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인천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학원장입니다. 학원가에서 일하는 저와 같은 사람의 하루살이 사이클은 일반 직장인들과는 정반대입니다. 이른 오후 시간대부터 늦은 오후 시간대까지가 업무시간대이지요.
아침에 초등학생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전 내내 학원 관련 업무를 체크하는 등 아무래도 애 아빠고 학원장이다보니 편하고자 하는 권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놓지 않을 수 없었죠. 물론 일반 직장인 친구들과 저녁 약속 잡기도 참 쉽지 않습니다. (카톡이라도 없었다면 정말...) 야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구 직관은 물론이고 야구경기 시청도 거의 불가능하지요. 선생님들과 회의하랴, 학부모님들과 상담하랴, 원장 직강도 들어가랴…경기를 볼 틈이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인천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모친의 고향이며 또한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에 큰 뜻을 품고 자랑스럽게 인천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인천에 살면서 야구장에 가본 것은 제가 미취학 아동일 때 삼촌 손에 이끌려서 딱 한번뿐입니다. ‘직관’이라는 표현을 쓸 수도 쓰기도 민망하지요. 어느 팀들 간의 경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거든요.
비록 단 한번뿐인 직관같은 직관아닌 직관인듯 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부친께서 쉬시는 날마다 TV로 야구경기를 시청하셨기 때문에 거의 - 강제적으로 - 야구경기를 보긴했습니다. 그 유명한 한국시리즈도 어쩔 수 없이 보았죠. (채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왜 그리도 야구(경기)가 싫었는지…아마도 자기주도적 시청이 아니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사실 그때는 축구가 더 좋았었나 봅니다. 야구는 적어도 두세개의 물건(야구공, 배트, 글러브)이 있어야 했지만 축구는 최소한 축구공 하나만 있어도 플레이가 가능했으니까요.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힘들어했던 IMF 시기(1997.11.21~2000.12.4)에 재학중이던 대학교에서 전공수업을 마치고 TV가 비치된 쉼터를 지나가다 정말 우연히 보게 된 LA 다저스의 한국인 투수 박찬호 선수의 경기 모습은 지금도 잊지를 못합니다.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시청한 야구경기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때부터 야구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통해서 야구에 대해서(about) 알게 되었고 박찬호 선수를 통해서 야구를(itself)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취업을 하고, 사업을 하게되면서 특히 최근들어 야구를 알아가고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왜 아버지께서 그토록 야구경기를 시청하려하셨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당신께서는 가장으로서 야구장 ‘직관’한번 다녀오시지도 못하셨을만큼 생업에 매진하셨지만 최근에 이르러서야 아버지께서는 왜 그토록 야구경기 중계방송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하셨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야구가 인간의 삶에 가장 가깝고 유사한 스포츠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저와 같은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야구에 대한 관심 속에서 제가 최근까지 봐왔던 아래의 영화와 책들은 야구와 야구인의 삶을 통해 스포츠로서의 야구경기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와 감동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저에게 삶과 일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야구’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야구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저에게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 The Rookie (2002, Dennis Quade 주연) - 35세 메이저리그 루키 Jim Morris 선수를 모티브로 한 영화.
* Watching Baseball Smarter (2007, Zack Hample 저서) - ‘야구 교과서’로 국내에도 번안 된 골수팬과 예비 선수를 위한 책.
* Money Ball (2011, Brad Pitt 주연) - 메이저리그 만년 최하위 팀 A’s 의 Billy Beane 단장을 모티브로 한 영화.
* The Extra 2% (2011, Jonah Kerri 저서) - '그들은 어떻게 뉴욕 양키스를 이겼을까’로 국내에도 번안 된 템파베이 레이스의 기적을 다룬 책.
* Baseball Field Guide (2011, Dan Formosa, Paul Hamburger 공저) - ‘야구 룰 교과서’로 국내에도 번안 된 야구 규칙을 다룬 책.
* 42 (2013, Hrrison Ford 주연) -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Jackie Robinson 선수를 모티브로 한 영화.
작년에 제 휴대폰에 유일한 야구게임 하나를 깔았습니다. 자주 접속해야 아이템도 받고 하는데 게임을 아주 가끔 드문드문 합니다. 제가 맡고 있는 팀은 SK 와이번스입니다. (올해 게임을 깔았으면 한화 이글스였겠습니다만…) 인천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라는 이유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 가상의 팀을 선택했던 이유는 바로 김성근 감독 때문이었습니다. 3번의 우승을 했었던 SK 왕조 시절(2007,2008,2010)에 페넌트레이스 뿐만 아니라 한국시리즈가 열리던 그 여러번의 기회에도 그토록 가까웠던 문학경기장에 단 한번도 ‘직관’을 가보질 못했습니다.안 갔었던 것이 아니고 못 갔었지요. 무려 3번 우승을 거머쥔 그 시절에 말입니다.
학원 개원을 준비한 2007년, 2008년 그리고 2009년에 학원을 개원할 무렵 ‘지도력’을 갈고 닦아야할 필요가 절실했던 당시, 지금이야 인천야구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옛날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던 팀들이 - 심지어 태평양 돌핀스 조차 - 우승은 고사하고 이렇다할 성적도 못내고 아픈 상처만 남긴채해체 수순의 흑역사 그 시절을 멈추게 했던 인천야구의 자존심을 세워준 SK 와이번스. 특히 기존의 명문 구단들을 무력화시키며 이 팀을 신생 명문 구단으로 키워놓은 ‘야신’ 혹은 ‘잠자리 눈깔’로 불리워지는 김성근 감독의 리더쉽은 학원 개원을 전후한 시기에 저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큰 깨우침을 선사했습니다. 프로감독 데뷔 23년 만의 첫 우승을 한 김성근 감독의 인생 스토리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2007년 한국시리즈 2연패 뒤 4연승으로 우승을 거머쥔 우승팀의 스토리를 통해서 절박하면 할 수 있고, 벼랑끝에서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고양 원더스와 한화 이글스를 통해서...)
학원을 경영한지 7년차가 된 지금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르침이 있다는 사실에 저절로 숙연해집니다. 인천(SK 와이번스)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가까운 필드에서 뵐 수 있었던 그때는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대전(한화 이글스)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멀리서나마 또 필드에서 다시 뵐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대전에 계신 팬분들은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자신의 길을 개척한 나만의 영웅들인 아버지와 박찬호 그리고 김성근. 이 한사람 한사람의 삶과 이야기는 적어도 저에게는 큰 울림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의 영웅들 고맙습니다. 야구. 그리고 각자의 삶과 처소에서 하루살이하며 고군분투하시며 ‘일구이무’의 삶을 사시는 모든 분들께 '어차피'라는 시선 속에 있어도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말라'는 김성근 감독님의 교훈을 전하며 화이팅을 주문합니다.
2015년 6월 11일 목요일. 무려 7년(2,555일)만에 대 삼성전 스윕을 달성한 김성근 감독 이하 모든 한화 이글스 선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꼴지라 더욱 절박했던 한화 이글스를 응원하는 모든 팬들과 함께 1999년 이후 무려 16년만의 한화 이글스의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갈망하며 두서없는 긴 글을 맺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은 김성근 감독 일화 가운데 <김성근 감독과 아들 김정준> 이야기입니다.
본의 아니게 긴글 죄송합니다.
*출처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465/read?bbsId=G005&itemId=253&articleId=9479138)
아버지가 야구 감독을 하면서 처음 눈물을 흘린 날이다. 아버지는 흙과 땀, 그리고 눈물이 범벅된 유니폼을 입고 스파이크까지 신은 채 동대문운동장에서 집까지 걸어왔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대로 픽 쓰러졌다.
좌절한 아버지 곁으로 7살난 아들이 다가왔다. 1시간이 넘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아버지를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말은 필요 없었다.
김성근(65) SK 와이번스 감독이 회상한 1977년 어느 날이다. 그가 이끌던 충암고는 황금사자기 8강전에서 9회말 1사까지 2-0으로 앞서다가 역전 끝내기 3점홈런을 얻어맞고 패퇴했다. 기세봉이 노히트노런 피칭을 했던 터였다. 선수들은 대성통곡을 했다. 제자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치자 독하디 독한 김 감독도 눈물을 쏟았다.
아들, 아버지를 일으키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2007년 가을.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한 SK는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2차전을 모두 내줬다. 이전 24차례 한국시리즈에서 초반 2연패를 당하고 역전 우승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김 감독은 승부처였던 2차전에서 진 뒤 송태일 매니저에게 "이대로 4연패로 진다면 감독을 그만두겠다"며 그답지 않게 약한 소리도 했다. 패배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다. 김 감독은 새벽 2시가 되도록 문학구장을 떠나지 못했다.
반격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다리가 풀려 감독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때도 유니폼을 입은 채였다.
똑똑. 문이 열렸다. 김정준 SK 전력분석팀장, 김 감독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마치 30년 전처럼 아버지 곁을 말 없이 지키고 있었다. 한참 후 정적이 깨졌다.
"가라."
"네, 저 갑니다."
"야속한 놈."
겨우 몸을 일으킨 아버지는 인천 송도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장수가 약해지면 병사들은 쓰러집니다. 힘내세요.'
김 감독은 "아들 뒷모습을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30년 전 기억이 되살아 나더라. 그때처럼 난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고 회고했다.
77년 충암고는 다음 대회인 봉황대기에서 기어코 우승을 차지했다. SK는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3~6차전을 쓸어담으며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아들, 아버지를 뒤따르다
아버지는 야구가 전부다. 그래서 아들에게도 야구를 시켰다. 60년대를 호령했던 좌완 투수의 아들은 오른손잡이 내야수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한이 서려 있는 충암고를 거쳐 연세대에 진학했다. 92년 2차 9순위 지명 선수로 LG에 입단했다. 아들은 그해 1군에서 5경기만 뛰고 은퇴했다. 14타수 2안타(타율 0.143)가 그가 남긴 프로 기록의 전부다. 다들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크다. 아들이 아버지를 넘기기란 역시 힘들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아들의 야구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93년부터 LG의 전력분석팀에서 일했다. 당시만 해도 전력분석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LG는 자체 개발한프로그램을 통해 상대 전력을 데이터화해서 분석하는 시스템을 활용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야구를 보는 눈과 이를 분석하는 두뇌를 물려받았다. 동작을 보는 눈썰미, 적재적소에 필요한 데이터를 갖춰 놓은 그는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연수를 다녀온 뒤로 한국야구 전력분석의 1인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아들이 '김성근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은 시점이 이때다.
아들이 LG 직원으로 일할 때 아버지는 삼성·쌍방울 감독이었다. 상대 감독과 분석원의 신분으로 서로의 약점을 봐야 했던 처지였다. 김 감독이 2001년 LG 지휘봉을 잡자 자연스럽게 부자상봉이 이뤄졌다. 하위권을 전전하던 LG는 2002년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앞에서 아버지가 끌고, 뒤에서 아들이 밀었다.
아버지, 아들에게 배우다
LG는 전력 열세를 딛고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치열하게 싸웠다. 승부 흐름이 LG로 넘어가는 순간, 6차전 9회말에 삼성 이승엽의 동점 3점홈런, 마해영의 역전 결승홈런이 터졌다. 김 감독이 77년 황금사자기 이후 가장 아쉬워했던 준우승이었다. 시리즈가 끝나자 LG는 김 감독을 해임했다.
성적 부진이 아닌 구단과의 마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는데 감독을 내치는 것은 야구인에 대한 모독"이라며 이를 갈았고, 아들도 곧 보따리를 싸고 SK로 떠났다.
아버지와 아들은 5년 뒤 재회했다. 부자는 이미 서로의 분야에서 정상에 서 있었다. '야구의 신'으로까지 칭송받는 김 감독은 야구 얘기를 하면 누구에게도 물러서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쓴소리를 하는 이가 아들이다. 김 감독은 아들에게서 조언을 받았다. 수도 없이 '이럴 땐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어요?'라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예전 같으면 콧방귀를 뀌고 말았을 테지만 이젠 아버지도 아들도 많이 변했다.
김 팀장은 한국시리즈에서 두 경기를 내주고 무너져있던 김 감독을 일으켰다. 마흔이 다 된 아들은 이튿날 머리카락을 빡빡 밀어버렸다. 역전 우승을 차지하고 처음으로 아버지와 얼싸안은 아들의 입술은 심하게 부르터 있었다.
김 감독이 말했다. "내가 정준이 나이 때 야구가 안돼서 삭발한 적이 있어. 그때 생각이 나더군. 아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닮아가나봐."
첫댓글 요즘 한화이글스의 열정적인 플레이와 이런 사연들이 읽으니 더욱 야구에 관심이 갑니다~~
감동적인 사연이네요...
아침부터 좋은글보고가네요~*
너무 좋은글감사합니다~~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멋있나요 ㅜ ㅜ 야구...인생...다시생각해보게 되네요.
대단하시군요~~
김성근 감독님의 말씀은 하나 하나가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명언 입니다~~
저런 분이 또 계실까 싶습니다~~존경하게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가 많은나이도 아닌데 이런글 보믄 울컥하지 나만그런가
와우 대단하시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눈물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모든 걸 투자한다면 꼭 성공할 것 같아요
글쓰신 분 한화팬 된 사연이 저랑 비슷하시네요 전 외삼촌이 삼미 다니셔서 삼미 어린이 팬 가입한게 시작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님 버리는 거 보고 sk에 정 다 떨어지고 야구 안보다 그분 복귀하신다는 소식에 야구(관람)계로 저도 복귀 ㅋ 전 94학번이어요 대학때 공강시간에 박찬호 경기 휴게실에서 보다 다음 수업 제껴버리던 추억이 생각 나네요. 종사하는 분야도 전 기업교육 쪽인데, 여튼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늘 같이 응원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경북의 작은 군에서 고교생을 지도하는 교사입니다. 님의 좋은 글을 대하니 이 싱그러운 아침,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저 역시 김성근 감독님의 열정에 반해 Sk의 야구의 몇 안 되는 영남의 팬으로 한국시리즈 직관을 비롯해 방학 때나, 연휴 때는 문학구장을 틈틈이 대구구장의 Sk경기, 특히 울 학교 학생들의 체험학습을 문학구장에서 행하기도 했습니다. 김성근 감독님의 철학을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노력한 것이 그저 행복할 뿐입니다. 님의 글로 지난 몇 년을 반추해 보며 더운 날, 강한 열정을 품고 학생들 앞에 당당히 서고자합니다. 감사합니다.
울림이 있는 감동적인 글 잘읽었습니다^^
한편의 자서전을 보는듯한 글입니다~~
책한번 내시지요~~김성근감독님 자서전~~벌써 나왔으려나?ㅎ
좋은글이네요..
감사^^
좋은 글로 아침을 시작하네요. 감동적입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적 입니다 저런 열정 정말 존경스러워요~~
오~~~정말 감동적인 글입니다!!!
저도 추천 도서 및 영화를 붙여보겠습니다.
추천도서: The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 Revised Edition(2004.04.01), Koppett, Leonard (한국 번역본: 야구란 무엇인가? 이종남 역, 황금가지)
추천 영화:
1. 내츄럴: 로버트 레드포드, 마지막 장면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러지 번개표 야구배트와 볼보이가 전하는 야구배트...
2. Bull durham(한국제목:19번째 남자) ..이 포수는 잊을 수가 없죠...그리고 1군에서 2군으로 내려와서 2군들이 타는 버스에서 1군 투수들의 커브는 폭포수처럼 떨어진다며 이야기하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팀 로빈슨의 속옷 징크스도...
잘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가슴에서 뭐가 움찔움찔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