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08
8월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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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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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hqnjGdL7Mw (김정호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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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고생하시는 분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는 예수님의 권고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십자가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니고 살아가는 갖은 결핍들, 결점들, 뜻하지 않았던 사고, 생각만 해도 가슴 미어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 열악한 상황, 가난, 병고, 스트레스, 위기, 관계 안에서 오는 갈등 등.
지속적이며, 인간 삶의 한 부분이다. ‘이제 큰 십자가 하나 잘 극복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찾아온다. 삶의 매 순간, 모든 국면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잘만 이해하고 극복하면 인생의 보약이다. 때로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크다 못해 끔찍할 때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가 주는 의미를 잘 깨닫고 끝까지 잘 견뎠을 때 찾아오는 기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영적성장의 가장 큰 도구이다. 우리 인생이 한 걸음 크게 나아가기 위해 가장 좋은 특효약이다.
그래서 결국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모습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각의 긍정화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은 불필요한 십자가를 양산할 뿐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가 주는 괴로움에 집착하기보다는 십자가가 뜻하는 의미, 해결방안, 기능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한 부분임을 명심하십시오. 십자가는 분명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의미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없는 인생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일 뿐입니다.
십자가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밥을 먹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 십자가가 좀 가벼워졌을 때 이웃들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로 인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워한다면 그 십자가를 나누어지려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십자가가 너무도 힘겨울 때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살리시려고 또 구원하시려고 노심초사하시며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관계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신과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배신하며 언제나 옆길로 새는 불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백성을 당신께로 돌아서게 하시려는 한 방편으로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느님의 마음 한 가운데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그분의 열렬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그 사랑의 표현으로 십자가를 보내십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십자가는 우리 죄인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강도가 센 애정표현입니다.
오늘 등에 얹힌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고생하시는 분들, 주님께서 주시는 아래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겪는 시련은 모두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시련들입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 코린 10, 12-13)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 코린 1,1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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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K-HeBpH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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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만 살아남는다. 그런데 다정해지려면….>
송곳니를 드러낸 사자와 이를 피해 달아나는 사슴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구해주고 싶습니까? 세상에 더 많은 사자가 있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착한 사슴이 뛰노는 숲을 원하십니까? 아마 두 종 중 하나가 멸종한다면 사자가 먼저 멸종할 것입니다.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은 인간처럼 강한 존재가 아닌 다정하고 온화하고 순종적인 사슴과 같은 존재가 세상을 채우기를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인간은 사슴 같은 순수하고 착한 것을 살게 하고 싶을까요? 인간은 히틀러처럼 한 민족을 말살하고 싶을 정도로 잔인한 존재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헉슬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늑대에게 공격받는 사슴을 보면 동정심이 든다. 사슴 같은 자를 순수하고 착하게, 늑대 같은 자를 독하고 악하게 여길 것이다. 용기와 열정으로 사슴을 지키며, 피가 철철 흐르는 무시무시한 늑대 소굴에서 구해내고 싶을 것이다.”
강한 자의 특징은 의외로 자비심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강한 자는 집단을 형성하는데 그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능력이 자비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무리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상대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입니다. 이 자비심이 클수록 더 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네안데르탈인은 그 친화력이 1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보다 100배 이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숫자가 많은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더 많은 호모 사피엔스들이 모이다 보니 언어와 같은 소통 능력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 기술적인 능력들이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신이 모든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에 히틀러처럼 다 약한 종족을 사정없이 죽이는 잔인함도 동시에 표현되었습니다.
어쨌건 브라이언 헤어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는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친화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친화력이란 타인에게 손톱과 이빨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이 친화력을 마치 늑대가 강아지가 된 것처럼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라고 부릅니다.
20세기 러시아 학자 벨라예프와 류드밀라는 동물의 가축화 과정을 알아보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야생 여우 중에 친화력이 강한 여우들을 선택하여 몇 번에 걸쳐 교배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주둥이가 짧아지고 송곳니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포식성과 호전성이 감소하여 더 귀여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야생의 보통 여우들보다 5배 많아졌던 것입니다.
자 그럼 세로토닌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인간에게 길든 여우는 사람의 손짓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음식이 들어있는 그릇을 사람이 손으로 가리키면 개와 같은 길든 동물은 그 손짓을 알고 음식을 찾지만, 침팬지와 같은 동물은 그것을 믿지 않고 본인 능력에 의존하여 찾으려 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개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침팬지나 늑대는 사라질 것입니다. 보호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만 가축화 한 것일까요? 이 책에서는 인간도 살아남기 위해 가축화하였다고 합니다. 인간 사회도 더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송곳니를 숨기고 그 지시하는 바에 순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참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유튜브 채널, ‘요요’]
자비심이 가장 강한 동물이 인간입니다. 자비가 없는 인간은 세상을 파괴하지만, 자비심이 큰 인간은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런데 그 자비심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발톱과 송곳니를 덜어내는 십자가를 통해 형성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밥은 안 먹어도 40일은 살지만, 사랑을 4일만 받지 않아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로 하루에 1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지만 사실 매일 자살로 죽는 사람이 40명 가까이 됩니다. 어느 게 더 큰 병이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바이러스일까요, 아니면 우리 마음 깊숙이 있는 사랑 받지 못하는 바이러스일까요?
금쪽같은 내새끼 107회에 ‘소아 무기력증’을 앓고 있는 금쪽이가 나옵니다. 인생 공허하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살고 싶지 않은 모습의 초1 여자아이입니다. 아이가 무기력하고 두렵고 불안해하는 이유는 아이 부모의 부부싸움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 이혼 직전까지 간 상황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헤어질까 봐 더 불안합니다.
싸움은 왜 일어날까요? 내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피 흘리지 않아서입니다. 친화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친화력은 결국 내 송곳니와 발톱을 자르는 일입니다. 그 일이 아니면 나도 죽고 자녀도 죽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큰 교육은 부모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환경 안에서 자녀들은 나빠질 수 없습니다. 살고 싶어지기에 자녀들도 이를 감춥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살 생명력을 얻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부모는 임종 체험으로 관에 들어감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으로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자녀들은 매우 행복해합니다. 무엇이든 흐르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돈은 통장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생명도 생명력을 잃습니다.
흐르는 것만 생명력을 갖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생명이 흐르려면 죽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내어줄 수 없어서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가질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선악과를 내어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어줄 수 없다면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의 소유가 됩니다. 그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도 마찬가지고 생명도 그렇습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입니다. 살려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정해집니다. 다정해야 살아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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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일본, 중국, 월남(베트남) 등 유교문화가 퍼진 곳에는 모두 실록이 있는데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라고 합니다. 이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고 합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은 본인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정확하게 사실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후손 왕이 실록을 볼 수 있다면 허물과 실수를 고치거나 없애려고 할 것입니다. 만일 후손 왕이 실록을 볼 수 있다면 작은 업적을 크게 과장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실록이 아니라 소설이 될 것입니다.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은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기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관직에서 쫓겨나고, 때로는 목숨까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본당에도 여러 기록과 자료가 있습니다. 지금은 전산화되어서 기록이 간편하지만 예전에는 모든 기록을 수작업으로 했습니다. 자료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습니다. 세례대장, 혼배문서, 건축물 서류, 회계자료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오래된 본당은 10년사, 25년사, 50년사와 같이 본당의 역사를 자료로 만들기도 합니다. 착각 때문에, 때로는 실수로 기록이 빠지기도 하고, 세례명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거나, 사진이 있으면 정정하거나,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저도 본당에 있을 때 기록으로 남긴 것이 있었습니다. 성당 부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자들도 있었고, 신자가 아닌 분들도 있었습니다. 예전에 있던 신부님이 들어와 살도록 허용한 예도 있었고, 공소회장님이 들어와 살도록 한 일도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매년 일정한 비용을 받는다는 서류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유권이 인정되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서류를 만들었고, 비용을 받았습니다. 다음 신부님은 그 서류를 근거로 성당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부임한 사제는 지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명확하게 잘못된 것은 분명 수정하고 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을 드러내거나, 전임 사제를 깎아내리는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기록을 담당하는 책임자도 사제가 바뀔 때마다 원칙과 소신을 바꾼다면 그것 또한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들이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때로는 목숨을 걸고서 기록을 남겼기에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보물이 될 수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사람의 실수는 남을 깎아내리면 내가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 온 사제는 신자들을 위한 사목과 본당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과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좋습니다. 전임 사제의 허물과 잘못을 밝혀내는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모든 책임자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게 국가의 기록을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남을 험담하고, 시기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만을 믿고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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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24-28 :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 모두의 원칙이고 강령이다. 이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신 말씀이다(참조: 마태 10,37-39; 마르 8,34-37; 루가 9,23-27; 14,25-27; 17,33; 요한 12,25).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목숨을 얻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은 무한한 차이가 있다. 즉 구원과 멸망의 차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절)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 파멸을 맞게 되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나의 가르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현세의 삶을 경멸하여 진리를 위해 죽음과 맞서기까지 하는 사람은 그 신심으로 인하여 죽음 안에서 자기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오리게네스, 마태오 복음 주해 12,26). 즉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절) 이 말씀은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 줄, 즉 생명 대신 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뜻하는 말씀이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내줄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절)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신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아드님의 영광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며, 하나의 영광이다. 이 영광이 같으므로 본질도 하나라는 말이다. 아드님이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듯이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심판과 엄격한 판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8절) 우리 신앙인은 이제 선택이 남아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을 끊고, 버리고, 죽이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음을 맛보셨고, 신앙인들에게도 이미 죽음의 맛을 보여주셨다. 말씀에 행동이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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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그 일에 어떤 특권도 없고, 특혜도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높은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또 많은 업적을 쌓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재림 때의 심판은 그런 직책이나 업적이 아니라, ‘각자의 행실’을 보는 심판입니다.(27절) “자신을 버리고”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어떤 어려움도 다 감수하고”입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땅’인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땅’이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만이 ‘좋은 땅’이 될 수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데, 땅을 개간하고, 가꾸고, 돌보는 일이 십자가입니다.
그 과정에서 ‘악한 자’가 와서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마태 13,19) 그때 ‘악한 자’를 물리치느라고 겪는 어려움들과 ‘악한 자’의 억압이나 박해를 참고 견디는 일들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마태 13,22) 그럴 때 단호하게 걱정과 유혹을 물리치는 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살다 보면 병에 걸릴 수도 있는데, ‘병’이 십자가가 아니라, ‘병고’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닙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라고 말씀하셨다. 박해를 피하는 것은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박해가 닥쳤을 때,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가는 것은 십자가를 피하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 상황에서, 떠나는 것이 싫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신앙을 버린다면, 바로 그것이 십자가를 피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마태 11,28)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에서 ‘고통’만 연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유와 목적을 생각하면, 십자가는 꼭 ‘고통’만은 아니고,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노력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추수 때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씨를 뿌리고 가꾸는 일이 곧 십자가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5-26)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현세의 일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중요하다.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인간은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혹시 무엇인가를 차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생각은 어리석은 착각일 뿐입니다. 권력이든 재물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7-28)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정말로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행실대로’라는 말에는, 심판의 결과는 각자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심판의 결과를 정합니다. 자기가 선택하는 일이니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말씀은,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씀인데, ‘제자들’을 사도들이 아니라, 넓은 뜻으로 ‘신앙인들’이라고 해석한다면,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즉 살아 있는 동안에 재림을 볼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1테살 4,16-17)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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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곤경의 날에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근심과 곤경 가운데 더욱더 주님께 다가가 간절히 기도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군중들은 예수님을 자신들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하였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루카 4,42) 그리고 그분께 매달리고 그분께 손을 대었습니다.(루카 6,19 참조)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간 것은 생명을 얻으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아시고 반기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그런데 그분의 말씀에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그것을 잃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요한 10,17). 또 당신의 이런 선택을 씨앗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생명을 얻으려면 오히려 생명이 죽음에 이르도록 철저히 경멸해야 한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 우리에게는 정말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한 묵시록은 환난을 이겨 내고 생명을 얻은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12,1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대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시험이 여전히 많은 신앙인에게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곧바로 십자가를 향한 여정을 걸으셨고 죽음을 맞으셨습니다. 그러고는 부활하실 것이라는 당신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복음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뒤따라 사는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고 부활해야 한다는, 신앙의 여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는데 죽어야 하는가?’ ‘행복을 원하는데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자는 고통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며, 희생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상징이고 선물의 표지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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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이란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이나 이기주의와 같은 유혹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지요. 아울러 자신의 의지를 주님의 뜻에 맞추는 행동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불편과 오해, 불이익, 희생마저 감당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져야만 하는 십자가가 아니겠습니까?
이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과거 수많은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늘 우리 마음에 살아 있지요. 나아가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의 생명만을 유지하려고 비굴한 행동을 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은 유지했지만, 우리 마음에서 잊히거나 죽은 이들로 남아 있을 뿐이지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 각자에게 달렸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길을 택한다면 그 과정은 외적으로는 고난과 가시밭의 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우리 내면에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 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참으로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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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호준 레오 신부님]
<예수님과의 일치>
죽기 전에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지금 이 자리에 죽기 전에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조만간에 재림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2000년이 지나도록 재림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을 말씀하셨을까?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 대답은 재림에 대한 언급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을 때 얻게 되는 예수님과의 일치....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 속에 주어지는 일치.... 그것이 죽기 전에 내 나라 내 마음속과 삶 속에 그분이 오심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었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잃을 때 얻게 되는 나라... 예수님과의 일치... 에 대해 묵상하다가 저에게 던져지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나의 목숨... 나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나에게 있을까? 였습니다.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 저에겐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건 신앙입니다. 그리고 사제직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사제직은... 사랑 없이도 할 수 있고,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이 빠진 상태에서도 성사를 집행할 수 있고,,, 사랑이 빠진 상태에서도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 사제직이 사랑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지만... 말도 안 되게도 사랑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사제직이란 보편적 의미의 신앙이나 교리적 사제직이 아니라 나 개인의 것... 나의 이상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저에게 너의 이상을 버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너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너의 사제직, 신앙을... 너의 욕망,,, 너의 이상을 버릴 때 살 것이며,,, 너의 이상을 나의 뜻보다 앞세울 때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실천한 다는 것....
그분의 말씀은 늘 이렇게 제 근원부터 흔들어 놓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고개 숙여 말씀드립니다. 아직도 멀었군요...
하느님께서 정하신 일이겠지만... 죽기 전에 그분께서 저의 나라에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도 제 마음대로 생각한 제 이상일까요...
여하튼 매일의 말씀이 그냥 흘러가지 않고 제 삶과 신앙을 깊이 흔드는 것을 볼 때 희망이 있습니다. 가슴은 아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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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홍태 베다 신부님]
<자기 십자가를 지자>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들으신 바와 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제 복음에서 들으신 대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이 가시려고 하는 수난의 길에 대하여 “주님 그래서는 안 됩니다”(마태 16,22)하고 행동에 뒤이어 나온 말씀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만 챙기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마태 16,23) 그런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의 뜻을 먼저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뜻, 주님이 보시기에 옳다고 판단되면 그 십자가가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가? 다들 자신의 유익만 먼저 챙기려고 하는 세상, 앞에서는 국가를 위하고 자신이야말로 가장 깨끗한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기선 갑판에서 한 아이가 개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공을 던지면 개가 그 공을 물어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잘못 던져 공은 바다로 굴러떨어졌고, 개도 공을 따라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른 선장에게 달려가 배를 돌이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절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커다란 배의 항로를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물 속에 뛰어들었다. 그제야 선장도 할 수 없이 배를 돌이켰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왜 목숨을 버리는 일이라 하더라도 십자가를 져야하는 지에 대한 물음에 힌트를 제공해 준다. 겨우 개 한 마리가 빠진 일이, 아버지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이제는 사람이 빠진 일로 의미와 사건의 중요도가 증대되었으며, 이는 결국 거대한 기선의 항로까지 변경시키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도 이 세상에 여전히 구원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우리 일상의 온갖 부조리함을 겨우 개 한 마리 빠진 일 정도로 하찮게 여기고 아무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타인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일상의 십자가는 너무나 많다고.
예수님께 있어서 십자가는 돌아가실 때 짊어지셨던 그 십자가 단 한 번뿐이셨지만, 우리는 늘 삶의 무게로 고민해야 하고 남몰래 울어야 하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할 데조차 없어 가슴만 치며 살아가야 하는 등 우리가 겪는 십자가는 셀 수도 없이 많다고.
그렇게 거의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십자가들을 어떻게 한결같이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한 번뿐이었는가? 아니면 예수님도 우리 이상으로 많은 일상의 십자가들과 맞닥뜨리면서도 그것들을 짊어지고 한결같이 하느님의 뒤를 따르셨는지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성서는 예수께서도 얼마나 많은 십자가와 만나셨는지를 잘 보도해 주고 있다:
예수님도 그 부모들과 함께 나자렛 벽촌에서 궁핍하게 생활하셨지만, 한결같이 성부의 뜻에 따라 사셨으며(마태 2,23),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이나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먼저 선택하셨으며(마태 4,1-11),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이사야 예언자가 53,4절에서 말한 대로 “그분은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으며, 지금의 우리야 따뜻한 집이라도 있지만, 당시의 예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난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셨으며, 군중들의 몰이해(마르 5,17)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시기와 모함(마태 9,11와 루카 5,30)이라는 십자가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받아들이셨다.
더더구나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고(마태 26,21), 베드로마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마태 26,69-75)은 당신을 참으로 힘들고 슬프게 한
십자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십자가상 죽음의 길을 앞두고도 게세마니에서 연거푸 세 번이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셨던 그 기도는 예수님이 얼마나 한결같이 당신 생애의 모든 십자가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짊어지셨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생은 곧 십자가의 연속이었음에도 단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짊어지셨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사신 예수님이셨기에 “나는 부활이다.”(요한 11,25)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당신의 삶이 생전에 이미 부활의 삶이 될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크리스천은 그런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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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답게>
마태오 16,24-28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사람답게>
사람 아닌 것에
자리를 내주고도
사람일 수 있기에
사람으로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 아닌 것에
자리를 내주면
사람다울 수 없기에
사람답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답게 사느냐
사람으로 사느냐
나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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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를 사랑하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신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이 없을까요? 그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과 정의와 양심에 따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의 잘못보다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것을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인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허물에 대한 보속을 위해,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고통 등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떠한 고통이나 결함이 없는 행복만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감당하시고 세 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걷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먼저 걸어가셨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해, 주장, 생각, 바람들을 접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내 생각이나 바람에 하느님의 말씀을 꿰어맞추고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뜻을 관철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를 죽인다는 것은 그분에게 나를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하여 더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큰 것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요한 비안네 성인은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이 커가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익을 끊어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심이 더욱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시련과 고통, 고달픔을 감당해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부활이라는 참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며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면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 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당신이 제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 1,22)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고 자신만의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우리의 모범으로 기억되고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앞으로도 기억될 것이며 믿는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 안에 예수님의 진리와 생명을 품고 살면 죽어도 살아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 날에 그 십자가가 나를 져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입니다.”(마태 16,27) “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내가 십자가를 사랑하면 십자가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나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성녀 빌리아르). “당신이 제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코린1,22)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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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연애하며 사랑의 감정의 고조되었을 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진심이야, 힘들지 않게 할게, 영원하자, 나는 달라, 믿어줘, 지켜줄게, 행복하게 해줄게, 앞으로 잘할게, 항상 곁에 있을게….”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는 이 말들이 모두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심이야’라는 말은 행동 없이 말뿐인 가짜 진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힘들지 않게 할게’는 너 때문에 더 힘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원하자’는 그냥 한때의 감정이었고, ‘나는 달라’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과 똑같았다고 합니다. ‘믿어줘’라고 했지만 자주 배신했고, ‘지켜줄게’라고 했지만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줄게’라고 했지만, 더 외롭고 불행해졌습니다. ‘앞으로 잘할게’는 역시 말뿐이었고, ‘항상 곁에 있을게’는 시간이 갈수록 곁에 없을 때가 더 많아지다가 결국 떠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말하는 사랑은 거짓이기도 하고, 변함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인 주님 사랑에만 기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보다 세상의 가짜 사랑, 거짓 사랑을 더 좇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유한한 세상 안에서의 사랑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든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전해줍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하는데, 첫째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과 계획보다 제자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목숨까지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손해 보는 일 같기도 합니다.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더 큰 이득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의 시간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과 함께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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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 자기 버림, 제 십자가를 짐, 주님을 따름 -
어제 수도원을 자주 찾는 어느 젊은 교구 사제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교구의 허락을 얻고 부모의 시골 은수처에서 휴양중인 사제입니다. 어제는 오전 고백성사후 집무실 문을 나서려던중 “청소를 하고 가겠습니다. 저는 청소를 좋아합니다.” 하더니 무려 1시간 이상 정성을 다해 신발장은 물론 입구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고 정리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은 ‘청소부가된 성자聖者’란 책이 생각났습니다. 수도원에 올 때 마다 고백성사를 보는, 오랫동안 만난 젊은 사제지만 전혀 새로운 모습의 발견이었습니다.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신부님의 은수생활은 문제가 없겠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하고 주변 청소와 정리정돈 잘하면 은수생활 문제 없이 잘 할 것입니다. 요즘 여름철 시골 생활이 ‘풀과의 전쟁’이듯 우리 삶은 일상의 전쟁입니다. 참으로 혼자살아도 삶이 중심과 질서가 잡히고 부지런해야 ‘일상의 늪’에, ‘일상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 저는 청소를 좋아합니다. 청소를 좋아하기에 영혼의 청소인 고백성사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 스물네시간이 부족합니다. 마흔 여덟시간이면 좋겠습니다. 하루가 너무 짧습니다. 날마다 머무는 시골 은수처에서 미사하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고, 곳곳을 청소하고 가꾸고 돌보고 정리정돈하다보면 하루가 금방갑니다.”
정말 무려 한시간 이상 떠나기전 말없이 묵묵히 정성을 다해 청소를 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이렇게 정성을 다해 살면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소하는 동안 수도원의 네 마리 개들은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청소부 성자, 신부님에게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메시지와 더불어 찍었던 여러 장의 청소장면의 사진을 전송했습니다. 신부님의 새로운 면모를, 열정과 순수를 새롭게 발견한 어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란 물음을 구체화한 질문이겠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결코 비상하지 않고 평범합니다. 청소에 정성을 다했던 젊은 사제처럼 각자 일상의 평범한 자리에서,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책임을 다하며 살면 됩니다. 예수님은 짧은 한마디로 당신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외없이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삶의 길입니다. 이 삶의 평생 여정이 바로 구원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주님을 닮아 참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따라야 할 분명한 목표와 방향인 주님이 계시니 결코 길을 잃어 방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주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자기 목숨을 살리는 참나의 실현인 구원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지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지에 눈이 멀어 세상 우상같은 소유물이나 외적인 것들에 노예되어 자기 존재를 잃고 살아가는 지요. 지난 주일 교황님 강론중 강조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명심하십시오. 그분은 하느님과 악마를, 선과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재물, 돈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하느님과 악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느님과 악마가 아닌 하느님과 재물입니다. 재물이 우리 섬김의 대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요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새삼 악마보다 더 흉악하고 고약하고 무서운 것이 재물에 대한 탐욕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탐욕에 대한 궁극의 결정적 처방이 바로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날마다 아침마다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한 수도형제와 한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길에서 결정적 원동력은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열정과 순수요, 아낌없이 자기를 버릴 수 있고, 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자기 버림이요, 사랑의 제 십자가짐이요, 사랑의 주님 따름입니다. 모두가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기에 자발적 사랑과 기쁨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랑할 때 십자가는 가벼운 선물이 되지만 사랑이 증발하면 십자가는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타인의 십자가를 지라 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유의 십자가를 지라 하십니다. 바로 내 운명의 십자가요, 내 책임의 십자가요, 내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할 십자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때,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이라 합니다. 바로 각자 십자가의 길에서 사랑과 섬김의 실행이라는 내 책임의 십자가를 잘 지고 따랐느냐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느님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의 사랑을 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소예언서 나훔서입니다. 나훔이란 이름 뜻이 “위로하는 이”라 합니다. 오늘 나훔은 유다에게 기쁜 소식과 위로를 전하는 반면, 아시리아의 니네베의 비참한 패망을 예언했고 사실 그대로 우상과 죄악의 소굴, 니네베 대도시는 초토화됩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경고가 됩니다. 바로 죄악의 유혹에 빠져 탈선하여 길잃어 버리지 말고, 시종여일 한결같이 각자 주어진 십자가의 길에 항구하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각자 십자가의 길이지만 혼자가 아닌 도반들과 “더불어(togrther)”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자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은 우리 모두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항구히 잘 따를 수 있도록 우리를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십자가의 길, 복음이 나올 때 마다 인용하는 제 좌우명 기도를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고백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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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16,24)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마태16,24-28)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예고 뒤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죄에 죽고 영적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다.' 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거듭거듭 말씀드리지만, 신앙인들은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6,21)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너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너를 품어 안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16,24.26)
'신앙의 신비여!'
신앙은 신비입니다. 신앙은 내가 죽어야 살 수 있고 부활할 수 있다는 역설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땀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매일 드리는 미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며, 성경 전체(73권)가 말하는 핵심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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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yY75-Sp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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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무언가 중요한 것을
여전히 놓치고 사는
우리들이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지는
우리의
실천이다.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길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다름아닌
우리의 십자가를
우리가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다.
은총 대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신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현주소가
여실히 드러난다.
십자가를 받아
들여야 한다.
대충과 그냥으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자아의 집착이 아닌
자아의 죽음이 바로
참된 십자가인 것이다.
주님과 우리의
공통분모는
십자가에 있다.
진심을 드러내는
삶 자체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우리들 관계이다.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섬기는
죄와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을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참된 사랑이며
십자가의 방식이다.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음을
믿는다.
자기 파괴가 아니라
이기적인 자기버림이다.
십자가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함께 지고
함께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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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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