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老僧百年]......”이라 함은 이류(異類) 속에서의 행이나 이(異)라고 부를 수도 없고 ,
유(類)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뜻이요,“앙산이 절을 하고[仰山禮拜]”라 한 것은 다만 절을 하는 것만이 합당하기 때문이다.파초(芭蕉)의 송에서 “밭이나 가는 [耕田]......”이라고 한 데까지는 공력을
들여 닦아 증득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운거(雲居)가 대신 말한 것은 검은 암소[水牯牛]도 아니요 위산의 스님[潙山僧]도 아니라는 뜻이다.
남탑(南塔)이 대신 말한 것도 이와 같다.
길주(吉州)가 법어한 대의(大義)는 범부와 성인이 같은 근원이요,묘한 본체는 물건이 없다는 뜻이니,이 일원상(一圓相)은 산 밑에 가서 소가 되어도 이것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옛사람이 이르기를 “성불하여 조사가 되어도 이것을 벗어날 수 없고 ,6도에 윤회하더라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신라(新羅)의 법어는 소가 되건 말이 되건 이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뜻이요 ,“도가 같은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느니라[同道自方知]”함은 이에 즉(卽)하여도 같은 도가 아니요,이를 여의어도 같은 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파초(芭蕉)의 법어에서 “물(物)”은 한 물건이나 분명하게 어떤 물건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불(拂)”은 털어 버린다는 뜻이니,금시(今時)의 범성(凡聖).인과(因果).공행(空行) 등을 다 없애 버리고 위산의 스님 아무개라고 하는 자리에 자리잡고 앉았다는 뜻이다.“의(衣)”는 옷의 변화이니 ,체용(體用)을 나누어야 하나니,날마다 만기(萬機)에 응하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산 밑의 소가 되는 것이다.
......대꾸하기 어렵다[難酬]“라고 한 것은 한 물건도 없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양쪽을 떠나서 일러야 하나니[亂劫兩頭應須道]......“라고 하였다.
“초(初)”는 최초의 한 물건이니 뜻은 “물(物)”과 같고 ,불(弗)“은 불(不)이니 ”불(拂)과 같은 뜻이며,“의(衣)”도 위의 뜻과 같다.
설봉(雪峰)의 염은 ,만일 위산과 앙산 부자(父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들여우 정령의 견해를 면치 못한다는 뜻이다.
보녕(保寧)의 상당에서 ,“피차가 모두 건방집니다[彼此老大]......분명하도다(酌然)”라고 한 것은 점잖치 못한 위산이 이렇게 해서 무엇하리요 함이요,“그러나[雖然如是]......보았는가?[也無]”는 다시 위산의 행리처(行李處)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며 ,“겉모양은 차이가 있다[形容雖有異]”라고 함은 왼쪽 겨드랑이에 겹겹이 쓰여있기 때문이요 ,“머리의 뿔은 [頭角].......“이라 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