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어갈수록 지난날들을 습관적으로 떠올리게 되나봅니다.
저는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니지만, 지수의 생활을 보면서 머리 속에서는 저도 모르게 저의 어렸던 날과 비교되기도 하고, 전에 흘려들었던 “옛날에는 말이야”로 시작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이 떠올려지거든요.
지수가 일곱 살이 되면서 전에 없던 반항을 자주 합니다.
늘 저나 지수에미의 말에 잘 따랐고 지금도 그러한데, 유독 먹을 것에 대해서는 고집이 부쩍 늘었습니다.
천식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지수는 살 먼저 빼야겠다.”셨다며 한 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요새 또 탐이 늘었습니다. 제가 지수에게 엄할 땐 굉장히 엄하게 대하는 편이어서 한 번 ‘안돼’라고 얘기하면 하지 않았었는데, 아이스크림과 초컬릿에 대해서는 제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도 제가 말리거나 말거나 후딱 먹어치우고 맙니다. 매를 맞더라도 먹고 싶은 것은 먹고 본다는 식이지요.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혀에서 느낄 수 있는 미각 세포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 것을 읽고 나니 어르신들이 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옛날 그 맛이 안난다’는 얘기도, 제 입맛에는 조금도 맵지 않은데 혀를 쑥 빼고 숨을 몰아쉬고 단맛에 열광하는 지수도 이해가 갑니다.
하긴 요즘처럼 먹을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는 것도 고문 수준일 테지요. 갈수록 자극적이고 갈수록 화려해지는 요즘의 군것질꺼리에서 자유로워지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지수만큼 어렸을 때엔, ‘한미과자’나 ‘라면땅’ ‘자야’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재원도라는 특수한 지역이었고 지독하게 가난했으니 좀 과장되기도 했겠지만, 어쩌다 아버지에게 10원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고 손가락에 초록색 녹물이 들도록 꼼지락거리다 전빵에서 ‘자야’를 사들고 돌아가던 그 경쾌한 발걸음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었으니 대부분의 군것질을 자연에서 해결했지요.
마당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거칠던 겨울 바다가 한숨 죽기 시작하면 상께(지명)에 갔습니다. 상께엔 바위가 많고 흙에 물기가 별로 없어서 쟁피가 많았지요. 쟁피는 잎사귀가 맥문동처럼 생겼고 1년 내내 푸르른 식물이었는데, 붓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은 꽃대를 봄에 한 번 밀어 올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꽃대를 뽑았지요. 반투명한 얇은 막에 쌓인 미색의 꽃대는 달코름했고 다섯 장의 초록색 꽃잎은 씁쓰름했고, 꽃잎 안에 있는 암술과 수술은 미색 바탕에 자줏빛 점이 몇 개 찍혀 있어서 먹기엔 아까울 만큼 예뻤습니다.
그런데 이 쟁피는 소도 먹지 않고 염소도 먹지 않았습니다. 맛이 없었나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쟁피를 ‘소도 안 먹는 풀’이라고 했었고 꽃 필 때를 빼면 우리들의 관심에서도 한참 밖으로 밀려나있는 풀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육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서는 이 쓸모없는 풀을 죄다 뽑아 몇 가마니에 한 가득씩 담아서는 실어가더군요. 동네 어른들은 육지 사람들이 실어가는 모습을 보시며 “무식헌 놈들이 품 베린다(노동력 낭비한다)”고 하시며 끼던 팔짱은, 나중에 쟁피를 육지 사람들은 ‘춘란’이라고 부르며 어떤 것은 한 뿌리에 그 때 돈으로 몇 백만 원 씩 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호미를 쥐고 산에 올라가게 만들었지만 뒷북이었음은 빤한 일이었지요.
쟁피를 뽑아먹던 시절, 저도 노란 쟁피를 여러 개 뽑아먹었으니, 가진 사람들이 몇 백만 원 씩 주고 사다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것을 먹어 없앤, 정말 비싼 군것질을 했었던 셈이지요. 세상 일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금성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로 어둠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부터 하늘에서 빛을 내는데, 아침엔 ‘샛별’이라 부르고 저녁엔 ‘개밥바라기’라고 부릅니다. 별 하나를 두고 제각각 다른 의미를 두는 것처럼 난 한 뿌리가 ‘소도 안 먹는 풀’도 되고 몇 백만 원도 되지요. 난을 한 생명으로 인정하고 욕심 부리지 않으면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난이지만,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을 보이면 그 만큼의 값을 치러야하지요. 하나를 얻으면 하나 이상의 걱정이 따라 들어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 많은가 봅니다. 난이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 도둑맞을 걱정, 값이 떨어질 걱정....... 남의 일 머리에 스치는 걱정만 해도 적지 않네요.
춘란을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이라 해서 ‘보춘화(報春花)’라고도 한다고 하니 봄을 먹기도 한 셈이구요. 그런데 사실 산에 사는 대부분의 춘란은 특별한 향기가 없습니다. 그저 잎이나 꽃이 다른 빛깔을 띠는 변종들을 ‘중투호’ ‘황화소심’ 같은 제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고 나머지는 ‘개난’이라 하기도 하지요.
사군자에 ‘난초’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명함을 디미는 이 식물은 우리나라 말고도 중국과 일본에도 산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난초가 단아하고 기품이 있어서 난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조선 후기 대원군이 즐겨 그렸던 것도 이 춘란입니다. 민영익과 더불어 난초 그림에 있어서 쌍벽을 이뤘다는 대원군의 난초 그림은 그림으로서도 유명하지만, 가짜가 많기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 명성이 하도 자자해서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자 사랑방에 사람을 앉혀놓고 그림을 그리게한 후 거기에 대원군이 자신의 이름만 쓰고 낙관을 찍어서 팔았다고 합니다.
"사군자" 하면 "매난국죽"이 떠오르고 그 중 난초 그림은 거의 모두 춘란을 그린 것이어서 우리나라에 사는 난초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들 아시지만, 사실 90여 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또 난초는 박테리아와 공생하여 번식을 하는데, 각각의 종마다 공생하는 박테리아가 따로 있어서 쉽게 번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을 어렵게 어렵게 만들어 떨어뜨려봐야 박테리아가 없으면 번식하지 못하니, 기존에 자리하고 있는 어미 곁에서 겨우 발아시키고 어미 곁에서 살아간다고 하네요. 난초가 무리지어 사는 이유, 이해가 되시는지요.
보리똥나무 역시 한참 식욕 도는 봄에 한 몫 해주던 나무였지요.
보리똥나무라고 부르고 보리밥나무라고도 불렀던 이 나무는 보리수나무과 보리수나무속의 보리장나무인 것 같습니다. 이 보리똥나무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면 멀리서 봐도 한눈에 찾을 수 있었지요. 잎싹의 뒷면이나 햇가지엔 은색 분가루 같은 것이 점점 찍혀있어서 반짝반짝 하거든요. 그것은 빨간 열매에도 마찬가지여서 열매를 손에 한줌 쥐고 입에 털어 넣고 나면 손바닥도 반짝일 만큼 선명한 것이었지요. 또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리면 굵기가 손가락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가지는 땅에 닿을 듯 휘어져 내려왔고, 키가 크지 않은 저도 쉽게 딸 수 있어서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따 먹을 수 있는 매력도 있었습니다.
단단하고 초록빛 나는 열매는 굉장히 시고 떫은데, 단맛을 보려면 열매가 빨갛게 익을 때 까지 기다려야만 했지요. 하지만 열매의 크기가 검지손톱만큼 크지만 씨도 새끼손톱만큼 커서 그 만큼 기다림의 보람은 줄어들기도 했지만, 먹고 난 씨를 따로 모아서 물에 한번 삶아서 먹으면 그런대로 그것도 훌륭한 군것질이 되어주었습니다. 자기 종자 퍼뜨려 달라고 단맛 나는 과육으로 씨를 치장한 보리장나무의 입장에서 보자면 완전히 적자나는 장사가 되는 거지요. 비닐봉지가 없던 시절이라서 양은 주전자를 들고 산에 들어가 먹을 만큼 먹고 주전자 한 가득 보리똥을 담아오면 형제들은 물론이고 부모님까지도 한 웅큼 씩 쥐고 입에 털어 넣으시고는 했지요. 할머니는 ‘보리똥 많이 묵으믄 똥구멍 맥힌다.’시며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도 아니었다 싶은 게, 떫은 맛은 탄닌 성분이고, 이것이 변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보리수 열매를 따다 소주에 한달 정도 담갔다 걸러 먹으면 맛난 술이 됩니다. 한방에서는 설사가 심한 체질이나 기침을 다스리는 데 쓴다고 하니 역시 할머니의 말씀은 옳았던 것입니다.
작년에는 이 보리수 열매를 익기 전에 따다 갈아서 옷감에 물을 들여보았는데, 감으로 들은 물보다 더 연하고 곱고 부드러운 색이 나와서 흡족한 웃음을 흘리기도 했지요.
보리똥나무 얘기를 여기까지만 하기엔 좀 서운합니다.
보리똥나무를 식물도감에 나오는 이름대로 쓰자면 ‘보리수나무’라고 써야할 것입니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아는 것도 없는 주제도 모르고 저는 이름이 지어진 까닭을 짚어보는 것을 즐겨합니다. 그것이 옳든 틀린든 간에 말입니다. 우선 이 이름부터 생각해보지요. 왜 ‘보리똥나무’이고 왜 ‘보리수나무’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보리똥나무를 ‘포리똥나무’ ‘파리똥나무’라며 비슷한 이름으로도 부르는데, 보리똥나무 잎의 뒷면이나 열매에 찍힌 점들이 마치 천정에 묻은 파리의 똥처럼 보여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다른 추측으로는 보리똥나무의 열매(보리똥)를 먹고 남은 씨가 마치 깎지 않은(껍질을 벗기지 않은) 보리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보고, 보리똥 열리는 시기에 보릿가실(보리 수확)하는 것과의 관계도 이름의 유래 중 하나로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보리똥나무"가 "보리수나무"가 되었을까요? 아무래도 "똥"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식물 연구하는 학자 체면에 "파리똥"이나 "보리똥"이라는 이름을 학명으로 사용하기엔 좀 민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똥"을 떼고 나무 수(樹)자를 넣어 "보리수"라고 했다가 "역전앞"이나 "손수건" 처럼 한자와 우리말의 의미가 같은 말이 겹붙는 것처럼 "보리수나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렇다고 식물 이름 중에 "똥"자 들어가는 이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줄기를 꺾으면 젖먹이의 누런 똥 같은 진물이 흐르는 "애기똥풀"도 있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애기"가 붙어서 왠지 좀 애교스러운 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석가모니께서 득도할 때 그늘을 제공했던 "보리수나무"와 우리나라에 사는 "보리수나무"가 전혀 다른 종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지요? 석가모니께서 살았던 인도라는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운 나라여서, 거기에 살던 나무가 우리나라로 이민 와서 추운 겨울을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지요.
먼저 얘기했던 쟁피가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따로 먹을만한 것이 없어서 쟁피를 먹었지, 만약 쟁피가 필 때 이 보리똥도 함께 열렸다면 어느 누구도 쟁피를 뽑으러 가지는 않을을 것입니다.
보리똥을 따러 산으로 다닐 무렵, 앵두는 꽃을 한창 피웁니다.
앵두나무의 모양새를 보면 키도 크지 않은데다 가지는 또 볼품없이 멋대로 퍼지고, 껍질은 군데군데 벗겨지며 도르르 말려서 뽄새가 고운 편에는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희고 가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고 촘촘하게 피워내는 꽃은 벚나무는 저리 가라 할 수 있을 만큼 어여쁘기 그지없지요. 다섯 장의 조금 쪼글쪼글하며 동그란 하얀 꽃잎과 노랗고 분홍빛 도는 여린 꽃술, 그리고 맑은 마른 나뭇잎색의 소박한 꽃받침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내서 참 한국적이다 싶을 만큼 곱고 곱지요. 앵두나무와 함께 장미과에 속하는 친척들이 피워내는 복숭아꽃이나 살구꽃, 배꽃, 딸기꽃, 벚꽃 등이 다 그렇게 어여쁘지만 제가 유독 앵두나무가 피워내는 꽃에서 정을 느끼는 것은 저 어릴 적 재원도엔 살구도, 배도, 벚나무도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집 화단에 앵두나무가 한그루 있어서 손쉽게 앵두를 따먹을 수 있었는데, 이 앵두꽃이 피면 동네 벌들은 죄다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지요. 꽃이 질 때쯤이면 꽃이 송이 째 떨어지지 않고 송이마다 다섯 장 씩 달려있던 꽃잎들이 제각각 떨어져서 온화한 봄바람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파르르 떨며 땅바닥에 떨어졌지요. 그런데 앵두꽃이 예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꽃들은 질 때쯤이면 누렇게 빛이 바래거나 시들어 가는데, 앵두꽃은 땅에 떨어져서도 한참 동안 그 고운 빛깔을 지니고 있지요. 그 꽃잎들이 할랑할랑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한 곳에 모이는 모습은, 마치 지난겨울에 내게 있었던 일들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 같은 하얀 눈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이 지나고 손가락 열개를 다 꼽을 때쯤이면 앵두가 익기 시작하는데,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빠알갛고 동그란 앵두와 맑은 초록색을 띠는 앵두나무의 잎사귀가 주는 색의 대비 또한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지요. 맛도 여느 열매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열매에 까실까실한 잔털이 무척 많지만, 그것은 장미의 가시와 같이 조금도 흠이 되지 않을 만큼 시큼달큼한 맛을 주었지요. 앵두를 한웅큼 모아 입에 탁 털어 넣고 움질움질하며 씨만 남게 되면 "푸"하며 씨를 뿜어내는 것은 버릇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앵두는 술에 담가 먹어도 맛이 좋습니다. 앵두를 따다 씻어서 소주에 넣은 뒤, 앵두의 빛이 희끄무레하게 바래면 앵두를 건져내고 마시는데, 발그레한 색도 곱고 맛 역시 가게에서 파는 "체리소주"보다 낫습니다.
한방에서는 앵두를 [매도영도]라고 부르며 열매는 물론 가지까지도 약재로 사용하는데, 열매는 이질과 설사에 효험이 있고, 가지는 불에 태워 그 재를 술에 타 마시면 복통에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또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앵두나무의 뿌리를 달여서 아침 저녁 빈 속에 사흘 동안 마시면 회충과 촌충을 구제할 수 있다 하며, "동의보감"에는 얼굴을 고와지게하고 기분이 좋아지게 하며, 체해서 설사하는 것도 멈추게 한다고 씌어있다 합니다.
조상님들께서는 또 단오 무렵에 앵두의 씨를 발라내고 꿀에 재워두었다가 무더위로 몸이 지칠 때 물에 타서 화채를 만들어 먹으면서 더위를 이겨내셨는데, 실제로 땀을 적게 흘리고 더위를 타지 않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마당이나 화분에 무언가를 심고 싶은데 무엇을 심을지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앵두나무를 추천합니다. 꼭 약재로 쓰자는 것이 아니라, 꽃 곱고, 녹음 푸르고, 맛도 좋은 앵두가 열리는데 더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앵두를 따먹고 나면 이내 여름이 되고 맙니다.
여름이면 종아리에 핏자국 내는 깔깔이풀(한삼덩굴)이 버티고 있고, 한번 갔다 오면 반바지 입은 다리에 풀독이 올라 아까징끼(요오드딩크)를 발라야할 만큼 길을 좁게 만들어버리는 사초과의 식물들이 득세하고 있는 산보다는 바닷가가 아무래도 매력적이지요.
나중에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재원도는 뻘갯벌과, 모래해변, 바위해변을 다 가지고 있어서 바다 생물들을 많이 살펴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참으로 고마운 섬이었습니다.
달(月)의 기울기에 따라 바닷물의 물살이 느리고 들물과 썰물의 차이가 작은 시기를 "조금", 반대로 보름달이 뜨거나 달이 아예 없을 때 바닷물의 물살이 빨라지고 바닷물이 높게 올라오고 깊게 빠지는 시기를 "사리"라고 합니다.
이 사리때가 되면 썰물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신발을 벗고 뻘밭(뻘갯벌)에 나가 무작정 걷습니다. 서해의 바닷물은 탁해서 물속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사람에겐 발바닥에도 눈이 있거든요.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올리고 물 속을 찬찬히 걷다보면 발바닥에 툭 밟히는 게 있습니다. 그럴 때 손을 물 속에 넣어 더듬으면 여지없이 주먹만한 소라가 잡혀 나오고는 했지요. 잡힌 소라는 제가 윗도리 옷의 끝을 들춰 한 손으로 그 끝을 잡아 오목하게 만든 곳에 갇혀 꼬물거리며 영영 바다와 이별을 하였지요. 옷에 뻘물이 들기는 했지만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와 고무대야에 잡은 소라를 쏟아 넣는 그 기분은 개선장군의 기분이 이랬을까 싶을 만큼 흐뭇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지요.
이 놈을 밥을 하고 나서 숯불로 이글거리는 잔불에 넣으면 뚜껑을 닫고 껍데기 속으로 쏙 들어가며 바닷물을 토해냈지요. 하지만 구우면 석회질인 껍질이 톡톡 튀는데다, 적당하게 익히기가 힘들어서 딱딱해질 때 까지 굽게 되면 먹기에도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구워먹는 방법은 잡은 소라의 양이 따로 삶을 만큼 많지 않을 때 사용하고는 했지요. 고동은 삶으면 길이가 긴 이불바늘이나 보통 바늘로 꺼내먹여야 했지만, 이 녀석은 덩치가 커서 젓가락으로도 쏙 잡아 빼먹을 수 있었고 쫀득쫀득하고 감칠맛 나는 것이 얼마나 맛있던지요. 이 녀석을 먹고 나서 물을 마시면 물도 달크작작한 맛이 느껴져서 여간 향긋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소라나 고동을 먹고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면 열이면 열, 신문지를 찢어서 챙길 여유도 없이 변소로 뛰어가야만 했지요.
소라는 한방에서 껍질 중에서 두꺼운 석회질 부분을 떼 내 가루 내어 약으로 쓴다고도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나각(螺角)"이라는 이름의 전통악기의 재료였다는 것이 정겹습니다. 나각은 소라 중에서 덩치가 큰 "대라(大螺)"를 잡아 속을 빼 내고 바람을 불어넣을 꼭지 부분을 잘라내서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악기의 특성상 연주를 하지는 못하고 "부우"하는 단음밖에는 내지 못하지요. "뱃고동"이나 "쌍고동"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요즘처럼 스피커나 경음기가 나오기 전엔 아마도 소라 껍질로 소리를 내어 드나들며 신호를 주고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이 달팽이 사촌 같은 녀석들(고둥류-학술적 용어로는 복족류(腹足類, Gastropoda)라고 한답니다) 중에는 육식을 하는 녀석이 많다는 사실을 혹시 아시는지요. 그 느릿하고 굼뜬 움직임으로 어떻게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는 얘긴지 쉬 고개가 끄덕여지지가 않으시지요? 그런데 이런 고둥형제들은 느릿느릿 바위나 모래, 뻘밭을 기어다니다가 조개를 만나면 움직이지 못하도록 휘감고 "치설"이라는 까끌까끌한 혀로 껍질을 갉아 구멍을 낸 뒤, 그 구멍에 소화액을 넣어 조갯살을 녹여서 먹는다고 합니다. 거기에 걸리는 시간만도 꼬박 하루가 걸릴 지경이라 하니 녀석들의 인내심도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여름이면 또 낚시를 빼놓을 수 없지요.
여름엔 물고기들의 움직임도 활발한데다 몰려드는 물고기의 종류도 다양하고, 낚시라는 게 뙤약볕 아래이긴 하지만 땀 흘리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이니, 해수욕 못지않게 여름에 어울리는 일이었지요.
낚시래봐야 요즘처럼 거창하게 릴을 몇 개 씩 가져가서 죄다 던져놓고 방울 소리 기다리는 게 아니라, 뒤안에서 제 키보다 두 배 쯤 큰 시누대 한그루를 베서 위쪽에 적당한 길이의 줄을 묶고, 그 끝에 낚시 하나와 돌멩이 하나를 묶으면 그것으로 낚싯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참대"라고 했지요. 입갑(미끼)도 스스로 준비해야했는데, 물고기가 입질도 하지 않는 썰물에 바닷물을 좇아 따라 내려가 뻘밭에서 갯지렁이를 잡아서 입갑으로 썼지요. 갯지렁이는 뻘을 파고 들어가 사는데, 찰랑이는 파도에 모래나 뻘이 밀려들어와 입구가 막히는 것을 막으려고 이것저것 물어다 입구에 붙여 빨대 모양으로 만들어두지요. 그러나 그것이 모래가 밀려드는 것을 막아 줄지는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스스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투항이나 다름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녀석들은 진동에 민감해서 살금살금 다가가 갯지렁이의 집 주변을 갑작스럽게 삽으로 푹 떠내야지, 삽을 끌고 걷는다거나 함부로 발을 놓는다거나 나직하지 않은 목소리로 얘기하면, 녀석은 벌써 눈치를 채고 구멍 깊이 들어가버려서 행동 빠른 낙지를 파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고 맙니다. 빨그작작하고 가는 갯지렁이를 홍거시, 초록빛 나고 뚱뚱한 갯지렁이를 청거시라고 불렀지요.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바다에 들어가 갯지렁이 끼운 참대를 드리우면, 물에 넣기가 무섭게 입질을 시작합니다. 운저리(풀망둑)들이지요. 이 운저리들은 식성은 대단하면서도 머리는 되게 나빠서, 운저리가 낚시를 채 물기도 전에 낚싯대를 거두면 화들짝 놀래서 도망가다가도 "어? 내가 왜 도망가야하지?" 하는 것처럼 금방 다시 되돌아와서 입질을 해대고는 하지요. 그런가하면 거짓말을 조금만 보태자면 머리가 덩치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여서 무는 힘은 좋은 편이라 입질에서 느끼는 손맛은 꽤 좋았습니다. 쉬지 않고 입질을 해대서 "드드드드" "드르르륵" 하는데, 꾹 참고 기다리다가 "득" 하고 입질을 멈추면 참대를 살짜기 들어올립니다. 그러면 예외 없이 운저리가 낚시를 꽉 물고 따라 올라오고는 했지요. 그리고 운저리를 잡기 위해서는 굳이 입갑을 파는 수고스러움을 생략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가리지 않는 식성의 소유자라서, 주변 바위에서 돌아다니는 바다의 바퀴벌레 "강구(갯강구)"를 손으로 잡아서 낚시에 끼워도 잘 물고, 심지어는 잡은 운저리를 잘라서 낚시에 끼워도 잘 물고는 했지요. 한 시간 정도면 주전자에 한가득 운저리를 담을 수 있었는데, 할머니께 갖다드리면 손가락으로 운저리의 배를 꾹 눌러 내장을 꺼낸 뒤에 시디신 배추김치에 둘둘말아 한입에 드시고는 했습니다.
긴 줄에 낚시와 돌멩이만 매달아 머리 위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두어 바퀴 돌려서 멀리 던지는 줄낚시("낭에쓰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본말이지 싶습니다)를 하면, 깔때기, 반어, 붕장어, 비드락, 샛서방고기 같은 것들도 잡히고는 했는데, 저는 할머니께 드릴 요량으로 줄낚시보다는 참대를 좋아했었지요.
이 운저리는 할머니처럼 통째로 김치에 감아 먹어도 맛나고, 막걸리로 두어 번 씻어낸 후에 회판을 만들어먹어도 맛나고, 손질해서 말렸다가 숯불에 구워먹거나 조림을 해먹어도 일품이었지요.
어린 시절을 저와 함께 보낸 그 많은 바닷가 생물들.
쫄짱기(엽랑게), 불기(달랑게), 독기(바위게), 똥기(사각게), 청거시, 홍거시, 강구(갯강구), 고동, 운저리, 짱뚱이... 그 많은 생명들이 다 제각각의 자리에서 삶을 살며 지구 환경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그 많은 오염물질들을 그들이 정화해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재미삼아, 심심풀이로 잡아서 먹거나 가지고 놀았을 뿐이었지요. 어쩌면 그것이 더 자연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써 그들을 공부하며 보호하자고 얘기하는 것보다는, 간척사업으로 갯벌을 빼앗거나 모래를 퍼다 집짓는 데 쓰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저렇게 심심하던 입을 달래다 가을을 맞을 즈음이면 주전부리는 절정에 달합니다. 세상이 먹을 것 천지가 되지요.
여름부터 밭둑에서 심심찮게 따먹던 깨금(까마중)은 풀 치고는 크게 자라서 볕을 가리지만, 손주들 따먹으라고 뽑지 않고 자라도록 하신 할머니의 말없는 배려 덕분에, 훑어서 톡 털어넣으면 입안에서 툭툭 터지며 아리아리한 맛을 주었지요. 또 밭 한쪽에서는 도마도(토마토) 집안에 미니토마토가 있다면 외 집안엔 조랑개가 있다는 듯, 작고 맛있는 조랑개가 노랗게 익어갔지요.
여름이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면 박씨네 선산을 지키던 뺏밤나무(구실잣밤나무)에서 뺏밤이 까맣게 익어 벌어지고, 먹고 나서 검푸르게 물든 혀를 빼 보이며 서로 웃던 시큼한 정금도 가을이면 지천이었지요. 훈이네 외할아버지 산에 딱 두 그루 있던 감나무는 지난여름, 감이 채 익기도 전에 큰형이 몰래 따다 소금 항아리에 넣어 우린 뒤 먹어버려서 가을엔 명함을 내밀지 못했습니다(하지만 그것이 큰형만의 소행은 아니었고 동네 아이들의 땡감서리에 소리소리지르며 쫓아다니기도 지친 훈이네 외할아버지는 결국 감나무를 심은 지 10년 만에 베어버리기에 이르렀지요).
먹을 것이 아무리 많아져도 가을의 으뜸은 으름(으름덩굴)이었습니다.
여름에 자줏빛이나 하얀 꽃을 피워내는데, 그 꽃이라는 것이 동그란 공을 셋으로 갈라 벌여놓은 것 같이 생겨서 "저것을 정말 꽃이라고 피워낸 걸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꽃잎(꽃잎처럼 보이지만 식물학적으로는 꽃받침이라고 합니다)과 꽃술은 두꺼워서 얼마나 투박하고 딱딱해 보이던지요. 하지만 열매의 맛만은 다른 누군가에 비교한다는 것이 미안하리만큼 특별했었지요. 시멘트 포대 속종이 같은 빛깔의 열매가 달리는데, 그 크기는 제각각이어서 작은 것은 풍선껌 하나만 입에 넣고 불 수 있는 풍선만큼 하고, 큰 것은 만만한 홍어 거시기만큼 하기도 했지요. 이 열매가 가을이 익으면 따라 익으며 쩍 벌어지는데, 그 안엔 녹은 촛농빛깔의 속살에 개구리 알 같은 까만 씨가 촘촘히 박혀 있었지요. 아래턱을 내어 밀고 이빨로 껍질에 붙은 속살까지 싹싹 긁어 입에 넣으면 보드랍고 달디 단 속살이 입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습니다. 씹을 것도 없이 오물오물하기만 하면 입 안에 씨만 한가득 남았지요. 숨을 크게 들이마셔서 "푸우"하며 뿜어내면, 혼자 설수도 없는 으름이 힘들게 만들어낸 단맛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었겠지요. 그 단맛으로 새나 사람을 꼬셔서 종자를 퍼뜨렸으니까 말이지요.
으름은 덩굴식물입니다. 열매나 나무를 따로 부르지 않고 모두 "으름"이라고 했지요. 살구나무나 감나무처럼 뒤에 따로 "나무"를 붙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녀석들은 그늘지고 축축한 곳에 즐겨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키 큰 나무들의 도움을 받아 휘감고 올라가야 하다보니 당연히 그늘이 생기고 그늘 아래는 습했겠지요. 그런데 이것은 몹시 곤란한 문제였습니다. 으름은 집에서 가까운 산에는 없고, "고래미"까지 한시간 넘도록 몇 개의 고개를 넘고 산속을 걸어야만 만날 수 있었거든요. 아버지에게 으름을 따러 갔다 오겠노라고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면 그 험한 길 때문에 허락을 받지 못할 것은 빤한 일이라서 어떻게든 몰래 갔다 와야 했는데, 갔다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운동 신경이 둔한 저는 나무도 잘 타지 못해서 제 키 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가 매달린 으름을 딸 재주도 없었지요. 게다가 으름에 대한 경쟁률은 치열할 정도여서 "예미"에 살던 날래고 날쌘 명남이나 명안이가 지나간 곳엔 으름이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어쩌다 그다지 높지 않은 곳에 매달린 으름을 발견하고 신발까지 벗고 낑낑대며 올라갔는데 이미 직박구리가 다 쪼아 먹고 빈껍데기만 매달려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다리에 힘이 다 풀릴 지경이었구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으름은 꽃이 핀만큼 다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고, 수분이 어려운 편에 속해서 집에서 몇 십 년을 키워도 열매를 한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봄에 으름과 맹감(청미래덩굴)의 새 잎을 뜯어서 말렸다가 함께 넣고 차로 우려 마셔도 떨떠름하고 향긋한 맛이 정신까지 맑아지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또 열매에 가득 차 있는 씨도 모아서 기름을 짜면 꽤 많은 기름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을 등잔불을 켤 때 썼다고도 합니다. 그 외에도 한방에서는 줄기나 뿌리의 껍질을 소염 진통제나 이뇨제의 용도로 쓰고, 할머니께서는 자주 콜록거리는 제게 으름의 뿌리를 달여서 먹이기도 하셨지요.
나무에서 떨어져 까진 무릎을 염소 뜯기러 가다 넘어졌다고 아버지께 거짓말하게 만들만큼 매력적이던 그 나무, 으름. 사람들이 망쳐놓은 환경 때문에 온난화가 진행 중이고, 몇 년 사이에 평균 기온이 몇 도가 올랐다지만 지금도 그 자리에 살고 있겠지요?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지만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고구마 얘기를 빼놓고 겨울로 넘어가기도 어렵습니다.
재원도에서는 ‘고구마’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고 ‘감재(감자)’라고 했었지요. 그럼 진짜 감자(potato)는 뭐라고 했냐구요? ‘북감재(북감자)’라고 했어요. 감자엔 붉은빛이 없으니 아마도 감자의 전래지역과 관계있는 ‘北’자가 아닐까 합니다. 감자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의 칠레라고 하지만(FTA니 뭐니 하며 나라가 시끄럽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농민들과 칠레와의 인연은 벌써 오래 전부터 닿아 있었나봅니다), 16세기 초에 스페인의 침략과 더불어 유럽으로 전파되어서 그 동네에서는 지금까지도 주식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순조 24년인 1824년에 만주의 간도 지방에서 두만강을 거쳐 들어왔다고 하니, ‘북쪽에서 들여온 감자’인 ‘북감자’라고 하는 것도 맞겠지요.
그에 반해서 고구마는 남쪽으로 들어왔는데, 1763년(영조 39년) 당시 예조참의였던 조엄은 7월에 통신사의 정사로 임명받아 같은 해 10월 6일 부산을 출발해서 그 날 저녁 대마도의 사스우라(佐須浦)라는 곳에 도착했는데, 일찌기 본적이 없는 식물을 보고 그가 통신사로써 적었던 ‘해사일기’라는 기행문에 그 식물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 또는 ‘효자마’라 불린다. 왜음으로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하는 이 것은 생김새가 산약과 같고 무 뿌리와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닮았다.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 있고, 구워서는 물론 삶아서도 먹을 수 있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든지,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가히 흉년을 지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리고는 종자를 얻어 그 보관법과 저장, 재배법까지 알아내 수행원으로 하여금 부산으로 가지고 가도록 한 후, 이듬해인 1764년에 돌아와 동래와 제주도에 시험 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고구마의 효시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대마도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모를 고구마로 봉양한다 하여 ‘고오꼬오이모’라고 했는데, ‘고오꼬오’는 효행을 뜻하는 일본말이며 ‘이모’는 우리말로 ‘감자’ 정도에 해당하는 말이라 합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는 1663년 김여휘 등의 백성이 유구(오키나와)에 표착해 껍질이 붉고 살이 희며 맛이 마와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하고, 서경창의 종저방이라는 책에는 고구마는 1633년(인조 11년) 비변사에서 고구마 보급에 힘썼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만, 고귀위마가 고구마가 되었든 고오꼬오이모가 고구마가 되었든, 고향은 가까운 두 녀석이지만 감자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고 고구마는 일본을 통해서 나중에 들어왔다 하니 먼저 들어온 고구마가 감자라 불리우고, 나중에 들여온 감자를 북에서 내려온 북감자라 부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어쨌든 ‘해사일기’에 적힌 것처럼 감재(고구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먹었습니다.
밥 짓고 남은 잔불에 묻어 구워먹는 맛이야 다들 아실 터이고, 솔잎을 깔고 쪄서 두고 먹어도 맛나고, 찐 감재를 얄팍하게 썰어서 햇볕에 꼬득꼬득해질 때 까지 말려서 먹어도 맛나고, 찐 감재 두어 개를 껍질 벗겨 밥그릇에 넣고 사카린 두어 알과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으깨면 배고픈 한 끼를 떼울 수도 있었지요.
가난은 우리 집 뿐만이 아니라 재원도 전체에 해당되는 일이어서, 쌀은 어지간해서는 구경도 못하고 겨울이 깊어 가면 여름에 거둬들인 보리까지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겨울 방학 중이었는데, 이 즈음이면 아버지께서는 비상사태를 선언하셨습니다. 다름 아닌 하루 두 끼 먹기를 선언하시는 것이지요. 어차피 저희들이야 학교엘 가지 않으니 아침을 늦으막하게 먹고, 점심을 건너 뛴 후 저녁을 좀 일찍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지요. 그나마 꽁보리밥으로 두 끼를 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은 감재로 밥을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배불리 먹어도 30분만 지나면 찐 감재 색깔 그대로 똥으로 나오는 감재는 그야말로 "굶기 서운해서" 먹는 것이지 식량으로 삼기는 어려웠지요. 하지만 막 쪄서 이빨까지 뜨거운 감재에 얼음 동동 뜬 동치미 국물을 들이키며 먹는 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었습니다.
감재를 먹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가을에 감재를 땅에서 캐면 그대로 얇게 썰어 볕에 말립니다. 편썰기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만든 것을 ‘감재쪽’이라 하였습니다. 감재쪽이 딱딱해질 때 까지 마르면 거둬서 창고에 두고 꺼내먹었는데, 그대로 먹어도 맛있고 팥을 조금 넣고 죽으로 쑤어 먹어도 맛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끼 식사로 충분했지요.
요즘이야 개량해서 노랑고구마니 호박고구마니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만, 예전엔 두 가지였지요. 가리감재와 물감재. 가리감재는 밤고구마라고도 했는데, 전분 함량이 높아서 찌면 딱딱해졌습니다. 김치나 동치미, 그도 아니면 물이라도 한잔 준비해두지 않고서는 도저히 하나를 다 먹을 수 없는 감재였지요. 반면 물감재는 전분 함량이 적어서 찌면 흐물흐물해지고 손만 대도 껍질이 저절로 벗겨지며 물이 줄줄 흘렀습니다만, 단맛에 있어서는 가리감재를 압도했지요.
고구마는 보관이 몹시 까다로워서 조금만 추운 데 두면 얼어버리고, 조금만 따뜻한 데 두면 썩어버렸지요. 그래서 종자는 늘 반닫이에 넣고 대청이나 윗목에 두었는데, 가끔 허기를 참다 못 견디면 엄마 몰래 종자를 꺼내 날로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감재는 진이 많아서 생감재를 먹고 나면 진이 묻어 입 주변이 까맣게 변했지요. 엄마에게 들킬까싶어 옷소매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몽니를 부리는 것이 또 감재였습니다.
입 주변에 꼭 먹은 표를 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칡입니다. 나무를 휘감고 타올라가는 성격 때문에, 한 때 황소개구리나 붉은귀거북이 만큼이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던 억울한 삶이지요.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중에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는다.
뎌러코 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햐 하노라."라며 대나무를 예찬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 칡을 뜻하는 한자인 갈(葛)자의 머리에는 풀 초(艸)자가 얹혀있지요. 대나무나 칡은 "나무일까 풀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삶들입니다. 칡은 풀일까요, 나무일까요? 대나무는 풀일까요, 나무일까요? 대나무는 이름에 "나무"가 붙어있지만 나무가 아닙니다. 풀이라고 보는 게 옳다고 합니다. 칡은 풀 대접을 받고 있지만 나무입니다. 딱딱한 목질부와 나이테를 가졌기 때문이지요.
많은 식물들이 그러하였지만, 특히 칡은 재원도에서는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식물이었지요. 그렇다고 섬김의 대상이었다거나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것은 아니고, 허투루 버릴 것이 없는, 그러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몹시 요긴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자면, 잎은 소가 무척 맛나게 먹는 밥이었습니다. 칡이라는 녀석이 큰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는 성질이 있고, 그렇게 올라가야만 하는 이유가 볕이 없으면 죽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직 햇볕을 쟁취하지 못한 아래쪽의 잎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볕을 받기 위해 큼직큼직하고 넓게 만듭니다. 잎이 크니 소들도 멀리 옮겨 다닐 필요 없이 한자리에서 많이 먹을 수 있었지요.
줄기는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줄로 썼습니다. 칡의 줄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섬유질이 많아 질기기까지 해서 나뭇단을 묶을 때나, 흙집을 지을 때 흙이 말라 벌어지면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흙벽 가운데에 박혀있는 대나무를 엮어 꼭 잡고 있는 녀석이었지요.
뿌리는 사시사철 캐다 먹을 수 있었지만, 특히 겨울에 캐다 먹는 칡이 물도 많이 나오고 향기도 좋았습니다. 즙을 짜서 먹거나 달여 먹기도 하고, 썰어서 말렸다가 차를 끓여먹기도 하고, 밥할 때 넣어 단내 나는 밥을 만드는데 쓰이기도 하였지요.
감재가 물감재와 가리감재로 나뉘는 것처럼 칡도 두 가지였습니다. 씹을 때 전분이 많이 나오는 칡을 "가리칡", 물만 잠깐 나오다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는 칡을 "물칡"이라고 했지요.
괭이와 삽을 들고 아버지를 따라나선 형들이 포대에 한가득 칡을 캐오면, 목구멍 저 속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향긋한 맛이 벌써부터 입에 군침을 가득 돌게 했습니다. 칡을 자를 때만큼은 나무 대접을 해줘서 톱으로 잘랐는데, 한 도막 들고 한 쪽 끄트머리를 이빨로 물고 죽 잡아당기면 칡이 결대로 쉽게 찢어졌습니다. 잘근잘근 씹으면 입 안으로 칡물과 전분이 쏟아져 들어오고, 아구탱이(턱아귀)가 아프도록 씹어도 질긴 칡의 섬유질은 입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더 이상 칡물도 전분도 나오지 않으면 ‘퉤’하며 뱉는데, 뱉어낸 칡에는 이빨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지요.
칡을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등나무와 함께 만들어낸 ‘갈등(葛藤)’이라는 단어의 말뿌리(語原)이지요.
갈등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칡덩굴과 등나무 덩굴이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견해, 주장, 이해 등이 뒤엉킨 복잡한 관계’라고 나와 있습니다. 대체 칡과 등나무가 어떻게 했길래 갈등이라는 복잡한 모습의 단어에 칡 갈(葛)자에 등나무 등(藤)자를 쓰면서 설명할까요?
사실 칡과 등나무는 사촌 사이입니다. 식물학계에서는 콩 꼬투리 같은 열매를 맺는 녀석들을 모두 ‘콩과’로 묶어주는데, 건드리면 잎을 오므려서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아 꽃집에서 많이 파는 신경초라는 이름의 미모사가 콩과에 속하구요, 눈이 좋아진다며 차로 끓여 마시는 결명자도 이 집안 식구지요. 빗자루나 울타리를 두르는 데 요긴했던 싸리나무들은 물론이고,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아까시나무나 클로버라고 부르는 토끼풀 까지도 이 콩씨집안 소속이니 엄청 대가족입니다. 그런데 이 칡이나 등나무는 향긋한 꽃 냄새나 휘감고 올라가는 특징이나 꽃의 모양을 살펴보면 같은 집안에서도 무척 가까운 사이이지요.
그런데 이 녀석들은 무슨 일로 다퉈서 사이가 멀어졌는지 몰라도 만나기만하면 으르렁댄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칡이나 등나무 모두가 누군가를 타고 올라가야하는데, 둘이 만나면 서로 높이 올라가기 위해 얽히고설키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햇볕을 양보하는 것은 저승사자 앞에 무릎 꿇은 꼴이니, 양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목숨을 건 갈등이 생길 수밖에요.
특히나 칡은 햇볕이 없으면 살수가 없어서 햇볕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입니다. 땅에 떨어진 씨가 싹을 틔우면 여러 개의 줄기를 내 뻗습니다. 그 여러 줄기 중에 타고 올라갈 나무를 찾으면 나머지 줄기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나무를 찾은 줄기에만 모든 영양을 집중적으로 보내줘서 빨리 자라게 하지요. 하지만 씨앗이 땅에 떨어져 몇 년 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적당한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성공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냥 죽고 말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칡의 왕국이 건설되는 것은 아닙니다. 칡이 휘감기 시작하면 나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결국 칡이 조인 숨통이 끊어져 죽고 말지요. 결국 칡도 따라죽고 말지만, 몇 년 동안 남의 등에 올라타고 호의호식하며 자식 씨 뿌리며 살았으니 여한은 없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칡이 사람의 몸에 좋은 것이야 다들 아실 테지요. 술 깨는 데에도 좋고, 위장병이나 감기에 좋다는 것은 특별히 책에서 찾아내지 않아도 주변에서 들리는 말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정보이지요. 특히 제주도에서는 칡을 ‘곡불이’라고도 한다고 하는데, 감기의 옛말인 ‘고뿔’과 관계가 없을 것 같지 않습니다. 또 제주도에 여행가면 기념품 가게마다 꼭 걸려있는 감물 들인 한복들을 ‘갈옷’이라고 하는데, 사실 갈옷은 칡덩굴의 껍질에서 섬유질을 얻어 옷감을 짜서 지어 입는 것을 갈옷이라 하고, 갈옷에는 풋감을 따서 물을 들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요즘처럼 감물들인 옷을 무턱대고 갈옷이나 갈중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사람을 빼고 나면 천적이 없는 칡. 한때 이 칡들이 숲을 다 죽인다며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던 적이 있습니다. IMF라는 세 글자의 영어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시절이었지요. 공공근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칡의 뿌리부분에 구멍을 내고 ‘근사미’라는 독한 농약을 들이부었지요. 그런데 사실 칡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줄기만 두어 번 반복해서 잘라도 햇볕을 받지 못해 죽고 맙니다. 우리가 퍼다 쓸 모래는 한정되어있는데 시멘트 공법을 대체할만한 건축공법을 개발하지 않고 모래채취를 금지한 지자체에 압력 넣어 모래 퍼가는 일이나, 나무 다 죽이는 칡을 죽인다며 깨끗한 물 만드는 산에 독한 농약 뿌리는 일이나, 자꾸 저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갑니다. 당장 배고프다고 제 발가락 잘라 한 끼 해결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발목까지 잘라먹어 더 이상 걷지도 못할 때 후회할 것인지요.
이제 겨울의 끝자락까지 왔습니다.
추운 겨울이래서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울 좋은 하늘타리’라며 실속 없는 사람을 비꼬는 속담도 있습니다만, ‘타래박’이라 부르던 하늘타리도 말라붙은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눈을 맞으면 그런대로 먹을만했지요. 노랗게 익은 타래박에 흰 눈이 쌓여있는 운치도 좋았습니다.
또 ‘오두배’라 부르던 꾸지뽕나무도 있었지요. 산에 간 형들이 바짓가랑이에 고드름을 주룩주룩 달고 들어와 내 놓은 겨울 눈 맞은 오두배는, 마치 화투의 목단 그림처럼 생기기도 했고, 어른이 된 여자의 젖꼭지 같기도 합니다. 겨울에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따먹는 오두배는 한 입 베어 무화과의 그것처럼 하얀 진액이 배어나오지만, 달코름한데다 혀가 아리아리해지는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런가하면 동네 아짐(아주머니)들은 겨울이면 김을 뜯어왔습니다.
너무 위험해서 저는 한번도 따라가 본적이 없지만, 김을 뜯으러 가는 날이면 대바구니에 재와 호미를 담은 아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타고 갈 배를 기다렸습니다(김은 호미의 끝 뾰족한 부분으로 캐는 게 아니라 호미를 옆으로 눕혀 모로 긁어서 뜯었습니다). 배라고 해봐야 높이가 50센티미터 남짓하고 길이도 채 5미터가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배였지요. 배 뒤쪽에 볼록 나온 놋봉에 노를 끼우고 놋줄을 걸어 노 젓는, ‘덴마’라는 무동력선이었습니다. 겨울 칼바람에 바다는 거친데다 배는 작고, 오랜 시간 김을 뜯을 수 있는 사리엔 물살까지 싸니(빠르니) 위험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게다가 바위에 붙어사는 김을 뜯기엔 고무신이 너무 미끄러워 재를 먼저 뿌리지 않고서는 김을 뜯는 것은커녕 바위 위에서 기어다니지도 못했던가봅니다. 그래서 “누구네 딸이 김 뜯다 미끄러져 빠져 죽었다.”는 식의 얘기 몇 가지는 아짐들이 모태서 신세한탄 할 때 마다 나오는 단골 이야기였지요.
고무장갑이 있었던 시절도 아니고, 그 추운 날 바람 막아줄 나무 한그루 없는 갯가 바위에서 시린 손으로 뜯어도뜯어도 바구니에 차지 않는 작고 얇은 김은, 차라리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특히나 제 어머니는 나무를 하는 것이나 약초를 캐는 것에서나, 혹은 다른 사람과 손재주가 비교되는 모든 일에서 다른 사람에게 지기 싫어하셔서, 늘 다른 아짐들의 바구니에 들어있는 김보다는 눈대중으로 봐도 더 많이 뜯어 오시기는 하였지만, 남보다 많이 했다는 뿌듯함은 밥상머리까지 따라와서, ‘김 뜯다 몇 번 미끄러졌다’거나, ‘호성이네 어매가 좋은 자리 맡을까봐 덴마에서 뛰어내리다 큰 일 날 뻔 했다’는 식의 무용담은 어머니를 잃을 것 같은 잿빛 조바심에 늘 제 가슴을 졸이게 했지요.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칭찬이나 위로가 필요해서 그러셨는지도 모르는데, 제 기억에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조심하라거나 잘했다는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뜯어온 김은 샘가로 가져가 맑은 물에 씻으셨습니다. 말이 김이지 사실 김이 절반, 재가 절반이었거든요. 김 바구니에 물을 부어가며 바구니를 이리 저리 흔들면 재가 저절로 씻겨 나갔습니다. 그렇게 너댓 번 해서 다 씻어지면 바구니는 한 쪽에 두어 물기가 빠지게 하시고, 대야에 물을 붓고 대나무 가지로 엮은 김발장을 물 속에 펴십니다. 그리고는 김발장보다 크기가 작게 나무로 짠 김틀을 올리셨지요. 그 김틀 안에 물기 빠진 김을 반 줌 정도 집어넣으면 갈색 김들이 마치 보리새우 떼가 헤엄치는 것처럼 물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도망쳐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고, 흩어져봤댔자 어머니가 놓으신 김틀 밖을 벗어나지 못했지요. 이 때 김발장을 살짜기 들어올려 물에 닿을 듯 말듯하게 해서 손으로 짜박짜박 두드려주면 김이 고르게 퍼졌습니다. 그러면 밖으로 꺼내 김틀을 떼 내면 네모난 김틀 모양으로 김이 김발장에 고스란히 체포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볕 좋은 담벼락에 기대 하루 쯤 세워두면 삐득삐득하게 말라 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봐야 여나므장이면 많이 뜯은 것이었으니 우습게 보이는 한 장의 김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겠으며, 100장을 묶어야 한 톳이 되는데 겨울 한철에 두 톳 넘게 땄던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하지만 어머니나 아짐들이 아무리 고생해서 만든 김일지라도 배고프고 개구진 형들의 표적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리 김틀을 놓고 뜬 김이지만 사람 손으로 한 일이라 삐죽삐죽 튀어나온 것들이 있게 마련이었지요. 저녁 쯤 되어 마른 김을 거두기 전, 살짝 덜 말랐을 때 형들은 그 튀어나온 김들을 뜯어먹었습니다. 물론 몰래였지요. 하지만 손이 한두번 가다보면 그게 어디 삐져나온 김만 뜯어먹어지겠습니까? 결국 김 한 장이 고스란히 없어져 발장만 남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요. 저는 김을 거둬오는 심부름을 자주했는데, 김이 다 말라 발장에서 뜯어내면 깨끗하게 떨어지지 않고 발장에 조금씩 붙어있게 됩니다. 제가 몰래 모퉁이 뜯어먹다 걸려서 혼날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지요. 위험하지만 많이 먹는 것보다는 조금 먹더라도 안정적으로 먹는 것이 더 편했거든요. 김을 뜯어내다 말고 아래턱을 삐죽 내밀어 이빨로 김발장을 긁어먹는 저의 모습을 어머니는 보았을까요?
지금은 인심이 야박해져서인지 김의 크기가 작습니다. 예전엔 지금의 A4지 보다도 컸지요. 그 큰 김을 숯불에 살짝 대다말면 바삭바삭해지며 초록색으로 변합니다. 김을 굽는 것도 기술이라 조금만 센 불에 굽거나 불에 오래 대고 있으면 금방 노랗게 타버리며 구멍이 생겼지요. 잘 구운 김은 하늘에 비춰보면 고르게 초록색이 나고,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부분은 갈색이 그대로 남아있게 됩니다.
어쩌다 구운 김이 밥상에 올라오기라도 하면 형제들의 눈이 번득일 정도로 고소한 맛이 났지요. 하지만 어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던 시절이던가요. 김을 자르고 잘라 밥 뜬 숟가락에 얹어도 밥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작게 잘라 먹었지요. 그 때 김 위에 밥을 얹어 도르르 말아서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감질맛 나는 크기로 먹었습니다.
김은 구워서 그렇게 간장에 찍어먹어도 맛나지만 국으로도 먹었습니다.
김을 바싹 구워 그릇에 대고 손바닥으로 문지르면 잘게 부서집니다. 거기에 소금과 간장만 넣고 물을 부으면 그대로 국이 되는데, 돌김으로 만들어 고소하고 시원한 이 맛은 정말이지 다시 한번만이라도 맛보고 싶은 그리움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습니다.
김을 양식해서 가격은 헐해졌지만 맛이 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또 양식을 하게 되면서 염산을 바다에 뿌리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바다가 오염되는 것도 사실이며 김 양식장이 물의 흐름을 막는 것도, 더 이상 양식하지 않는 김 양식장에 꽂힌 채로 남아있는 지주목들이 위험하고 바다를 오염시키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자연은 자연스러울 때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데, 주변을 해치면서까지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많이 얻고 많이 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보다 더 많고 귀한 것들을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거든요.
동백꽃도 맛나게 먹었습니다.
‘재원도의 김이박’이라면 우리 집안인 함가와, 권씨, 진씨를 꼽을 수 있었습니다.
재원도에서는 김씨나 이씨 박씨는 귀했고, 함가와 더불어 권씨와 진씨가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요. 그런데 진씨네 선산에는 동백나무가 많았습니다. 많다기보다는 큰 동백나무들이 있었지요. 그 크기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동백나무 위에서 친구들끼리 잡기장난(북한말 같지만 재원도에서는 술래잡기를 잡기장난이라고 했었지요)를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한 그루에서가 아니라 땅에 내려오지 않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다니며 할 수 있을 만큼이었습니다.
고드름을 주룩주룩 달고 들어와
내놓는 겨울 눈 맞은 오두배는, 한 입 베물면 무화과의 그것처럼 하얀 진액
이 배어나오고, 달코름한데다 아리아리한 것이 참 맛났었지요.
저는 동백나무만 만나면 옛 여자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데, 그도 그럴 것이 이 동백나무에게
단단히 반해서 어린시절을 났거든요.
동백은 꽃이 귀하디귀한 한겨울 섣달에 꽃을 피웁니다. 그것도 눈에 확 띄는 아주 빨간 색
이지요. 거기에 마치 종이를 동그랗게 말아 가위집을 넣은 듯 빽빽하게 서 있는 하얀 꽃술
머리에 몽실몽실 얹혀있는 꽃밥.
꽃이 열리는 각도도 경박하게 활짝 젖히며 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꽁생원처럼 옹삭하
게 닫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적당하게 피는 꽃은 거만하게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아니었지요. 당당하지만 겸손하게 피는 동백꽃, 그 안에는 달
콤한 꿀이 있었습니다.
화려한 빛깔을 지닌 꽃에는 대부분 향기가 없습니다. 눈에 잘 띄는 모양새나 빛깔로, 수정
해서 열매 맺도록 도와줄 나비나 벌을 꼬드기지요. 반면에 향기가 강한 꽃은 모양새나 빛깔
이 볼품없습니다. 바람결에 향기를 흘려보내면 멀리에 있는 곤충들이 알아서 찾아오기 때문
이지요. 예쁜 꽃을 만들거나 향긋한 냄새를 만들어내는 수고스러움을 귀찮아하는 식물들도
많습니다. 소나무처럼 꽃이 있는 둥 마는 둥 하게 피워서 바람에 꽃가루를 실어 보내는 녀
석들이지요. 그런데 동백은 겨울에 꽃을 피우는데 바람에 흘려보낼 만큼 꽃가루가 가벼운
것도 아니고, 그 엄동설한에 생태계 보존이라는 사명으로 얼어 죽을 위험마저 마다하지 않
고 날아다닐 곤충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동백나무 집안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오
고 있을까요? 그것은 새들의 업적입니다.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는 새 중에 ‘동박새’라는 새
가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짐작을 하실 수 있겠지만 이 녀석은 여름엔 거미나 진드기 같
은 곤충을 잡아먹으며 연명하다, 동백꽃이 피면 꿀을 먹느라 아예 동백나무 숲에서 살다시
피 합니다. 동백꽃의 꽃술 안 쪽 깊숙한 곳에 들어있는 꿀을 먹으려고 머리를 들이밀면, 머
리에 묻어있는 꽃가루로 동박새도 모르게 동백꽃은 수정을 마치지요. 그런데 이 동박새는
노란색에 가까운 연둣빛을 띠는 깃털도 예쁘지만 노랫소리가 그렇게 예쁘다고 합니다. ‘예
쁜 것이 죄‘라고, 이 것이 수난을 당하는 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디 사람이라는 동물들이
예쁜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가던가요. 동박새는 특히나 바다 건너 일본 사람들이 좋아해서, 그
나라 돈으로 100만 엔에 까지 거래된다고 하니 수출역군인 우리나라 밀렵자들이 가만히 있
을 리가 없지요. 다 잡아다 팔아먹어 동박새가 귀해진 지금은 ‘직박구리’라는 새가 동백꽃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재원도에는 동박새가 없어 애초부터 직박구리의 동백꽃 세상이었습니다. 꿀 따먹으러 동백
숲에 가면 늘 들을 수 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직박구리의 것이었지요. 우리가 꿀을 따먹을
때는 꽃을 송이 째 따서 조심스럽게 꽃받침을 떼면, 길쭉한 암술과 함께 떨어져 나왔습니다.
빨간 꽃잎과 노란 수술은 서로 붙어있어서 모양이 지켜졌고, 꽃의 아래쪽에는 암술이 빠져
나온 흔적이 조그만 구멍으로 남았지요. 그러면 고개를 들어 꽃송이의 구멍을 입에 갖다 대
고 ‘훕’하고 빨아들이면 달디 단 꿀물이 노란 꽃가루와 함께 입안으로 빨려들어 오고는 했
습니다. 그런데 이 꽃가루가 목으로 너무 많이 따라들어 오면 기침이 났으니, 동백꽃의 유
일한 복수였던가 봅니다. 하긴 동백나무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무척 얄미웠겠지요. 걸핏하면
밟고 올라오지를 않나, 수정해서 열매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는커녕 꽃 째로 따서 얌체처럼
꿀물만 먹고 버렸으니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동백꽃은 멀쩡한 듯 하다가도 느닷없이 툭 떨어지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바람이 한번 슬
쩍 건드리며 지나가면 그 덩치 큰 꽃이, 멀쩡하게 생긴 빨간 꽃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통
째로 떨어졌지요. 하지만 그렇게 꽃이 진 자리에는 동그랗고 빨간 열매가 딱딱한 외투를 입
고 열리고, 이듬 해 추석 쇨 즈음해서 쩍 벌어져 까만 열매들을 떨어뜨렸지요. 이 열매는 형
들이 소나 염소를 뜯기러 산에 다닐 때 마다 개야침(호주머니)이 볼록하도록 주워다 할머니
를 드렸고, 할머니는 그것으로 기름을 짜서 소주병에 넣어두시고는 머리를 감고 참빗질을
한 머리를 곱게 쪽진 다음에 비녀를 꼽고 손바닥에 한 숟가락 쯤 따라 펴서 바르셨지요. 그
러면 까만 머리가 반짝반짝 윤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끔 열매가 아닌 떡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열매도 아니고 꽃도 아닌, 말랑말랑하고
스펀지 같기도 한 떡이 열렸지요. 우리는 그것을 ‘동백떡’이라고 불렀는데, 따서 먹으면 단
맛이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것보다는 풀냄새가 더 느껴졌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세균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곰팡이인 것 같기도 하지만, 먹고 큰 탈 없었으니 몸
에 해로운 것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동백나무는 여러모로 조상님들의 삶과 닿아있었는데, 찬찬히 자라는 만큼 나무가 단단해서
“장이야!”하며 호기를 부리며 장기판에 딱 때려도 깨지지 않는 장기알을 만드는 데 쓰였고,
빗이나 다식판을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고 합니다. 또 도자기를 구울 때 동백나무의 잎을 태
운 가루로 유약을 만들어 자주빛을 내는 데에도 쓰였고, 씨에서 짠 동백기름은 머릿기름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먹기도 했고 나무로 만든 가구에 칠해주면 붉은빛을 띠며 좀이 슬지 않
는다고 합니다. 한방에서는 여러 가지 증상에 약재로 쓰이기도 했지요.
저는 조상님들의 생활방식을 몹시 동경합니다.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어 썼지만 그 결과가 절대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들이 완성되어 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돈을 내고 비닐봉지만 뜯으면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지요. 하지만 무엇을 하던 간에
그 흔적은 고스란히 쓰레기로 남습니다. 그것을 땅을 파서 묻고, 그 위에다 집을 짓고 꽃을
심지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이런 꼼수가 얼마나 갈까요? 이런 얄팍한 수로 우리는
언제까지 이 지구 위에 발붙이고 살 수 있을까요?
쵸코렛처럼 달지도, 콜라처럼 톡 쏘지도, 햄버거처럼 맛나지도 않았지만, 쟁피 뽑아 먹고 동
백꽃 빨아먹던 그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다하면 믿으시겠는지요.
자연과 하나 되어, 나 스스로도 하나의 자연이 되어 더불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콘크리트
세상에 갇히기 전에 말입니다.
첫댓글 ㅎㅎㅎ. 아주 긴 글입니다. 그래도 저는 거의 다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유시유종님의 주전부리입니다. 아마도 누구나 어릴때에 이런 주전부리의 추억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쑥스럽고 말하기 싫어서 하지 않을 뿐인 것 같습니다.
연재로 해 주심 더 좋았을 것을.. 비장이 바쁘기도 하지만 성격이 급해.. 좋은 글을 차분히 읽을 수도 없네요 ㅠㅠ.. 담에 다시 보길 기약하며 오늘은 대충..ㅎㅎ
긴 글로 숨차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재주는 없고 하고픈 말은 많다보니 그리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