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신하들이 황태자를 폐하고 정사에 복귀한 것을
하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한 장의 치사(致詞)를 어찌 사양하겠는가 하고 말했다."
-영조실록에서 편집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마이엘르 제국의 큰 근심거리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의 황실 직계가족이었다.
딱딱하고 규칙에 벗어나는 것을 극히 꺼리는 마이엘르의 정서로 볼 때, 마이엘르의 황후는 지극히
'비 마이엘르 적'인 사람이었다. 그 집안에 내재되어 있던 광기는 아름답고 젊은 황후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황제는 그런 황후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이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몽환적이며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는 슬픔에 젖어 돌아오는 황후에게 황제는 호화스럽게 치장된
새장과 같았고, 마이엘르 정통의, 천상 군인이 어울리는 황제에게 황후는 규칙에서 어긋난 그 무엇이었다.
두 사람에게 사랑은 있어도 동질감은 없었고, 이해는 찾아볼 수 없이 인내만이 존재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 황제 부부는 그 아이가 아버지를 닮았기를 더없이
바랐다. 황후의 기질이 마이엘르와 도무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란츠 황태자는 황후의 기질을 빼어 닮았다. 마이엘르 제국이 추구하는 모든 질서, 심지어는
신분 질서까지도 곱게 납득하지 못했으며, 제왕학과 군사학을 배우는 일보다 시를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데
온 정신을 기울였다. 나이가 찰 수록 그런 것들이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심해져만 가는 황태자를 제국
은 용납하지 못했다.
"네가 그러고도 이 마이엘르의 제위를 잇기 바라느냐!"
마침내 황제의 노호성이 터졌다. 제국군의 사열식 참관 도중의 일이었다.
대 마이엘르 제국의 위풍에 맞게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던 위병들마저 깜짝 놀라 행군을 멈추고 황제와 황태자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그 소리에 놀라고 위축되어야 할 황태자는 태연한 채 위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나 태연한지, 방금 제위를 물려줄 수 없노라고 소리친 황제마저도 이 정도 배짱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단 1분도 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황태자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대답한 것이다.
"저는 절대로 이 나라의 황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날의 사열식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황제는 분에 못 이겨 쓰러졌으며 귀족들은 그런 황제를 보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제일 먼저 여행을 갔던 황후가 급하게 돌아왔으며 마이엘르의 정세는 프란츠를 폐태자시키는 방향으로 물결치기
시작했다. 허나 문제는 황제에게 직계 혈손은 프란츠 외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그 자신을
꼭 빼닮은 조카가 있었다. 평소 황제는 몽상가적인 자신의 아들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딱딱하기 그지 없는
조카를 더 마음에 들어했었다.
크로시아 대륙의 천재라는 카류리드가 외국으로 망명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 때였다.
황후의 눈물 어린 간청과 황제 자신의 부성애로 인해 황태자 프란츠는 다시 한 번 갱생의 여지를 얻게 되었다.
카류리드의 목표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황태자의 의식을 마이엘르 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 하지만 카류리드는
프란츠를 뜯어 고치는 대신에 프란츠의 이상을 마이엘르의 현실에 맞게 접목시키는 것으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
았다.
프란츠는 감격했다.
마이엘르의 모든 이들이, 심지어는 어머니마저 자신의 이상이 틀렸다고 해 왔다. 프란츠가 보기에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 어째서 한쪽은 지배하는 주체가 되고, 한 쪽은 지배당하는 대상이 되는 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둘러싼 이들은 모두 자신을 이단자를 보듯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츠는 점차로 지쳐갔다.
자신의 이상은 이제 자신이 보기에도 쓸모없고 허황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프란츠가 놓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오기였다. 한낱 자존심.
누군가가 나서서 자신의 이상이 어째서 잘못된 것인지, 납득시켜주기만 한다면 그까짓 이상쯤이야 버릴 수도 있을
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단시하고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반박하고 해소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을 이 작은,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소년이 해냈다. 자신의 이상이 옳다고 확인해주었으며, 이 이상이 다른이들
에게서 배척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프란츠에게 있어 카류리드는 신과도 같아 보였다.
한편,
"뭐라고 하셨습니까?"
약간 피곤해보이는 눈을 한 소년이 한쪽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리며 감히 황제의 말에 반문했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소년의 반문에 답해 주었다.
"내 골칫거리 아들의 정신 상태를 뜯어 고쳐달라고 했네."
황제의 말을 듣고 있던 카류리드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황제를 알현하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시비를 거는 젊은 관리를 향해
본디 마이엘르 제국은 황제 폐하의 호출을 받은 자를 아무나 가로막을 수 있느냐며
빈정거리고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정교사까지 하라고?
"사양하겠습니...."
"내 자네가 이곳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도록 힘써줌세"
...언제나, 현실은 차갑고 슬픈 법이다.
"아! 비록 만고에 없는 일을 만났지만 지금은 내가 그 보좌에
나갔으니 나라를 중흥해야 하는데, 오늘 대신이
어찌 감히 정사에 복귀하는 처음에 연달아 아뢰는가?"
-영조실록
첫댓글 잘 봤습니다^^ 제 수준이 딸려서 영조실록에 편집된 글귀가 먼뜻인지 도통 알 수는 없지만 소설내용은 [나라의 골칫거리황태자가 천재(?) 카류리드를 만나 무려 갱생!과 카류리드! 황제의 구미당기는 말 한마디에 가정교사 ok사인 보내다]편이 군요~ 그나저나 마지막말 [...언제나, 현실은 차갑고 슬픈 법이다.]은근히 개그네요~ 여기다 인간극장 노래가 나온다면 딱일 듯해요... 왠지 후에 카류리드가 구석에 쳐박혀서 빈정거리며 이렇게 생각했을 듯 "(훗)네에-해야죠 네에 누.구.말.씀.이.신.데.요해야죠그-럼-요-" 그리고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다~글구 저도 소설 더 써봐야겠어여^^
영조실록에 있는 글들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때 쯤에 한 말들입니다;; 세자를 폐세자로 만들고 국왕에게 축하하는 신하들과 또 자기 아들 뒤주에 가둬놓고 이것이 나라를 중흥시키는 일이라고 우기시는(?) 국왕님의 차가움이지요;; 아마 카류리드가 없었으면 프란츠도 저렇게 되었을듯;;ㅋㅋ 저도 에이님 소설이 보고파요 ㅠㅠ
클릭한 순간 영조실록의 글이 떠서 멈칫. 소녀 정조를 좋아해서..아니 실은 정조보다는 백탑파를 좋아하므로..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되었달까...쨌든 정조한테 관심을 갖다 보니 영조한테도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되서.. 뭔가 감격해서 3초간 정지해 있다가 소설보자 하며 내렸는데!!! 무려무려 원했던 글인겝니까아아아? 에이님의 말씀대로 왠지 마지막에 인간극장 노래 나오면 절묘한 느낌일듯. 하핫,
저도 정조 좋아해요..ㅋㅋ 엘리트주의인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 엘리트는 찾아보기 힘들 듯한(그 옆에 정모씨...;;) 포스를 정말정말 사랑합니다... 냥호님도 제가 원하는 소설 한 편만 날려 주시면...흑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