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 최지안
두 개의 달이 보인다. 손톱이 시작되는 부분에 살짝 얼굴을 내민 달. 그리고 가장자리에 하얗게 아치를 이루며 끝으로 밀려난 달. 초생달 같기도 하고 그믐달 같기도 하다.
어느 틈에 자라는 걸까. 이불 위에 두 손 내놓고 자는 밤, 누군가 와서 손톱을 늘이는 것도 아닌데. 안쪽의 달은 그 자리 그대로인데 왜 바깥쪽 하얀 끝동만 자라는 것인지. 엄지와 검지, 중지도, 약지와 새끼도 모두 하얗게 끝이 길어져 있다. 주인도 모르게 조금씩 키를 늘인다. 아니, 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밀려 끝으로 가는 것인가.
손톱을 보면 애처롭다. 얼마나 살이 여리면 딱딱한 각질을 붙여 놨을까. 갑각류들이 그렇다. 속이 여린 것일수록 딱딱한 껍질을 갖고 있지 않은가. 겉이 단단해 보이는 것일수록 속은 물컹한 것이 많다. 어쩌면 나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손톱은 나중에 만들어진 부분이리라. 신이 인간을 빚을 때 다 만들어놓고 여리고 미덥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붙여준 것이 틀림없다. 그거라도 지니고 있으라고. 억센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으니 손톱이라도 지니고 있으라고. 그러니까 손톱은 신이 여린 것에게 주는 위로가 아닐는지.
그리 본다면 손톱은 손에 달린 작은 무기다. 깎지 않고 길게 놔둔다면 충분히 무언가를 흠집 낼 수 있다. 대만의 고궁 박물관에서 본 서태후가 쓰던 손톱 장식처럼. 그것은 가히 무기로 보였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았겠지만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쓰였으니 아주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무기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손톱은 신중하게 다루어야한다. 용안을 할퀴어 사약까지 받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보더라도 무기 사용은 역시 맨 마지막이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마음을 할퀴는 일 또한 조심해야겠지.
무기라고 하지만 그리 견고해 보이지도 않는다. 어딘가에 부딪치면 살이 까맣게 죽는다. 때로는 손톱까지 빠져야 낫는 것을 보면 여간 예민한 곳이 아닐 터. 아프기는 얼마나 아픈지. 짐작컨대 손톱이 빠지는 것은 죽은 살을 밀어내는 것이어서 죽을 만큼 아픈 것이리라. 피붙이를 보내는 일처럼 누군가를 내 삶으로부터 밀어내던 일도 죽을 만큼 아픈 일이지 않았던가.
표시나지 않게 아픈 곳이 손톱 밑이다. 안쪽으로 들어간 여린 부위여서 가시가 들면 눈물 나게 아프다. 이상한 것은 미운 사람도 꼭 손톱 밑 가시처럼 가슴을 파고든다는 것이다. 가시는 가장 약하고 연한 틈으로 파고든다. 역설적인 것이 사랑하는 사람도 손톱 밑에 든 가시처럼 아프다. 어쩌지도 못하게. 그러고 보면 미움과 사랑은 같은 종류의 아픔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과는 많이 싸우고 미워하는 법이어서 탈이 나면 더 아픈 법이다. 손톱 못지않게 예민하고 까다로운 것도 마음이니까.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없으면 아쉬운 손톱. 파근파근하게 쪄낸 감자의 껍질을 살살 벗길 때라든지 마늘을 깔 때도 여간 요긴한 것이 아니다. 가려운 곳을 긁고 얇은 것을 집을 때도 톡톡히 제 몫을 한다. 이런 미세한 작업을 뭉툭한 손가락으로는 할 수 없어 손톱이 붙어있는 것이리라.
손톱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손은 나이를 속일 수 없다고 하지만 손톱은 직업을 속일 수 없다. 농사일을 하는 사람의 손톱은 까맜고 바이올리니스트는 짧다. 자동차 정비공은 기름때가 끼어있다.
어머니의 손톱 밑은 늘 까맸다. 밭농사에 손이 깨끗할 날이 없었다. 식구들 쉬는 저녁에도 고구마 순을 까고 마늘을 깠다. 내가 좀 거들려고 하면 손에 검은 물이 든다고 못하게 했다. 어머니의 땀과 눈물, 자식에 대한 걱정과 조바심은 절이고 절여져 까맣게 손톱 밑에 들어앉아 가실 줄 몰랐다. 그 까만 손톱으로 참기름을 짜고 감자를 캐고 고추를 빻아 내 차에 실어주었다.
손톱을 보면 소비의 패턴이 보인다. 현재를 즐기는 요즘 세대의 소비 성향이라고 할까. 적지 않은 수의 여성들은 시간과 돈을 들여 손톱에 작은 사치를 부린다. 네일 샵에서 관리 받거나 네일 스티커를 구입해 붙이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과도한 사치는 못하지만 그리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소소한 부분에서 부유함을 맛보는 소비다. 이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삶을 거부한다. 멋진 집을 사지는 못하지만 여행을 가서 비싼 호텔에 머물고, 근사한 점심을 먹지 않지만 커피를 마시는데 점심 값과 별 차이나지 않는 돈을 지불한다. 작은 것에 사치를 부려 현재의 행복감을 느끼는 소비형태다.
반짝거리는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 자기만족을 누리는 기쁨도 있지만 설거지나 허드렛일을 하기엔 불편하다. 갑갑하기도 하고 두꺼워진 손톱 때문에 손놀림도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점 때문에 더 손톱을 가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나는 집안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듯.
소스타인 베블런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유한계급의 소비문화는 실용적인 것 보다는 비실용적인 것, 간편한 것 보다는 불편한 것, 쉬운 것 보다는 어려운 것을 선호한다고. 이런 소비는 자신이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예를 들면 노동을 할 필요가 없는 서양의 귀족 부인들이 거추장스런 긴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집안일이나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처럼 보이고자 길고 예쁜 손톱을 유지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이 학교에 상담하러 갈 일이 있었다. 학교에 갈 때는 손톱을 손질하고 가라고 누군가 귀띔을 해주었다. 그래야 좀 사는 집 엄마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부유하고 가난하고가 아이 진로 상담과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만은 손톱이 그 사람의 현재를 짐작케 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비단 손톱뿐일까. 옷과 가방, 자동차, 집. 우리는 있어 보이는 것에 필요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그런데 왜 모임이 있을 때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싶어지는 것일까. 이런 나의 이중성, 자기기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손톱은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다. 너무 짧게 자르면 아파서 어느 정도 하얀 부분을 남겨 놓고 깎는다. 어쩌다 바투 자르면 손끝이 아파서 고생한다. 후회를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짧게 자르는 경우가 생긴다. 선택이나 결정도 그랬다. 바투 자른 손톱처럼 성급히 내린 결정들은 후회의 시간들을 데리고 왔다가 천천히 아물곤 했다. 간혹 아물지 않고 계속 덧나는 상처도 있다.
보라색이 도는 손톱을 들여다본다. 가만히 보노라면 가리비 조개의 안쪽을 보는 것 같다. 가지런한 여러 개의 빗살이 촘촘한 홍가리비. 패각에 오목하게 남은 엷은 보라색이 자꾸만 슬퍼지는 껍데기. 패주가 끊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손톱 같은 조개껍데기.
조개껍데기들이 다 그렇다. 누군가 살았던 작은 집에 커다랗게 들어찬 공허. 여린 살은 어디로 가고 껍데기만 남은, 지키고 싶었던 것을 잃은 집.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보라색으로 배어드는 슬픔이라고,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라고 말할 것 같은 작은 집.
지키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지키고 싶었으나 끝내 놓치고 말았다. 어린 동생의 손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던 풍선처럼, 만원 버스에서 잃어버린 운동화 한 짝처럼 어이없이. 삶에서 밀려난 언니를 놓친 기억. 그것은 내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되었다.
살아온 이력들을 조개껍데기 뒤집듯 하나씩 되짚어 본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조개껍데기를 뒤집어도 가정은 가정일 뿐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내주고 말았다고, 불가항력이었다고 악을 써도 되돌아올 수 없는 것들은 죽을 때까지 손톱 밑을 찌르는 가시로, 아물지 않은 생인손으로 남았다.
8년간 언니의 손톱을 깎았다. 의료사고로 식물처럼 누워있던 언니는 매년 시들어갔다. 누군가 영혼만 고스란히 빼내어 가져가고 몸만 남겨둔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사람은 시들어 가는데 손톱은 자란다는 것이었다. 일부러 맞춘 것도 아니건만 내가 병원에 찾아갈 때쯤이면 언니의 손톱이 자라 깎을 즈음이 되곤 했다. 휠체어에 태우고 병원을 한 바퀴 돌고 몸을 주무르고 귀에다 속삭여도 언니는 하품만 했다. 그새 자란 언니의 손톱을 깎고 간병인 주머니에 몇 만원 찔러주고 오는 것이 병문안의 굵직한 일거리였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무런 긴장감도 없는 언니의 손을 왼손으로 쥐고 오른 손으로 손톱을 깎았다. 사람이 아프면 손톱부터 변한다. 하얗고 통통하던 손은 삭아서 부서질 것 같았다. 분홍색이던 손톱은 누렇게 되었다. 퇴색된 언니의 삶처럼 손톱도 색이 바랬다. 깎는 소리도 나지 않고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튕기지도 않고 톡톡 떨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톱을 깎으며 알았다. 누군가에게 손톱을 맡기는 일도, 깎는 일도 아주 슬픈 일이라는 것을. 더욱이 피붙이의 손톱을 깎는 일은 마음을 깎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것은 한 점 한 점 꽃잎을 떼어내듯 희망이라든가, 바라던 기적을 놓아버리는 일이었다.
어떤 인연은 너무 슬퍼서 잘릴 때에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슬픔이 너무 길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벙어리 울듯 울음은 삭혀져 묵음으로 쌓인다. 전화기 너머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전화기를 들고 있는데 상대는 벌써 종료 버튼을 누른 다음이다. 그것은 언니의 손톱이 깎이는 것처럼 묵음이었다. 언니의 영혼은 깎은 손톱을 밟고 소리도 없이 문을 닫고 가버렸다. 손톱 밑처럼 아프게.
끝으로 밀린 손톱을 깎는다. 똑똑 떨어지는 손톱들. 시간에 떠밀린 주름이 자근자근 눈가를 움켜쥐는 사이에도 접혔던 기억은 새것처럼 생경하다. 자꾸 떠밀려 가다보면 그 기억도 같이 떠밀릴까.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똑, 똑, 손톱 깎는 소리만 들린다. 내 손톱을 깎으며 누군가의 손톱을 기억하는 저녁이 흐느낀다.
내가 자른 언니의 손톱은 어디에 있을까. 힘없던 하얀 달들. 억지로 되는 인연은 없다고. 떠날 인연은 떠나고 만날 인연은 어느 구간에서든 만나게 되리라며 썩고 있을까. 길고 밋밋한 인연도 짧아서 서러운 인연도 언젠가 끝으로 밀리는 것이라고. 달이 차면 기울 듯 묵은 손톱을 밀어내면 새 손톱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아파트 위로 달이 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