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3818]農巖시-善竹橋(선죽교)
농암집 제6권 / 시(詩)
農巖集卷之六 / 詩
善竹橋
溪水濺濺溪草綠。溪邊短碣記麗朝。
至今疑有萇弘血。終古悲同豫讓橋。
已判存亡隨漢鼎。寧論揖遜似虞韶。
褚生不死知何益。長愧石頭城下謠
善竹橋(선죽교)
溪水濺濺溪草綠--시냇물은 콸콸콸 물가 풀은 파릇한데
溪邊短碣記麗朝--시냇가 작은 비석 고려 왕조 기록일세
至今疑有萇弘血--지금까지 장홍의 피 남아 있는 듯한데
終古悲同豫讓橋--만고토록 예양 다리 그 슬픔과 마찬가지
已判存亡隨漢鼎--국운 존망 이미 갈려 새 왕조 들어서니
寧論揖遜似虞韶--舜(순)과 같은 왕위 선양 어찌 다시 논하리오
褚生不死知何益--허나 저생 목숨 부지 무슨 소용 있었더냐
長愧石頭城下謠--석두성 밑 떠도는 노랫말에 부끄럽네
[주D-001]
지금까지 …… 듯한데 : 周靈王(주 영왕)의 충신 萇弘(장홍)이 모함을 받아 蜀(촉)으로 쫓겨나자 할복자살을 하였는데, 그때 흘린 피가 3년 뒤에 푸른 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莊子 外物》 여기서는 선죽교에 흘린 정몽주의 피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음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주D-002]
만고토록 …… 마찬가지 : 예양(豫讓) 다리는 중국 태원부(太原府) 양곡현(陽曲縣) 분수(汾水) 위에 있던 다리로, 전국 시대 진(晉)나라 예양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은 본래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비수를 품고 숨어 있다가 조양자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곳이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정몽주가 새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개를 고수하다 살해당한 선죽교가 예양의 경우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3]
허나 …… 부끄럽네 : 저생(褚生)은 남조(南朝) 제(齊)나라의 저연(褚淵)을 말한다. 송 명제(宋明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명제가 죽을 때, 그를 중서령(中書令)과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아 상서령(尙書令) 원찬(袁粲)과 고명(顧命)을 받들고 어린 임금을 보좌하라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뒤에 소도성(蕭道成)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제(齊)나라를 세우려 하자, 원찬과 유병(劉秉) 등은 그에 불복하였으나 저연은 소도성을 적극 도와 그로 인해 제나라에서 영화를 누렸다. 석두성(石頭城)은 송나라와 제나라의 도읍지인 건강(建康)의 별칭으로, 지금의 남경(南京)이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 “가련하다 석두성아, 원찬처럼 죽을망정, 언회(彦回)처럼 살지 마세.[可憐石頭城 寧爲袁粲死 不作彦回生]”라는 노래가 유행하여 그의 변절을 비꼬았다. 《南史 卷28 褚淵傳》 곧 조선 왕조가 들어설 때 정몽주와 달리 변절하고 새 왕조를 도운 고려의 유신(遺臣)들이 당시에는 비록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세간의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