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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芳秀(양방수)8.15특집
'聖母(성모)님 발현 장소를 가다'-
메주고리예에서 發現(발현)하신 聖母(성모)님!
人類(인류)의 어머니!
성모님께서 發現(발현)하시는 奇蹟(기적)의 현장을 찾아가서 보았다. 20세기중에 성모님의 발현과 성모님의 긴급한 중요한 “메시지( Message) ”을 알아 본다. 人類(인류)는 지금 自滅(자멸)의 의기에 처해 있는 것일까?
戰爭(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공포! 또한, 현대 과학이 해결 할수 없는, 크고 작은 災難(재난: Disaster)으로 인한 공포속에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우리는 무엇으로 대처 해 나갈 것인가?
우리는 과연 미래에 대한 希望(희망)을 가질수 있는 것인가?
지난 2000년간의 그리스도교의 歷史(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님 동정 성모 마리아님께서는 人類(인류)의 悔改(회개)와 平和(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確約(확약: definite promise)을 해 오고 계십니다.
특히 人類(인류)가 위기에 처해 있을때 누차 자비로우신 聖母(성모)님께서 介入(개입)하시어 歷史(역사)의 進路(진로)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금세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미 전 세계에 걸쳐 300군데 이상의 장소에서 발현 하셨습니다.
20세기의 첫 發現(발현:Revelation) 장소로 포르투갈(Portugal)의 파티마(Fatima)를 선택하셔서 전 世界(세계)를 위한 平和(평화)의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母性愛(모성애)를 들어내 보이시며,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
20세기 말기에 와서 성모님께서 계속 발현 하시며, 우리 모두가 당신의 “메시지”에 심각하게 귀를 귀울리라고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은 교회의 생명과 생활안에 성모님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고, 현존해 계신다는 것을 뜻한다고 믿지 않을수 없습니다.
전 유고 슬라비아에의 山岳(산악)지대로 부터 아프리카 대륙 정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님을 보내시어 인류를 위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지금 세계는 아주 좋지않은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들은 세계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충고를 하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의 메시지가 그러하고, 다른 많은 곳에서의 “메시지”가 그러합니다. 사태가 심각 합니다. 매우 심각 합니다.
제 1편. 성모님께서 인류(人類)를 위해 발현(發現)하시는곳 ~
메주고리예(Medugorje Yugoslavia)를 가다.
http://blog.daum.net/bangyang/57
제 2편. 그 날은 세례자 성 요한 대축일이였다.
http://blog.daum.net/bangyang/56
제 3편. 1981년 6월 24일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현재까지 왜? 이토록 발현 횟수가 증가 했을까? 자문해 보지 않을수 없다.
http://blog.daum.net/bangyang/58
제 4편. 첫번째 발현. 포르투갈(Portugal)의 “파티마 (Fatima)”
http://blog.daum.net/bangyang/59
제 5편. 두번째 발현. 벨기에(Belgie)의 보렝(Beauraing)
http://blog.daum.net/bangyang/61
제 6편. 세번째 발현. "벨기에(Belgie)“에의 "바뇌 (Banneux).
http://blog.daum.net/bangyang/62
제 7편. 네번째 발현. 스페인(Spain)의 가라반달 (Garabandal)
http://blog.daum.net/bangyang/63
제 8편. 다섯번째 발현. 에집트 (Egypt) 짜이툰 (Zeitun)
http://blog.daum.net/bangyang/64
제 9편. 여섯번째 발현. 일본(Japan)의 아끼다(Akita)
http://blog.daum.net/bangyang/65
제10편. 일곱번째 발현. 베네주엘라 (Venezuela) 베타니아(Betania)
http://blog.daum.net/bangyang/66
제11편 여덟번째 발현. 르완다의 키백(Kibeho Rwanda)
http://blog.daum.net/bangyang/67
제12편 아홉번째 발현. 소비에트 (Soviet) 우크라이나 (Ukraine)와 끝으로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르의 동굴 위에서 14세 된 시골소녀 베르나데타(Bernadette Soubirous)[1933년 12월 8일 성녀 베르나데타로 시성]에게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지를 차례로 연재 한다.
http://blog.daum.net/bangyang/68
제13편 루르드 성모님 발현 이야기 1편
http://blog.daum.net/bangyang/86
제14편 루르드 성모님 발현 이야기 2편
http://blog.daum.net/bangyang/89
제15편 프랑스 기적의 성당을 가다.
http://blog.daum.net/bangyang/119
제16편 Holy Love Korea
http://blog.daum.net/bangyang/1393
제 17편 나주 성모님의 진실
http://blog.daum.net/bangyang/2018
제18편 루르드의 성녀 마리아 베르나테드
http://blog.daum.net/bangyang/2206
제 1편 성모님께서 인류(人類)를 위해 발현(發現)하시는곳 ~ 메주고리예(Medugorje Yugoslavia)를 가다.
인구 450만 “보스니아 헬제고비나 (Bosnia-Hercegovina)” 라는 나라의 남부에 위치한 포도 재배와 담배 농사를 짓는 작은 마을로 현재는 이 지구상에서 순례자가 가장 많이 방문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이 나라는 共産國家(공산국가)인 舊(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속한 나라였었다. “유고슬라비아”의 뜻은 南部(남부)의 ”스라브인”이라는 뜻이다.
이곳 발칸 반도의 남부 “스라브”인들은 지난 500년 이상을 남쪽은 “오토만(Ottoman)” 제국(지금의 터어키Turkey)에 의하여 북쪽은 “오스트리아”와 “항가리”에 의하여 지배되어 오다가 세계 제 1차 대전(1914-1918) 이 끝나면서 1918년에 “썰비아인-크로에이시아인-스로바니아인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統一(통일)되어 獨立國家(독립국가)를 세웠으며 1929년에 “유고슬라 비아” 왕국(Kingdom of yugoslavia)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이 때의 면적은 26만m2 로 한국보다 조금 넓은 면적으로 영토를 확창 하였다.
세계 2차 대전(1939-1945)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고쳤다.
연방체제내에는 1. 스로바니아(Slovenia) 2. 크로메이시아(Croutia) 3. 보스니아-헤제고비나(Bosnia-Hercegovina) 4. 썰비아 (Serbia) 5. 몬테네그로(Monenegro) 6. 마케도니아(Makedonia) 라는 6개 공화국이였다 .
1918년 통합 연방국가로 건국한지 80년만에 1999년 공산체제가 와해되어 8개국이 모두 독립국가로 분리되었는데 “씰비아
CROATIA 의 여객기를 타고 날아가다~ CROA CROATCROATIA IA 의 여객기를 타고 날아가다~ TIA 의 CROATIA 의 여객기를 타고 날아가다~
ny 카메라 Lens f=7.9-23m/m 1.2.8-52(5.0 MERA PIXELS Cyberot)카메라로 촬영
Sony 카메라 Lens f=7.9-23m/m 1.2.8-52(5.0 MERA PIXELS Cyber-shot)
카메라로 촬영
유고가 위치한 발칸반도는 동서양을 연결하는 길목으로 강대국들의 표적이되어 일찍이 로마제국이 점유하였으나, 330년에 東(동).西(서)로 분리되면서 北部(북부)는 서(西) 로마가 南部(남부)는 東(동) 로마제국(후에 비잔 틴제국으로 개칭) 지배하게 되었다.
서(西) 로마제국은 476년에 멸망했지만, 가톨릭 교회가 뿌 리를 내렸고, “비잔틴”국은 8세기에서 11세기에 가톨릭과 동방전교로 분리됨에 따라 그 치하의 많은 주민이 “동방전교”로 개종 하였다.
“비잔틴”제국은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풀”의 함락과 함께 “오만” 제국에 의해 亡(망)하게 되었고, 1463년에 “오토만” 제국(지금의 Turkey)에서 王國(왕국)을 세운 오스만(Osman)이라는 王(왕1326-1359)의 이름에서 "오토만" 제국이라 불렀다. 터어키 사람들은 자신들을 오스만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오스만리(Osmanli)라고 부르게 되었고, 영어권에서는 오토만(Ottoman)이라고 한다.
“오토만” 제국은 東(동) 구라파, 희랍, 이란등 서(西) 아시아와 아라비아, 에집트, 북아프리카까지를 지배하던 전성기를 맞아 강대한 “오스람” 제국으로 “이스람교”를 전파했다.
1875년에 보스니아-헬제고비나에서 반제국주의 반란이 일어 나고 지배국인 ‘오토만 제국(터이키)이 탄압을 시작하자 1877년 ’러시아‘가 기독교인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1년간 전쟁으로 (로토전쟁) ’터어키(Turkey)‘는 패하고, "콘스탄티노풀"의 서쪽 교외에서 소위 San Stefano 조약을 맺어 “씰비아 ”와 “몬테네그로”의 독립이 승인 되었다.
1878년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하여 독일(獨逸)의 “미스마르크” 首相(수상)이 주관하여 “베르린” 조약이 이루어져 “보스니아 헬제고비나”의 행정권이 “오스트리아”로 넘겨져 1908년에 “오스트리아”의 屬國(속국)으로 倂合(병합)되고, 스로바니아, 크로에이시아, 보스니아-헬제고비나등, 3개 발칸 국가(國家)가 그 지배하에 들어 갔었다.
1912년 제 1차 전쟁이후 제 2차 발칸전쟁은 “불가리아”의 참패로 끝나고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Francis Ferdinand) 內外(내외)를 民族主義者(민족주의 자)인 "Black Hand“ 라는 비밀 결사대에 속한 Gavrilo Princip라는 청년이 암살 하자 ”오스트리아“는 ”씰비아“에 대해 宣戰布告(선전포고)를 하였고, 同盟國( 동맹국)인 獨逸(독일)이 참전하면서 제 1차 世界大戰(세계대전)은 시작 되었다.
“보스니아”는 10세기 초에는 “실비아”의 일부로 편입 되였다가 10세기 중엽에는 “크로에이시아”가 침입하여 그들의 영토로 만들었고, 11세기에는 “비잔틴제국”이 지배하였으며 1463년에는 “오토만” 제국이 지배 하였다. 11세기 초반에는 항가리의 침입을 받기도 했던 나라다 .
“헬제코비나”는 1284년 까지는 독립국가였으며 15세기말 엽에 “보스니아”의 일부가 되었는데 그 중간에 잠시 “썰비아”의 治下(치하)에 있을때가 있었고, 독립국으로 있을때도 있었다.
15세기 말 “보스니아“의 치하에 들어간 이래 두 나라는 내내 ”보스니아-헬제고비나“라는 국명으로 하나의 나라로 유지되어 왔다 .
“메주고리예”는 “모스타”의 남부에 위치하며 옛 “헬제 고비나” 땅에 위치하는 셈이다. ”의부에 위치하며 옛 “헬제 고비나” 땅에 위치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나라의 원주민은 모두 “씰비아인”이 아니면 “크로에이시아”인이다. 이 중에 후에 “모스람”족이 분리되어 결국 3대 민족이 혼재하는 나라가 된것이다.
“보스니아” 지방인 이라던가 “헬제고비나” 지방인은 있어도 “보스니아인”이라던가 “헬레고비나인”은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민족으로는 “크로에이시아인”이나 “씰 비아인” 또는 “모스렘”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은 그 잔악성과 규모가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등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마침내 UN의 중재와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UN의 개입으로 1992년 2월 부터 정전협정으로 난민의 보호등, 인도적인 원조로 유지되어 오다가 1995년 6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구주연 합)는 “구라파”의 한 모퉁이에서 그러한 참혹한 내전이 있음을 묵과 할수없는 결론을 내리고 무력 개입을 감행하였다.
Rapid Reaction Force(긴급대응부대)라는 이름으로 처음에는 9,000명 정도의 병력이 군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씰비아군”을 전투폭기로 폭격을 하는등 적극적인 개입을 하게 되었다.
1999년에는 유엔이 철수하고 NATO가 평화유지군( Stabilization Force)이 주둔했었다. 당시 NATO 가맹국 20개국 가운데 미국이 2만, 영국이 1만 4천, 불란서 1만, 독일이, 4천, 로서아군이 2천이 주둔했었다. NATO군에 의해 현지 “썰비아”나 “모스램”이나 “크로에 이시아”군은 더 이상 무력 충돌이 있을수 없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것은 1995년 11월 데이튼 조약이 현실을 만들었다 .
이 조약후 “쎌비아”지역과 “모슬렘” “크로에이시아” 지역은 다시 “사라예보” 중앙정부의 관장하에 들어왔다. 이 두 자치령의 연방국으로 개편하면서 평화를 얻은 것이다 .
“메주고리예”는 “일리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던, 이곳은 紀元(기원) 1세기때 로마 퇴역병들을 위한 도시로 건설 되었다.
640년-642년에 敎皇(교황) 요한 6세때 “크로아티아”인들이 점령하여, 이 지역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일리리아”인들과 “로 마”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자, 이 때 이들과 순교한 屍身(시신)을 “로마”로 移送(이송)하기 위해 “마르티노” 수도원장을 시켜 엄청난 金貨(금화)를 주고 해방 시켰다.
그 뒤 교황은 이곳에 司祭(사제)들을 보내어 “크로아티아 ”인들에게 洗禮(세례)를 주게 되었다.
그 후 “크로아티아” 人(인)과 “일리리아” 人(인)과 “로마” 사람들이 서로 婚姻(혼인)하여 살아 현재의 “메주고리예” 사람들은 약간의 피가 서로 섞여 흐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된 “크로아티아” 인들은 즉시 성 “베드로”좌에 순명 서원을 하고 절대로 이 민족들을 침입하지 않는 대신에 이웃 民族( 민족)과 평화를 이루며, 그리스도인 민족을 지키는 守護者(수호자)가 되겠다고 誓願(서원)하였다.
카톨릭 교회와 교황을 향한 충성심은 “메주고리예” 주민들의 특색중 가장 큰 특색으로 이미 13세기 전 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1054년 발칸 반도에 “그리스도”가 전파 되고, 있을 당시 敎會(교회) 분열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그리스도교는 “로마 카톨릭교”와 “동방 정교회”가 갈라지게 되었다. 宗敎(종교)는 王國(왕국)에 속하여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세르비아”인들은 “카톨릭 司祭(사제)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아 버리거나 聖堂(성당)을 불태우곤 하였다.
십자군 전쟁
몬테네로그 ”는 “신유고국” 이라는 호칭으로 존재하고 있다. “사라센” “이스람교도”와 1096년 부터 1099년에 제1차 十字軍(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제 2차(1147-1149), 3차(1184-1892), 4차 (1202-1204), 5차(1217-1221), 6차(1228-1229),7차(1248-1254), 8차 전쟁이 1270년 원정이 실패함으로 실제적 원정은 끝났으나 역사적으로 비오(Pius) 2세가 서거한 1464년을 원정이 완전히 끝난해로 본다.
그러나 이 지역을 순례할수 있는 것은 “사라센” 이스람교 도들이 “스페인”을 쳐들어 왔을때 있는 힘을 다해 이곳을 지켜냈기 때문에 유럽의 “그리스도교”의 일부가 남아 있다. 1463년 “보스니아”는 “터어키” “오스만” 제국 아래 무릎을 꿇고 1482년 “헤르체고비나”까지 그 손아귀에 들어 갈때에 “프란치스꼬 ”會(회) 會員(회원)들과 信者(신자) 家庭(가정)이 산속에 숨어 살면서 함께 同苦同樂(동고동락)하며, 그 어려운 迫害(박해) 시절을 꿋꿋하게 이겨 내고 카톨릭 信仰(신앙)을 지켜 나갔다.
십자군 배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때 “프란치스꼬” 회원들은 信者(신자)들에게 있어서 司祭(사제)로 스승과 의사로 그 역활을 톡톡히 해 내었다. 이 지역 모든 “크로티아”인 들이 “터어키” “오스만” 제국의 강대한 권력 앞에 강행되던 강제 回敎(회교) 개종자 만들기에 모두 견디어 낸 것은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은 재산을 잃지 않기 위해 “이스람”교로 개종 하였다.
막강한 “터어키” “오스만” 제국은 1878년에 막을 내리 고 “오스트리아-항가리” 帝國(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형식적인 王國(왕국) 을 세웠고,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밑에서 어느 정도 윤리적인 해방을 맞아 새 로운 敎會(교회) 건설이 시작되어 많은 司祭(사제) 修道會(수도회) 修女會(수녀회)가 창설되었고, “카톨릭” 학교와 신학교와 대학등이 건설 되었다.
1892년에 “모스타르”에 성모승천 “프란치스꼬회” 관구가 설정되었고 ‘메주고리예“ 본당은 이에 소속되어 그해 즉시 본당으로 승격 되었다. 그해 즉시 “프란치스고” 회원들은 성당을 건립하였으나 3년이 되지 않아 지반이 약해 성당벽에 금이가기 시작하여, 더 이상 미사 봉헌을 할수가 없어 여름에는 마당에서 겨울에는 사제관 지하실에서 미사 봉헌을 하였다고 전한다 .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식민지를 떠나 英國(영국)의 인도하에 “세르비아”인 들이 주축이 되어 “세르비 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연합 왕국이 誕生(탄생) 되었다. 이 때 “알렉산드로”라는 東方正敎(동방정교)를 믿는 “세 르비아”인이 王(왕)으로 등극하여, 英國皇室(영국황실)과 정략 結婚(결혼)을 하게 된다.
첫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유지되는 동안 東方正敎會(동방정교회)는 가톨릭의 司祭(사제) 독신 제도를 방해하고, “치칠로”문자를 사용 하
며 司祭(사제)들이 수염을 기르도록 종용하여 東方正敎會(동방정교회) 司祭(사제)들과 유사하게 만들려고 온갖 압력을 가하며 박해 했다.
((십자가산에 세계(십자가산에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수 많은 순례자들)
당시 "메주고리예“의 주요 산물은 담배로 정부에서 아주 싼 가격으로 전매했기 때문에 농부들은 세금을 낼 돈 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빈 곤에 허덕이였다.각국에서
십자가를 세운 “쉬뽀밧츠‘ 山(산) 頂上(정상)에
筆者(필자)가 촬영할 이순간은 구름이 약간 끼었다.
Sony 카메라 Lens f=7.9-23m/m 1.2.8-52(5.0 MERA PIXELS Cyber-shot)카메라로 촬영
1900년에 주님께서 직접 확인하시는, 영원한 수난의 상징인 十字架(십자가)를, “메주고 리예” 포도밭 근처에서 미사를 마친 住民(주민)들이 모여 그 뜻을 세웠으며, 그 꿈은 1933년에야 이루진 그 정상(頂上)을 필자(筆者)가 올라가 보았다.위 사진참조
1900년 본당 “베르나르딘 스몰얀” 신부님은 기아에 허덕이는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해발 537m 의 “쉬뽀밧츠‘ 山(산) 頂上(정상) 에 예수님 善終(선종) 1900년을 기념하는 십자가를 세우기로 하느님께 약속하고, 주민들의 생활인 담배밭과 포도밭이 우박으로 인하여 해마다 廢農(폐농)이 되자 이를 지켜 주시고, 모든 악으로 부터 마을 주민들을 지켜 달라는 뜻으로 세운 십 자가 공사가 세위지기는 1933년에 10미터의 높이로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이 만나 는 지점에 그리스도께서 ”골고타“ 언덕에서 달리셨던 십자가 나무에서 채취한 한 조각 나무를 ”로마“에서 옮겨 모신후로 이 山(산)은 十字架山(십자가산)이라 고 한다.
본당 신부가 十字架(십자가)를 祝聖(축성)하고 이 十字架( 십자가) 밑에서 사상 처음으로 “메주고리예‘ 출신 ”고르고 바실리“ 신부가 미 사를 봉헌한 후로는 우박으로 농사를 망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마을 어른들께서 증언하고 있다.
제 2차 世界大戰(세계대전) 당시 “스몰리얀” 신부는 지금 의 대 성당을 건축하고자 했으나, 자재 부족으로 기초 공사 조차도 힘들었다고 한다. 제 2차 전쟁이 시작 되었을때 “유고슬라비아”왕국은 그 전 보다 훨씬 더 잔인해졌으며, 급기야 내전이 일어 났다.
세계대전후 많은 카톨릭 “크로아티아”인들과 다른 여러 소수민족들은 공산주의의 그늘에서 벗어 날려고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떠나야 만 했다.전쟁이 끝난 직후 수백명의 司祭(사제)들이 학살당했다.
“메주고리예” 십자가산에 十字架(십자가)를 세웠던 :스몰 리얀“신부님과 ”고르고 바실리“ 신부님이 ”모스타르“에서 함께 학살 당하고 그 두 屍身(시신)은 ”네레트봐“강에 던져지고 말았다.
敎會(교회)의 모든 재산은 압수 당하고 司祭(사제)들은 절대 빈곤에 시달렸다.
종교를 초월하고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순례객들이 메주고리예 성당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있다.
전쟁 중에 368명의 “메주고리예‘ 주민들이 학살 당했고, 이 때 “메주고리예” 본당이 소속해 있는 “모스타르-두브노”교구에서 약 18,000명이나 되는 信者(신자)들이 학살 당했다. 1970년대는 “크로티아”인들이 어쩔수 없이 독일, 오스트 리아, 스위스, 미국,등지로 일을 찿아 떠나야만 했다.
1966년 까지는 공산 政府(정부)에서 建築(건축) 許可(허가) 를 내어 주지 않아 잡초가 우거진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건축허가가 나오자, 본당 信者(신자)들이 너도 나도 자원 봉사하여 그리스도 역사 2,000년을 뜻하는 각각 12개의 유리창이 달린 두 종탑을 정면에 세운 커다란 聖堂(성당)을 완공시켰지만 , 그 때 당시 주민 400여명에 불과한 시골 본당의 교우들에게는 財政(재정)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주었지만, 이 모든것은 信仰(신앙)의 힘으로 잘 견디었다.
새로 봉헌된 성전은 옛 성당의 주보이었던 순례자의 주보 성인이시며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이신 대 야고보를 그대로 주보로 모셨는데, 오 늘날의 “메주고리예”의 성당의 그 의미를 더 많이 부여하고 있는 이곳은 현재는 세계에서 巡禮者(순례자)가 가장 많이 訪問(방문)하는 巡禮地(순례지)가 되었다.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이 本堂(본당)을 특별히 선택했다!“라고 말씀 하시는 성모님 發現(발현)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필자(筆者)는 생각한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다는 “메주고리예‘를 필자(筆者)가 찿아간 곳은 오늘날의 ”보스 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가의 남부에 위치한 작은 산골 마을이다.
북쪽에는 산악지역이 발달해 있고, 남쪽에는 해안지역이 발달해 있는 “헤르체고비나” 는 북부의 산악지역이 지중해로 부터의 공기의 흐름을 타고, “헤르체고비나”지 역 농사에 좋은 기후 조건을 만들어 주는 이 곳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남부 크로티아 그리고, 아드리해에 접해 있는 곳이다.
이 지역 의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오고 따뜻하며, 여름에는 온화한 곳으로 비는 봄에도 오지만 가을에 많은 비가 내린다. 11월 12월 두달에 가장 많은 비가 온다고 한다. “아드리아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습도를 높여주고, 특히 가을에 많은 양의 비를 몰고 온다고 한다.
비가 온 후에 며칠 동안 강한 바람이 불어 오는데, 筆者(필자)가 갔을때도 “아드리아해”의 해안가는 강한 바람이 불었다. 특히 이 곳은 無神論(무신론) 主義的(주의적)인 共産主義(공산주의) 정권하에서도 正統(정통) 信仰(신앙)이 살아 있는 곳이 “메주고리예”라고 생각 할수 있다.
종교를 초월하고 세계 각국에서 몰려오는 순례객들이 메주고리예 성당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있다.
전쟁 중에 368명의 “메주고리예‘ 주민들이 학살 당했고, 이 때 “메주고리예” 본당이 소속해 있는 “모스타르-두브노”교구에서 약 18,000명이나 되는 信者(신자)들이 학살 당했다. 1970년대는 “크로티아”인들이 어쩔수 없이 독일, 오스트 리아, 스위스, 미국,등지로 일을 찿아 떠나야만 했다.
1966년 까지는 공산 政府(정부)에서 建築(건축) 許可(허가) 를 내어 주지 않아 잡초가 우거진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건축허가가 나오자, 본당 信者(신자)들이 너도 나도 자원 봉사하여 그리스도 역사 2,000년을 뜻하는 각각 12개의 유리창이 달린 두 종탑을 정면에 세운 커다란 聖堂(성당)을 완공시켰지만 , 그 때 당시 주민 400여명에 불과한 시골 본당의 교우들에게는 財政(재정)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주었지만, 이 모든것은 信仰(신앙)의 힘으로 잘 견디었다.
새로 봉헌된 성전은 옛 성당의 주보이었던 순례자의 주보 성인이시며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이신 대 야고보를 그대로 주보로 모셨는데, 오 늘날의 “메주고리예”의 성당의 그 의미를 더 많이 부여하고 있는 이곳은 현재는 세계에서 巡禮者(순례자)가 가장 많이 訪問(방문)하는 巡禮地(순례지)가 되었다.
성모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이 本堂(본당)을 특별히 선택했다!“라고 말씀 하시는 성모님 發現(발현)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필자(筆者)는 생각한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다는 “메주고리예‘를 필자(筆者)가 찿아간 곳은 오늘날의 ”보스 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가의 남부에 위치한 작은 산골 마을이다.
북쪽에는 산악지역이 발달해 있고, 남쪽에는 해안지역이 발달해 있는 “헤르체고비나” 는 북부의 산악지역이 지중해로 부터의 공기의 흐름을 타고, “헤르체고비나”지 역 농사에 좋은 기후 조건을 만들어 주는 이 곳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남부 크로티아 그리고, 아드리해에 접해 있는 곳이다.
이 지역 의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오고 따뜻하며, 여름에는 온화한 곳으로 비는 봄에도 오지만 가을에 많은 비가 내린다. 11월 12월 두달에 가장 많은 비가 온다고 한다. “아드리아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습도를 높여주고, 특히 가을에 많은 양의 비를 몰고 온다고 한다.
비가 온 후에 며칠 동안 강한 바람이 불어 오는데, 筆者(필자)가 갔을때도 “아드리아해”의 해안가는 강한 바람이 불었다. 특히 이 곳은 無神論(무신론) 主義的(주의적)인 共産主義(공산주의) 정권하에서도 正統(정통) 信仰(신앙)이 살아 있는 곳이 “메주고리예”라고 생각 할수 있다.
“아드리아해”의 해안가를 뻐스를 타고" 메주고리예"를 가다.
Sony 카메라 Lens f=7.9-23m/m 1.2.8-52(5.0 MERA PIXELS Cyber-shot)카메라로 촬영
오랬동안 이곳은 희망이 억압 당하고, 共産治下(공산치하)에서 수많은 苦痛(고통)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信仰(신앙)과 믿음만 이 이들을 인도하는 自由(자유)에 대한 希望(희망)의 힘이였고, 祈禱(기도)는 위안이자 희망이이였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1900년 에 주님께서 직접 확인하시는, 영원한 수난의 상징인 十字架(십자가)를, “메주고 리예” 포도밭 근처에서 미사를 마친 住民(주민)들이 모여 그 뜻을 세웠으며, 그 꿈은 1933년에야 이루진 그 정상(頂上)을 필자(筆者)가 올라가 보았다. 아래 사진참조
平和(평 화)를 갈구하는 마음의 空閒(공한: Vacancy)으로 가득찬 금세기에 특히 이곳 주민 들이 성모님께 절규(絶叫)했던 기도(祈禱)가 드디어 성모님께서 응답하셨다고 생 각되어진다.
그리하 여 東西(동서) 世界(세계) 모든 사람들을! “메주고리예‘는 招待(초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현장을 가 보면 누구든지 그 실체를 피부로 느끼지 않을수 없는 곳이 ”메주고리예’이다.
메주고리예의 十字架 山 頂上에 선 筆者와 家族(가족)
Sony 카메라 Lens f=7.9-23m/m 1.2.8-52(5.0 MERA PIXELS Cyber-shot)카메라로 촬영
세계 곳곳에서 발현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다르지만 이곳 성모님의 모습은 특이하였다.
성모님의 동상 발 아래 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사진설명: <<한반도 의 평화를 위하여>>For the Peace of the Korean Peninsula Aug, 15, 2001, Benedicto, Moo Kil An. Degu Korea. 대한민국 大邱人 (대구인) 안 무길(베네딕토)
혜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이 “메주고리예”의 성모님의 발현에 귀를 귀울리어, 靈肉(영육: Soul and body)간의 治癒(치유)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는, 그 현장을 밤 늦게 도착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 맨 먼저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발현 하셨다는 發現山(발현산)을 가 보았다.
그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거칠고 거치른 가시밭길과, 산비탈 바닥 돌들이 반들반들하게 달코, 달아 있었다.
현재는 발현하셨다는 곳에 아름다운 성모님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원주민인 Matllda Dragicevic(마텔다 드라기체비취) 女史(여사)는 이 발현산에 모신 성모님은 한국의 篤志家(독지가)가 세워 주었다고 설명 했다.
“마텔 다”의 말에 의하면 성모님의 은혜로 불치병을 앓고 있던 자녀가 치유를 받고 가정의 평화를 얻은 감격은 식지 않았고, 그 은혜를 보답키 위해 대한민국 大邱人(대구인) 안 무길(베네딕토)씨가 성모상을 세웠다는 성모님 동상 뒤편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글로 설명하고 있었다.
사진설명: <<한반도 의 평화를 위하여>>For the Peace of the Korean Peninsula Aug, 15, 2001, Benedicto, Moo Kil An. Degu Korea.
대한민국 大邱人 (대구인) 안 무길(베네딕토)
이 곳에서 태어나, 자란 “”미리아나 스타니슬라브 바실리- 쭈까리니“” 記者(기자)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이곳 주민 “비스카” “야곱“ ”이방카“ ”미리야나“ ”마리야“ ”이반“이라는 여섯명의 아이들이 성모님의 부름을 받은 傳令(전령 :An official message)들이다.
사랑하는 아내 요안나가 聖地에서 모셔온 메주고리예의 아름다운 聖母님 像本
사랑하는 아내 요안나가 聖地에서 가져온 메주고리예의 돌 앞뒤
필자가 旅程[여정]을 풀고 지낸 호텔에서 바라본 메주고리예 성당의 모습.
성당안에서는 몰려오는 순례객을 모두 수용할수가 없어 성당 뒤뜰을 확장하여 이곳에서 많은 행사가 이루어 진다. 메주고리예 성당의 후면 모습.
메주고리예 성당의 후면 모습.
곳곳에 세워논 메주고리예의 사진들
이곳 주민 “비스카” “야곱“ ”이방카“ ”미리야나“ ”마리야“ ”이반“이라는 여섯명의 아이들이 성모님의 부름을 받은 傳令(전령 :An official message)들이다.
수도원 입구에 세워진 예수님의 行跡(행적)
놀라운 성모님의 발현이 시작된 초기에는, 긴장감과 공포, 불신으로 뒤엉킨 事件(사건)들 이, 알려지지 않은 카톨릭 신자들의 또 다른 마을로, 번져갔다. 공산정부의 압박속에서 살아온 이 마을이 수백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역사(歷史)와 화해하고 ,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화해를, 또 더 나아가 그 이상 으로 근본적인 뿌리에서 부터 화해하라는 하늘의 초대를 받아 드리도록 선택 되어 졌다고 생각 되어진다.
“메주 고리예”는 이슬람교도, 동방정교도, 카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 고비나” 공화국에 속해 있던 시골 아주 작은 산촌(山村)이다. 舊(구) “유고스라비아”는 현재(現在)는 “이태리”의 접경에 위치한 “슬로베니아 공화 국” 그 아래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그 아래 “보스니아 헬제고비나 공화국 ” 그 인접한 “썰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 “마케도니아 공화국” 으로 각각 분리된 독립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
사라예보(Sarajevo, 세르비아어: Сарајево, 문화어: 싸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인구는 1991년의 조사에 따르면 429,672명이며 현재는 약 40만명으로 추산된다. 발칸 반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이래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이에리사(李에리사, 1954년 8월 15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 탁구 선수이다.
대한민국에는 1973년 이에리사가 주축이 된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의 단체전 우승으로 알려진 도시다. 1984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이며, 보스니아 전쟁 중에 포위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사라예보 국제 공항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1531년 대학교가 세워진 교육의 중심지이다. 보스니아 전쟁 종전 이후에 안정을 되찾으면서 관광지로도 다시 부상하고 있다.
사라예보(Sarajevo, 세르비아어: Сарајево,
문화어: 싸라예보) 모습.
1992년 5월, 사라예보의 보스니아 의회 빌딩이 화포에 맞아 불타고 있다. (사진 왼쪽)
스르프스카 공화국 육군 군인인 라트코 믈라디치. (사진 오른쪽 위)
사라예보의 노르웨이인 UN군. (사진 오른쪽 아래)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인구는 1991년의 조사에 따르면 429,672명이며, 현재는 약 40만명으로 추산된다. 발칸 반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이래로 긴 역사를 자랑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위키백과
보스니아 전쟁 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은 1992년 4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무력 충돌이다.
전쟁은 몇 가지 측면과 관련되었다. 주요 참전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과 자칭 보스니안 세르비아와 보스니안 크로아티아가 있었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의 스릅스카 공화국과 헤르체그보스니아가 있고, 외부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공화국, 크로아티아가 있었다.
전쟁의 결과로 유고슬라비아의 해체가 되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1991년, 다민족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던 민족은 주로 무슬림인 보스니아인 (44%), 세르비아 정교회 세르비아인 (31%), 천주교 크로아티아인 (17%)로 이루어진 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가 1992년 2월 29일에 통과되었다. 이 것은 국민 투표후 공화국 수립 후 자국 내 세르비아인들에게 반대를 얻었다.
크로아티아 독립 선언에 이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정부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공격하고, 세르비아인은 보복을 피하기 위해 보스니아 지역을 탈출하며 특히 동부 보스니아인은 인종청소를 당했다.
이것은 주로 영토 분쟁으로, 초기에는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군(VRS)가 한 편에,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이 대부분이며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은 크로아티아 국방 위원회(HVO)가 또 다른 편에 섰다. 크로아티아 또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일부분의 영토를 원하며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보통 쓰라린 전투,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 인종 청소, 집단 강간과 대학살 등으로 대표된다. 사라예보 포위와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같은 사건들은 갈등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고 있다.
세르비아는 초기 JNA의 무기와 광대한 자원으로 인해 우세였으나, 보스니아인들에 의해 추진력을 잃고 크로아티아인의 스프르스카 공화국과 동맹도 맺었으나, 결국 워싱턴 협정으로 인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형성된다. 스레브레니차 대학살과 마르칼레 대학살 이후, 북대서양 조약 기구는 1995년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격으로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진격을 방해하며, 이는 종전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전쟁은 1995년 12월 14일 파리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평화 협정의 최종 협상이 진행되었다. 평화 협상은 1995년 12월 21일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보통 데이턴 협정이라 부른다.
1995년 미국 중앙 정보국의 보고서에서, 세르비아군은 전쟁 중 90%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2008년 초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45명의 세르비아인, 12명의 크로아티아인 및 4명의 보스니아인이 보스니아에서의 전범 재판으로 기소되었다. 가장 최근의 연구에서는 10만-11만명이 사망하고, 220만명이 난민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치명적인 전쟁으로 남았다.
1. 개요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치명적인 전쟁.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년만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 중 최대의 규모의 학살이 자행된 전쟁이기도 하다.
보스니아에서 최악의 강간 피해를 입은 지역 "그르바비차"(Grbavica). 해당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EBS 지식채널e 측에서 다시 편집한 영상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너무나 빠르게 잊혀지고 있다.
2-1. 내전의 시작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붕괴·분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하게 전쟁이 벌어진 곳은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바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스니아에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유고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91년 당시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아래의 흰 선이 내전 당시의 경계다. 결국 경계선 동쪽의 세르비아계 영역에 다수 존재했던 보스니아계 민간인들이 주된 희생자가 되었으며, 이후 세르비아계의 영역 확장으로 원래 크로아티아-무슬림(보스니아)계 지역이었던 곳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각각 구성하는 대부분의 인구가 슬로베니아계(90%), 크로아티아계(89%)고 주거지역이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어 사실상의 전선 쟁탈전이었던 것과는 달리, 보스니아는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계,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었다. 같은 이유로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에도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찬성했던데 반해 세르비아계는 반대하면서 갈등은 격화되었다.
결국 1992년 2월 유고 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2/3를 차지하는 보스니아계(오늘날은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1/3을 조금 넘음)와 크로아티아계가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나머지 1/3의 세르비아계가 독립에 반발, 이웃한 신 유고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하에 스르프스카 공화국[1]의 이름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간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번에도 세르비아는 직접적인 전면개입보다는 내부 사병조직과 현지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였다.
일단 내전은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가 함께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구조였으나 여기에 크로아티아에서 같은 해 6월 12일 작게는 크로아티아계 공화국 지역, 크게는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목표로 전쟁에 참전하면서 상황은 더더욱 막장이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하위 전쟁인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 에서는 사상자가 1만명 이상 나왔는데, 62%가 보스니아계였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였다.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계의 무슬림 인종청소 역시 함께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 독립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프라뇨 투지만 역시 전범으로서의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투지만은 1999년 사망했다.).
내전 중기인 1994년의 인구 구성. 세르비아계의 영역이 전범위로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유일한 예외가 형제국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지도 남쪽의 크로아티아계(파란색)의 일부 확장이다. 보스니아계가 많았던 지역을 크로아티아계가 차지한 경우도 있다. 이건 크로아티아가 본국에서의 전쟁도 힘에 부쳐 세르비아를 제대로 막지 못해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진 데다,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는 스르프스카 군이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이 전쟁은 세르비아가 이하에 서술될 반인륜적인 헛짓만 안 했어도 승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전쟁이다.
2-2.스레브레니차 학살
라드코 믈라디치-虐殺의 主犯
보스니아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은 다른 민족에 대한 인종 청소로 잔악의 정점을 이루었고, 자연스럽게 방화, 살상, 강간 등이 자행되어 그 잔악성이 국제사회를 경악시켰다. 특히 처음부터 전쟁을 인종청소의 기회를 삼았던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지역에 정규군보다는 민병대와 의용병을 적극 투입했고, 그나마 군법의 최소한의 규제조차도 받지 않는 무장병들이 전장에서 날뛰면서 약탈, 강간, 학살이 빈번하게 벌어지게 된다.
强姦工場을 만들어서 학교, 교회 등에 가임기 여성으로 판단되는 무슬림 여성(10~60세 사이)을 한 곳에 몰아두고 집단 强姦을 했다. 보스니아계의 무슬림 남성을 학살로 제거하고, 여성들은 세르비아계의 아이를 갖게 함과 동시에 무슬림 여성의 종교적 신앙까지 파괴하는 최악의 전쟁범죄를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실시했다.
특히 1995년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잔악성은 극에 달했다. 구글 또는 관련 자료에 대해 조회해보면 그 잔학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굴삭기로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수많은 무슬림 남성들을 죽인뒤 묻어버리거나 했는데 이러한 구덩이들이 너무 많은데다가 그 위치도 정확하지 않아 수치가 정확히 계산되지 않을 정도이다.
원래 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무슬림 민병대가 조직되어 세르비아 계들을 축출하여 자위권을 행사하고 있던 도시였는데 UN은 이곳을 안전지대로 선포하면서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에 민병대를 무장해제시켰다. 이에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의 방어력이 형편없음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했다.
스레브레니차에 주둔한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은 안전지대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자 폭격을 요청했으나 기각되었고, 기세가 오른 세르비아 군대는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을 포격했으며 결국 평화유지군 병사들은 항복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도 NATO는 관망할 따름이었다. 당시의 UN에는 이러한 내전형태의 전쟁에 개입할만한 규정상의 권한이 없었다. 최소한의 치안 유지를 위해 평화유지군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내정간섭이었던 것. 도시를 점령한 믈라디치는 무슬림 아녀자들을 상대로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선전을 했으며 실제로 여자와 아이들은 생명만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믈라디치는 남성들까지 지켜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8,400명에 달하는 무슬림 남성들이 네덜란드 평화 유지군의 눈앞에서 살해되었다.뿐만 아니라, 무슬림 여성에 대한 집단강간을 벌였다. 스레브레니차는 UN이 "안전지대"로 선포한 드리나 강 동안의 3대 도시중 하나였다. 나머지 두 도시는 제파와 고라주데로 이 중에 고라주데만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았으나 세르비아 민병대의 맹렬한 공격으로 수백명의 민간인이 포격으로 죽었고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드리나 강 서안의 안전지대로는 비하치, 사라예보가 있었으나 그곳은 함락은 면했어도 역시나 포격으로 피바다가 되었다. 사실 말이 안전지대였지 이미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UN이 지정한 안전지대를 '실내사격장'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당시 네덜란드군은 150여명 정도의 경무장 소부대였으므로 처음부터 세르비아군 대부대를 저지할 힘이 없었다는 변호가 있으나, 그 대가가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 때문에 2014년 네덜란드 민사법원에서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네덜란드 정부의 책임이 있으며 희생자들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기사 링크
http://www.hankookilbo.com/v/e96470af059d4465be7fff769664bad5
애초에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영토의 50% 가까이를 차지했으며, 사라예보 역시 바로 국경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계의 우세 아래 이들의 전쟁 범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세르비아군의 90%가 전쟁범죄에 가담했다는 CIA의 추정이 있다. 인종 청소의 대부분은 이들이 점령한 동보스니아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대부분의 피해자는 스르프스카 공화국 내 인구 비율이 높았던 보스니아 인이었다.
유엔군과 NATO군이 파견된 95년까지 이 지역은 사실상 방치된 상황이었다. 드리나 강 서쪽의 피해도 막심해서 수도 사라예보에서만 시민 1만 2천명이 세르비아인들의 공격으로 살해되었다. 당시 스르프스카 공화국군은 보스니아 시민이 세르비아계든지, 보스니아계든지, 크로아티아 계든지 가리지 않고 무조건 공격하여 학살했다.
참고로 저 수치는 민간인만 집계한게 저 정도다. 보스니아군 사망자는 6천여 명. 오늘날까지 사라예보는 포위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오늘날 인구는 전쟁 전 인구의 6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라예보의 경우는 밀수꾼까지 자발적으로 봉사하여 시내에 보급품을 전달했을 정도로 보스니아 정부의 방위의지가 필사적이었다. 결국 끝까지 지켜낸다.
보스니아인들의 고초가 어찌나 심했는지를 다룬 서적으론 조사코의 만화 고라즈데가 있다. 거기서 인터뷰한 인물들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상당수는 인터뷰를 아예 거절했고 간신히 섭외한 어느 여인은 조 사코가 인터뷰를 시도하자 머뭇거리더니 "다 말해줄 수는 없수. 눈이 뽑힌 사람들을 봤지."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비셰그라드 학살을 목격한 노인은 세르비아 민병대가 여자와 아이들도 죽였냐고 묻는 조 사코의 질문에 "그렇게 당연한 것을 왜 묻소?"라고 코웃음을 쳤다.
보스니아에서 자행된 학살의 한가지 끔찍한 일은 전혀 낯모르는 민병대들이 몰려와서 학살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만 해도 친구였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돌변하여 군복을 입고 나타난 다음에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공부를 하고 파티를 하던 사람들에게 총칼질을 해댔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던 건 또 아니었다. 무슬림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세르비아계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정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분위기가 차츰 살벌해졌고 서로 친했던 무슬림과 세르비아계 이웃들은 이미 한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았으며 인사를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세르비아계들은 과거 우스탸샤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경험이 있어 피해의식이 강했고 "너희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새끼들이 우릴 다 죽이고 너희들만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고 있지?"란 말을 공공연히 했다고 한다.
학살의 생존자들은 자신들에게 총을 쏘고 칼로 목을 따던 학살자들의 직업, 이름, 취미까지 죄다 다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세르비아 민병대는 최대한 자신들의 무슬림계와 크로아티아계 지인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고 어떤 세르비아계들은 보스니아 공화국에 여전히 충성을 바쳤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가령 세르비아계에 의한 보스니아 포위전 당시 5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 보스니아 공화국에 충성을 바친 요반 디브야크(Jovan Divjak, 1993~1997년 동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군 부사령관) 장군도 있다.
위와 같은 인종청소가 서방세계에는 민족갈등에 의해 표출된 것이라고 표현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도 강했다. 전술한 것과 같이 보스니아에는 무슬림이 많이 살았으며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보스니아에서의 세르비아계(동방정교회)는 저소득층이 많았다.
스레브레나차는 안전지대로 설정하여 민병대의 무장해제를 UN이 시키고, 그리고 서방측이 위와 같은 인종학살에 대한 언급이 과거 나치 독일의 범죄와 같은 궤로 두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에 있다. 세르비아계의 동방정교회라 하여도 결국 서방측의 기독교계열의 종교인 반면에 보스니아계는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서방측과 UN의 유고내전 초기의 미적지근한 반응도 이로 인한 것이었다. 서방측은 본래 구성원인 무슬림 지도층으로 이루어진 보스니아 내각보다는 동방정교회로 이루어진 기독교 기반의 친서방 내각이 구성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계는 실질적으로 서방측의 푸쉬를 받았다. 군사적으로 완벽하게 무장된 세르비아에 대한 제제가 거의 없었다. 반면 보스니아계는 서방측에게 묶인뒤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늦게나마 보스니아계 무슬림에 대하여 사우디아라비아등의 무슬림 국가들이 지원을 해주려 했으나 이미 시기를 놓친 상황이었다.
2-3. 戰況이 뒤집히다.
전쟁이 시작되자 1992년부터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의 NATO 가입국을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단계적 징벌이 내려졌다. 신 유고 연방에는 경제 재제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심지어 국제연합에서도 신 유고 연방의 회원국 자격을 사실상 박탈하면서 사실상 국제사회로부터 왕따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 변화와는 별개로, 당시 서방세계 국가들이 펼친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재제와 금수조치는 별 효과가 없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세르비아와 인접한 주변 동유럽 국가들이 세르비아와 밀수, 밀거래를 벌였기 때문이었다.[4] 이런 상황에서 기어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 평화유지군까지 파견되었으나 평화유지군은 애시당초 현장관리만 맡는 군대였으니 세르비아계 입장에서 보면 직접 공격만 안 하면 상관없으므로 내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사령관이었던 소위 '수퍼 장군' 라트코 믈라디치는 고라즈데, 사라예보, 비하치 세 도시만 점령하면 이제 전쟁은 끝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승리를 확신하는 상황이었고 실태로 보스니아 공화국의 운명은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세르비아인의 테러로 알려져 사라예보가 세르비아의 수도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많은데, 사라예보는 1461년 도시가 세워진 이래 보스니아 소속으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내였다. 그런데도(어쩌면 첫소리와 글자 수의 비슷함으로) 사라예보와 세르비아가 연관된 것처럼 기억하는 사람이 꽤 된다.
1995년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사라예보시장을 폭격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평화로운 일요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번화가 시장에 대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포격으로 다수의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한 이 사건으로 국제적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던 것이다. 사라예보는 당시 양측의 경계였고, 전쟁 중 우세한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수도 등의 이유로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이것이 깨지게 된 것.
이런 여론을 뒤에 업고 UN이 아닌 NATO가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명명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공습을 개시했다. 8월 경에 시작된 NATO 소속 공군기들의 대대적 폭격은 수도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집적소, 통신시설을 집중폭격했고,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핵심시설도 덩달아 폭격 대상이 됐다. 이로서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진격은 저지당했다. 정작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고 하나 NATO가 완전히 세르비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가 천명된 것이라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었고 이에 세르비아계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폭격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으나(겨우 6발만 투하했다고 한다.(...)) 전술적이든 전략적이든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고 세르비아계의 수장 라도반 카라쥐치가 "이제 미국놈들에게 보여줄 예의는 없다."라고 선포하게 만드는 악효과만 낳았다. 거기에 세르비아 민병대가 2대의 NATO 전투기를 격추시키면서 세르비아의 기세만 잔뜩 올려주었다.
믈라디치 장군은 UN군 포로들을 전략 거점에 묶어서 인간 방패로 삼았고 프랑스 평화유지군 사령관이자 UN군 사령관인 베르나르 잔비엘 장군에게 폭격을 계속하면 보스니아 민간인들과 UN군 포로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영국군 평화유지군 사령관 로즈 장군은 학살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지렛대만 있으면 어린아이들도 탱크를 저지할 수 있다면서 보스니아인들이 엄살을 부린다고 주장했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게다가 때맞춰 이웃 크로아티아 공화국 영내에서는 미국의 후원[5] 으로 재정비된 크로아티아 공화국군의 '폭풍(스톰)' 작전이 시작되었다. 물론 크로아티아군은 여전히 형편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적도 세르비아 정부군이 전면 개입을 꺼리는 상황에서 주로 크라이나 공화국군과 의용병들만으로 구성되어 전력면에서 나을 게 없었던 데다 보스니아에 너무 깊게 빠져든 나머지 크로아티아 전선에 상대적으로 소홀해졌기 때문으로,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점령하고 있던 세르비아계 크라이나 공화국은 붕괴되었다. 나머지 세르비아계 잔존세력이 본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어 미국의 특사가 세르비아를 후원하던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을 방문해 압력을 넣으면서 전쟁은 수습단계로 들어섰다. 옐친은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후원하지 말도록 경고했고, (후에 학살 전범으로 역사에 남게 되는)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에게 더 이상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설득할 수박에 없었다.
러시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기만꾼'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세르비아의 편에 있었으나 사라예보와 고라즈데에서 벌어진 참상으로 반전된 여론에 밀려 세르비아에게 등을 돌렸고 "세르비아인들은 최소한의 인도적 한계도 지키고 있지 않다."라는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2-4. 內戰이 끝나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역사적인 데이튼 협정이 체결되었다. 다만 독립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인정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각기 영토의 5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계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무슬림 연합이 공존하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직은 세 민족(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가 번갈아 맡게 된다는 협정의 내용은 결국 갈등의 근본원인인 민족문제를 제거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후 1996년 3월부터 사라예보에서 스르프스카(세르비아계) 공화국군이 철수하였다.
한편 이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UN 감시이행군과 러시아군이 공동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별도로 추가된 것은 세르비아계의 요청으로, 협정상 보장에 따라 러시아군이 세르비아계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것. 다행히 2013년 현재까지는 큰 탈이 없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인 셈이며, 주변국들의 EU 가입이 미뤄진 (혹은 지금도 미뤄지고 있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보스니아 내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슷한 점이 좀 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지역의 민족문제로 발생했다는 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테러가 전면 국제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 세르비아 뒤에는 범슬라브주의의 대부를 자처하는 러시아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 결론은 발칸반도는 세계의 화약고가 맞다 냉전기였다면 세계대전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상황인데, 다행히 90년대의 국제정세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힘의 약화가 명확하던 시기였고, 결국 유일 최강국이던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반론도 많다. 왜냐하면 유고 내전 당시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무리적인 개입이 쉽지 않았으며, 개입했다면 전쟁은 초기에 종료되었으며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아래서 인종청소와 같은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러시아가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방측은 유고 내전을 최소화시켜야 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이를 관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유고 내전의 경우 서방측의 안이한 행동이 그 피해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가 벌어진 이면에는 무슬림 정권을 축출해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었던 서방세력의 태도가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서방세계라고 이 전쟁에 대해 큰소리칠 입장은 결코 되지 못한다는 것.
2005년의 민족 구성.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두 공화국의 경계로 민족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경계 너머 세르비아계의 대대적인 철수(민족 이동)이 수반되었고, 전쟁 중 심각한 피해를 입은 보스니아계 지역은 일부만이 회복되었다.
이 참담한 전쟁에서 보스니아는 3만명이 넘는 군인과 그와 같은 규모의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세르비아도 2만명의 군인(주로 세르비아계 의용병과 스르프스카군)과 4천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5천명의 군인과 2천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실제 사망자는 앞 수치들의 도합인 9 만여명보다 1~2만명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상자나 난민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았다. 무려 22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직전 인구는 435 만명이었는데, 현재는 그보다 적은 402 만명이니 난민의 규모와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 시기에 민간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쟁의 생존자가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당시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그나마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제노사이드가 조직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고 애초에 인구도 얼마 없는 동네라서 아프리카 지역처럼 백만 단위의 사망자가 엄청난 규모로 쏟아져나오는 일은 없었다.
스포츠 부분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도 경기 출전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것. 과거 냉전 당시 동유럽의 스포츠 강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해 세계 운동경기에서 존재감이 사라지게 된다. 전쟁의 장기화와 유고 연방의 분리로 국가대표 선수들의 혼란 또한 당연히 발생됐다.
유고 연방 분리로 국가대표 각 선수들은 독립한 자신의 모국으로 국적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유고 시절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축구, 수구, 테니스 등의 전력이 급락하게 된다.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사례로 유로 1992를 들 수 있다. 당시 UEFA는 유고슬라비아의 유로 대회 출전을 박탈했고, 그 자리를 대신한 덴마크가 유로 1992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아예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 중 모니카 셀레스나 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 같은 선수들은 미국 등 국외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http://jugomania.blogspot.com/2013_09_01_archive.html
처음 발 현때는 1981년 6월 24일 수요일, 공산주의 독재를 견디다 못한 “유고슬라비아” 국민들 앞에 독재 指導者(지도자)가 死亡(사망)한지 겨우 일년이 지났을 때였다. 無神論的(무신론적)인 獨裁者(독재자)의 추종 세력이 영원할것 이라고 명세를 했고, 그것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희망이 억압당하는 이 땅에서도 희망(希望)과 기도(祈禱)와 신뢰가 살아지지 않는 靈性(영성: Spirituality)의 祝福(축복)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 한다.
메주고리예에서 發現(발현) 하신 聖母(성모)님!
目次(목차)
2.2 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두브노교구장 라트코 페리치 주교의 입장
2.4 4. 교황 프란치스코와 알렉산드르 아위 멜로 신부와의 대화
槪要(개요)
1981년 6월,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메주고리예”라는 작은 마을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했다. 메주고리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기본 메시지는 바로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께로 다시 돌아와 평화의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후 성모 마리아는 클리자밧의 십자가 그늘 아래 살고 있는 6명의 어린아이들에게 매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성모 마리아는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을 급히 전하러 오셨다고 한다. 병들고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회개하고 하느님과 새롭게 화해하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한 것이다.
6인 발현 목격자들 중 3명은 오늘날까지 성모 발현을 매일 겪고 있다. 이들은 메주고리예에 거주하는 비츠카(Vicka), 이탈리아 몬자에 사는 마리야(Marija), 미국에서 거주하며 메주고리예를 오가는 이반(Ivan)이다. 네 번째 발현 목격자는 미르야나(Mirjana)로, 매달 2일에 발현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며, 나머지 두 명인 이반카(Ivanka)와 야콥(Jakov)은 일 년에 한 번 발현을 겪고 있다고 한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메주고리예 성모 마리아께 기도와 공경을 드리고 있으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위하여 메주고리예를 찾고 있다.
메주고리예에 대한 논란
1. 유고슬라비아 主敎團(주교단)의 입장
1991년 4월 10일 자다르에서 유고슬라비아 주교회의는 메주고리예에 대한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사를 한 결과 메주고리예가 초자연적발현과 계시와 무관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메주고리예로 모여 들고 있기 때문에 사목자들의 관심은 요청된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메주고리예에서 성모 마리아께 대한 건강한 신심행위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메주고리예에 대한 조사를 이어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두브노교구장
라트코 페리치 主敎(주교)의 입장
2017년 2월 26일 페리치 주교는 교구 홈페이지를 통해서 성모 발현은 없었다는 것이 교구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페리치 주교는 6명의 목격자들을 면담한 기록을 확인한 결과, 이들의 목격담에는 의심의 여지가 많았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첫째로 메주고리예의 성모님는 먼저 말을 걸어야 말을 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어떤 질문에는 이상한 웃음을 내며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했다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성모님는 목격자들과 사목자들의 요청에 따라 언덕 위에서 내려오기도 했다는 것이며, 네 번째로는 메주고리예 성모님는 얼마나 더 발현할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며, 다섯 번째로는 목격자들이 베일을 밟거나 옷이나 몸을 건드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에 페리치 주교는 “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성모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성모 발현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3. 敎皇廳(교황청)의 現在(현재) 입장
교황청은 2019년 5월 12일에 메주고리예에 대한 순례를 공식적으로 허용한다. 하지만 메주고리예에 대한 성모 발현의 진위에 대해 아직 조사하고 있으며 이것이 성모발현의 진실성에 대한 인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침을 내렸다.
4. 교황 프란치스코와 알렉산드르 아위 멜로 신부와의 대화
"메주고리예에는 은총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회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증인 [미리아나의 증언] 자막 재수정하여 재업로드!
https://www.youtube.com/watch?v=Tt8PYNu-woM&t=8s
메주고리예 성모님 발현증인
[마리아 파블로비치의 증언]
https://www.youtube.com/watch?v=7x5Orcyc50w
메주고리예 - 평화의 메시지!
https://www.youtube.com/watch?v=4UYWjwGLPU4
https://www.youtube.com/watch?v=q5LRuFYj_W8
(3)
https://www.youtube.com/watch?v=Y6nn061xoEA
메주고리예 저녁예절 실시간 중계 방송 한국어 공식 웹사이트 ...
~계속~
단기4342년 서기2009년 대한민국 건국 62주년 己丑年(기축년) 8월 21일 Fri, 미국 South Baylo University에서 남원양씨 병부공(兵部公)중 군수공파 30세손(世孫) 양방수(梁芳秀).
첫댓글 이승철 수 2020-11-04 오후 6:40 양 선생님 귀한 자료 잘 봤습니다. 양 선생님 사모님과 같이 촬영한 사진 너무 행복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