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슬픔을 느끼면서 과연 이 시점에서 제가 할 일이 뭔가 떠올려봤습니다. 기억하는 것,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비슷한 사례들을 통해서 주의를 촉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각종 재난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개중에는 잘 처리한 사례도 있었고, 시작부터 사후 조치까지 모두 엉터리로 점철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번에 언급할 사례는 불행하게도 후자에 속합니다.
태종 14년인 서기 1414년 8월 4일, 초대형 해상 재난 사고가 조정에 전해졌다. 전라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은 조운선이 안행량, 즉 태안반도 앞바다를 통과하다가 침몰한 것이다.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들은 조창에 모아놨다가 배로 한양까지 운송했다. 문제는 연안을 따라오는 항로를 이용하다 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에 암초와 급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진도의 울돌목과 태안반도 앞바다가 대표적이다. 특히 안행량의 경우에는 침몰과 난파 사고가 잦았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유례없는 초대형 재난이었다. 가라앉은 조운선이 66척에 달했고, 사망자는 2백명, 그리고 물에 빠진 곡식은 5천 8백석에 달했다. 한 두척이 아니고 66척이나 가라앉은 이유는 불명확한데 아마 한밤중에 무리하게 운행하다가 거센 바람때문에 암초에 부딪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야간 항해는 극히 위험한 쪽에 속한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조운선을 운행하던 수군들이었다. 사고는 부주의와 무관심이 빚어낸 인재였다. 본래 7월은 바람이 심해서 배들이 운행을 회피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호조에서 7월 달에 출발시켜서 8월초까지는 한양에 도착하도록 무리하게 지시했고,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는 7월 중에 조운선들을 출발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위험한 야간 항해를 시도한 이유도 명백해진다. 호조에 얘기한 8월 초라는 기한을 맞추기 위해 무리한 항해를 한 것이다. 현장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조운선의 운행을 책임진 실무자인 진무는 관기 두 명과 동행했다. 침몰 당시 관기 두 명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책임자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별 생각 없이 이행했고, 실무자는 관기와 노닥거리느라 현장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이다. 상부에서 얘기한 기한을 맞추느라 바람이 강한 위험한 시기에 암초가 많은 지역을 한 밤중에 통과하다가 초대형 재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어쩔 수 없던 측면보다는 좀 더 주의하고 조심했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던 사고인 셈이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호조에서 그렇게 지시를 내렸다고 해도 수군도절제사가 아무 대책없이 위험한 시기에 조운선을 출발시킨 것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태종은 수군도절제사를 즉시 파직하고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는데 역마를 타지 말고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공개적으로 강력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죽은 수군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고, 유족들의 슬픔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세종 8년인 1426년 2월 15일, 한양은 불바다가 되었다. 점심 무렵, 한양 남쪽에 사는 노비 장룡의 집에서 난 불이 때 마침 불어온 바람에 힘 입어 한양을 휩쓴 것이다. 때 마침 세종은 사냥을 떠나서 한양에 없는 상태였다. 금방 잡힐 줄 알았던 화마가 거세지자 관료들은 사색이 되었다. 중전은 다른 건 다 포기하더라도 종묘는 반드시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궁궐 수비대까지 총 동원된 사투 끝에 겨우 종묘가 잿더미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밤까지 타오른 불길이 겨우 잡히고 나자 피해상황이 집계되었다. 운종가의 행랑 백여칸과 시장을 관할하는 경시서가 잿더미가 되었고, 중부의 민가 1,630호와 남부의 민가 350호, 동부의 민가 190호가 불타버렸다. 인명피해는 남자가 9명, 여자가 23명이었는데 그나마 시신이 확인된 것이고, 완전히 불에 타버린 사람은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2년 후인 1428년 한성부가 세종에게 한양의 주택이 16,921호라고 보고한 사실이 있다. 2천채가 불타버렸으니 한양 안의 민가 열 채 중 한 두 채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대참사였다. 다음날 또 불이 일어나서 민가 2백호가 불타는 추가 피해가 일어났다. 전쟁을 제외하고는 한양이 입었던 가장 큰 피해가 아니었을까 싶다.
부랴부랴 사냥터에서 돌아온 세종은 담당관청인 예조로 하여금 피해자의 구호를 지시한다. 화상을 입은 사람은 의원에게 치료하도록 하고, 화재로 인해 집을 잃은 이재민들에게는 일단 식량을 공급하게 했다. 아울러 사망자들의 장례를 치룰 수 있도록 관청에서 쌀과 종이를 나눠줬다. 가족을 찾을 수 없었던 사망자는 관청에서 주관해서 장례를 치뤄주었다. 아울러 계속해서 식량과 집을 지을 자재를 공급해주는 등 후속 지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화재를 막을 전담부서인 멸화군의 창설을 지시했다. 일단 발생한 화재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와 제도적인 문제점을 보완해나가는데 주력한 것이다. 앞서 소개한 태종때의 해상 재난 사고가 인재였다면 이번 사건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화재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한편,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발빠르게 취했다. 물론 왕정 시대와 공화정 시대인 오늘날을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의 품격과 자질, 그리고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면 무리한 말일까
출처 : Pgr21.com
글쓴이 : 자이체프
어째 박씨정부 대응이 600년전보다 못한 것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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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때 화재사건으로 마녀사냥했던건 쏙 빼먹었네요.
화재가 났는데 범인이 잡히지 않자, 무고한 함길도(함경도)사람들 잡아서
고문하고 윽박질러서 죄를 자백받아서 사건 무마시킨건데요.
웃긴게 평소 함길도 사람들이 음흉해서 범인으로 지목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