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는 돌아오는 비행기를 12번 게이트에서 타야 하는데 15번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했지만, 어쨌든 비행기는 놓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여행이었어요.
한국에 와서 디지털 카메라를 살펴보니 메모리에 셋째 날 카메라가 고장나기 전에 찍은 사진이 그래도 5장이 있더군요. 결국 셋째 날 사진은 그것이 전부예요. 고장난 디지털 카메라를 대신해 넷째 날부터는 1회용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셋째 날까지는 사고의 연속(첫째 날 : 비행기가 늦게 뜸, 둘째 날 : 비 오는 날씨, 셋째 날 : 카메라 고장)이었지만, 넷째 날부터는 그런대로 무난하게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넷째 날에는 '나라' 시내를 둘러봤어요. 여행 안내 책자에서 권하는 대로 기차역 앞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갔습니다. 흥복사 터, 나라 국립박물관, 동대사, 카스가 신사를 봤는데, 정말로 모든 관광지가 길 하나 씩을 사이에 두고 죄다 몰려있더군요. 한 가지 열 받는 점은 기차역이 가장 낮은 곳이었고 관광지를 둘러보는 내내 오르막의 연속이라 다리에 알 박히는 줄 알았다는 점.
'나라'의 동대사에는 사슴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기는 했는데, 동대사에 다다르기도 전에 근처에 있는 국립 박물관, 절, 신사 할 것 없이 죄다 사슴과 그 배설물(!) 투성이였습니다. 그래도 동대사 근처에 가장 많이 있기는 했어요. '나라'에서 자전거 운전대 앞의 바구니에 배낭을 담아두고 다녔는데,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사슴이 가방을 뒤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동대사에서 건진 보물

굶주림은 사슴도 쇠(!)를 씹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카스가 신사는 왜 갔나 싶었습니다. 거긴 정말 일본 고유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갈 만 한 곳이었거든요. 게다가 도착했을 때 네 시가 넘어 신사가 문을 닫았기에 주변 숲을 둘러보다가 산 속에서 길 잃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1월에 활엽수가 잎을 피우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따뜻하다는 걸 알겠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꽤 여러 겹 껴입고 갔는데, 일본에 가 있는 내내 얇은 잠바 하나만 입고 다녔으니까요.
내내 오르막으로 사람을 힘들게 한 '나라'였지만, 그래도 돌아올 땐 내리막 뿐이라 페달 밟지 않고 편하게 내려왔습니다.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은 교토를 다녀왔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마포종점'이라는 노래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차가 교토에서는 아직도 다니더군요.
관광객을 대상으로 인력거도 다니고 있었는데, 타고 있는 사람들이 죄다 연인들. 저처럼 혼자간 사람은... ㅠㅠ
금각사와 은각사가 소장하는 보물을 전시하고 있는 상국사(이번 여행 중에 가는 곳마다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던 유물을 전시하더군요), 옛 일본 왕궁 주변에 만든 공원인 교토 고엔, 에도(도쿄)에 있던 막부가 교토에 왔을 때 머물던 니조성(다섯 째 날에 갔을 때 네 시가 넘어 문을 닫았기에 여섯 째 아침에 다시 갔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는 폭포 근처에 세웠다는 키요미즈데라('맑은 물 절'인데 문제의 폭포는 어디에 있는지 결국 못 찾았습니다.) 등 여행 안내 책자에서 소개하고 있는 곳에도 가 봤고, 그 밖에는
윤동주 시인(도지샤 대학을 다니던 중 체포되어 일본 감옥에서 생체실험의 피해자로 순국)과 정지용 시인(도지샤 대학교 영문과를 다니면서 당시의 교토의 풍경을 시로 남김)의 시비가 있는 동지사(同志社, 도지샤) 대학교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베어 간 조선 사람들의 귀와 코를 묻은 귀 무덤(耳塚, 미미즈카, 또는 코 무덤) 하필이면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는 신사 앞에 있더군요. 거기에다가 공교롭게도 그 옆은 교토 국립 박물관

교토 국립 박물관은 상설전시관은 새로 짓느라 폐쇄했고 특별전시만 하고 있었는데, 그 특별전시가 우리나라에서 이미 했던 합스부르크 전시회라서 교토 국립 박물관은 패스.
그리고 설마 여러분 중에서 이렇게 하실 분은 안 계시겠지만,
일본 만화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에 도쿄에 사는 고등학생인 주인공들이 교토로 수학여행을 가는 부분에서, 지금도 남아있는 '동사(東寺)'를 본 다음에 터만 남아있는 '서사(西寺)'와 '라성문(羅城門)'을 둘러보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저는 '동사(東寺)'를 다섯 째 날 교토에 처음 갔을 때 가장 먼저 봤고, 여섯 째 날 교토를 떠나기 전에 여행 안내 책자에 나와있지도 않은 '서사(西寺)' 터와 '라성문(羅城門)' 터를 찾아가서 봤습니다.

위의 두 사진은 모두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에 나온 구도 그대로입니다.(만화책이 있는 분은 확인해보세요.)
만화책 보고 그거 찾아다니다니, 나 무슨 짓을 한 거니?
그리고 넷째 날까지는 저녁 전에 숙소로 돌아왔지만,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은 교토에서 돌아와서 숙소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오사카의 밤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뭔가 대단한 경험을 한 것 같지만, 그저 상가를 돌아다닌 것 밖에 없어요. 그리고 1회용 카메라로 찍은 밤 거리 사진들은 현상 결과 모두 '암흑'... 4일 동안 1회용 카메라 다섯 개로 200장 가까운 사진을 찍었지만 저 자신을 찍은 사진을 비롯해 50장 정도는 '암흑'... 암흑, 암흑, 흑흑흑...
마지막 날 돌아오는 비행기는 저녁 일곱 시 40분에 출발하니까 저는 공항에 다섯 시 정도까지만 도착하면 되고, 오사카에서는 네 시 정도에 출발하면 되는데, 숙소에서는 열 한 시 전에 나와야 했습니다.
숙소에서 나와서 공항에 갈 때까지 그 몇 시간 동안 누군가는 화장품을, 누군가는 옷을, 누군가는 신발을, 누군가는 게임기를, 누군가는 프라모델을, 누군가는 전자제품을, 누군가는 DVD를, 일본어를 한국어만큼 쓰는 누군가는 책을 볼 텐데, 이렇다 할 취미가 없는 저는 그냥 마냥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뜻하지 않게 메이드 카페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절대로 메이드 카페를 찾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일본에 올 때 제 손에는 55,000엔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표만 들고 왔기에 이 돈으로 엿새 치 숙박비도 지불했고, 카메라가 고장나서 산 1회용 카메라도 처음엔 두 개로 시작해 결국엔 다섯 개가 되는 바람에 안 써도 되는 돈 5천엔이 나갔고, 장난 아니게 나가는 교통비와 관광지 입장료 때문에 식비 빼면 남은 돈이 없더군요.
그렇게 6박 7일 동안 쓰고 공항 가는 기차표까지 사고 남은 돈이 2,523엔. 백엔 이하는 나중에 한국 돈으로 바꾸지도 못 하기에 잔돈 다 없애려고 마지막으로 편의점에 들어갔습니다. 가격표에 붙어 있는 금액을 보고 523엔을 맞췄습니다.
캔커피(198엔), 과자(105엔), 떠 먹는 요구르트(105엔), 빵(115엔)을 골라서는 계산대에 놓고 점원이 바코드를 찍는 동안 저의 뛰어난 암산 능력에 스스로 뿌듯해 하고 있었는데, 이게 왠 일? 523엔이 아니라 502엔이라는 겁니다. 무슨 행사를 하느라고 115엔짜리 빵을 94엔으로 팔고 있다는군요. 크윽! 또 다시 21엔이 남았습니다.
2천엔은 무조건 쓰지 않기로 했기에 결국 2021엔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올 때 일본의 공항에서 엉뚱한 게이트에 가 있었다는 얘기는 맨 앞에 했고, 한국에 와서 마지막으로 하나.
김포공항에서, 사람이 올라가야 작동하는 에스칼레이터 앞에서 "에이씨, 에스칼레이터가 멈췄잖아!(투덜투덜)"하는 한국 사람을 봤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첫댓글 도지샤대.. 앞에서 버스탔어요!.....이런;;
풍금님 따라다니려니 숨이 찹니다...^^
무사히 귀국하셔서 다행이예요. ^^
돌아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리얼 버라이어티하네. 더 많은 이야기는 정모때 들려죠. 푹 쉬게나. ^^
오..............다들 일본을... 두분 글 읽고 있으니 안가본 저는 짬뽕되고 있어요~ㅎㅎㅎ