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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6
#신명기 #Deuteronomy 29:29
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이방족속들에게는 자연만물을 통해서 절대적인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 까지는 나타났어도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졌으며, 아울러 그들에게는 왜 여호와께서 감추어졌는지에 대한 이유조차도 모든 인류에게 감추어졌다. 아브라함에게는 장차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단지 그림자 같은 희미한 정도로만 나타났고, 그분의 명확한 실체는 감추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희미한 형상만을 보고서 믿음으로 견고히 인내하였다. 야곱에게는 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야 했는지, 요셉에게는 왜 자기가 친 혈육의 형들에게 버림을 받아 애굽에 팔리고 무려 13년 동안이나 비천한 노예와 억울한 죄수로서 살아가야 했는지가 한동안 감추어졌었고, 그 이유는 애굽에 7년 대풍년 이후 7년 대기근이 닥쳐서야 드러나게 되었었다. 모세에게는 왜 자기가 한창 동족 히브리인들에 대한 애정과 혈기가 왕성한 40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망자가 되어야 했는지, 80세에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로 임재하신 여호와를 뵈었을 때 지난 40년 동안 뭐하시다가 이제 늙고 힘없을 때에야 히브리인들을 인도하러 애굽으로 가라 하시는지가 감추어졌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의 비밀한 계획은 모세가 애굽에 재앙을 하나씩 내리면서 조금씩 드러나게 되었고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광야에서 40년 동안 떠돌아 다니게 되면서 더욱 명확해져갔었다. 욥은 평생을 진심으로 여호와를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순간에 장성한 모든 자녀들을 잃고 전재산이 풍비박산 나며 아내로부터 저주를 듣고 버림을 받으며 죽느니만 못한 질고에 시달려야 했는지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에 대한 복된 의미가 가려졌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선지자 엘리야에게는 북 이스라엘 내에서 바알과 아세라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의 존재가 감추어졌었다. 선지자 엘리사에게는 스승 엘리야보다 갑절의 성령이 주어졌어도 수넴 여인이 자기 발을 붙잡고 엎드린 이유는 감추어졌었다. 어떤 시인들과 선지자들에게는 왜 이 땅에서 악인들이 저렇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떵떵거리며 사는지, 왜 의인들이 억압을 받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감추어졌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 땅에서 형통한 악인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를 시인들과 선지자들에게 알게 해주시자 그들은 그제서야 여호와의 공의로우심을 찬양할 수 있었다. 선지자들에게는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명확한 실체는 감추어졌었더라도 여호와께서 새롭게 지으실 크고 웅장한 성전과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와 예언하게 될 자녀들과 환상을 보게 될 청년들과 꿈을 꾸게 될 아비들 등에 대한 계시들이 드러나게 되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신령한 복음의 가르침을 전혀 깨달을 수 없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당신에 대한 크고 비밀한 것들을 모두 드러내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신앙에 꼭 필요한 것들만 엄선하셔서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심으로써 외적으로 드러내셨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성도들 개개인의 영에 거하게 하셔서 그 성경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내적으로 드러내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은 참된 신앙을 위한 모든 지식과 지혜와 방편들은 오직 성경만을 근거로 해서 오직 성령만의 가르쳐주심으로써 갖춰 나가야 한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도 성령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들은 교회와 성도의 신앙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성령께서는 분명히 성경을 깨닫는 경계를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몇몇 신학자들은 지나친 지적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성경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억지로 해석하려 하다가 멸망의 길에 이르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진화도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라고 우기는 유신진화론자들이 그러하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논하면서 서로를 배척하고 갈라서는 것이나, 계시록에 기록된 천년왕국이 주님 재림 전이냐 후냐 없냐를 두고서 피터지게 논쟁을 일삼다가 갈라치기 해버리는 것은 교회와 성도의 신앙에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하고 백해무익할 뿐이다. 기독교 보수주의를 성경의 가르침을 올곧이 지켜내는 의미가 아니라 이 땅의 정치이념에 적용해 버리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민주/자본주의자이신지 아니면 사회/공산주의자이신지를 논하는 것은 복음의 비밀을 억지로 헛되이 푸는 것이다.
#20200826
#레위기 #Leviticus 19:23-25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주실 가나안 땅은 오랫동안 이방족속들의 터전이었어서 그들의 가증한 풍속으로 인해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상태였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 땅으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토하여 내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차지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차지하더라도 그 땅에 젖어든 이방족속의 더러움이 바로 즉시 깨끗하게 씻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3년 동안은 그 땅의 소산을 할례 받지 못한 더러운 것으로 여겨 먹지 말라고 금하셨다. 그렇다고 그 3년 동안 백성들은 어차피 먹지 못할 것이라 해서 그 땅을 내버려두어서는 안되었다. 비록 먹지 못하더라도 백성들은 마치 땅의 소산을 거둘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그 땅을 경작해야 했던 것이다. 그 땅을 3년 동안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3년이 지난 후에는 돌이 가득하고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으로 전락해서 버려지게 될 뿐이었다. 3년이 지나고 4년 째 소산은 전부 그 땅을 주신 여호와께 바쳐 드려야 했다. 그렇더라도 백성들은 아까워하거나 불만을 해서는 안되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을 애굽의 잔혹한 압제에서 구해내시고 광야에서 죽지 않게 보살피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장대한 네피림 같은 이방 족속들을 앞장서서 몰아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4년째 소산 전부를 여호와께 바치면서 그 모든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며 감사해야 했다. 백성이 실제로 자기 소산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5년째 소산부터이다. 그 때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소산을 풍성하게 해주셔서 지난 4년 간의 무소유를 잊을 정도였다. 물론 이 풍성한 소산을 맛보려면 백성들은 지난 4년처럼 자기 땅을 열심히 경작해야 했다. 4년 동안 아무 소득이 없어도 열심히 경작했던 것처럼 5년 째부터는 실제로 자기 소산이 되는 것이므로 더욱 열심히 해야 했을 것이다. 지난 4년 동안 열심히 경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5년째에도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그 해에 노력한 것은 그 해에만 해당될 뿐 다음 해로 전가되지 않는다. 올해의 소산은 올해 얼마나 열심히 기경했느냐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5년째에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소산을 얻으려는 백성은 그 약속에 의지하여 열심히 땅을 경작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약속을 믿는다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돌아올 소산은 없다. 5년 째 이후에라도 모종의 이유에서건 자기 땅을 오랫동안 경작하지 않게 되면 땅이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어 더이상 두번 다시 좋은 열매를 내지 못하는 버려질 불모지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며 그 책임은 풍성한 소산을 약속하신 여호와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방치한 자기에게 전적으로 있다.
중생하기 전 인간의 모든 본성은 전적으로 이방 족속이 거주하던 가증스러움으로 더럽혀진 땅과 같이 부패한 상태이다. 그들의 심령을 주관하는 자는 세상 권세자인 마귀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알지 아니함으로써 스스로의 육욕을 따라 마귀가 좋아하는 가증한 열매를 맺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거하는 마귀가 쫓겨나고 성령께서 거주하심으로써 중생하게 되면 그 때부터 중생한 신자는 성령께서 새롭게 하신 심령과 의지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전인격적으로, 마치 땅을 경작하듯이, 거룩하게 만들어가야 할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제 막 중생한 신자는 마치 모든 것이 서툴고 혼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와도 같기 때문에 교회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 신자가 이제 막 성령으로 중생했다 하더라도 그의 중생 전 악하고 부패한 본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사람마다 다르지만 얼마 동안은 이전의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보다 압도적으로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는 그가 비록 중생했다 하더라도 겉모습은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자처럼 여겨서 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제 막 중생한 신자의 신앙이 어느 정도 충분히 장성할 때까지 정성으로 양육함과 더불어 그를 통해 교회에서 모종의 유익을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 설령 이제 막 중생한 신자가 세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라 하더라도 교회의 물질적 유익을 위해 성급하게 그에게 직분이나 봉사를 부여해서는 안된다. 이는 사도가 새로 입교한 자를 장로나 감독으로 세워서는 안된다고 명시하였다. 신자의 신앙이 교회의 돌봄으로 어느 정도 장성하여 세례를 통해 공적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그 신자에게 갑자기 많은 것을 부담주어서는 안되고 그가 어느 정도 스스로의 신앙으로 자기의 것을 교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교회의 보편적인 복음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4년째 소산을 전부 거룩한 것으로 여겨 여호와께 바치는 것과 같다. 교회의 복음 사역을 통해서 세례를 받은 신자의 신앙이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좀 더 주님과의 신실한 교제를 맛보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일련의 기간을 거친 후에 신자가 자기 신앙으로 적절히 분별할 수 있게 되면 그제서야 교회는 그 신자에게 적합한 직분과 봉사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신자는 교회의 복음 사역과 더불어 자기 스스로 말씀과 성령으로써 신앙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 중생했다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 변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는 언약을 믿기만 하고 정작 스스로나 교회나 신앙을 키워가는데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점령하고도 오랜동안 방치하여 버려지는 땅과 같이, 귀신을 쫓아내어 깨끗하게 소제하고도 성령으로 채우지 않아서 쫓겨난 귀신이 자기보다 더욱 악한 다른 귀신 일곱을 더 데리고 와서 눌러앉은 것과 같이 교회에 나오기 전보다 더 안좋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의 교회 생활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자기 영혼을 위해 말씀으로도 성령으로도 채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자는 결국 교회를 등지고 떠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런 자들이 비록 외적으로는 교회에 오랜동안 머물러 있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고, 한 번 빛을 받고 성령을 맛보고도 배교함으로써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며, 잡혀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없는 짐승처럼 스스로 악에 팔려 그리스도를 짓밟는 거짓 신자들이라 가르친다. 그런 자들은 교회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복음을 듣고서도 자기 안에서 복음을 왜곡하고 가감함으로써 매사에 성령의 선한 열매를 내지 못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처럼 사탄의 열매를 낸다. 그런 자가 목사가 되면 적그리스도가 되고 직분을 받으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만들어 그리스도의 입에서 토하여 내침을 당하게 만들며 교인이면 교회에서나 일상에서나 몰상식과 완악함으로 해를 끼치게 마련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전광훈과 그의 교회와 그의 추종자들과 그를 옹호햐는 자들이 이와 같다. 그런 자들은 이미 자기들의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고 단단히 미혹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의 이념과 사상에 젖어 이를 근간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자들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악한 땅처럼 불사름을 당하고 버려질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떤 이 땅의 정부체제나 경제체제를 옹호하신적이 없으신데도 저들은 마치 특정 정부체제와 경제체제만이 성경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라 왜곡하고 미혹한다. 게다가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보다는 자기들의 이념을 수호하는데 더 큰 열심을 보이며 그것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더욱이 이념주의에 찌든 저들이 드러내는 행위를 보면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며 정당한 정부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거짓과 허위로 비방과 저주를 서슴지 않는다. 그런 저들에게는 이웃의 안전을 위한 배려가 없으므로 모두가 조심해야 할 시기에도 악의적으로 현장예배를 강행하여 물의를 일으킨다. 이는 복음이란 반석 위에 이념이란 집을 짓지 않고 이념이란 모래 위에 복음이란 집을 지었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이다. 저들 스스로는 자기들은 오로지 영적인 신앙 양심에 따라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하여 예배를 수호했다고 위로하지만 이는 아무런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근거없는 정신승리에 불과할 뿐이다. 저들이 국가 지도자와 정부에 내뱉은 온갖 거짓말과 비방과 저주는 결국 이 땅의 권세자를 세우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에 심판주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에 대한 심판과 정죄를 당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