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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같은 가을을 지냈습니다. 예보에 보니 다음 주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답니다. 또 얼마나 가려나 싶기도 합니다.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들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반세기 전과는 많이 달라진 듯합니다. 지구도 나이가 드는 모양이지요? 하도 포탄을 쏘아대서 열받은 모양입니다. 요즘은 자동차도 불을 잘 때더군요. 툭하면 이곳에서 저곳에서 달리다가, 서 있다가도 불이 납니다. 거참! 자꾸 덥혀주고 있습니다. 겨울은 제대로 오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입동은 진작 지났는데 말입니다. 안 오면 말지요, 하고 싶지만 이게 그런 일이 아니잖아요. 한해 동안 괴롭혔던 병균들을 정리해주는 기간이 바로 겨울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겨울에도 기승을 부린다면 어쩝니까? 아 글쎄, 수눙고사 치르는데 추위가 아니라 모기가 오락가락해서 고생했답니다. 거참, 뭔 일이래요?
그래도 이산 저산 나무마다 산들마다 색동옷 입고 겨울 준비 완료하고 있습니다. 저러다 오히려 파란 싹 돋아나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걱정됩니다. 우리나라 바다에도 문제가 생겼다잖아요. 동태 꽁치 사라진지는 이미 꽤 되었고 이제 오징어도 올라가고 있답니다. 아 - 옛날 맛이 그리워집니다. 우리 것 다 사라지고 저 멀리 북유럽에서 수입한 것으로 대체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신토불이인데 아무래도 그 맛이 아닙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나마 종이 말라 없어진 것은 아니니 다행인가요? 우리 세대 지나고 나면 더욱 달라질 것입니다. 그저 살아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할까 봅니다. 그 때의 맛은 그냥 먼 추억으로나 간직하고 살아야지요.
이제 단풍도 지나갑니다. 색동옷 입은 마지막 주말이 아닐까 싶네요. 건강하게 기분 좋은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11월 16일 김종우 목사 드림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 : 15)
<세상 참 예쁜 오드리>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불행을 당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불행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입니다. 오랜 시간 그 아픔과 슬픔을 이겨내며 살아갑니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고 살면서 차츰 마음 정리가 됩니다. 삶이라는 수레바퀴에 밀려서 잊혀가는 것입니다. 물론 망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먼 창고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트라우마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튀어나와 슬픔과 분노를 재생산해낼 수도 있습니다. 아주 없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속 어딘가에 간직되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픔이 재현될 수 있습니다. 가까이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아니면 혼자서 이겨내야 합니다.
갑작스런 사고는 충격이 크지만 그만큼 빠른 대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질병이라면 조금 다릅니다. 물론 시간을 다투는 급작스런 병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시간을 유지하며 진행하는 질병의 경우 여러 가지 차질을 불러옵니다. 먼저 가족의 일상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실 가족 중에 환자가 발생하면 그 한 사람의 고통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함께 겪는 아픔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그래도 요양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 되지요. 지난 세기까지만도 모두 가족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실 요양시설에 입원한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본인도 그렇고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란 ‘기훈’은 특히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엄마 곁에 머물러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만두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방안에 가두어두기도 어렵지요. 24시간 따라다니며 지킬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 입구에서 쪼그리고 앉아 졸면서 버티기도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생활이란 것이 없어집니다. 동생 ‘지은’이가 돌아와서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자고 우기는 것을 극구 말립니다. 1년만이라도 그냥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애원합니다. 듣고 있던 엄마도 요양원에 가겠다고 동조합니다. 어쩌지요?
‘알츠하이머’ 많이 들어본 이름입니다. 여러 가지 증상이 있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억상실입니다. 최근 이 ‘기억’이란 문제로 글을 자꾸 쓰는 듯합니다. 과거를 모르는 나는 과연 나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는 여전히 내 아내인가? 등등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이 질병에 걸리게 되면 남은 가족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생각이 복잡해질 것입니다. 물론 일찍 발견이 된다면 서서히 대처해갈 수 있습니다. 아마도 완치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뇌세포는 회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는 식사를 분명 끝냈는데 조금 후 식사하자고 말합니다. 일하는 식당에서 이상한 기미가 보였지만 설마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래서 모시고 병원진료를 받습니다. 결과는 ‘알츠하이머’입니다.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점점 진행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어느 순간 집을 나가더니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아이를 딸로 착각하고 데려가다가 아동유괴범으로 잡혀 파출소로 끌려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기훈이는 엄마의 병명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지 않으려 합니다. 간신히 집에 돌아오기는 합니다. 집안 곳곳에 설명서를 붙입니다. 화장실, 싱크대, 안방, 찬장 등등. 엄마는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진작 집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자기 꿈을 실현하고자 나간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부모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기훈이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훈이는 친오빠가 아닙니다. 어려서 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기훈이를 아들로 받아준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아들처럼, 아니 오히려 더 애정을 쏟아부어 키웠습니다. 지은이는 어느 날 갑자기 부모의 사랑을 빼앗긴 것입니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를 당하며 자랐습니다. 자라는 동안 내내 상처가 되어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십대의 반항과 더불어 아이돌을 꿈꾸며 가출한 것입니다. 당시 화를 내던 아빠가 쫓아오다 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상처까지 안고 산 것입니다.
한창 잘 나가려는 때에 지은이는 백혈병 진단을 받습니다. 골수이식이 필요합니다. 보호자로 달려왔지만 기훈이는 부적합자입니다. 당연하지요. 친형제가 아니니 말입니다. 남은 사람은 엄마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가족은 다시 모입니다. 수술은 잘 끝나고 모두가 살아서 소풍을 나갑니다. 진작 이렇게 사랑해주었으면 오죽 좋았을까 마는 우리 삶 속에 늦은 경우는 없습니다. 생각이 나면 지금 하면 됩니다. 지나간 과거보다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며 살 것이 아니라 바라보며 사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때로는 반성도 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영화 ‘세상 참 예쁜 오드리’(Audrey)를 보았습니다. 엄마의 별명입니다.
바람을 보는 자
우리 모두 처음 교회 나온 동기 또는 예수를 믿게 된 동기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부모님 따라다니다 그냥 다니게 된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신자들도 나중에 자기 의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따라다니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신앙을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 어떤 동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려운 질병에서 하나님 은혜로 낫게 되어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소위 기적을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믿게 된 것이지요. 저의 경우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을 받은 체험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놀라운 사건을 체험해서 얻은 신앙은 그 뿌리가 아주 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차 이야기했습니다만 기적을 체험해서 믿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긴 믿음은 자칫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가 갈라지고 그 사이를 건너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와서 불과 몇 개월 지나자 먹을 것 없다고 불평이요 마실 것 없다고 원망합니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할 뿐 믿음을 키워가기는 어렵다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초가 든든한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롬 10 :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어디서 난답니까? ‘들음에서.’ 무엇을 들어야 한다고요? ‘그리스도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들어야 합니다. 듣고 또 듣고, 들은 것도 듣고 또 듣습니다. 한 번 들었다고 다 들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들은 것을 또 듣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한 번에 다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한 번 들은 설교는 다시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뭐 또 듣느냐고? 그런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만 공부하는 것 아닙니다. 저도 공부합니다. 여러분을 가르치려니 저도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니 들어야 하고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에게 전달해주지요.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해할 때까지 듣습니다. 때로는 10번도 더 듣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들을 때마다 이해하는 내용이 달라지고 이해하는 폭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성경 한 번 읽었다고 안 읽어요? 아닙니다. 읽을수록 더 읽습니다. 왜요? 읽을 때마다 맛이 다릅니다. 읽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한다고 했습니까? 세상 이야기입니까, 하늘 이야기입니까? 한두 번 읽었다고 다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시 1 : 1 - 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복 있다고 한 사람은 단순히 나쁜 짓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율법’ 곧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날마다 읽는 것입니다.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는 겁니다. 즉 생각하며 읽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발견해야 하겠지요. 사도 바울이 전도하며 다니다가 데살로니가에 갔더니 유대인들의 방해가 심했습니다. 그 옆에 베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행 17 : 11 - 12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말씀을 어떤 자세로 받았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뭐 했다고요? 성경을 상고했답니다. 우리도 그런 자세로 성경을 읽고 배우고 신앙하면 좋겠습니다. 하이고! 먹고살기 바쁜데 어찌 날마다 성경을 배운다냐? 그러지 맙시다. 잘 아는 성구 암송해봅시다. 마 6 :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건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대로 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 문제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죽은 이후 예수님이 빈들로 나가십니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모입니다. 예수님이 무리와 함께 있으며 병도 고쳐주고 하루를 지내는데 날이 저물어갑니다. 그러니 하루 종일 함께 있던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걱정스러워서 예수님께 와서 사정을 말합니다. 마 14 :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1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세상에! 우리가 군량미라도 가지고 다닙니까? 그런데 약삭빠른 제자가 사전조사를 해둔 모양입니다. 17절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사실 그것도 자기네들이 준비해갖고 온 것이 아니지요. 요 6 : 8 - 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그것 가지고 몇 명을 먹이십니까? 마 14 :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대단한 기적이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입니다.
바로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백성은 퍼뜩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당시 얼마나 먹고살기 힘든 때입니까? 그런데 예수님만 계시면 먹을 것 걱정 있겠다, 없겠다? 그렇지요? 그러니 예수님 잡아다가 왕 삼으려고 합니다. 요 6 : 15 “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 미리 아시고 그 자리를 부랴부랴 피하십니다. 마 14 : 22 - 2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자 제자들을 먼저 배로 떠나보내고 예수님은 홀로 산기도 하러 가셨습니다. 시간이 좀 지났지요. 제자들은 어느 만치 갔을까요? 24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한참 갔습니다. 그런데 쉽지 않네요.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쩌지요?
이제 여기 제자들을 따라가보겠습니다. 마 14 : 25 - 26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자,‘밤 사경’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언제쯤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오늘날 시간으로 말한다면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를 가리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꼭두새벽’이라고 하지요. 그 캄캄한 새벽에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해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바다 위로 사람이 걸어오는 겁니다. 잔잔한 바다도 아니고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위를 사람이 걸어온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풍랑으로 인해서 고난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소름 끼치는 일 아닙니까? 어둠이 덮여있는 바다, 출렁이는 물결 위에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이건 분명 귀신이지요. 그래서 소리를 지릅니다. ‘유령이다!’ 여러분은 바다에 빠져죽겠습니까, 귀신에게 잡혀 가겠습니까? 아 물론 이것도 저것도 둘 다 싫지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이판사판인데 뭘!
겁에 잔뜩 질려있는 제자들에게 물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이 급히 달래주십니다. 27절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 베드로 좀 보십시오. 28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나올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참 겁에 질려 있다가 예수님이라는 소리에 안심이 되었겠지요. 그러면 어서 오십시오. 우리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말해야 정상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이 풍랑도 잔잔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왜요? 이미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마 8 : 23 - 26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의 한 마디에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여태 고생했던 이 풍랑도 잔잔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바다 위를 걷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풍랑을 잔잔케 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풍랑이 이는 물위를 걸을 생각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앞에서 보았지만 이미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 중요한 이 네 사람 모두 어부들입니다. 그러니 갈릴리에서 뼈대가 굵은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밤중에 일어나는 바다 한 가운데서의 풍랑은 공포의 대상 아니겠습니까? 배라도 뒤집어지면 끝장입니다. 풍랑과 싸우며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이고, 이제 살았다 싶지요.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맞이하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도 바다 위를 걷게 해달랍니다. 이 무슨 허무맹랑한 짓입니까? 아무튼 예수님이 허락하십니다. 29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와 - 대단하지요? 베드로도 바다 위를 걷습니다. 풍랑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 위를 걸어갑니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아직 예수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냥 이야기처럼 읽으니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바다가 잔잔합니까? 아닙니다. 바다의 사나이라 할 만한 어부들이 고난을 당할 만큼 파도가 일고 있습니다. 그 바다 위를 걷는다는 것이 보통 이야기입니까? 배에서 나와 출렁이는 그 물위로 어떻게 내려갈 수 있었을까요?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오직 누구를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지금 그 바다 위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믿음을 지속시키는 것이지요. 29 - 30절 다시 읽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여기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배에서 물위로 내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그냥 빠집니까, 빠져 갑니까? 퐁당 하고 빠져버리지요. 어떻게 빠져 갑니까? 말이 안 되지요. 무엇을 느낍니까? 서서히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시험해보십시오. 쏙 빠지는지, 아니면 서서히 빠져 가는지 말입니다.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베드로가 자기도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듣고 기특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오 - 이것 봐라! 그래 오너라, 하셨습니다. 일단 물위로 내린 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겁나는 일 아닙니까? 그냥 잔잔한 물위도 아니고 파도가 일렁이는 물위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읽습니다.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합니까?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바람일까요, 파도일까요? 그 꼭두새벽에 바람이 보입니까? 낮에도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바람이 불고 있다는 어떤 현상이 보일 뿐입니다. 물론 그 현상을 보면서 바람이 보인다고 표현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보통은 바람이 보인다고 하지 않고 바람이 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갔다고 말씀합니다. 하도 이상해서 영어성경을 보았더니 거기도 똑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보았다, 빠지기 시작했다, 그럽니다. 그러니 우리 성경이 잘못 번역된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하나님 말씀 속에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뭔가 깊은 뜻을 담고 있으려니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지금 바람을 보고 있으니 그 예를 보겠습니다. 단 7 :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무슨 바람이요? ‘네 바람.’ 아니 바람을 하나 둘 셋 넷 하고 셀 수 있습니까? 그러니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겠구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고 계십니다. 바람이 꽤 심하게 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바다 위를 걷고 있습니다. 바람이 더 세차게 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가다가 그만 바람에 더 크게 일렁이는 파도를 보았겠지요. 그러자 베드로의 몸이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놀래가지고 살려달라고 소리 지릅니다. 마 14 :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십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지요? ‘믿음이 적은 자여’
사실 베드로가 믿음이 적은 자입니까? 이 일련의 상황을 잘 생각해본다면 베드로는 우리에 비하면 대단히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우리는 감히 따라가기 힘들 정도 아닙니까? 지금 상황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냥 읽으니 아무런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대단히 어지러운 상황 아닙니까? 파도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배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고 계십니다. 예수님도 파도를 따라 움직일까요, 그냥 아무런 요동 없이(파도야 출렁이든 말든) 곧바로 직진하고 있을까요? 사실 상상하기 좀 힘듭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파도를 바라보니 상황이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풍파 몰아쳐도 주님 바라보며 꿋꿋이 걸어가면 아무 요동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여러 가지 생각들이나 유혹들이 우리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믿음 자체를 흔듭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세상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배웠지만 바람은 영을 비유하지요. 하나님만 영이 아닙니다. 우리를 어지럽히는 영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계해야 합니다.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한창 ‘영성훈련’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영성’이라고 말하면 괜히 뭔가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물론 대단하지요. 일단 영은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대단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영의 소속이 둘로 나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이라고 무조건 다 하나님 소속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귀도 영이고 바로 마귀 소속의 영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영성훈련’이 하나님의 영인지 마귀의 영인지 그것부터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따라가다가는 마귀의 영을 따라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의 길입니다. 우리가 살려고 훈련을 받는 것이고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를 따라가다니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모르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보이지도 않는 영을 무엇으로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다시 봅니다. 요일 4 :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세상에 누가 나왔다고 합니까? ‘거짓 선지자’입니다. 영은 보이지 않아도 선지자는 사람이니까 보입니다. 문제는 ‘거짓 선지자’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말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마귀의 거짓말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전하는 말이 마귀의 말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다면 누가 듣겠습니까? 다 도망갈 것입니다. 이게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초림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말씀이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의 계명’을 가르쳤다고 질타하셨습니다. 오늘도 똑같다는 말입니다.
교회마다 모두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합니다. 마귀의 말이라고 설교하는 교회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 마귀의 말인지 신자가 분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른 것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목사님은, 절대 하나님 편이다, 라고 믿고 싶습니다. 하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배반하리라고 누구인들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지만 마귀는 바로 그런 점을 이용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는 사람을 자기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그 미혹에 넘어갑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확실하게 올바른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무기로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벧전 5 :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마귀를 대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말씀하심은 그 영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상황은 정리가 됩니다. 조용해지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에게는 사단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을 그리지 말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꾸 가르치고 또 배우라고 종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지 바르게 알고 믿어야 믿음이 바로 서고 든든하게 자라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특히 예언의 말씀을 알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왕래해야 합니다. 다니면서 배우십시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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