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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란 주제는
매우 난해한 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쉬운 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1+1=2라는 사실은
유치원생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과 "이"라는 수학이 아닌 철학적 개념을 묻는다면
유치원생들은 물론 대학생들도 답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신약의 예배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전혀 다른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
아주 혼동스러울 것입니다.
가끔 "모세의 번제"가 먼저인가 "아브라함의 번제"가 먼저인가를 생각하면......
우주의 블렉홀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모세의 번제가 먼저라고 말하면 정말 아브라함의 번제는 허상이 되고
아브라함의 번제가 먼저라고 말하면 성경 기록의 계시적 영감설이 부정됩니다.
생각없는 사람들도 여기까지 읽으면......
조금은 긴장하게 될 것입니다.
몸에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일어나는 사람은
"성경적인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서 진실과 허상의 갈등을 느끼는 양심적인 신앙의 사람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번제도 실재이며, 성경의 영감설도 진실이라는 사실을
믿음이 아닌 신념으로 확신할려고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오래 전에 대구 시내에 있는 국채보상공원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두어 사람이 접근해서 말을 걸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 증인라는 사실을 밝힌 그 사람들은
목사인 나에게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 때 맞은 탄환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주일 예배"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주일 예배"가
신약 성경에서 한 번도 드려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소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저였는데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성경을 읽으며 ....
주일학교 시절부터 한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혁주의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아무리 연구해도......
초대 교회 주일 예배가 드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 이 천여년 동안 드려졌던 "주일 예배" ........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와 신약의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하며 흥분할찌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그것을 이제야 알았느냐"고
비아냥할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들......
예배와 소그룹의 두 날개로 하늘을 날아 오르는 비전의 날개짓을 하는 교회들.......
성경적인 믿음의 근거가 아닌 신념의 허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쯤해서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를 다시 생각하면.......
기독교 신앙의 난제 중의 난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의 제사를 인정하면서
신약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는 지 조금은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일검....간단한 무적지검의 일초식으로도
신본주의 옷을 입은 인본주의 신앙으로 이데올로기화된 주일 성수와 주일 예배의 철옹성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주일"이라는 개념은 물론
주일 성수라는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을 동일시 하는 것은
성경 이해의 초보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주일 성수를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일에 믿음의 열정을 쏟았습니다.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배라는 것은
예배의 형태나 형식, 그리고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본질로 하나님께 나아가 영광 돌리는 것, 그 자체를 예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을
예배로 가르쳤습니다.
구원의 본질로서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은
메시야를 만난 수가성 여인이 들은 최고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었습니다.
예배는 의식화된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원의 본질이요,
하나님과 소통하여 그 은혜와 영광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전하여진 예수님의 예배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에 관한 구원의 본질을 복음 메세지로 선포한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본질은
구약의 모든 제사의 원리를 성취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는 완전한 구원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개역 성경에 의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무속적 개념으로 인해서
이데올로기로 형식화된 예배를 거룩하게 드리는 말씀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예수님의 완전한 구원 메세지를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한국 교회에 있습니다.
오늘날 주일 예배는
구약의 제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하신 것을 기뻐하며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의식화되었습니다.
의식화된 예배를 위한 주일 성수는
구약의 안식일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시스템화된 인본주의 복음의 핵심 동력으로서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공과 번영을 위한 종교적 자아실현의 방편이요, 수단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소원성취를 위한 발원이나 기원을 드리는 예배란
복음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원과 기원을 드리는 의식화된 예배는
기독교 유사 종교의 산물입니다.
각종 예배와 기도회는
역동적인 예배의 영광을 인본주의 신앙의 기복과 무속으로 수단화되었습니다.
입시철마다 느끼는 갓바위 기독교 신앙은
예배와 기도의 세속화된 현주소를 말해 줍니다.
감성적 열린 예배와 예배 의식의 다양화는
종교 다원주의를 열어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바알로 섬겼던 구약의 제사는
성공과 번영의 금장색을 인본주의 시스템화된 복음의 이데올로기로 의식화된 예배를
타락의 늪으로 가졌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구약의 레위기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던 제사가
사사기 시대를 거치면서 남북 이스라엘 왕조 시대를 지나는 동안 바알을 여호와로 섬기는 극심한 타락으로
이스라엘은 언약의 저주를 받아 멸망을 당하고 열 두 지파는 해체되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구약의 제사는 솔로몬의 성전이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스룹바벨 성전이 헬라에게 짓밟히고, 해롯 성전이 로마에게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레위기법에 근거한 구약의 제사는 지구상에서 더 이상 드려지지 않았고 .....
레위기법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어 새로운 메시야 시대를 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의 교회 시대가 구원의 문으로 열렸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초대 교회 공동체는 유무상통하며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상으로 누렸습니다.
교회 공동체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상으로 누렸던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는
성전 중심의 유대교와 첨예한 갈등구조를 갖게 되었고 극심한 핍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졌습니다.
그 후 로마의 십대 황제들의 박해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상으로 누렸던 교회는 카타콤의 지하 묘지로 은신하여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세상의 나라로 상징되는 로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열어가는 교회를
잔혹한 박해로 순교자의 피를 뿌렸습니다.
지하로 숨어들었던 교회는 복음의 생명력으로 인하여
마침내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로마 공인이라는 희망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천여년의 로만 카톨릭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열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로마 십대 황제들의 박해보다 중세 천 년의 로만 카톨릭은
더욱 순례하는 교회를 핍받하고 박해하며 종교적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성자와 성물을 숭배하는 의식화된 로만 카톨릭의 미사는
참된 하나님의 영광을 예배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예배 형태는
칼뱅과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정체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세 천 년이라는 어둠의 터널은
종교개혁의 생명 운동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로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기초가 된 칼뱅의 사상은
자본주의 형태로 교회를 운영하는 기틀이 되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유무상통하였던 초대 교회 이상은
자본주의로는 이룰 수 없는 요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주일 예배와 주일 성수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교회 발전과 성장 동력의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수단화 되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로 역동적인 복음의 전파는
중세 천 년을 지나는 동안 교회는 자본주의 틀이라는 인본주의 이상의 시스템으로 더욱 굳어졌습니다.
교회 성장을 통한 복음 전파는
모던과 포스트 모던의 상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를 맞아 실용주의 옷으로 갈어입었습니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교회 안으로 들어 온 실용주의는
프렌차이즈식의 성장 프로그램으로 시스템화된 복음을 인본주의 이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각종 열린 예배와 집회는 인본주의 신앙의 이상을 실현하는 목적이 이끄는 수단이 되었고.......
대중적인 리더쉽을 가진 종교 지도자는 초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신본주의 예배의 생명력을 잃어 버린 교회들은
신본주의 옷을 입은 감성적 열린 예배를 인본주의 신앙으로 채색하였습니다.
목적인 예배는 감성적 열린 예배로 교회 성장의 수단이 되었고......
성공과 번영을 위한 기원 예배는 기독교 인본주의 신앙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또한 목적인 예배는 땅밟기 기도와 같은 샤마니즘 무속 신앙의 도구가 되어
예배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을 가장한 기원 예배를 무속 신앙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레위기법의 구약 시대 제사는 그 중심이 되었던 솔로몬과 스룹바벨과 해롯 성전이 하나같이 무너졌고......
박해 시대에도 초대 교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상으로 누렸던 참된 기독 신앙은 중세 천년 동안 타락하였으며
종교 개혁으로 신본주의 산앙의 생명을 가진 새로운 퓨리탄 시대를 열었지만
이데올로기화 된 인본주의 복음으로 기독교 유사 종교가 창궐하는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목적인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믿음과 사랑으로 유무상통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상을 누리지 못하고.....
이데올로기로 의식화된 예배의 노예가 되어 성공과 번영의 세속을 추구하는
기복과 무속 신앙의 기독교 유사 종교의 늪에 빠졌습니다..
예배를 푸닷거리로 만들어 놓고도
거룩을 찾아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를 다하였다고 바리새인들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갓바위 기독교 신앙으로 통하는 기독교 유사 종교는
울트라 모던 시대의 종교 다원주를 인본주의 신앙으로 열어가는 바알 종교입니다.
얼마전 "여제"라는 케이블 방송의 드라마에서
진실은 존재하지 않은 허상이며 진실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대사를 충격적으로 들었습니다.
진실한 삶은 아름다운 향기로 흔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창조되고 만들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하나님을 향한 열린 예배는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진실한 신앙의 흔적이 아니라
종교적 열정으로 은혜로운 문화를 인본주의 이상으로 만들어 가는 종교 작품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존재하는 것을 감사하는 신앙은 믿음이지만
실재하지 않는 것을 비전으로 열망하는 것은 신념입니다.
믿음의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원의 탄성이지만
감성적 열린 예배로 성공과 번영을 비전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무속 신앙의 신념입니다.
진실과 허싱의 예배는
믿음과 신념의 차이로 결정됩니다.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신념의 주체는 자아입니다.
진실은 존재하는 것이지만
허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실은 믿음을 낳지만
허상은 신념의 비전을 가집니다.
구원의 본질인 믿음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감사로 찬양드리지만
신념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공과 번영을 신념의 비전으로 사모합니다.
목적인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지만
수단의 예배는 신념으로 감성적 열린 예배를 종교적 걸작으로 만들어 갑니다.
결국 하나님이 목적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수단인 사람은 신념의 사람입니다.
신념은 불신의 사람이 갖는
생존의 몸부림입니다,
참으로 엘리야와 엘리사는 솔로몬의 성전인 여호와의 전에서
레위기법에 근거한 제사를 한번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였고
이사야 선지자는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 66:3-4 절 말씀에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사야서의 말씀이 고민되지 않는다면
오늘날 주일예배에 대해서도 아무런 고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전파되지 않는 주일 예배는
샤마니즘의 푸닷거리에 불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