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如山房에서 보내는 편지 ⑮
양문규 시인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 지 10여 년, 옛 생각 껴안고 나지막하게 엎드려 천태산 여여산방에서 펼치는 마음의 풍경! 그는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오랜 울음을 갈무리해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 그 작고 보잘것없는 초라한 물상들에 끊임없이 눈 맞추며, 공동체적 삶의 숨결을 읽어낸다. 지금 바로 여기, 여여(如如)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양식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맑은 시처럼 길어 올리고 있다.
천년 은행나무와 함께 걷는 생명 스테이
양문규
지난봄부터 하루 일과 중 빠트리지 않는 게 있습니다. 산책이 그것이지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주로 이른 새벽 마음이 가는 길을 따라 한두 시간 묵묵히 그리고 천천히 걷습니다. 천년 은행나무를 지나 아랫마을 누교리 천태산 주차장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도 있고요. 영국사 매표소에서 망탑봉삼층석탑을 올라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산을 내려가 육조길을 따라 남고개까지 갔다 돌아오는 고즈넉한 길도 있지요. 아니면 매표소에서 곧장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다가 용추폭포를 지나 진주폭포에서 남고개를 따라 장선리까지 가는 옛길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등산 코스가 아닌 나무꾼의 길로 천태산 능선을 구불구불 걷기도 합니다.
산책을 하루 일과의 중요한 과제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30여 년 동안 피워왔던 담배를 피우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도 따랐지만 무엇보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를 앞두고 나름대로 결의를 다진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물론 그동안 산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날마다 산책으로 아침을 여는 것은 아니었지요.
오늘은 그동안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여여산방에서 찻길을 따라 아랫마을 도가실, 명덕리를 지나 큰 도로로 나아가서 한참 걷다보면 누교리가 나오는데요. 거기에서 천태산 주차장까지 내친김에 또 걸었지요. ‘쉬어가는 집’에서 차 한 잔 얻어먹고 다시 등산로를 따라 천년 은행나무까지 오는 거였는데요. 꼬박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천태산 소롯길을 두고 차가 다니는 마을길을 따라 걷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산책은 “중세에 아이들이 ‘저기 세인트 테레(sainte-terrer: 어슬렁거리는 사람, 성지순례자)가 간다! 고 소리칠 때까지 성지순례자 행세를 하고 시골을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일삼던 한가한 사람들’에서 유래”(헨리 데이빗 소로우, 『산책』(양문, 2005), 13쪽)하였다고 전합니다. 보통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로 알고 있지요. 어릴 때에는 산책(散策)보다는 산보(散步)라 하였지요. 불가에서는 포행(步行)이라 하는데요. 천천히 걸으면서 참선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지요.
내가 천태산에 든 것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으로 든 것처럼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스스로 배우고 깨우치”는 데 있는데요. 그것은 자연이며, 생명입니다.
1999년 서울생활을 접고 낙향한 이후 천태산 자락에서 살아온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 길은 항상 천년 은행나무와 같이하였는데요. 천태산 은행나무를 통해 자연의 질서를 읽으며, 고귀한 생명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길 줄 알게 되었지요. 그 결과 세 권의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논저와 평론집 등을 펴내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9년 2월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창립되고요. 그해부터 자연, 생명, 평화, 시가 어우러진 삶의 향연!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지역주민과 함께 열기 시작하여 올해로 4회째를 맞게 되었는데요. 2012년 문화재 생생사업 ‘천년 은행나무 생명의 숨결 따라 생생(生生)’이 그것입니다.
2012년 문화재 생생사업은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 물론 지난해와 같이 자연, 생명, 평화 시가 어우러진 삶의 향연을 근간으로 하고 있지요. 또한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10월 27일)’ 일환으로 천태산 및 은행나무 사화집 발간(9월 1일), 천태산 및 은행나무 걸개 시화전(9월 1일~11월 30일), 천태산 및 은행나무 작품 시공모 당선작 시화(샌드 브러스트) 설치(10월 중)가 있고요. 여기에다 새롭게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가 기획되어 지난 5월부터 매달 한 차례 진행되고 있는데, 오는 11월까지 운영하게 됩니다.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는 각박한 도시와 일상의 번잡한 생활을 훌훌 털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궁구하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나아가 자연, 생명, 평화의 상징인 천태산 은행나무의 고귀한 생명의 숨결을 느끼고, 호흡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생명체로의 동질감을 찾고자 하는 것이지요.
“자연은(해와 바람과 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자애로워서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건강과 환희를 안겨”(『월든』(이레, 2010), 198쪽)줍니다. 천태산 은행나무가 그러한데요.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는 천태산 및 천년 은행나무와 인사 나누기로 문을 엽니다.
이후 ‘은행 및 은행잎을 활용한 공작활동’을 시작합니다. 손거울과 부채 만들기가 그것인데요. 처음에는 은행을 통한 핸드폰 고리 만들기, 부채에 천년 은행나무 그려 넣기를 하였는데요. 보다 창의적인 공작활동을 생각한 끝에 한지(은행잎)를 이용한 손거울 만들기, 한지 찢어 붙여 천년 은행나무 만들기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지요. 은행과 은행잎을 활용한 공작활동은 모두가 유년으로 돌아가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지요. 생전 듣지도 먹어보지도 못한 밥상을 차려먹는데요. ‘영양은행비빔밥’이 그것입니다. 천태산 은행나무가 선사한 은행과 천태산에서 채취한 고사리, 취나물 등으로 만들어지는데요. 서로 다른 음식재료가 어울려 맛난 음식이 되는 과정을 통해 상생과 화합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저녁 식사 후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천년 은행나무 자연, 생명, 평화 문화강좌’가 진행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신 문화강좌를 통해 자연이 베푸는 삶의 양식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를 목판화로 제작한 류연복 판화가의 ‘판화로 읽는 은행나무’, 지리산 자락에서 생명, 평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이원규 시인의 ‘자연과 함께 세상을 살리는 글쓰기’, 한의사 김혁 소설가의 ‘삶을 치유하는 천년 은행나무 한방 이야기’가 그것인데요. 오는 8월 11일(토)에는 『은행나무』(문학동네, 2011) 저자인 계명대학교 사학과 강판권 교수의 ‘동방의 성자, 은행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찾아나서는 것은 곧 나무의 삶을 배우는 구도자의 길”(강판권, 『은행나무』(문학동네, 2011), 8쪽)이라 합니다. 그래서 “한 번을 만나더라도 존경과 존중의 마음으로 만난다면 위대한 은행나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존경과 존중이야말로 성리학자들의 실천덕목이니,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만나는 일은 곧 성리학자의 실천덕목을 배우는 것과 같다”(같은 책, 8쪽)고 전하고 있지요. 천년 은행나무를 더욱 절실하고 뜨겁게 만나는 시간이 되겠지요.
‘천년 은행나무 자연, 생명, 평화, 문화강좌’ 이후 잠자리에 들기 전 친교의 시간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소개 및 장기를 발휘하고 담소를 나누는 시간인데요. 과일이며, 옥수수, 감자 등의 간식거리도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지요. 무엇보다 자연 그대로의 밤공기를 마시며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개구리, 소쩍새 등 자연의 소리, 생명의 소리를 듣다 잠이 들게 되지요. 특히 황토방에서의 하룻밤은 가뿐한 몸과 맘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합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영동 국선도 김기영 사범과 함께하는 ‘영동 영국사 망탑봉삼층석탑 해맞이 및 천년 은행나무 생명의 숨결 나누기’와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판화 찍기 체험’ 등이 있습니다. 천년 은행나무 생명의 숨결 나누기의 명상체험은 오전 6시 30분부터 시작되는데요. 천년 은행나무에게 인사를 한 후 망탑봉삼층석탑에 올라 기체조와 단전호흡 명상이 그것입니다. 물론 망탑봉삼층석탑에서의 해맞이를 위해서는 더 일찍 일어나야겠지요.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천년 은행나무생명의 숨결 나누기는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제공합니다. 자연과 생명의 본질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궁구하게 되는데요. 이땐 누구나 다 ‘동방의 성자’가 됩니다.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는 천태산 은행나무로 시작하고 또 그렇게 끝이 납니다.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 판화 찍기 체험’이 그 마지막으로 천년 은행나무를 마음에 심고 모시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가지고 갈’ 그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그 무엇, 혹은 차라리 자기가 ‘되어야 할’ 그 무엇”(『월든』(이레, 2010), 38쪽)이 있습니다. 천년 은행나무 영동 영국사 은행나무가 그것을 명징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도 천태산 은행나무를 지나 망탑봉삼층석탑을 향해 걸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그러한 것처럼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낙타처럼 천천히 걸었고요. 그것은 삶의 원천을 찾아 나서는 생명의 산책이었는데요.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 생명, 평화가 아니겠는지요. ‘천년 은행나무 생명 스테이’가 걷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계간 『시에』 2012년 가을호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