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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1일 화요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울보가 된 사람
40년 전 이맘때 내가 근무하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은 꽃동네 얘기를 처음 들었고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의 대부분은 자원봉사자'라고 꽃동네 얘기를 해주었는데, 사실 그 때만해도 음성의 꽃동네는 아주 초창기의 작은 동네에 불과했습니다. 학생들은 그 곳에서 하루 만이라도 봉사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스스로 회비를 내기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3천원이면 아주 큰돈으로 희망자들이 40명이 되어서 대형 버스 한대를 대절하고 부족한 것은 다섯 분의 선생님들이 채워 주시기로 자원하였습니다.
대림 3주일날 길을 알지도 못하는 버스 기사는 여기 저기 물어가면서 꽃동네의 입구를 겨우 찾을 수 있었고 조립식으로 지은 엉성한 수용소와 같은 꽃동네에 최귀동 할아버지가 기둥나무에 간신히 의지해서 웃음기 없이 학생들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을 얻어서 결핵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별도로 모시고 있었고 학생들은 서로 짝을 지어 빨래도 하고 밥도 지으면서 자원봉사자들을 따라서 열심히 도와주었습니다. 목욕탕에 빨래를 모아놓고 세제를 풀어 발로 밟아가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열심히 일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중풍으로 고생하는 할머니에게 목욕을 시키는데 너무 힘들게 고생을 하였는데 자기보다 체격도 작고 힘도 없어 보이는 젊은 자원봉사자 언니가 그 할머니를 얼마나 목욕을 잘 시키는지 감탄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일로 학생들은 거의 파김치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아주 큰 방으로 모두 모였습니다. 그 때 비로소 미사가 시작되었는데 무극성당의 신부님이며 꽃동네의 창설자인 오웅진 신부님이 3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참석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신자가 아니었기에 처음 드리는 미사는 그저 신기하였고 신자인 학생들과 나는 꽃동네 사람들과 자원봉사자와 같이 거의 200여명이 드리는 아주 생생한 감사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미사 중에 신부님께서 성령의 미사로 뜨거웠습니다. 강론 말씀 중에 꽃동네에 79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셔져 있는데 그해에 54분이 돌아가시면서 안구를 기증하신 분이 48분이 계셔서 새롭게 96명이 눈을 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품에는 지금 69분의 장기 기증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정문에 ‘사랑의 꽃동네’라고 쓴 돌 하나 가 서있어 아주 을씨년스러워 보였지만 정말 아름답게 인생을 마감하신 그 분들과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고 믿고 있는 이 분들이 과연 아름다운 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참석자들에게 모두 안수를 해주셨는데 나도 신부님의 안수를 받으면서 성령으로 가득 차서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라고 친구들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놈’이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매몰찬 사람이었습니다. 평소에 독하게 마음먹고 살아서 그리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주님께 매달리면서 많이 울어서 눈물샘이 다 마른 줄 알았는데 그런 내가 눈물샘 보가 드디어 터진 것입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나를 학생들이 보고 울고 선생님들도 따라 울어서 참석한 학생들과 눈물바다를 이룬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지금도 그때 터진 눈물보가 마르지 않아서 강의 할 때나 기도 중에 눈물을 많이 쏟습니다. 성령께서는 내게 심령기도의 은총이나 치유의 은사는 주시지 않았지만 내게 눈물의 은총을 주셨다는 것을 이제 나이가 들고 세상을 보는 눈이 차츰 뜨여지니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을 주시는 주님께 정말 감사드렸고 세상은 주님의 은총으로 가득 차 있는 경이로운 곳으로 우리 서로 사랑을 나누고 어려움을 나누며 자신을 내어놓고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의 눈물이 눈가에 맺힙니다.
그날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모두 자신들이 너무 행복하고 자신들의 부모님들이 너무 훌륭한 분들이라고 소감을 나누었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시끌벅적 떠들며 그 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또 울보가 되었지만 어느 학생은 이 모든 것을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면서 그날 하루 봉사가 평생의 삶을 아름답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후로 많은 학생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수녀원에 간 학생들도 있고, 지금도 열심히 자원봉사도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지금 그때 그 기억은 지금도 잊어지지 않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머물며 마음 한 곁에 감사와 기쁨으로 일렁입니다.
오늘 성령을 가득히 받은 엘리사벳은 크게 외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성모님을 찬송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하심을 알아보고, 성모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심을 알고, 느끼며 소리쳐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하고 갈수록 사람냄새가 사라져간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야 하는 사명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묵상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 줄 아는 것도 우리가 받은 은총입니다.
<보셔요, 내 연인이 산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 아가의 말씀입니다. 2,8-14
8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9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보셔요, 그이가 우리 집 담장 앞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고 창살 틈으로 들여다본답니다.
10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1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
12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13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14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축일12월 21일 성 베드로 카니시오 (Peter Canisius)
신분 : 신부, 교회학자
활동 연도 : 1521-1597년
같은 이름 : 가니시오, 가니시우스, 베드루스, 카니시우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또는 베드로 카니시오)는 네덜란드 동부 네이메헨(Nijmegen)에서 아홉 차례나 시장으로 선출된 야곱 카니스(Jacob Kanis)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 베드로 카니스로도 불리는 그는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독일의 쾰른(Koln) 대학교로 갔으나,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고, 1543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산을 모두 나눠 준 후 154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 그는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해졌다.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의 여러 회의에 참석했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가 시칠리아(Sicilia)의 메시나(Messina)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 번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러던 중 바이에른(Bayern)의 빌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의 도움을 요청하자 1549년에 잉골슈타트(Ingolstadt)로 갔다. 그는 이와 비슷한 일을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도 수행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그런 주제를 다루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가 독일어 교리서의 첫판을 출판하자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즉시 15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1556년에 프라하(Prague)로 파견되어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해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Bohemia)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고,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했으며,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다. 1559년부터 1565년 사이에 그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대성당의 대표적인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아주 정열적인 사람으로 30년 동안 도보로 또는 말을 타고 2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후일 그는 독일의 딜링엔(Dillingen),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부르(Fribourg)에서 끝까지 교육과 집필에 전념하다가 1597년 12월 21일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할 만큼, 트렌토 공의회에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그 당시 논객들 가운데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력을 간파했기 때문에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는 또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루스(Cyrillus)와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편지를 비롯해 순교 신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기도서) 등 수많은 저서를 출판했다. 흔히들 그를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른다. 그는 1864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25년 5월 2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예수회에서는 4월 27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드로 카니시오 (Peter Canisius)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감사합니다. 눈물의 은총... 성령으로 가득차신 야고보 아저씨~~ 영육간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
감사합니다. CEO-PAUL님
주님의 은총으로 항상 영육간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1. 성 베드로 카니시오 (Peter Canisius)는 우리 본당 주보로 모시는 성인이십니다.
2. 꽃동네 하면 저한테도 생각나는 게 있네요. 우리 아이가 석,박사과정을 대전 카이스트로 가게 되었는데 꽃동네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간다는 겁니다. 7일인지 10일인지 오래되어 잘 기억나진 않지만, 깜짝놀라며 이게 뭔 일이지? 일반 대학에서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학사일정 소개 그리고 선후배들이 모여 뒷풀이로 시끌벅적 보내면서 길 들인다며 술 못마시는 친구들에게도 억지로 먹여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던 시절이었거든요. 카이스트에선 전통이라고 해요. 졸업한 선배들도 같이 모여 후배들과 봉사를 한다더군요. 좋은 전통으로 깨우침을 주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김용운 회장님
아드님의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하셨군요.
항상 영육간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