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77), 옥녀봉에서 견훤대왕 왕릉까지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어떤 외압적인 행위로 집안에만 붙박이처럼 틀에 박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으니, 평소에는 잘 나가지 않던 외출 유혹이 더 등을 떠민다. 오늘은 학교에서 결재할 일도 있고, 손자 돕는 아내도 시간여유가 있어 익산 인접 도시인 논산지역을 같이 둘러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적거려 강경읍 금강지류에 있는 ‘옥녀봉’과 연무읍 부근에 있는 ‘견훤왕릉’이 색다른 곳이어서 나들이 목적지로 정했다. 학교에서 결재를 모두 마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오늘은 화요일이어서 나와 아내는 출생연도 끝자리가 의료용 마스크를 구매할 수 있느 날이다. 복잡한 시내보다는 한적한 면 소재지의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려고 강경 가는 길에 황등면 소재지에 들렀다. 약국 앞을 보니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약국 안에도 사람이 없었다. 혹시 안 팔면 어쩌나하면서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사님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마스크를 사러 왔다고 하니 약사는 접수 절차를 마치고 마스크를 주었다. 지난주 전주시내에서 줄을 서가며 힘겹게 샀던 것과는 너무 대조가 되어서 기분이 묘했다.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강경읍 옥녀봉을 보니 황등면에서 30여 분 이내의 거리였다. 옥녀봉은 달 밝은 보름날 하늘나라 선녀들이 이 산마루에 내려와 경치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맑은 강물에 목욕하며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옥녀봉 공원으로 올라가는 소라 등껍질 같은 나선형 길을 돌고 돌아서 봉화대까지 오르니, 갑작스러운 짭조롬한 강경 새우젓 강풍이 불어 단단히 신고식을 치르게 하여 힘들었다. 바람 때문에 실눈을 뜨고 아래 전경을 보니 금강지류가 한 눈에 보였다. 강풍에 갈댓잎들은 성난 파도처럼 그칠 줄 모르며 금방이라도 쓰나미가 되어 옥녀봉으로 밀려올 기세였다. 옥녀봉 정자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거칠 것 없이 훤하고, 논산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강 건너 들녘에는 논산지역의 특용작물재배 딸기밭 집단단지 수만 평의 비닐하우스가 강풍에 살아남기 위해서 땅에 넙죽이 엎드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다. 강풍 속에서도 산과 강과 들이 끄떡없이 의연함을 보니 조상님들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줬던 대자연의 경외(敬畏)스러움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옥녀봉 7부 능선쯤 내려오니 초가지붕의 'ㄱ'자 교회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우리나라의 근대문화 수입의 전파 역할이었던 기독교 문화의 흔적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강경침례교회는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말기 인천과 강경을 오가면서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 집사가택으로 1896년 2월 미국 보스턴의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파울링 선교사가 거처를 정한 곳이다. 한강 이남에서 지어진 최초의 'ㄱ'자 교회로(김제 금산ㄱ자 교회-1905년, 익산 두동ㄱ자 교회 1929년) 당시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유별이 엄격한 유교 전통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가니 박범신 『소금』의 배경이 되었던 집이 잡초 속에 슬레이트 지붕을 간신히 머리에 이고 버티고 있어, 주위의 청결이 아쉬웠다. 강풍이 아무리 몰아와도 볼 것을 샅샅이 훑어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강경읍내를 이리저리 둘러봐도 식당들은 있는데 인적도 드물고 모두 문을 닫은 것 같았다. 설령 식당문이 열려있다고 해도 선뜻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자동차는 강경읍을 벗어나 연무읍 견훤왕릉(甄萱王陵) 쪽으로 향했다. 읍내를 조금 벗어나니 대로변에 음식점 두 군데가 보였다. 하나는 ‘시골집’이고, 하나는 ‘싸리집’이었다. 우선 간판이 정다운 시골집으로 들어갈려니 건물 앞에 사정이 있어 폐업한다는 주인댁의 플래카드가 바람에 휘청거렸다. 할 수 없이 싸리집에 들어가니 여러 식탁이 있는데 두 군데만 손님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집의 주된 메뉴인 우렁쌈밥을 주문하여 식사하니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아니면 우렁쌈밥이 맛이 있어서인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식사를 마쳤다. 돈을 지불하고 먹었어도 주인장한테 미안한 감이 들어서 칭찬을 했다.
“사장님, 내가 사장님 설거지하기 쉽게 하시라고, 반찬 그릇을 전부 비웠네요”
”맛있게 잡수셔서 감사합니다."
자동차로 15분가량 가니 견훤왕릉에 닿았다. 이곳은 내가 수없이 지나다녔던 길목이다. 그런데 그 때마다 왜 지나치고 이제야 왔을까? 1,000여 년 전의 견훤대왕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후백제 부흥의 꿈을 이루고자 칼을 갈고 활시위를 수없이 당겼을 견훤대왕, 묘지 형태나 묘지 주위의 조형물을 볼 때 그 당시는 후백제의 부활도 실패하고, 몰락한 죽음이어서 장례의식도 초라하게 치러졌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들 가운데 작은 야산에 묻었으리라. 이곳이 견훤왕릉이라는 표시는 행정관청에서 설치한 작은 안내판과 1970년 견 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후백제 왕 견훤릉)’이 유일하다. 소박하다 못해 쓸쓸하고 적막하기까지 했다. 정말 여기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묘란 말인가?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다 맏아들 신검(神劍)의 반란으로 실패하고, 금산사(金山寺)에 갇혔다가 몰래 도망하여 고려에 항복, 후백제가 멸망하자 울분과 번민에 싸인 채 등창[背瘡]으로 연산(連山)에서 죽었다 한다. 견훤은 등창으로 죽음 앞에도 제국의 꿈 남쪽 하늘 끝 완산 벌 전주를 그렇게 그리워하여, 묘의 좌향도 전주 쪽을 향했다는 전설이 있다. 묘지의 참배를 마치고 주위를 살펴보니, 허름한 철책 아래 석축 사이에 때 이른 제비꽃 한 송이가 보랏빛으로 견훤대왕의 피멍을 토해내듯 나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눈시울을 젖게 했다.
아쉬운 견훤왕릉 참배를 마치고 주차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출입문을 열자마자 센서에 의해 동시홍보 녹음방송이 나왔다. 견훤왕릉 해설보다는 행정당국의 홍보내용 일색이었다. 견훤왕릉이 있기에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는데 견훤왕릉 방송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어느 사이 나의 애마(愛馬)는 전주성에 입성하니 천여 년 전의 후백제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진동하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2020. 3.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