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도 세모시가 아름다운 서천의 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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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1:57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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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시가 아름다운 서천의 한산
백제 때 설림군(舌林郡) 또는 남양(南陽)이라고 불리던 서천군이 비인군과 한산군을 합쳐서 하나의 군으로 된 것은 1914년이다. 서천군 장항읍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만들어진 장항제련소로 널리 알려졌으며, 비단강으로 불리는 금강을 가운데 두고 군산과 마주 보고 있다. 이승소가 “산 열리고 들 넓으니 푸른 하늘 나지막한데, 말 놓고 돌아오니 낮 닭 우는 소리 들린다. 맑은 시냇물 흰 비단 펼쳐놓은 듯, 멀리 별포로 통해 흐르고, 밭두둑 수놓은 듯 착잡하여 긴 방죽에 둘렀구나”라고 노래하였듯이, 서천군의 서천평야는 충남지역의 대표적 평야다. 이 서천에 본래 군이었던 한산면이 있다.
이파의 취읍정(翠邑亭) 기문에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고와 기린봉은 북쪽에 진산이 되어 있고, 웅포는 그 남쪽을 둘러 흐른다”라고 하였던 한산의 명물은 뭐니 뭐니 해도 한산 세모시다. 이 지역의 땅이 모시 가꾸기에 좋아서 모시로 얻는 이익이 전국에서 첫째라고 알려진 것처럼, 한산면의 세모시가 서천군의 명물로 자리 잡은 지는 오래되었다.
여름이면 읍내 유지나 되어야 풀 먹이고 다림질 잘한 모시옷을 입었을 뿐이었다.
김원일의 소설 『노을』에 나오는 것처럼 모시옷만큼 여름에 시원한 의복도 없다. 모시로 지은 옷은 통풍이 잘되고 시원하며, 가볍고 깔깔하고 산뜻한 맛은 무명이나 삼베가 따르지 못한다. 모시 원단은 선이 곱고 우아하여 고전미 넘치는 전통 한복과 다양한 디자인의 생활한복뿐 아니라 양장, 그 밖의 생활 소품으로 사용되는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탄성이 좋지 않아 잘 구겨지는 단점이 있어 입는 것이 귀찮기도 하지만 고운 모시옷을 입고 조심하는 버릇이 몸에 배면 더욱 우아한 자태를 풍길 수 있다. 그 옛날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시절 모시를 짜던 아낙네들의 피와 땀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시옷에 깃들어 있다.
한산모시관
한산모시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한산모시를 처음 생산했던 건지산 기슭에 세운 모시 박물관이다.
모시는 한자로 저(苧ㆍ紵), 저포(苧佈), 저마포(苧麻佈) 등으로 불리며,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 자료인 『삼국사기』에 ‘신라에서는 삼십승저삼단(三十升紵衫段)’을 당나라에 보낸 기록이 있다. 『계림유사』에 고려 방언으로 저왈저모(苧曰苧毛), 저왈모시배(苧曰毛施背)라 하여 오늘날 모시라는 이명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모시옷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입었던 옷이다.
고려 때 원나라에서도 모시 직물을 선호하여 수출을 요구해온 기록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고려 때가 모시 직물 제작의 전성기였음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동래 지방에 전해오는 민요에 “모시야 적삼 아래 연적 같은 저 젖 보소, 많이 보면 병납니더, 담배씨만큼만 보고 가소”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모시옷 아래로 은은하게 비치는 여자의 젖가슴을 훔쳐보기는 보되 조금만 보라는 은근한 충동질이라고 볼 수 있다.
1123년 고려 인종 때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이 보고 들은 풍물을 쓴 『고려도경』에 모시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남아 있다.
모시는 백옥처럼 희고 맑아 결백을 상징하고 윗사람이 입어도 의젓함이 나타나며, 백저포로는 상복을 삼았다. (······) 임금도 서민들과 마찬가지로 흰 모시옷으로 평상복을 입었다.
모시의 생산 지역은 삼베가 전국에서 고르게 생산되는 것과 달리 충청도의 부여를 비롯한 서천, 정산, 홍산, 비인, 임천, 남포를 이르는 저산팔읍과 전라도 일부였다. 그중에서도 충청도의 여덟 고을은 모시가 많이 나고 모시 거래가 활발한 곳이라서 저산팔읍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시 중에서 고급 옷감은 한산 지역에서 나는 가는 모시(세모시)를 들 수 있다. 한산 세모시는 『택리지』 「복거총론」의 ‘생리(生利)’편에도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과 한산의 모시밭, 안동과 예안의 왕골논”이라는 구절로 언급되어 있다. 한산 모시는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여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라는 말이 생길 만큼 결이 가늘고 고운 것이 특징이다.
특히 모시를 곱솔 바느질한 깨끼저고리의 정갈한 맵시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치마는 폭 28센티미터의 12폭 치마를 만들어 입었는데 빨고 풀 먹이고 만지고 다림질하는 여인의 특별한 솜씨가 깃들어야 한다. 한산 모시의 시초는 신라 때 한 노인이 산에 약초를 캐러 갔다가 유달리 깨끗한 풀이 있어 껍질을 벗겨보니 그 껍질이 늘씬하고 보들보들하여 이것으로 실을 뽑아 베를 짰는데 이것이 한산 모시의 시작이라고 한다. 한산 모시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모시 중에서 고급 옷감은 한산 지역에서 나는 세모시를 들 수 있다. 한산 세모시는 『택리지』에도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과 한산의 모시밭, 안동과 예안의 왕골논”이라는 구절로 언급되어 있다. 품질이 우수하고 섬세하기로 유명하여 ‘밥그릇 하나에 모시 한 필이 다 들어간다’라는 말이 생길 만큼 결이 가늘고 고운 것이 특징이다. 특히 깨끼저고리의 정갈한 맵시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모시가 아름다운 서천의 한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