은 2002년 대신생명 부당 지원 문제와 연계돼 70대 후반의 나이에 타의로 회사 경영에서 물러나게 됐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대신증권의 사업다각화를 보여주는 ‘나인원한남’ 조감도.#. 장면 다섯.
주식과 채권도 하는 회사자본을 바탕으로 한 대형화 바람 속에 대신증권이 선택한 길은 차별화였다. 제한된 자기 자본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에 나섰다. 증권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금융회사를 인수하고 신규 인가를 받아 새로운 사업 영역에 진출했다.
출발은 저축은행 인수였다. 2011년 8월 중앙부산·부산2·도민저축은행의 자산을 자산·부채 인수(P&A) 방식으로 인수했다. 대신저축은행은 출범 10년 만에 총자산 기준 15위권 회사로 성장했다. 2014년 우리에프앤아이를 인수해 대신에프앤아이를 출범시켰다.
부동산 등 대체 투자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대박’은 여기에서 터졌다. 대신증권의 손자회사인 디에스한남을 통해 개발한 최고급 주택 단지 ‘나인원한남(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분양이 성공리에 마무리되면서 큰 수익을 거뒀다. 본업인 주식 중개업이 시대적 흐름에 쪼그라들었지만 나인원한남 프로젝트가 성공하면서 회사는 ‘어닝 서프라이즈’ 실적을 올렸다.
2019년에는 대신자산신탁을 설립해 부동산 신탁업을 시작했다. 자산 관리 회사(AMC) 인가를 받고 리츠 시장을 본격 공략했다. 글로벌 투자 확대를 위해 미국 뉴욕, 싱가포르, 일본 도쿄에 현지 법인도 설립했다.
대신증권은 이 같은 사업 다각화를 통해 금융과 부동산을 아우르는 밸류 체인을 구축했다. 스스로 ‘과거 주식과 채권만 하는 회사에서 주식과 채권도 하는 회사’로 탈바꿈했다고 말한다. 기존 증권, 자산 운용 등 금융 부문과 에프앤아이·자산신탁 등 부동산 부문의 전문성을 결합해 차별화를 이루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증권과 자산신탁 등 그룹의 시너지를 활용한 글로벌 리츠 상품 출시를 계획하고 있다. 하반기 상장이 목표다. 업계에선 이 같은 대신의 차별화가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끌지 지켜보고 있다.
구경회 SK증권 애널리스트는 “사업 구조가 대부분 비슷한 한국의 증권업계에서 대신증권처럼 부동산 금융, 부실채권(NPL)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한 기업이 있다는 것은 투자 선택의 폭을 넓혀 줄 것”이라고 말했다. 윤유동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도 “타사와 차별화된 부동산 수익원을 확보해 간다는 점은 긴 호흡으로 바라봐도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해시태그로 보는 대신증권 60년
#큰대믿을신
대신증권을 수식하는 대표 브랜드 슬로건이었다. 고 양재봉 창업자가 출장길에 열차를 타고 가던 도중, 열차 바퀴가 레일과 마찰하면서 일어나는 소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 3·3조 가락을 느꼈고 이를 회사 사명인 대신에 도입했다. 미래를 지향하는 진취적 기상과 함께 고객에게는 안심하고 투자 자산을 맡길 수 있는 신뢰감을 심어 준다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황소상
주식 시장의 강세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황소상을 만들었다. 전남대 미술대학장 김행신 교수의 작품으로, 역동적인 대신그룹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실제로 황소를 사들여 그 행태를 연구하는 등 1년여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여의도 대신증권 사옥 앞을 지켜 왔고 지금은 대신증권 역사관이 자리한 위례 사옥 앞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거래소·금융투자협회에 있는 황소상과 함께 여의도 3대 황소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이보스
1997년 4월 증권거래법 개정으로 한국에서도 온라인 주식 매매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정보기술(IT) 부문의 집중 투자로 결실을 본 사이보스 시리즈는 대한민국 온라인 증권 거래 플랫폼의 혁명이자 한국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사용자들의 니즈를 직접 반영해 개발한 홈 트레이딩 시스템(HTS)으로 유명했고 증권업계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HTS로 알려져 있다. 사이보스가 형님이라면 크레온은 형보다 나은 아우라고 할 수 있다. 사이보스의 압도적 기능에 수수료는 10분의 1 수준으로 저가 수수료를 선호하는 온라인 트레이딩 투자자들에게 안성맞춤인 HTS,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배당
대신증권은 주주 친화 정책으로 유명하다. 지속적인 자사주 매입과 현금 배당을 통해 주주 가치 제고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대신증권의 배당 정책은 안정적 배당 투자를 원하는 주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왔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24년 연속 현금 배당을 실시하고 있고 배당 성향 측면에서 업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증권업계를 대표하는 배당 주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인원한남
나인원한남은 용산구 한남동에 들어선 최고급 주택 단지다. 지드래곤·방탄소년단(BTS) 등 유명 연예인과 기업인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 최고급 주택 단지가 대신증권의 손자회사인 디에스한남에서 개발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디에스한남이 2016년 용산 외인아파트부지(니블로배럭스)를 6242억원에 낙찰받아 최고급 주택 단지로 개발해 지난해 분양을 마쳤다. 대신증권을 필두로 한 대신금융그룹의 부동산 경쟁력을 입증한 개발 사업으로, 가장 최근에 공급된 대규모 최고급 주택 단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매거진한경] 2022.06.20.
첫댓글 자기자본 기준으로 현재 10위...10년 뒤에는 5위권 안으로 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